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4
“원장님. 이 아이가 바둑을 둘 줄 아는데 한 번 봐 주실랍니까?”
“네에? 걔가 바둑을 둔다구요?”
“네, 그리 세진 않지만 제법 둡니다. 게다가 동아일보 국수전 기보를 외우고 복기까지 하거든요.”
“에이, 아무렴 걔가 복기를 할까?”
원장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부친 조규상이 훈현이를 바둑판 앞에 앉혀 놓고 복기를 시켰다.
당시 조훈현은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던 국수전 기보를 틈틈이 공부하던 중이었다.
어린 훈현은 아무 생각 없이 양 손에 흑돌 백돌을 나눠 쥐고 주르륵 복기를 해냈다.
대략 80여 수에 달하는 조남철과 김봉환의 바둑 수순이었다.
그 희한한 광경에 모든 사람들이 바둑판 주위로 몰려들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원장은 아직도 꼬마의 천재성을 의심하는 눈치였다.
“기보를 외우는 거야 연습을 많이 하면 가능한 거고 어디 조금 있다가 신문이 배달되면 오늘 치 기보를 놓아보도록 합시다.”
그래서 신문이 올 때까지 모두가 기다린 후-
원장이 신문을 들고 올라오자 훈현은 대수롭지 않게 국수전 기보의 숫자를 곰곰이 들여다 보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주르륵 한 판을 그려냈다.
그제서야 원장을 비롯한 모든 구경꾼들이 경악했다.
아직 글자도 읽지 못하는 꼬마가 놀랍게도 완벽하게 바둑의 맥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나랑 한 판 둬 볼래?”
원장이 마침내 지도대국을 자청하고 마주 앉았다.
아홉 점 바둑.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바둑에서 훈현은 바둑에 나이가 상관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원장은 그 자리에서 훈현에게 무료입장 자격을 베풀었다.
그 날부터 유달기원에는 색다른 멤버 하나가 들어오게 됐고 모든 기객들이 번갈아 가며 꼬마와 바둑을 즐겼다.
처음에는 너무 신통한 꼬마랑 한판 둔다는 기분으로 상대했던 기객들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점점 훈현의 급성장하는 기력에 밀리기 시작했다.
막내 아들의 천재성을 지켜보는 재미로 기원에만 죽치고 살았던 조규상은 어느날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가세가 기울어 이화여대를 다니던 장녀가 중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무작정 이렇게 세월을 보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1958년 겨울.
목포의 조규상은 어린 막내아들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을 한다.
임시거처는 갓 결혼한 큰딸의 보문동 집.
그리고 매일 명동의 송항기원으로 출근을 하게된다.
송항기원은 당시의 일인자 조남철 국수가 운영하던 기원이다.
조훈현은 입지전적인 인물의 전형이다.
오로지 바둑 하나만을 택하고 그 길로 생활의 자유와 건강한 부유(富裕)까지 획득한 사람이다.
철저히 혼자의 힘으로 지금의 명예와 재산을 일군 것이다.
누가 뭐라해도 그 만큼 프로페셔널한 기사도 드물다.
거의 오십이 다 된 나이에도 여전히 세계 타이틀전의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것을 보라.
승부가 있고 상금이 있는 곳을 그는 어떤 경우에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프로 갬블러로 유명한 차민수는 조훈현의 승부사 기질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스갯소리지만 방내기 세계 타이틀전이 생긴다면 조훈현을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말그대로 있을 수 없는 농담이지만 차민수의 표현은 그냥 흘려 들을 수만은 없는 뭔가가 분명히 있다.
언젠가 조훈현은 중국의 마효춘과의 대국에서 만방이 어떤 것이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전까지 마효춘은 번번히 중요한 길목에서 조훈현의 발목을 잡았던 껄끄러운 상대.
그 마효춘에게 족보에 있는 묘수를 구사하여 엄청난 대마를 잡아버린 거였다.
유리해도 더욱 고삐를 죄는 조훈현의 초식에 얼마나 많은 상대들이 치를 떨었던가?
요즘 조훈현의 바둑은 한층 더 격렬해졌다는 평을 듣는다.
젖혀오면 끊고, 끊어오면 늘어 바둑판 전체를 지뢰밭으로 만드는가 하면 특유의 속력행마로 치고 빠지면서 19로에 풍파를 일으킨다.
그의 운석은 화려하지만 미학과는 거리가 멀다.
신인 시절 김인 국수가 조훈현의 한 수(手)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런 수를 둘 수 있지?”
프로라면 차마 끔찍해서 둘 수 없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조훈현은 단호히 강변했다.
“그래도 그 곳밖에 둘 수 없었습니다.”
두 국수의 승부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
조훈현의 수(手)는 철저히 승부에 기여할 수 있는 리얼리티를 추구한다.
어디에 두어도 한 수인데 미추(美醜)가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렇다고 그의 행마가 전성기 때의 고바야시처럼 처절한 지하철은 아니잖은가?
이기기 위한 수를 추구하다 보면 미학도 어느 정도는 따라오는 법이다.
아무튼 입지전적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한 조훈현의 프로페셔널리즘을 강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부친으로부터 전혀 유산(遺産)을 물려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부친 조규상은 그 척박한 환경에서도 막내아들의 천재성을 간파하고 자신의 생애를 던져 당대 최고의 바둑황제를 만들어낸 킹메이커이다.
신설동에서 돈암동으로 가다보면 좌우로 야트막한 산맥이 늘어서 있다.
성북구의 비탈진 그 동네가 60년대엔 다 달동네 판잣집촌이었다.
무작정 상경한 조규상 일가가 둥지를 튼 곳은 보문동.
탑골승방 보문사 뒷골목의 우물터를 돌아 층층계단을 오르면 경동고등학교 담장 아래 닥지닥지 붙어있는 마을이 있었다.
번지에 산(山) 자가 붙은 곳.
조규상은 신혼의 장녀 조복심 집에 임시로 기거하면서 보문시장에 좌판을 깔고 야채장사를 시작하면서 어렵사리 집을 마련했고 목포의 식구들을 전부 끌어 올렸다.
모든 생활의 초점은 막내 조훈현의 바둑공부에 맞춰져 있었다.
조규상은 매일 막내를 데리고 명동의 송항기원(松恒기원)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시장일 때문에 바쁘면 누나들과 매형 김석곤이 교대로 마부 역할을 맡았다.
한국기원이 생기기 전 명동의 송항기원은 한국바둑의 중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바로 현대바둑의 아버지로 통하는 조남철 선생이 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목포의 신동이 상경했다고 하자 조남철 국수는 흔쾌히 지도대국을 허락해주었다.
역시 9점 바둑.
콧물을 훌쩍거리며 조남철 국수와 바둑을 두는 소년을 보고 많은 관전객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지켜 보았다.
그런데 이 소년의 바둑이 예사롭지 않았다.
뚝딱뚝딱 속기로 일관하면서도 제법 행마의 틀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코흘리개와의 바둑이었지만 조남철 국수는 신중한 장고를 거듭해 최선의 수를 찾아내 응대했다.
승부는 세 시간 뒤에 끝이 났다.
국수의 승리였다.
패배를 확인하고 난 조훈현은 고개를 푹 떨구고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진 것도 분했지만 바둑 한판을 세 시간 씩이나 둔 게 너무 징그러웠다.
그런데 조남철 국수가 또 다시 한판을 더 두자고 했다.
어린 훈현은 넌덜머리가 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소년을 구슬려 바둑판 앞에 앉혔다.
당시 훈현에게는 지옥같은 승부였겠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경이로운 시선으로 그 판을 지켜 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남철 국수는 여지껏 지도기를 두 판 이상 둬준 적이 없는 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두 번 소년의 기력을 테스트하고 난 조남철 국수는 훈현의 급수를 강한 8급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급수와 관계없이 조남철 국수가 내준 수풀이 문제를 어린 훈현은 단번에 ‘패’가 난다고 대답해 놀라운 잠재력을 과시한다.
조규상은 훈현이의 미래를 믿고 기꺼이 밑바닥 인생을 자청해 보문시장의 인텔리 야채장사로 계속 일을 했다.
물론 좌판을 지키는 일은 거의 아내 박순애의 몫이었지만, 그들 부부는 막내아들이 일본유학을 갔다 온 뒤로도 한참 동안까지 야채장사를 했다.
그러니까 조훈현이 가세를 일으킬 때까지 무려 이십 년 넘게 보문시장의 터줏대감으로 일을 해온 거였다.
그 세월 동안 좌판의 규모는 커진 적이 없었다.
겨우 한 두 평 남짓한 좌판에 오이 몇 개, 고추 몇 개, 깻잎 몇 단을 놓고 지나가는 고객들을 상대했지만 부부는 시장에서 그 누구보다도 웅대한 희망의 주단을 깔아놓고 있었는지 모른다.
바둑황제 조훈현의 취미는 등산과 독서로 알려져 있다.
등산은 체력관리를 위해 훗날 그가 의식적으로 택한 취미지만 독서는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뗄래야 뗄 수 없는 선천적 취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분야의 정상에 우뚝 선 명인이므로 그의 독서취향이 고상할 것으로 기대하지는 마실 것.
그는 비교적 읽기 편한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는 잡식취향의 독서광이므로.
일곱 살이 되자 조훈현은 집 부근의 삼선국민학교에 입학을 했고 마침 한국기원이 생겨 원생격으로 다니면서 바둑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무렵 조훈현이 바둑만큼이나 관심을 품은 쪽은 다름 아닌 만화.
꽉 짜인 학교와 기원생활을 벗어나기만 하면 소년은 만화방으로 숨어들어가 가상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다.
가족들이 그 때문에 무던히도 가슴앓이를 하곤 했는데-
한 번은 보호자 없이 기원에서 바둑을 두던 훈현이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야간에 찾으러 다닐 수도 없고, 이래저래 가족들은 애만 태우고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데-
이튿날 동이 터오자 둘째 누나 조경자는 첫 버스를 타고 명동으로 나갔다.
짐작이 가는 곳은 오직 명동의 만화방밖에 없었다.
송항기원 다닐 때부터 훈현이가 즐겨 찾았던 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만화방의 양철문을 두드려 들어가 보니 훈현이는 한구석 의자에 쪼그려 옹색하게 잠들어 있었다.
밤늦게까지 만화를 보다가 막차를 놓치자 주인아저씨가 잠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그보다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준 동생이 너무 예뻐서 누나는 그만 와락 끌어안고 눈물을 떨구고 만다.
그 바람에 잠이 깬 훈현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보다 만 만화책을 다시 펼치고 천연덕스럽게 침까지 발라가며 페이지를 넘긴다.
정말 못말리는 만화광 조훈현의 일화이다.
한국기원 원생시절.
미완의 대기 조훈현을 담금질해준 기사들은 많다.
동향의 선배 김인 국수가 각별한 애정을 주었고, 원생들의 사범을 자처했던 정창현이 많은 판수를 상대해주곤 했다.
본바닥에서 강자들과 어울리다 보니 훈현의 바둑은 일취월장, 괄목상대, 일신 일신 우일신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러니 한국기원의 재롱동이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을 수밖에.
당시 아마추어 정상으로 군림하던 신면식(申勉植) 선생이 소년 조훈현을 혼내 주겠다고 벼르며 나섰다가 중반에 대마를 잡히고 두손을 들었었다.
그는 깨끗이 돌을 던지고 훈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나보다 세구나!”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노인이 찬탄을 금치 못하며 훈현이의 후원자가 되주겠다고 나섰다.
그 분이 바로 이학진(李鶴鎭) 선생.
이학진 선생은 그때부터 조훈현의 매니저를 자임하며 많은 바둑책과 옛 기보를 모아 주었고, 체계적인 행마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조훈현을 소개하고 다녔다.
조훈현을 중원무림의 강자로 키우기 위해 이학진 선생은 조건 없이 정성을 쏟았던 것이다.
가족과 후원자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조훈현은 구김살 없이 성장해갔다.
바둑을 열심히 둔다는 조건으로 사탕도 원 없이 얻어먹었으며 만화책도 보고 싶은 만큼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