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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일대기. 조훈현론, 조훈현의 생각법 ,기타

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18

by 자한형 2023.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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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18/김종서

그래, 한 판 겨뤄보자.’

사상 최초의 사제대결로 관심이 모아졌던 최고위전에서 스승은 최선을 다해 승리를 거두었다. 제자는 그 결승기에서 무력하게 패퇴했지만 천하의 조훈현에게 한 판을 이겼다는 것으로 충분히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이창호는 본격적으로 전열을 정비하고 조훈현의 성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제국(帝國)의 균열은 내부에서부터 온다고 했던가?

향후 십년쯤은 더 지속되고도 남을 것으로 여겨졌던 조훈현의 시대가 영원한 라이벌 서봉수 대신 내제자 이창호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1989.

이창호는 사흘에 한번 꼴로 바둑을 두어 111전을 기록했고, 최다승인 84(당시 세계신기록)을 올렸다.

서봉수 9단을 비롯한 고단자들을 연파하고 88KBS바둑왕 타이틀을 획득, 세계최연소(14) 타이틀 보유자가 되었다.

그러나 어렵게 정상권에 도달해 가진 스승과의 타이틀매치에서는 세 차례 계속 실패해 신구미월령(新鳩未越嶺)이란 고사성어를 음미하게 했다.

조훈현 일인독주 체제를 서서히 뒤흔든 천재소년 이창호의 등장에 바둑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스승과 제자가 하루 아침에 라이벌이 되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일 수 있다는 드라마틱한 스토리, 이것은 바둑이 만들어 낸 절묘한 명작이었다.

바둑올림픽인 응창기배 대회가 열리기 직전에 일본이 한발 먼저 개최한 후지쯔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 대회는 198842일 동경에서 테이프를 끊었다.

한국대표 선수는 조훈현 9, 서봉수 9, 장두진 6단 세 사람.

얼마나 기다렸던 큰 승부였던가?

안으로 오랫동안 갈고 닦았던 한국바둑의 기량을 유감없이 떨쳐보이리라.

41일 전야제 행사 때 1천여 명의 바둑팬들이 주목했던 것은 중일 수퍼대항전의 영웅 녜 웨이핑()과 자국의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였다.

추첨 결과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의 상대는 한국의 조훈현 9.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사실상의 결승전이라고 평했다.

9단은 내 입단동기이다. 20년 만에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어려운 상대인 줄 알지만 꼭 돌파해보겠다.

고바야시 9단은 그렇게 임전소감을 밝히고 입술을 한 일자로 굳게 닫았다. 겉으로 자신감과 투지를 밝혔지만 내심으로는 대진추첨의 불운을 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튿날 고바야시는 전야제의 약속을 확실히 이행해냈다.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단 한순간도 우세를 빼앗기지 않고 5집 반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조훈현은 그렇게 첫 세계대회의 첫 판에서 손맛을 보지 못하고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뿐만 아니라 서봉수 9, 장두진 6단도 각각 린 하이펑(林海峰)과 마 샤오춘(馬曉春)에게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한국바둑의 현주소가 극명하게 드러났던 일전이었다.

한국선수단은 전원 1회전 탈락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총총히 귀국길에 올랐다.

엄청난 기대를 걸었었던 언론과 바둑팬들은 그 참담한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역시 아직은 안되나?

며칠 전부터 요란하게 세계바둑대회의 개막을 예고했던 신문들은 아무 일없었다는 듯 일제히 1단 기사의 몇 줄로 후지쯔배의 참패를 쑥스럽게 알리는 것으로 민족언론(?)의 책무를 다했다.

조훈현은 그 날 이후로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려야 했다.

머릿 속의 그림대로였다면 파죽지세로 결승에 올라 반대편 시드에 포진한 조치훈과 결승에서 만났어야 했는데.

아니, 중일 슈퍼대항전에서 위세를 떨친 녜 웨이핑을 꺾어 일본의 콧대를 눌러주는 대리만족감을 즐겼어야 하는데.

고바야시와 나누었던 한판 승부의 기보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통증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같은 시간 중국(당시에는 중공)의 간판스타 녜 웨이핑은 후지쯔배 1차전에서 유럽대표인 약체 로날드 슐렘퍼를 꺾고 8강에 올랐다.

그 무렵 중공 정부는 그에게 기성(棋聖) 칭호를 수여했고, 중공의 신문들은 중국바둑계의 공자(孔子)라는 최상의 칭호를 선사하며 영웅 만들기에 나섰다.

그러나 중공의 녜 웨이핑, 일본의 고바야시가 그 시기 양국의 정상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훗날 조훈현이라는 이름 석 자를 더욱 빛내게 만드는 황금분할의 삼각구도라고 해도 좋았다.

1회 후지쯔배의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다가올 응창기배의 승부를 위해서는 어쩌면 이 때의 참패가 보약이었는지도 몰랐다.

1988820.

중국 북경의 샹그리라 호텔.

대망의 응창기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 대회가 열렸다.

이번에 한국대표는 조훈현과 조치훈 두 사람 뿐-.

후지쯔배에서 나타난 각국의 전력을 참고해서였을까?

조치훈이 일본기원 소속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한국대표는 오직 조훈현 한 사람뿐이었다.

대회가 열리기 전, 조훈현과 한국기원은 주최측의 횡포에 격렬한 항의를 표시했다. 그러나 주최측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싫으면 불참하라고 배짱이었다.

응창기배는 주지하다시피 대만의 재벌 잉 창치(應昌期) 씨가 1백만 달러라는 거금을 투자해 만든 최대의 기전. 이 대회의 저변에는 바둑종주국 중국이 최근 부쩍 일본에 근접하자 확실하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개최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일본 룰을 배제하고 새로운 응씨 전만법(塡滿法)을 적용하고 참가인원도 중국계 기사가 절반(녜 웨이핑, 오송생, 마 샤오춘, 강 주주, 린 하이펑, 왕 리청, 왕 밍완)을 차지한 것으로도 쉽게 증명된다.

억울하고 자존심이 구겨졌지만 조훈현은 단기필마로 북경을 향했다.

첫 번째 상대는 대만대표 왕 밍완(王銘琓).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조훈현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8238강전-

상대는 역시 대만대표 왕 리청(王立誠)을 물리치고 올라온 고바야시 고이치.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대진이었다. 바둑의 신은 어쩌면 이리 심술 맞을까? 한참 후에 만나게 해도 충분한 강자들을 초전에 붙여놓다니.

그러나 알고보면 이 대전은 바둑의 신이 절묘하게 장치해놓은 시나리오의 반전요소였다.

고바야시는 아주 편안한 표정이었다.

입단 동기 조훈현의 매서움은 20년 전에 익히 파악하고 있었지만 한국으로 건너가 비교적 손쉬운 상대들과 노니는 동안 칼날이 무뎌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후지쯔배에서 이미 그대의 초식과 내공의 깊이를 들여다보았노라. 본인방전이나 기성, 명인전처럼 큰 물에서 놀아보지 못한 그대는 나의 진정한 적수가 아닐 듯싶네. 내 평가가 억울하다면 어디 한 번 들어와 보시게.

지하철 바둑으로 정평이 난 고바야시는 철저하게 실리를 파고 나중에 타개하는 스타일. 그를 상대로 초반에 한 수라도 삐끗한다면 결코 역전하기 힘들다.

그런데 조훈현이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기필코 이기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투지가 조급함을 불러일으키고 마침내 무리수를 두고 만 거였다.

상대의 실수를 소름끼치도록 정확하게 포착한 고바야시는 일거에 우세를 점하고 야금야금 승부의 변수가 될 요소들을 차례로 반상에서 지워나가고 있었다.

같은 시간, 옆 자리에서는 조치훈과 녜 웨이핑의 대국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쨌거나 한국대표 두 사람이 중국, 일본의 정상들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고 있는 장면.

이 장면이 바둑삼국지의 프롤로그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형세는 우리의 양조가 철저하게 불리한 상태였다.

검토실의 한국선수단은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조치훈은 초반부터 컨디션 난조로 일방적으로 밀렸고, 조훈현 역시 단 한 수의 실수 때문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상대가 다름아닌 고바야시, 덤 정도 부족한 상태라면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바둑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조훈현의 눈에서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이래 지나 저래 지나 질 수밖에 없다면 길게 갈 거 뭐 있으랴. 그의 운석이 격렬하게 용틀임했다.

좌충우돌, 종횡무진, 천방지축, 한 수 한 수가 뜨겁고 처절하고 끈적끈적한 승부수였다.

검토실의 관전객들은 모두 다 조훈현이 돌을 던지기 위한 수순으로 단말마적인 몸부림을 치는 거라고 단정했다.

모두들 그렇게 감탄했었다.

"승부는 결정났지만 조훈현의 투혼은 굉장하다. 눈물겨울 정도로!"

대국실의 고바야시는 스페인의 투우사처럼 한 발 한 발 물러서며 조훈현의 저돌적인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조훈현의 초강수가 연달아 작렬했다.

얼핏 보면 아마추어 바둑에서나 나올 법한 무리수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불퇴전의 서슬에 고바야시는 자신도 모르게 위축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그대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승리는 요지부동, 한 집을 이겨도 내가 이긴다.

사냥한 초식동물의 목덜미를 물고 질식할 때까지 기다리는 야수의 심정으로 고바야시는 어서 판이 끝나기만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판을 다 메꾸고 보니 조훈현이 멋적게 웃고 있는 것 아닌가?

응씨 룰로 계산해보니 조훈현이 16분의 5집을 남긴 거였다.

이럴 수가!

고바야시는 기가 막혀 치를 떨었다.

그의 일생일대에 이토록 치욕적이고 기분 나쁜 패배는 없었을 것이다.

초강수로 육박전을 벌인 끝에 얻은 승리라 명국의 리본을 달기는 좀 어색하지만 바둑평론가들은 이 바둑을 '세기의 대결 중 최고의 백미(白眉)'로 평가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헤쳐나갈 수 있는 오직 한 길의 활로를 개척한 조훈현의 근성과 기세가 극명하게 드러난 한 판이었다는 것이다.

20021017일 벌어진 제7회 삼성화재배 8강전에서 조훈현이 중국의 뤄 시허에게 거둔 투혼의 반집 역전승 장면을 떠올려 보시라. 아마추어가 보아도 절대로 이기는 길이 없을 것 같은 바둑을 그는 기어이 쫒아가 실낱같은 승리의 수순을 낚아채지 않았던가?

바둑평론가 이광구는 조훈현이 위기에 처했을 때 특유의 흔들기로 반상을 주름잡을 때 '강신무(降神舞)'를 보는 것처럼 황홀하다고 표현했다.

그가 사방을 흔들어댈 때 상대들은 함께 스탭을 맞추다 실족을 하곤 만다.

기적의 역전승은 혼자 잘 둔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다.

상대가 마법과도 같은 최면에 걸리고 주술에 홀려줘야 만들어지는 법이다.

아무튼 그렇게 조훈현은 넉 달 전 후지쯔배에서 당했던 패배의 아픔을 고스란히 고바야시에게 되돌려 주었다.

고바야시 입장에서는 실로 분하고 원통했겠지만 승부에서 과정의 품격이나 완성도 높은 설계도는 결과보다 우위에 설 수 없었다.

그는 좋은 바둑을 두다가 역전패 당한 패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8개월 후, 두 라이벌은 또 다시 제2회 후지쯔배 2회전에서 재격돌하게 된다.

고바야시는 전야제에서 익살맞게 엄살을 부렸다.

"제발 이번만은 조훈현과 초반에 붙지 않았으면 좋겠다."

뼈가 있는 발언이었다.

조훈현의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조훈현의 지독한 승부욕을 은근히 비꼬는 듯한 한 마디였다.

그 말에 마()가 끼었던지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또 2회전에서 맞붙게 되었다.

실로 질긴 악연으로 맺어진 숙적들.

역대 스코어 1:1

고바야시는 응씨배에서의 설욕을 위해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조훈현은 또 다시 강력한 인파이팅으로 그를 몰아붙였다.

'제비'라는 별명이 무색할 만큼 저돌적이고 파괴적인 강수를 연발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당시 고바야시를 상대로 펼쳤던 조훈현의 괴초식을 주목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필자는 그 세 판의 바둑에서 조훈현의 격정과 카멜레온과도 같은 변신술의 극치를 음미한다.

첫 만남에서 고바야시에게 맥없이 밀린 뒤로 그는 철저히 상대를 연구했던 것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완벽하고 상대에게 인색한 지하철 바둑, 마치 이탈리아 축구처럼 자물쇠 수비로 상대를 질식시키는 고바야시의 바둑.

그를 이기기 위해서는 경쾌한 제비의 행마를 버려야 했다.

훗날 제자 이창호의 끝내기 솜씨를 타파하기 위해 스스로 격렬함을 택했던 것이 결코 우연이나 시행착오의 산물이 아니었다.

이미 그 당시에 조훈현은 고바야시를 상대로 '상대성 원리'에 따라 '기풍의 전환'을 시도하는 복선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응씨배 8강전이 끝난 북경으로 돌아가 보자.

네 판의 대국이 끝난 결과 4강은 녜 웨이핑(), 후지사와(藤澤秀行), 린 하이펑(林海峰), 조훈현으로 압축됐다.

국제대회의 단골 우승후보로 손꼽히던 조치훈과 고바야시가 낙마하고 보니, 4강의 면면 중에서 가장 여유 있게 다가오는 우승후보는 네 웨이핑이었고, 그 다음이 린 하이펑이었다.

그러나 일본대표로 마지막 살아남은 후지사와는 의미심장한 예언을 던졌다.

"조훈현이 세계최강이다. 우승은 그의 몫이다. 아마도 나와 결승전에서 만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조훈현의 실전스승, 국적을 떠나 지금도 조훈현은 그를 만나면 깍듯이 인사를 올리고 어깨를 주물러드리는 등 존경과 애정을 바친다.

후지사와의 호언장담에 주최 측이나 중국, 일본의 기사들은 망령든 노인네의 기분 나쁜 망언 쯤으로 듣고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후지사와의 예언은 몇 달 뒤 여지없이 적중하고 만다. 물론 자신의 결승진출에 관한 장담은 허풍으로 끝났지만.

8강전이 끝나고 샹그리라 호텔에서 축제와도 같은 만찬이 벌어졌다.

요즘이야 한 달이 멀다하고 세계대회가 빈번하게 열려 전세계의 프로기사들이 자주 교류하지만 그 당시에는 참으로 귀한 시간이요 귀한 자리였다.

뜨거웠던 승부의 호흡을 식히고 바둑의 세계화를 위해 모두가 힘을 모으자는 별들의 만찬장.

그런데 조훈현은 만찬의 산해진미를 맛볼 틈이 없었다. 옆에 앉은 조치훈이 느닷없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터뜨리는 바람에 그를 달래느라 애를 먹어야했다.

"나는 바보야. 내 바둑은 이제 끝나고 말았어!"

이름만으로도 만찬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천하의 조치훈이 어이없게도 패배의 충격을 추스르지 못하고 눈물을 떨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 그대는 누가 뭐래도 일류야. 세계대회 토너먼트의 단판승부에서는 누구라도 질 수 있어. 오늘 바둑은 잊어버리자."

아무리 달래도 조치훈의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그 상대가 녜 웨이핑이었기에 그는 더더욱 분통이 터졌는지도 몰랐다.

만찬장에 함께 앉아 있었던 고바야시는 조치훈의 비감에 누구보다도 공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정작 더 분통이 터지는 사람은 자신인데 그렇다고 치훈처럼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고 무던히 타는 가슴을 냉수로 식혔으리라.

그날 밤.

조치훈과 조훈현은 새벽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조치훈은 그 동안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외로움을 세 살 위인 선배 조훈현에게 하소연했다.

모처럼 조훈현은 자상한 형의 입장에서 아우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한국과 일본에 떨어져 활동하면서 본의 아니게 언젠가 겨뤄야 할 숙적으로 서로를 저만치 거리에서 탐색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은 하나였는지 모른다.

일란성 쌍둥이처럼 그들은 닮은 꼴이었다.

어린 나이에 바둑인생을 택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혹독한 수업을 받은 과정, 그리고 천부적인 기재와 후천적 노력으로 각각 양국의 정상에 등극한 내력이 너무도 흡사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성까지도 발음이 같아 '양조시대?라는 조어가 탄생했었다.

또 있다.

승부사로서의 외로움.

한국인이라는 타이틀을 끝끝내 고집하며 일본바둑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치훈.

한반도를 평정했지만 지금 응씨배에 홀로 출전해야 하는 서러움을 톡톡히 맛본 바둑약소국의 조훈현.

그들은 그렇게 본질마저도 철저히 닮은 쌍둥이 승부사였던 것이다.

그날 밤 밀어(密語)를 나눈 이후로 두 사람은 비로소 따뜻한 형제애를 교감하며 가슴 속에 드리워진 외로움의 그늘 한 자락을 접을 수 있었다.

19881120, 치열한 토너먼트를 통해 검증을 끝낸 세계 4강의 스타들이 서울에 모였다.

응씨배 준결승전.

조훈현 VS 린 하이펑, 녜 웨이핑 VS 후지사와.

어느 누구 하나 부족함이 없는 대승부사들이었다.

다만 그 중 63세의 노구 후지사와의 존재가 조금은 이채로웠다. 그 자리에 고바야시나 조치훈이 올라와 있었다면 응씨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대회 4강전의 구성이 보다 완벽하게 짜여졌으리라.

그러나 후지사와의 저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희망사항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60년대 당시 일본의 최강 사카다와 10년간 자웅을 겨뤘고, 이후 일본 최대 타이틀인 기성전을 6연패한 후지사와는 도박과 알콜중독, 위암 선고를 받는 등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도 마음만 드잡으면 큰 승부에서 괴력을 발휘하는 인물, 그래서괴물 슈코로 통했다.

오랜 투병생활로 피골이 상접한 후지사와는 서울에서 조훈현을 만나자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언젠가 조훈현을 만나기 위해 술병 하나만을 달랑 쥐고 현해탄을 건너온 적이 있었던 그였다. 그 때는 사랑하는 제자에 대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해 아무런 목적없이 날아온 거였지만 이 번에는 상금 40만 불이 걸린 바둑대회의 적수로 찾아온 거였다.

아아, 드디어 이런 날이 우리에게 도래하다니.

후지사와는 마냥 유쾌하기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환갑이 지난 나이로 세계 정상권에 오른 자신의 영광도 즐겁지만 그보다도 그가 가장 아끼는 기재 조훈현이 기대에 걸맞게 성장해준 것이 너무 기특하고 반가웠던 것이다.

쿤켄(훈현의 일본 이름), 보나마나 너하고 내가 결승에서 만날 텐데.그 땐 봐주고 싶어도 어쩔 수 없다. 서로 최선을 다하자.”

장난기어린 말로 후지사와는 조훈현에게 엄포를 놓았다. 그는 어느 자리에서나 세계최강의 기사는 조훈현이라고 강조하고 다녔다. 그러면서 교묘하게(?) 자신의 성가(聲價)를 함께 끼워 띄었다.

하하, 왕년에 조훈현이 나한테 석 점까지 두고 바둑을 배웠었지.”

그런 말을 들으면 조훈현도 즉각 응사한다.

에이, 선생님도 저한테 두 점까지 까신 적 있었으면서.”

한 판 승부에 따라 한 점씩 칫수고치기 시합을 했던 유학 시절의 에피소드였다.

그 시절 소년 조훈현에게 내기바둑을 권유해 세고에 스승으로부터 혼쭐이 나게 만들었던 장본인 후지사와,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의 장난꾸러기였다.

바둑 한 판을 가르쳐주어도 그냥 두는 법이 없었다. 하다못해 어깨 주물러주기 등의 조건이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