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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 일대기. 조훈현론, 조훈현의 생각법 ,기타

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20

by 자한형 2023.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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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20/김종서

15수째에서 조훈현이 방향을 틀었다.

녜 웨이핑은 전혀 고민하지 않고 조훈현의 도발에 침착하게 대응했다.

반상의 네 귀는 백의 참호로 변했고 중앙에 담을 쌓은 흑은 악착같이 침투하는 백군 게릴라들의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초강수로 버티는 형국이었다.

흑돌이 놓이면 흑이 우세해 보였고 백돌이 놓이면 금세 백이 우세해 보이는 난투극-.

일희일비, 검토실의 관전자들은 종국 직전까지 바둑의 승패를 가늠하지 못하고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진정하느라 애먹었다.

대국자들도 반상에 머리를 박고 동공이 튀어나올 만큼 처절한 계가를 수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끝내기로 승부가 날 바둑이라면 아무래도 뒷심이 강한 녜 웨이핑이 유리했다. 더욱이 덤 8집을 안고 싸우는 입장이니.

게다가 초읽기를 맡은 화 이강 8단이 조훈현의 심기를 자꾸 건드렸다.

녜 웨이핑의 차례 때는 잠깐의 여유를 두었다 읽고 조훈현의 차례에는 가차 없이 카운트를 헤아린 것.

그러나 승리의 여신은 짜여진 드라마를 외면했다.

막바지에 녜 웨이핑이 사소한 실수를 범했는데 조훈현이 전광석화처럼 타이밍을 잡아 선수로 두터운 끝내기를 차지해버린 거였다.

종국해보니 덤을 제외하고 흑의 한 집 승리였다.

한 걸음만 삐끗했어도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었던 비관적인 외길을 조훈현은 처절한 투혼으로 건너오고 말았다.

검토실에서 종국을 지켜본 윤기현 단장과 개인 자격으로 응원을 온 김학수 4단이 얼싸안고 환호성을 올렸다.

중국선수단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었고 녜 웨이핑의 아내이자 세계최강의 여류기사 쿵 샹밍(孔祥明) 8단은 얼굴을 감싸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중립의 입장에서 진지하게 4국을 검토하던 일본기사들은 입을 모아 조훈현의 승부사적 기질이 돋보인 한판이었다고 밝혔다.

절체절명, 백척간두의 막바지에 몰렸음에도 2국에서 실패한 포석을 다시 들고나와 진검승부를 벌인 조훈현의 오기, 실리를 선호하는 기풍이면서도 과감하게 세력작전을 구사한 그의 배짱, 초읽기에 몰린 상태에서도 상대의 허를 정확하게 포착한 야수성이 마침내 반달곰을 질리게 만들었다는 강평이었다.

그리하여 종합전적 2:2-

승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과거의 네 판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고 오로지 마지막 제5국의 단판승부로 세계챔피언이 결정되는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4국을 이긴 쪽이 유리하다는 게 정설.

한국선수단은 조훈현의 우승을 확신하며 대회장을 나섰다.

그러나 정작 승리자는 그다지 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저조한 컨디션으로 전쟁에 임했는데 피를 말리는 대국으로 인해 바이오리듬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거였다.

인체는 극한상황에 접하면 스스로 교감신경을 작동해 만반의 응전태세를 갖춘다. 신선한 혈액은 두뇌로 상승해 판단력을 증강시키고 아드레날린이 분비되고 장의 연동운동이 정지하는가 하면 괄약근이 수축된다. 그리하여 체내의 기가 누출되는 것을 방지하며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상황이 종료하면 일시에 모든 신경작용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 타이밍이 빠르면 일시적으로 쇼크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

조훈현의 몸 상태가 바로 그러했다.

지독한 고열이 엄습했고 아랫턱이 자꾸 떨렸다95.

마침내 1년 넘게 이어져 왔던 제1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의 챔피언이 가려지는 날.

윤기현 단장은 4국에서의 불공정 계시를 강력히 항의하여 일본인 이토 씨를 추천했고 주최측은 어쩔 수 없이 요구사항을 받아들였다.

숙적들이 이윽고 마주앉았다.

오래 전 LA에서의 친선대국까지 포함해 종합전적 3:3으로 평행선을 긋고 있는 라이벌. 두 사람 모두 서로의 무공과 기량에 치를 떨고 있었으리라.

입회인이 개시를 선언하자 녜 웨이핑이 한웅큼 돌을 쥐었다.

조훈현이 홀짝을 맞추지 못하자 녜 웨이핑은 노타임으로을 불렀다.

앞서 벌어졌던 네 판의 순번을 무효로 하고 새롭게 돌을 가린 결과, 또 조훈현이 흑을 잡게 된 것이다.

검토실의 윤 단장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젓자 일본인 관전필자 후지이(藤井正義)씨가 윤기현 단장의 어깨를 치며 위로했다.

오늘 조훈현이 이깁니다. 두고 보세요. 어젯밤 꿈을 꾸었는데 산신령이 홀연히 등장해 흑을 쥔 조훈현이 승리한다고 예언했거든요.”

후지이의 꿈이 사실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그를 비롯한 일본팀은 알게 모르게 중립의 위치를 지키지 않고 조훈현을 응원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오전 10-

조훈현은 또 2,4국과 동일한 포진을 시도했다.

녜 웨이핑은 눈썹을 한 번 꿈틀하더니 양화점으로 변화를 모색했다.

아마도 조훈현의 도발적인 기세에 질린 것이었으리라.

그러자 조훈현은 4국 때와 정반대로 철저하게 귀를 파기 시작했다.

넓은 곳이 많아도 그는 상대의 집이 커질 가능성이 보이는 곳에 즉각 특공대를 투입해 두 집 내고 사는 타개작전으로 일관했다.

녜 웨이핑은 묵묵히 중앙에 성을 쌓으며 조훈현의 발 빠른 행보를 뒤쫒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민첩한 상대라도 언젠가는 허점을 노출하겠지.

그는 처절하게 인내하면서 두텁게 두텁게 따라왔다.

점심 작전까지 조훈현의 시간소모량은 90, 그에 비해 녜 웨이핑은 고작 30분만 쓰고 있었다.

꾹꾹 참다가 자신이 장기로 하는 종반에 에너지를 터뜨리겠다는 심산 같았다.

점심 메뉴는 장어덮밥.

그런데 조훈현은 먹는 둥 마는 둥 젓가락으로 밥알을 헤아리고 있었다.

윤 단장이 말을 걸었다.

왜 아직도 편찮은가?” “......”

그는 대답대신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말라있는 입술, 그는 큰 시합의 중압감과 감기 기운으로 만신창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냥 편안하게 두시게. 평소 자네 실력대로만 둔다면 이길 수 있을 걸세.”

조훈현은 선배의 충고에 또 미소만 지어보였다.

힘겨운 표정이었지만 눈빛만큼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음식을 앞에 두고 내내 허공의 한 점만을 응시했다.

윤 단장은 그런 그를 내버려 두어야만 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오전 봉수한 바둑판이 홀로그램으로 펼쳐져 있을 것이고 그 바둑의 전단(戰端)을 찾기 위해 골몰해있는 것이 분명했으므로.

아니나다를까 오후에 바둑이 속개되자마자 조훈현은 승부수를 띄웠다.

백의 세력권에 잽을 던진 다음 아예 깊숙이 헤집고 들어간 것이다.

응수가 곤란해진 녜 웨이핑의 행보가 둔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껑충껑충 중앙으로 탈출한 흑은 한숨을 돌려 우변의 약한 돌 한 점을 꾹 이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지킬 곳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때부터 녜 웨이핑이 맹렬한 반격을 시도해왔다.

시간을 아껴온 그는 상대의 대마를 노골적으로 공격하면서 동시에 시간을 공격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초읽기에 몰린 조훈현을 궁지로 몰기 위해 그는 고도의 계산이 필요한 난해한 초식으로 태클을 해왔다.

그러나 시간으로 승부하려는 그의 작전은 오산이었다.

조훈현은 당대 최고의 순발력을 자랑하는 천재.

코너에 몰린 상태에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카운터블로를 날린 끝에 마침내 백의 공격에서 벗어나 거꾸로 대마를 잡아버린 것이었다.

그 수순은 거의 유일한 생명선이었는데 일분 초읽기 속에서 조훈현은 완벽하게 외길을 밟아나갔고 녜 웨이핑은 자폭을 택하고 말았다.

조훈현이 145수를 힘차게 두자 녜 웨이핑은 무겁게 고개를 떨구며 돌을 던졌다.

그 순간 검토실에서 함성이 터졌다.

5국이 진행되는 동안 바둑평론가 박치문 씨를 비롯해 동남아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각 언론사 특파원들이 대거 싱가포르로 몰려와 우리측 응원단도 적지 않았던 터.

4국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측 쿵 샹밍 8단이 오열을 터뜨려 주위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 만큼 그들의 기대가 컸었고 어이없는 좌절에 체면 따위를 갖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대국실에서 녜 웨이핑은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조훈현은 상대의 아픔을 이해한다는 듯 기쁨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곧이어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그동안 한국 측을 은근히 애먹였던 잉 창치 씨도 환한 웃음을 비치며 승자 조훈현을 축하해주었다.

1미터도 넘는 트로피와 40만 달러짜리 수표를 받은 조훈현이 그제서야 머쓱하게 미소를 지었다.

점심 때 지었던 희미한 미소가 시상식에서 꽃으로 활짝 피어났다.

같은 시각, 95일 오후 4시의 한국기원은 빅뱅이 일어났다.

생중계로 해설을 하던 김수영 6단이 조훈현의 우승 소식을 전 국민에게 전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쉰 목소리로 하루 종일 열변을 토하던 그는 목이 메어 이 대목에서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너무 감격한 나머지 그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2백 명의 청중들도 따라서 울었다.

한국기원 사무국에서 캔맥주를 대량으로 주문해 청중들에게 서비스하며 즉석맥주 파티를 벌였다.

브라보!

싱가포르에 기자를 파견하지 못한 언론사들이 한국기원으로 카메라를 보내 연신 플래시를 터뜨렸다.

한국바둑이 세계정상에 우뚝 오른 감격의 순간이었다.

챔피언 조훈현은 싱가포르 교민들을 비롯한 응원단과 승전 축하파티를 늦게까지 즐기고 호텔방에 들어왔다.

긴장이 풀려 목욕할 기운도 없었다.

아아!

그는 침대에 풀썩 쓰러져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부드러운 어둠 속에서 수백 수천의 환영들이 파노라마처럼 회오리쳤다.

목포의 애잔한 풍경, 보문동 달동네의 계단, 세고에 스승집의 다다미 방, 공군복무 시절의 애환과 폭격시대의 영광, 그리고 파란만장했던 응씨배 토너먼트의 기억들.

이제 내 몫은 한 것이겠지.

주마등같은 필름 끝자락에 비로소 안도감이 묻어났다.

몸을 뒤채고 천정을 바라보았다.

며칠동안 답답했던 비강(鼻腔)이 시원한 느낌이었다.

대승리의 엔돌핀이 지독한 감기 바이러스를 몰아낸 모양이었다.

참으로 상쾌한 피로감을 만끽하며 그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96일 김포공항.

1층 입국장 게이트가 열리고 바둑황제조훈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30여 대의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뜨렸다.

동시에 와아- 함성이 터졌고 1백여명의 환영객들이 황제를 에워쌌다.

한 사람의 바둑인이 이처럼 성대한 환영을 받아본 적은 일찍이 없었다.

아내 정미화씨는 북받쳐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남편의 손을 꼭 쥐었다. 중국 원정길을 동행해보았던 그녀는 마지막 결전장인 싱가포르에 따라가지 않았다. 피를 말리고 영혼을 태우는 현장이 너무나도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녀는 용인의 사찰에서 날마다 천 팔십 배()를 올렸다.

부처님, 남편이 후회없는 바둑을 둘 수 있게 평정심을 주십시오.’

맹목적인 승리를 기원하는 예불이 아니었다.

육체의 건강과 정신의 평정을 염원했다.

그러다 보면 승리는 자연스레 따라오는 고차원적인 기도였던 것이다.

남편의 손은 뜨거웠다. 그렇지 않아도 깡마른 체구의 그가 그날 따라 유난히 말라보였다.

고생했지야?”

아내와 아이들 뒤에서 부모 조희아(규상에서 개명) 옹과 박순애 여사가 짧게 물어왔다. 그동안 어떠한 바둑시합의 결과를 놓고도 이렇다 저렇다 평을 하지 않았던 어른들이셨다.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체질의 조훈현이지만, 이 날은 속내를 활짝 드러내놓고 마음껏 웃음을 터뜨렸다.

귀빈실에서 가진 기자회견.

결승 5번기에 대한 소감, 새로운 국제 룰에 대한 견해 등을 기자들이 물어왔다.

황제는 모처럼 자상하게 모범답안을 냈다.

회견이 끝날 무렵 한 기자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언제쯤 일선에서 은퇴할 생각인가? 그리고 이창호 이외의 또 다른 후진양성을 위한 계획은 없는가?”

이제 막 정상에 오른 바둑황제에게 은퇴시기를 묻는 당돌한 발언.

그러나 그 질문은 정상 등극 이후의 국내바둑 판도를 나름대로 예측한 기자의 예리한 후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황제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바둑두는 것 자체가 내 직업이고 소명이기 때문에 일선에서의 은퇴는 전혀 생각해 본 바 없다. 지금 이창호 3단을 내제자로 키우고 있는데 내 자신이 현역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후진양성은 나중에 생각하고 싶다.”

19899월에 남긴 그 인터뷰는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2002년 겨울까지도 아직 그대로 유효한 상태이다.

공항에서 종로의 한국기원까지 조훈현은 꽃가마를 타고 이동했다.

장원급제를 축하하는 환영의 카퍼레이드.

길거리의 시민들은 세계바둑을 제패한 37세의 아름다운 청년 조훈현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시인 박재삼은 헌시를 지었고,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정치인들의 축하메시지가 쇄도했다.

한국기원 5층 건물 전체 벽면에 경축 플래카드가 걸렸고, 각 신문마다 1면 전체를 바둑황제 조훈현에 대한 찬사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정부에서 나라의 명예를 빛낸 공로를 높이 사 문화훈장을 수여키로 결정하자 조훈현은 우선 순위로 조남철 선생이 먼저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꽃을 피운 자신보다 파종(播種)을 한 선생의 공로가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나란히 청와대로 가 훈장을 수여받았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던 우리 바둑계, 문화와 스포츠 어느 쪽으로도 편입되지 못하고 장르의 정체성을 고민해야 했던 바둑, 일본에서 활약하는 조치훈의 소식에 따라 울고 웃던 한국바둑이 마침내 자력으로 쟁취해낸 세계제패의 대쾌거-

조훈현이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서 보여준 독무(獨舞)는 세계바둑계의 시선을 한반도로 돌리기에 충분했다.

이후 모든 대회에서 한국의 위상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어 출전 엔트리 수도 늘어난 것이다.

길고도 긴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고 집으로 돌아온 조훈현은 모처럼 제자 이창호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누구나 마주하면 세계제패에 대한 축하인사를 먼저 건네건만 돌부처와도 같은 창호는 꾸벅 고개만 숙였다.

이제 열 다섯의 여드름투성이 청소년.

스승은 씨익 웃으며 창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목례와 손길은 결코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다.

한국바둑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결정적인 장면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입술을 열어 표현하진 않았으나 창호는 응씨배 결승대국 중계방송을 지켜보며 애타게 스승의 승리를 기원했으리라.

당시 3단이었지만 무패의 연승행진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던 창호는 이미 정상급 실력을 인정받은 상태였고, 계산이 정확하고 빠르기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고수로 대접받고 있었다.

창호야. 이젠 네가 해줘야 한다.”

조훈현은 익살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자기 몫은 다했다는 홀가분한 어조-

그러나 그 한 마디에 실로 깊은 의미가 함유되어 있었다.

제자가 어린 나이에 절륜의 무공을 떨치며 고단자들을 연파해도 좀처럼 칭찬한 적 없는 스승이었고, 남들이 입을 모아 창호의 기량을 높이 평가해도 아직은 멀었다며 자꾸만 제자를 품 속 자락에 감추었던 스승 아니었던가.

그처럼 평가에 인색했던 스승이 비록 장난스럽긴 했어도 어쨌거나 정식으로 제자에게 임무를 떠맡긴 것.

필자는 그 발언이 후계자 책봉식이었다고 감히 주장한다.

스토리 서두에 언급한 바 있듯이 응씨배 결승에서 패퇴한 녜웨이핑은 세계바둑인들을 향해 중국바둑의 잠재력을 은근히 과시했었다.

자신을 몰락시킨 조훈현과 다시 응씨배에서 만나려면 4년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 시간은 녜웨이핑에게 너무나 긴 시간이었다.

나에게는 깜짝 놀랄만한 후계자가 있다. 앞으로 주목해달라.”

녜웨이핑이 자랑한 제자는 다름아닌 창하오(常昊).

그의 예언에 걸맞게 창하오는 현재 세계바둑계의 거봉으로 우뚝 솟았다.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당부한 몫이 바로 현재의 판도에 비춰진다.

이창호는 스승이 건넨 바통을 한 손에 굳게 움켜쥐고 당당하게 선두를 질주함으로써 황제의 황태자 책봉이 옳았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옥좌에서 한발 물러난 상왕이 아직도 국제전에 기사로 출전해 제자의 앞길을 막는 적군들과 처절한 육박전을 펼침으로써 다소 짐을 덜어주는 상황이 흥미롭지만......^^)

해외원정에서 돌아온 황제는 가을부터 국내 기전의 타이틀을 방어하느라 곤욕을 치러야했다.

응씨배 대전(大戰) 때문에 이월된 전쟁의 스케줄이 폭주했다.

전선(戰線)은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사방에 형성되었다.

기왕전에서 서봉수가, 대왕전과 기성전에서 유창혁, 그리고 최고위전에서 제자 이창호가 도전장을 던져왔다.

전방위에서 몰려오는 치열한 도전.

전천후로 임해야 했던 처절한 응전.

그해 겨울-

마침내 경천동지할 대사건이 터지고야 말았다.

1989년은 한국바둑이 세계를 향해 힘찬 기지개를 켠 한 해였다.

그리고 한국바둑의 운명을 혼자서 짊어지고 응창기배 우승을 견인한 조훈현 역시 개인사의 절정을 구가했다.

국내 타이틀 쟁취 100회의 신기록은 덤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 해에 국내에서도 세계조류에 발맞춰 메이저급 세계대회인 동양증권배를 개최했는데 조훈현은 시기상조를 이유로 불참했다.

일본과 대만의 강호들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신진 양재호 6단이 우승하면서 세대교체의 기치를 휘날렸다.

전년도에 대왕위를 쟁취하면서 천재성을 떨친 유창혁 3단은 기성전과 대왕전에서 조훈현과 12번기를 펼친 끝에 패퇴해 아깝게 무관으로 전락했지만 바둑황제와 팽팽한 접전을 벌여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일본의 조치훈은 본인방을 따내 십단, 천원과 함께 3관왕에 올라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 무렵, 바둑황제 조훈현이 무색하리만큼 출중한 성적을 내고 있는 다크호스가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다름아닌 황태자 이창호 4단이었다.

14세의 소년 창호는 제8기 바둑왕에 등극하면서 타이틀홀더가 되었고 111국을 두어 자그마치 84승에 75.7%의 놀라운 승률을 기록했다.

27패 중에 스승 조훈현에게만 13, 라이벌 유창혁에게 3패를 기록했고 그외의 기사들에게는 거의 전승을 거두다시피했다.

아직 스승을 따라잡기에는 힘이 부친 듯 했으나 괴동 이창호는 절대열세의 전적과 관계없이 1989년이 저물어가는 12월에 스승으로부터 최초의 타이틀 하나를 따내는데 성공했다.

29기 최고위전.

창호는 예선서부터 하늘을 찌르는 기세로 강자들을 연파하며 토너먼트의 사다리를 거침없이 타고 올라갔다. 서능욱, 장수영, 서봉수, 김일환을 꺾고 도전권을 획득한 것.

한 해전에 최연소 도전자 기록을 세웠던 기전이 바로 최고위전이었다.

그 때는 스승의 준엄한 가르침 앞에 무릎을 꿇었고, 이후 두 번 더 타이틀전에서 물러섰지만 이 번의 기세는 뭔가 달랐다.

흑을 든 제1국에서 스승의 날렵한 행마에 굴하지 않고 버틴 끝에 6집반 승리를 거둔 것이다.

2국은 스승의 완력이 제대로 먹혀들어 불계패.

1:1로 균형을 이룬 도전기는 이듬해로 넘어갔고 18일 열린 제3국에서 창호는 환상의 명국을 연출하며 157수만에 불계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스승의 반격이 곧바로 이어져 4국은 불계패.

199022.

그 날짜처럼 2:2 타이스코어에서 마지막 5국이 두어졌다.

최종국답게 바둑은 262수까지 이어지는 혈국이었다.

눈터지는 계가바둑에서 스승은 끝까지 반집을 이기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으나 종국해보니 제자의 반집승이었다.

관철동이 발칵 뒤집히는 대사건이었다.

14세의 풋내기가 세계챔피언이자 호랑이 스승을 꺾고 마침내 신문기전에서 우승을 한 것이었다.

최고위전은 조훈현이 20년 전에 생애 최초로 획득했던 타이틀.

역사의 수레바퀴는 무려 이십 년 만에 한 바퀴를 그렇게 돌았다.

이틀을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도 좀처럼 감기 기운은 가시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