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중추절
오늘부터 6일간의 추석 연휴가 시작된다. 오전에는 산책에 나섰다. 하루 일과에서 빼먹지 않으려는 일정 중의 하나다. 한강변으로 돌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거의 한 시간 여가 소요되었고 만보 수준의 보행수를 채웠다. 산책중에 모친에게 전화를 드렸다. 오늘 오후 2시쯤에 부산행 KTX를 타고 내려가고 5시쯤이면 집에 당도할 것이라고 말씀을 전했다. 독립생활을 하고 있는 작은아들에게 전화해 집에 와 있으라고 당부를 했다. 12시 20분쯤에 가방을 들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몰고 우리 내외가 서울역 근처의 손기정기념관주차장으로 향했다. 소요시간으로 내비가 알려준 시간은 40분이었다. 하남의 선동 IC로 진입해서 8888 올림픽도로를 탔다. 반대방향의 올림픽도로는 거의 주차장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귀성전쟁이 시작되는 듯했다. 차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수준이 아니고 거의 꼼짝 못 하고 서 있는 수준이었다. 반대로 서울역을 향하는 차로는 한가롭기 그지 없었고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날씨도 말고 쾌청한 날씨여서 전형적인 가을날의 청명함이 우리를 밝게 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서부역쪽으로 해서 서울역에 당도했다. KTX의 열차표가 입석 + 좌석 표였다. 서울에서 동대구역까지는 입석이고 나머지 구간은 좌석이 있는 형국이었다. 일말의 기대를 거는 부분은 통로상에 있는 보조석 두 좌석이었다. 그러려면 제일 먼저 열차에 탑승해서 그 좌석을 선점하고 확보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플래트홈에서 줄은 제일 먼저 섰는데 열차가 플래트홈으로 들어오고 보니 이미 한 승객이 보조석을 차지하고 있어 한 좌석만 확보할 수 있어 그 좌석은 아내의 몫이 되었다. 한 손님은 아예 승차해서 입석표를 승무원에게 발권받기도 했다. 20분을 열차가 달린 후에 도착한 다음 정류장은 광명역이었다. 바로 아내가 앉은 좌석 뒤로는 짐칸이 있었다. 보조좌석 뒤로는 캐리어 등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이층 형식으로 되어있었다. 그곳에 가방 등 짐을 실어두고 귀성을 이어갔다. 짐칸의 맞은편에는 승무원석이 있었다. 열쇠로 열고 닫는 형식이었고 열차가 달리는 동안 승무원이 근무하는 곳이었다. 열차가 중간중간에 정차를 하는 곳에서는 승무원이 정차 전에 나와서 제일 먼저 하차를 하고 열차의 정차와 다음의 발차까지 승객의 안전을 보호하는 역할을 승무원들이 하고 있는 듯했다. 1시간 30분을 달려 김천구미역에 당도했다. 2년동안 수없이 드나들었던 역이어서 감회가 남달랐다. 그런 시간도 이제는 추억이 되었고 66년 전의 호시절이었다. 다음역은 20분쯤 후에 동대구역에 당도했다. 이제부터는 좌석이 있는 상태여서 어느 만큼 편안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40분쯤 후에 울산(통도사) 역에 도착했고 얼마 후 최종 목적지 부산역에 당도했다. 가방을 메고 부산역 역사를 빠져나와 택시 타는 곳으로 갔다. 부산 부모님댁에 30분쯤 후에 도착했다. 부모님께 인사를 올렸다. 부산에서 보낸 시간은 20년이었다. 그런데 이제 부산을 떠난 시간이 40년 전이었다. 부산도 예전의 모습이 남아있는 부산의 모습이 아니었다. 많이 변모되었고 곳곳이 아파트촌으로 변했고 아직도 변모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어렸던 시절을 살았던 대연동 고개 쪽은 아파트 공사를 위해 터파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거의 암벽이 있어 공사가 힘들 것같기도 했다. 부모님과 미리 막내동생이 포장해 온 회로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세상살이 얘기를 나누고 회포를 풀었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추석명절이다. 음력으로 8월 보름이다. 부모님이 일찍 기침하셨다. 문안인사를 드리고 아침식사를 차렸다. 그리고 채비를 해서 우리 내외가 집에서 나왔다. 도로변으로 나오자마자 빈 택시가 와서 곧바로 목적지로 향할 수 있었다. 대연동에서 해운대 방면으로 갔다. 수영로터리에서 안락동을 지나 목적지에 당도했다. 큰집에서 제수를 마련해 놓고 상차림을 할 준비를 해 놓았다. 한쪽에는 큰 상이 놓였고 왼쪽편에 제기박스가 놓였다. 그리고 제사음식들이 준비되었다. 제주가 정성껏 제기에 제사 음식을 하나하나 정갈하고 정성스럽게 담았다. 처음으로 준비된 것은 각종 과일류였다. 조율이시라고 통칭되는 순서대로 과일이 놓였다. 대추 밤 배 감이었다. 여타 과일도 여러 가지 준비되었다. 바나나 멜론에 샤인 머스켓까지였다. 여섯 폭짜리 병풍을 차례상 위쪽으로 배치를 했다. 그것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와 같은 것이었다. 상의 끝자락에 촛대가 놓였고 불을 밝혔다. 반상에는 향불과 제주가 준비되었다. 주전자에 정종을 담아 준비를 해 놓았다. 다음의 음식은 전과 튀김, 나물 종류였다. 튀김은 고구마튀김, 오징어 튀김 새우튀김 등이었다. 두부전, 탕국도 차려졌다. 돼지고기 수육 그리고 생선류 송편 등도 제사상의 한자리를 차지했다. 마지막에 오른 것은 메와 탕국이었다. 고춧가루가 쓰이지 않는 것이 제사상의 철칙이었고 복숭아도 쓰면 되지 않았다. 지우를 붙여놓고 본격적인 차례가 시작되었다. 아내가 차례를 지내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차례가 끝난 후 식사를 할 차례였다. 모든 제수를 정리한 후 새롭게 식사를 차려 아침을 먹었다. 거의 10시경이었다. 예전에는 이렇게 큰집에서 차례를 모시고 작은집으로 갔다가 네댓 곳의 차례를 지내고 나면 오전시간이 훌쩍 가버리기도 했는데 이제는 각자 제사를 모시는 식이 되어버려 간소화되었다. 식사를 마시고 디저트로 차와 과일을 먹고는 큰집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막내동생이 차를 가져와 그것에 편승해서 귀가한 셈이었다.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귀경열차에 오르기 위해 막냇동생 차로 부산역으로 갔다. 아쉬움이 남았고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서운함이 가득했지만 어쩔 수 없는 작별이었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다시 손기정기념관주차장으로 도보로 이동한 후 차를 몰고 귀가했다. 한강변 위로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아내가 사진 촬영을 했다. 집에 도착할 때쯤에는 보름달이 구름에 가려 흐릿해졌다.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작은 아들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추석이 마무리되었다. 이제 중추절은 예전처럼 그렇게 엄청난 귀성전쟁을 하던 때와는 많이 달라졌다. 풍속자체가 그렇게 귀성에 아등바등하고 조상을 모시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은 그런 분위기는 아닌 듯하다. 집안마다 풍속에 맞춰 성묘하면서 벌초하면서 간단히 차례를 지내는 식으로 명절의 의미가 퇴색하고 변모해 간다.. 가족 간에 화합하고 같이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고 한 해를 반추하고 되돌아보며 삶의 한 자락 편린을 쌓아가고 추억을 만들어가는 시간이 아닌가 한다. 언제까지나 부모님이 건재해서 자식들을 보살펴줄 수는 없는 일인 셈이다. 어느만큼 제사를 모셨으면 명절제사는 성묘로 갈음한다든지, 또는 간단한 형식의 차례로 대신하고 가족 간의 화합의 장을 만드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무튼 2023년 중추절은 그나마 코로나19로 잃어버렸던 소중한 일상을 되찾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여겨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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