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1991)
해방 이후 『자유부인』·『소설 손자병법』·『소설 초한지』 등을 저술한 소설가.친일반민족행위자.생애 및 활동사항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다. 1929년 6월 신의주중학교 재학 중 신의주고등보통학교생도사건으로 검거되어 치안유지법 위반과 불경죄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본 히로시마[廣島]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입학, 1932년 중퇴하고 귀국했다. 니혼대학 시절 『프롤레타리아신문』에 단편소설 「조선의 어린이로부터」를 응모하여 당선되었다. 귀국 후 1935년 1월 『매일신보』에 콩트 「여자」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해 7월 『조선문단』에 시 「도회인에게」, 1936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졸곡제」가 가작, 1937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성황당」이 1등으로 당선되었다.1940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했으며, 이해 10월 조선문사부대(朝鮮文士部隊) 자격으로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육군지원병훈련소의 1일 행사에 참가하고, 그 소감문 「반도민초(半島民草에 일시동인(一視同仁)」을 『삼천리』에 발표했다. 1941년 7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용산 호국신사 어조영지 공역봉사에 참가했다. 1943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조선신궁에서 개최한 연성회에, 4월에는 일본 남방종군작가 이노우에 고분[井上康文]과 우에다 히로시[上田廣] 환영회, 5월에는 내선작가교환회, 6월에는 제1회 조선군보도연습에 참가했다. 이해 6월 친일문인단체 조선문인보국회 서설희곡부회 간사로 선임되었다.해방 후 『중앙신문』 편집부장 겸 문화부장, 『대조』 편집주간, 한국전쟁 당시 육군종군작가단, 1961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위원장, 방송윤리위원, 라이온스클럽 한국A지구 총재, 평북용천군장학회 회장, 적십자사 서울시 상임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대표적인 소설로 『자유부인』·『명기열전』·『소설 손자병법』·『소설 초한지』·『산유화』 등과 수필집 『비석(飛石)과 금강산의 대화』, 그 외 『소설작법』 등이 있다. 친일작품으로는 「반도민초에 일시동인」·「국경」·「군대생활」·「사격」·「희생적 정신의 구현자」·「산본(山本) 원수」·「조국으로 돌아간다」·「개척 전사」 등의 단편소설과 시, 산문 등이 있다.정비석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27∼151)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현대문화사,2009)『한국문학사』(대한민국예술원,1984)『한국현대소설사』(이재선,홍성사,1979)『한국현대소설사』(김우종,성문각,1978)『조선신문학사조사』(백철,수선사,1948)방송지우』 제2권 제2
(1944.2)조광』 제9권 제10
(1943.10)반도의 빛』 제68
(1943.8)매일신보
(1943.6.16)삼천리』제12권 제10
(1942.12)국민문학』제3권 제4호(1942.4.)·제3권 제7
(1942.7)국민신보
(1939.4.23)조선일보
(1937.1.14)동아일보
(1936.1.4)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비석(鄭飛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