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의 전설 조훈현 일대기 21/김종서
소년 이창호는 예상보다 빨리 스승에게 보은(報恩)의 훈장을 헌정했다.
문제는 그 훈장을 스승으로부터 탈취해왔다는 점.
스승이나 제자나 그 상황 앞에서 표정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마찬가지로 바둑계 인사들도 사제 앞에서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 할지 난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난처한 사람은 바로 조 국수의 아내이자 이 최고위의 사모(師母)인 정미화 여사였다.
그날 밤 연희동 집의 분위기는 기묘했다.
피로에 쩔은 조 국수가 힘겹게 현관을 들어섰고 그 뒤로 그림자처럼 소년이 들어섰다.
장한 쾌거를 거두었음에도 소년은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집안 어른들을 맞았다.
최고위 타이틀전이 벌어질 때 필자는 늦게까지 연희동에 머물고 있었다.
조부모님들이 결과를 궁금해하셨기 때문에 수시로 진행상황을 알려드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창호의 승리가 확정됐음을 전화로 확인하고 전하자 할아버님(조희아옹)은 저으기 고개를 주억거리셨다.
“허허, 그 놈 참!”
할아버님은 창호의 정신적 후원자이자 열렬한 팬이었다.
그날 할아버님은 심야에 귀가한 두 영웅들에게 똑같은 말을 건넸다.
“수고했다.”
아주 늦은 밤이었지만 창호는 대충 얼굴을 씻고 바둑방에서 혼자 복기를 하기 시작했다.
스승은 곧장 잠자리에 들었는데 바로 옆 방에서 제자는 두어 시간 넘게 바둑알을 만지고 있었다.
어쩌면 14세 소년 창호는 최고위 타이틀을 땄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사건인지 모르는 듯싶었다.
늘 두던 바둑 중 한판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었다.
다만 어렵던 스승과의 승부 5번기에서 3:2로 이겼다는 사실에 다소 흥분했을지 모른다.
그 나이에 상금의 액수나 타이틀홀더의 사회적 위치를 인식했을 리는 만무했다.
어려서부터 승부욕이 강해 모든 게임에 미칠 정도로 파고들었던 이창호에게는 바둑도 어쩌면 게임의 일종인지 몰랐다.
모든 스테이지의 키워드를 열고 한계 점수를 도달해야 직성이 풀리는 소년에게 바둑이라는 종목의 게임에서 마지막 관문은 역시 스승 조훈현이었다.
소년은 어느새 첩첩산중의 난이도 높은 스테이지를 통과한 상태에서 최후의 문을 열기 위해 수문장 ‘조훈현’ 캐릭터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창호는 바둑지와 바둑연감에 실린 스승의 기보를 낱낱이 분석하고 속력행마에 대항할 수 있는 비책을 강구했다.
결론은 두텁게 판을 짠 상태에서 후반에 승부를 내는 것이었다.
포석과 전투에 능한 스승은 주로 초반에 승기를 포착한 다음 상대가 운신할 수 없게 묶어버리는 스타일이었고 설령 초반에 실착을 해서 밀리더라도 중반에 가공할 흔들기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경향이 많았다.
워낙에 기력이 출중한 까닭에 대부분의 상대들은 스승 앞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었다.
그래서 스승은 후반부에 정교한 끝내기 솜씨를 과시할 기회가 드물었다. 어지간한 판은 불계승으로 밀어버렸으므로.
최고위전에서 창호는 자신의 전략을 완벽하게 구사해냈다.
최종국에서 끈질긴 인내와 치밀한 계산력으로 스승이 내보인 한 치의 허점을 여지없이 꿰뚫어버린 거였다.
1990년의 아침은 그렇게 밝아왔다.
15년을 이어온 조훈현의 독재, 서봉수 도전체제가 이창호의 등장으로 다각화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기운에 고무된 듯 입단 5년차인 오규철 3단이 1월 왕위전 도전자로 나서 조훈현과 일합을 겨뤘다.
서능욱은 KBS, MBC 양대 방송사의 속기전 결승에 올라 조훈현을 괴롭혔다. 물론 조훈현은 그들 모두를 제압하고 다관왕의 지위를 방어해냈다.
한편 위로는 영원한 라이벌 조훈현에게 밀리고 아래로 뭇 후배들에게 치이던 서봉수 9단은 5월 제 2 기 동양증권배에서 자신의 천적으로 통하던 이창호를 3:1로 꺾고 기적처럼 우뚝 일어섰다.
그러나 창호는 명인전에서 서봉수 9단에게 설욕하며 도전권을 쟁취했다.
하지만 조훈현은 서봉수와 이창호를 싸잡아 물리치고 황제의 위엄을 계속 떨쳤다.
그해 9월.
사제는 국수전에서 다시 만났다.
국내 최고(最古)의 전통과 호칭의 상징성에서 으뜸을 자랑하는 국수전.
창호는 그 전쟁에서 완벽한 전술로 3:0 스트레이트 승리를 거두었다.
조훈현의 이름 뒤에 15년 동안 꼬리표처럼 달려있던 국수라는 호칭을 15세 제자가 마침내 떼어버린 것이었다.
국수의 계보는 한국바둑 일인자의 계보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바둑평론가들은 조훈현의 몰락을 예고하기 시작했다.
제자에게 국수위를 내준 조훈현은 이어 상금랭킹 1위의 기성전에서 유창혁에게 1승 1무 4패로 어이없게 KO패를 당했다.
역대 타이틀전에서 조훈현이 이토록 일방적으로 몰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창호와 유창혁에게 완패를 당한 조훈현. 이쯤되자 바둑계는 일인자 논란이 일어났다. 다관왕 조훈현과 국수, 최고위의 이창호, 그리고 최대상금 타이틀 기성위를 보유한 유창혁 중 누가 일인자인가 하는 문제였다.
철저하게 상금의 규모를 따지는 일본식으로 본다면 이제 조훈현은 더 이상 일인자로 불릴 수 없는 처지였다.
다시 해가 넘어가고 1991년 1월 조훈현은 대왕 타이틀을 제자 이창호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이미 창호가 국수가 되었을 때 바둑계에서는 이창호의 독립에 관한 여론이 번지고 있었다.
한 지붕 아래 기거하고 한솥밥을 먹으며 같은 차를 타고 한국기원에 나가 타이틀 전쟁을 벌이는 사제의 기묘한 동거는 누가 봐도 어색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창호의 부친 이재룡씨는 조금 더 아들을 연희동에 맡겨두고 싶었다. 비록 스승을 연거푸 이기고 있다지만 열 여섯 살에 불과한 소년 국수 이창호를 완벽하게 담금질시켜 천하의 명검으로 탄생시키고자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대왕위를 상실한 날, 조 국수는 기분전환을 위해 친구들과 밤을 보냈다. 이튿날 새벽에 귀가한 남편을 맞이하러 나온 정미화 여사는 문득 창호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창호의 방에서 희미하게 바둑돌 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
아아, 저 소리는 내 남편을 이기려는 소리가 아닌가!
새벽이라 창호는 조심스레 돌을 놓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총성처럼 아프고 공포스러운 소리였다.
여지껏 자식보다 더 아껴온 창호였기에 그녀는 아릿한 통증을 느껴야했다.
창호의 괄목할만한 성장은 사모로서 당연히 자랑거리였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남편을 위협하는 강적이 아니던가? 창호의 발전은 곧 남편의 퇴보이며 남편의 몰락은 당장 가계(家計)와 직결되는 것이 프로의 공식이다.
이 엄청난 아이러니를 어떻게 감수할 것인가?
애당초 조 국수 부부는 창호를 5단까지 혹은 성인이 될 때까지 품을 생각이었었다. 그것이 일본에서 불문율로 통해 내려오던 관례였다. 헌데 이 괴소년은 너무나도 빨리 성장해 관례를 적용하기도 어려웠다.
아니, 일본에서는 스승과 제자가 승부바둑을 둔 관례조차도 없었다.
‘조훈현은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더 심한 표현으로‘살모사론’이 등장했다.
모든 뱀은 난생(卵生)으로 알을 낳지만 살모사는 독특하게도 체내에서 새끼를 부화한다. 어미의 뱃속에서 새끼들은 어미의 살을 먹으며 자란다. 새끼들이 세상에 나올 때면 어미는 껍데기만 남는다.
종족번식의 본능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담보하는 살모사.
조훈현도 어찌 보면 살모사의 어미와 많이 닮았다.
내제자인 이창호를 품어 자신의 자양분을 먹이로 제공했다는 점에서.
1991년 2월.
사제가 본격적으로 바둑계의 영토분쟁을 시작한 시점에서 창호가 하직인사를 올렸다.
이제 더 가르칠 것이 없다. 하산하거라.
스승이 6년 내제자 수업의 종료를 선언했다.
창호는 짐을 꾸려 반포의 아파트로 출가했다.
전주에서 수시로 서울을 오르내리는 아버지 이재룡 씨의 입장을 감안해 고속터미널 부근에 둥지를 튼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조국수도 평창동으로 이사했다.
헤어지자마자 사제는 그 달에 최고위전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스승이 도전자 입장이었다.
결과는 3:2로 이창호의 승리.
다음달 3월에 제자는 왕위전에 도전해 4:3으로 승리한다.
이제 조훈현은 군소 타이틀만을 거느린 변방의 성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국수와 왕위, 최고위를 보유한 이창호가 완벽하게 쿠데타에 성공한 형세였다.
바둑평론가들은 수시로 조훈현의 심경을 물어왔다.
“제자는 제자고 승부는 승부입니다. 이제까지는 창호가 나한테 배웠지만 앞으로는 내가 창호한테 배워야지요. 창호는 내가 모르는 경지를 알고 있는 듯싶기도 해요.”
그는 겸허하게 이창호의 실력을 존중하고 인정했다.
그러나 창호한테 배우겠다는 어조에서 결코 승부를 양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전의의 일단을 엿볼 수도 있다.
이때부터 그는 검토실에서 특유의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나는 몰라. 창호한테 물어 보라구.”
“나는 곧 은퇴할 사람이야. 몰라 몰라.”
국내에서 6개월 동안 한 번도지지 않고 무려 41연승을 올리면서 명실공히 히 일인자에 오른 이창호건만 이상하게 국제대회의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후지쓰배에서 마 샤오춘에게 완패했고 요다 노리모토와의 대결에서 3:1로 패퇴해 바둑팬들을 실망케 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이창호를 아직도 미완의 대기로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짙었다.
오다케 9단은 노골적으로 이렇게 평했다.
“이창호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하다. 그러나 오로지 스승 조훈현 9단을 이기는 길만을 연구한 것이 아닌가 싶다.”
국제대회에서 조훈현을 만나면 그들은 입을 모아 이창호에 대해 물어왔다.
그때마다 조훈현은 빙그레 웃으며 한결같이 대답했다.
“당신들은 아직 이창호의 실체를 모른다. 창호는 세다. 언젠가 당신들은 창호의 실력을 깨닫게 될 것이다.”
조훈현은 팔불출처럼 자신의 제자를 그리 자랑하고 다녔다.
그해 8월 그는 또 제자에게 명인 타이틀을 빼앗겼다.
3:0의 충격적인 전적.
이제 바둑계에서도 사제대결이 벌어지면 당연히 제자 쪽에 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서봉수와 유창혁 같은 이들은 이창호의 힘을 충분히 알기에 조심스럽게 논평했다.
“이제 조 국수가 옛날 같은 영광을 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말했지만 다른 이들은 더 심하게 표현했다.
“이제 조훈현도 완전히 간 거 아냐? 이십 년 동안 독재를 누렸으니 할만큼 했지.”
모두가 그렇게 조훈현의 몰락을 예고했고 단정했다.
실제로도 그 무렵 조훈현은 기왕과 패왕 두 개의 타이틀만 달랑 쥐고 있었으니 팬들이 화려한 재기의 기대감을 가질 수도 없었다.
세계챔피언에 오른 후 목표감을 상실해버렸고, 기존의 상대들과 달리 빈틈이 없는 창호와의 대결에서 연속적으로 패배하자 자신감마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끝없이 기다리는 창호의 바둑 앞에서 조훈현은 방향감각을 잃기 일쑤였다.
좋은 바둑으로 만들어가다 역전패 당하는 경우가 잦아졌고 치명적인 반집패를 자주 당했다.
그러다보니 미세한 계가바둑으로 판이 짜이면 불길한 예감에 휩싸일 수밖에.
거기에 체력의 열세도 더해져 점점 조훈현은 기울어져갔다.
그러나 한 가지, 시간이 흐를수록 심리적 부담감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 그에게 보약이 되고 있었다.
지는 것이 습관이 되고 제자의 실력을 아예 윗길로 인정해버리고 나니 오히려 개운해지는 거였다.
이 때부터 조훈현은 이창호를 상대로 진지한 탐색과 실험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한때 창호가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연구했던 것처럼 그도 창호를 극복하기 위해 치열한 공부를 전개한 거였다.
어떻게 하면 창호를 이길 수 있는 것인가?
승부도 중요하지만 아직 스승으로서 창호가 세계일인자가 될 때까지는 더욱 자극을 줄 필요가 있었다.
조훈현은 창호를 상대로 매번 같은 포석을 들고나와 답을 요구했다.
사제는 고집스럽게 그 포석의 수십 가지 변화를 주고받으며 현란한 승부를 펼쳤다.
거기서 파생되어 전 세계에 퍼져나간 정석이 바로 한국형 포석이다.
2003년 2월 14일. 기성전 제2국에서 이창호가 모처럼 패배했다.
최근 21연승을 기록하며 농심배, 도요타 덴소배, 국수위까지 손쉽게 거머쥐고 동방불패의 위용을 과시했던 그가 150여 수 만에 돌을 던졌다.
상대는 다름아닌 스승 조훈현.
지난번 1국에서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던 스승은 2국에서 특유의 스피드로 귀를 선점한 다음 중앙에 산재한 곤마들을 무난히 수습해 제자의 항서를 받아냈다.
5번기가 3번기 승부로 압축되면서 기성전에 대한 팬들의 관심이 서서히 증폭되기 시작했다.
최근 소년기사들이 두각을 나타내면서 사제가 결승에서 부딪히는 장면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창호는 여전히 여러 개의 성을 차지하고 있는 절대군주이고, 조훈현의 이름 앞에서는 이제 제자와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마저 증발한 상태이다.
정상의 제자에게 도전장을 던지기 위해서는 과거에 비해 훨씬 내공과 계산이 강한 젊은 강자들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 그 걸림돌을 넘는 일이 결코 쉽지 않고 아무래도 많은 전투를 치러야 하므로 상당한 전력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선 조훈현의 기마부대가 출정을 하면 중원이 술렁거리고 세인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전장(戰場)을 주시하게 된다.
‘이번에 전신(戰神)은 또 어떤 조화를 부릴 것인가?’
사제대결의 양상은 언제나 발 빠른 스승이 기습, 침투, 생존 및 도피탈출을 감행하고 묵직한 제자가 매복, 수색, 정찰 및 포위압박하는 공수대결로 전개된다.
어느 쪽이 자신의 주특기를 더 발휘하느냐에 따라 승부가 가려진다.
그런 점에서 관전자들은 조훈현의 공격을 더 주시하게 된다.
앙팡테리블 박영훈은 이렇게 말한다.
“조 국수님 바둑은 박력만점입니다. 다른 기사들의 기보는 몰라도 저는 국수님의 기보만큼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바둑을 둘 수 있다는 것, 그 것이야말로 모든 기사들의 꿈이죠. 저도 그런 바둑을 두고 싶습니다.”
지존무상 이창호는 어느 누구에게도 스승의 바둑을 쉽게 논평하는 일이 없지만 어려운 상대를 대라면 아직도 스승을 지목한다.
“선생님이 가장 까다롭습니다.”
문하에서 하산시킨 지 10년이 넘었는데 아직까지 제자를 편안히 놓아주지 않는 스승.
중국 바둑인들은 녜웨이핑, 마 샤오춘 같은 선배들이 조훈현보다 일찍 승부의 뒤안길로 물러난 점을 통탄하고 있다.
지난 12월 조 국수는 컨디션 조절 실패로 극심한 부진에 빠졌었다.
워낙 대국 스케줄이 일년 내내 폭주해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내기 힘들므로 딸들의 방학 시즌에 맞춰 모처럼 해외여행을 계획했었던 게 원인이었다.
여행 일정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대국을 벼락치기로 압축해버린 거였다.
그러다보니 거의 매일 대국을 해야 했고 등산 같은 재충전의 기회를 가질 틈이 없어 막말로 골병이 들 정도였다.
연례행사로 찾아오는 감기 바이러스가 무려 한달 동안 체내에 머물며 심기를 어지럽혔고 그 와중에도 빈번한 해외대국이 잡혀 있어 연말쯤엔 몸을 추스르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여고를 졸업한 맏딸 윤선이는 이번 겨울에 아빠의 아픔을 알게 됐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엊그제 가족들 모두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아빠가 화면을 보면서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시는 거예요. 무슨 소리인가 귀 기울여 들어봤더니 바둑 용어들이더라구요. 아빤 TV 앞에서 그날 두었던 바둑을 복기하고 계셨던 거에요. 사람들이 아빠를 천재라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아빠가 엄청나게 노력하는 분이라는 걸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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