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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경쟁과 사교육 없는 교육은 불가능한 것인가

by 자한형 2024.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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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과 사교육 없는 교육은 불가능한 것인가?/전재학 인천 산곡남중학교 교장

학교 교육에서 경쟁은 불가피한 것인가? 사교육을 통한 경쟁만이 성공의 삶을 보장할 수 있는가? 둘 다 대답은 ‘No’라면 이것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경쟁은 숨 쉬는 공기처럼 당연하고 공정한 사회의 기본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우리가 아닌가? 신자유주의 원리를 신봉하는 대한민국은 경쟁을 국시(國是)처럼 떠받들고 있지 않은가? 사교육비는 2021214000억 원에서 202226조 원으로 급상승했다. 이처럼 경쟁과 사교육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으로 일상화된 우리에게 이를 극복할 방책은 무엇이란 말인가?

근래에 우리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경쟁하지 마세요.”라고 주장한 지식인이 있다. 바로 전직 미국 대학 교수이자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던 베스트셀러 작가인 혜민 스님이다. 그는 한 신문의 칼럼에서 세상을 좀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키면서 성공하고 싶다면 경쟁이 없는 곳으로 가서 독창성을 가지고 새로운 사업이나 창작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처음엔 주위 반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나아간다면 세상을 바꾸는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경쟁 실태는 어떤가?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국 중 35위로 최하위 낙제점에 가깝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것을 경쟁(競爭)의 논리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미국보다 더 미국화된 대한민국이 원인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이 추종하는 자유 경쟁 원리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더 신봉하고 있다. 나아가 경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등의 제반 영역을 지배하고 국민은 이에 희생되어 삭막하고 끔찍한 삶을 살아간다. 경쟁은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하는 소위 폭력사회내지 야만사회의 주범이다.

우리의 학교 교육도 오랜 기간 철저하게 경쟁을 피해 가지 못하고 있다. 많은 진보학자들은 교육혁명을 부르짖으며 지금의 줄 세우기 경쟁 체제와 공교육 강화를 통한 사교육의 의존도를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동안 정부가 바뀌어도 언제나 그 밥에 그 나물처럼 무늬만 개혁을 부르짖던 보수 정부가 있었다면 진보 정부도 교육에서 혁신적인 제도를 내세웠지만 기득권층과 사교육 카르텔의 저항에 부딪혀 역시 한계점에 봉착했다.

이젠 보수, 진보할 것 없이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은 국민의 공감을 이끌어 대한민국 교육의 영혼이자 성공 방정식이 되어버린 경쟁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맹목적 사교육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믿기 어렵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경쟁이 없던 시대가 존재했다. 중세 시대 서양에서는 경쟁 자체가 이라는 생각에서 죄악으로 규정하고 때로는 살인에 처하던 중범죄였다. 하지만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른 지금, 우리 사회는 경쟁 이데올로기가 교육 영역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이념이 된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한국 사회는 실로 경쟁지상주의의 천국이자 사교육 공화국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것이 최근에는 한국 사회가 이생망’ ‘헬조선’ ‘N포 세대로 대변되는 핵심적 요인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베라르디는 죽음의 스펙터클에서 한국 사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지적했다. 끝없는 경쟁, 극단적 개인주의, 일상의 사막화, 생활 리듬의 초가속화가 그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경쟁이 다른 부정적 특성들의 원인이라는 사실이다. 목숨을 건 경쟁으로 인해 개인주의가 극심해졌고, 일상은 황폐한 사막이 되었으며, 생활 리듬은 살인적인 속도를 장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사교육비의 부담은 초저출산 국가의 직접적인 이유가 되고 있다.

오늘날 독일교육의 초석을 다지고 1970년대 교육개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현대 독일교육의 아버지라 추앙받는다. 그는 경쟁은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교육에 반하는 원리로서 인간적인 형태로 이루어지는 교육은 결코 경쟁 본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또 그는 경쟁을 의심의 여지 없는 야만이라고 힐난했다.

경쟁에 반대하는 아도르노의 교육이념이 실현됨에 따라서 독일의 학교에서는 경쟁은 야만 행위로서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우열을 가리는 석차는 사라졌다. 학생은 서로 다른 취향과 재능을 지닌 개성적 존재이지, 우열을 나누어 일렬로 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었다.

교사에 따라서는 선행교육으로 앞서가는 학생들을 자기 수업에서 제외시킨 사례도 있을 정도다. 이처럼 경쟁 없이도 교육 선진국이자 경제 대국이 된 독일인에게 더욱 부러운 사실은 그들이 어떤 일에 종사하든 당당하다는 것이다. 우리 눈에 비친 많은 독일인에게서 좀처럼 열등감을 가진 이를 찾기가 힘든 이유다. 이를 우리는 그저 딴 나라 이야기라고 외면할 것인가?

제로 투 원의 저자이자 페이팔을 창업한 피터 틸은 경쟁을 하지 말아야 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그것은 경쟁하다 보면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경쟁하는데 소모적으로 다 쓰게 되어 정작 혁신적인 기술의 발전이나 새로운 시장의 개척 없이 단지 생존만을 위해 싸우다 다 함께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 사례로 1990년대부터 미국 항공사들이 서로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갈수록 이윤이 작아져 결국 여러 항공사들이 우르르 파산했던 경우가 있다. 마이크로 소프트(MS)와 구글(Google)이 검색엔진을 포함한 비슷한 여러 사업에서 경쟁하는 동안 애플(Apple)이 아이폰과 같은 신기술로 세계 최고 기업 가치 회사가 된 것은 또 다른 사례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적어도 국가백년대계인 교육에서만큼은 시사점을 얻어야 한다. , 교육개혁은 경쟁교육의 폐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교육의 본질을 찾자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교육은 인간이 자신의 소양과 재능, 잠재력을 발현(發現)시키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 교육은 이제 모든 인간을 획일화된 기준에 맞춰 줄 세우고, 수직적 위계질서에 배치하는 가혹한 경쟁교육이 초래하는 야만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

나아가 쉴 시간과 생각할 여유조차 없는 청소년들을 구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 경쟁으로 인한 제로섬 게임에 더 이상 어린 학생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다시금 묻고자 한다. 경쟁 없는 학교 교육, 나아가 사교육의 배제는 불가능한 것인가? 이제 우리는 경쟁교육에서 공존, 상생 교육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사교육을 극복하는 기숙형 자사고, 특수목적고 등 혁신학교의 운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에게 이런 교육의 보편화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이제 교육부의 미래 시계도 국방부의 시계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정해진 목표에 도달한다는 기대와 희망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바야흐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이제는 디지털 대문명의 시대에 맞게 상상력과 창의력을 기르고 연대와 협력으로 서로 성장하고 상생할 수 있는 학교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사교육의 막대한 경비는 누구에게나 인간 행복의 마중물로 전환되어야 한다. 다시금 정부는 킬러문항 배제와 같은 작고 지엽적인 것으로 새로이 준킬러문항경쟁을 부추길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서 시행될 원대한 교육개혁에 착수하여 경쟁과 사교육이 없는 교육의 틀로 완전히 개혁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사교육 공화국에서 다시금 혁신학교를 되돌아보며

우리가 교육개혁을 거론할 때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일까? 학교 내부적으로는 전통적 방식의 수업을 혁신하고 교육과정의 특색 있는 운영을 떠올린다. 그만큼 학교 교육에서 수업과 교육과정 운영은 변화의 중심축이다. 그러나 실제 교육과정의 구조적 특성에서 볼 때 학교 간에 별 차이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재의 교육시스템이다. 하지만 혁신학교는 학생들이 타 학교와 다르다고 느낄 정도로 경험의 차이를 내세운다. 이는 요즘 문제화된 사교육의 해결책이자 공교육의 정상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어떻게 이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필자는 최근 3년에 걸친 지역형 혁신학교의 운영으로 이를 보다 실감할 수 있었다.

혁신학교의 실제적인 수업 운영의 실태를 소개해 본다.

첫째, 학생 주도의 수업이다. 한 마디로 학생들이 수업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교과 수업에서 조별 활동을 하거나 그 결과물을 발표하고, 공부할 부분을 미리 나누어 학습한 것을 친구들에게 설명하며,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추진하여 그 성과를 수업에 가져오는 등의 활동이 이루어진다. 예컨대 모둠활동, 토론활동 및 발표, 직접 PPT를 제작하여 발표하기 등 역동적인 수업에서 학습활동의 핵심적 동력은 바로 교사가 떠먹여 주는 것이 아닌 학생들이 직접 떠먹는 주도성이고 그것이 배움의 자발성을 좌우하고 진정한 배움이 일며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둘째, 함께 하는 공부다. 이는 더불어 사는 사회의 핵심인 협업(cooperation)을 통한 배움이다. 여기엔 조별 과제, 팀 프로젝트 등 다양한 이름으로 학생들 간의 협업을 유도한다. 물론 활동 과정이 과정 중심 평가의 관점에서 수행평가로 이어지기도 한다. 학생들은 이런 활동을 통해 교사가 아닌 다른 친구들로부터 긍정적인 팀워크, 협동심 그리고 부족한 정보에 대한 공유를 통해 서로 나눔의 정신을 배운다. 약간의 무임승차나 의견 갈등의 경우도 결국은 이를 잘 조율하여 극복하는 경험을 축적하게 된다. 이는 혼자 하는 공부보다 함께, 특히 또래 집단의 협업을 통한 공부가 효과가 크다는 교육학적인 이론에 근거한 것으로 이론이 없다.

셋째, 학습 방법의 체득이다. 교과 수업에서 자기 주도성에 기반한 학습 방식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요구한다. , 적극적인 의견 개진과 상호 교류에 의해 공유하는 방식을 취득하게 된다. 따라서 학생들은 학습 태도나 전략, 개인적 성향 등을 새로운 학습 상황에 맞게 변화시키고 맞추어 가게 된다. 이들은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체득하여 학원에 가기보다는 학교의 면학실을 굳세게 지켜나간다. 이것이 바로 맹목적 사교육에서 탈피할 수 있는 길이다.

넷째, 삶과 연계된 배움이자 기본을 위한 공부다. 학생들은 교과교실제를 위해 학교 공간 혁신의 일환으로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교실에서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통한 수업 경험을 한다. 여기서 각 교과가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이는 교과서와 입시 중심 교육 내용을 뛰어넘는 교육 소재와 경험들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고 결과적으로 배움의 경험과 의미가 풍부해지게 된다. 또한 각 교과에 내재된 삶의 기초 원리를 파악하고 교육받은 존재로서 넓은 안목을 갖추게 된다.

그렇다면 혁신학교에서의 평가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는 현실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다. 왜냐면 종래 방식과는 다른 교육활동을 운영하면서 시험은 학생들의 경험과 괴리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대학입시를 위한 전통적인 시험 방식을 무시할 수 없기에 혁신학교의 교육적 지향과 철학과의 불일치를 초래하는 것이 없지 않은 것은 아쉬운 일이다. 혁신학교의 평가는 학업성취 수준을 구분하기보다는 실제 가르친 만큼만 평가하여 학습의 부담을 줄여주는 원론적 수준에 그치는 경향과 배움을 자극하기 위하여 과정을 중시하는 수행평가에 치중하고 있다. 이는 평가가 대개 현실에 중점을 두고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외부의 평가, 전국학력고사(모의평가)에 비해 쉽게 출제하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혁신학교가 학부모로부터 학력 저하의 주범으로 외면당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가늠할 수 있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관 모의평가가 실시된 3일 인천 세원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고 있다. (사진=전재학 교장)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가늠할 수 있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관 모의평가가 실시된 3일 인천 세원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고 있다. (사진=전재학 교장)

이상(理想)은 현실(現實)을 넘어선다. 그래서 이상주의자는 현실로부터 배척당하기 쉽다. 현실주의자는 이상주의자가 될 수는 없지만 반대로 이상주의자는 유연성을 갖추어 현실주의자가 될 수 있다.

혁신학교는 이상이고 평가는 현실이다. 그러므로 혁신학교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교육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들의 현실적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로써 혁신학교만의 매력을 상실하기 쉽다. 참으로 서글픈 현실이다.

문제는 교육의 대상자인 학생이 혁신학교 체제 속에서 다양한 경험과 배움을 통해 실()보다 득()이 많다는 사실에 그나마 위로를 찾고자 한다. 실제 혁신학교에 대한 학생 당사자들의 만족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반면에 이들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일부 학부모는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어 이를 배척하는 양면성의 시대에 혁신학교는 고독한 순례자와 같다. 이것이 바로 현재 혁신학교의 위상이다. 지역과 학교에 따라서 이런 현상은 편차가 있다.

우리는 학생들을 교육의 관점에서 교육자의 시선으로 육성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입시 위주의 현실에 안주한 교육은 절망과 불행을 낳고 있다.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이생망이 무엇인가. 점수 한 점에 이 생애에서는 망했다고 절규하는 그들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현실은 그렇게 안타깝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우리의 교육은 시대에 뒤처져 거친 바다와 같은 세상에서 표류하고 있다. 표류한다는 것은 가야 할 목적지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제 혁신학교가 추구하는 목표가 일반화되어 교육의 바다를 순항해야 한다. 다만 현재 교사가 담당하는 각종 행정업무를 충분한 인력의 배치로 해소하여 가르치는 본래의 업에 몰두하고 학생은 배움이 즐겁고 행복한 학교생활로 연계된다면 더 이상의 무엇이 우선할 수 있을까?

혁신학교는 최근 논란의 킬러 문항 해결의 강력한 백신이며 대한민국을 사교육 공화국에서 해방시키는 강력한 해결책이다.

혁신학교의 표류는 국가적으로 지극히 불행한 일이요, 결국은 교육을 정체 또는 후퇴로 이끄는 자해행위다. 우리 교육이 저마다 혁신학교로의 방향 설정과 이를 실행하기 위한 용기 있는 도전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제 미래의 국가 역량을 키우고 교사,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 모두가 즐겁게 가르치고 배우고 더불어 성장하는 진정한 교육의 장으로 학교를 개혁할 수 있는 기반을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갈 것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사교육의 허상을 깨닫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최근 대통령의 킬러 문항 배제라는 발언으로 촉발된 수능과 그에 따른 사교육의 문제는 우리 사회에 가히 9.0 강진이라 할 정도의 후폭풍을 낳고 있다.

과거로부터 대한민국은 사교육 공화국이라 불리던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2022년 한 해 동안 대한민국에서 사교육비로 지출한 금액은 26조였다. 이토록 사교육이 성행하는 가운데 학원이든 가정 과외든 사교육과 관련된 불편한 진실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과외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그러하지 못하니 갈수록 교육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가난과 학벌이 세습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많지 않다.

문제는 교육 당국과 사교육이 거대한 카르텔이란 성채를 쌓은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다. 이를 최근에 대통령도 직설적으로 지적한 것이 아닌가.

오늘날 학교는 지역에 따라 70~90%의 학생들이 정규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학원으로 달려가고 있다. 어려서부터 학원으로 내몰린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당연히 학원으로 등원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다. 소위 학교에서는 내신을, 학원에서는 입시(수능)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면학실을 마련하여 자기주도 학습을 할 수 있도록 최첨단 공간을 제공해도 관심이 없거나 거의 빠지기가 일쑤다. 혹시라도 면학실을 이용해도 불참을 통보하는 날이 많다. 대개는 주 5일 중에 최소 2~3번은 빠지게 된다. 이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쉴 시간조차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진행되는 학원 수강의 실상이다. 이는 엄청난 가계의 부담을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위 상상을 초월하는 고소득의 일타 강사를 배출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 결과 선량한 다수의 국민은 허망하고 휜 허리가 더 고통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사교육을 통한 지식은 본인의 출세와 성공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가늠할 수 있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관 모의평가가 실시된 3일 인천 세원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고 있다. (사진=전재학 교장)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가늠할 수 있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주관 모의평가가 실시된 3일 인천 세원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시험을 치르고 있다. (사진=전재학 교장)

왜냐면 과외는 인간의 사고(思考) 능력을 키우지 못하고 단지 시험을 좀 더 잘 보기 위한 기술을 배우는 것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볼 때 학생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학부모는 그것을 감수하고 또 조급해할 뿐이다. 오직 미래의 불확실성과 두려움, 불안을 먹고 자라는 사교육은 이제 배보다 배꼽이 큰 볼썽사나운 기형아가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유대인의 교육은 한껏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다. 오천 년을 이어온 유대인 교육법은 우리나라의 입시 위주의 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번번이 언급되나 현실적으로는 토양이 매우 다른 인재 육성법으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유대인은 세계인구의 0.2%에 불과하고 또한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도 안 되는 숫자이다. 하지만 세계 노벨상 수상자의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유대인 교육의 본질은 탈무드토라를 바탕으로 어려서부터 형성된 신앙 교육에 기반한다. 특히 유대인 교육의 가장 큰 장점은 대화와 토론의 하브루타를 바탕으로 아이들을 사랑으로 가르친다는 점이다. 성적이 행복 순이 된 우리의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에 일침을 가한다.

유대인 교육의 오래된 비밀을 우리는 일찍부터 깨닫고 있지만 우리와는 다른 시스템으로 알고 그저 부러워만 하는 모양새는 안타까움의 극치를 이룬다.

탈무드에 가난한 어린아이들에게 배워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속성을 살펴보자. 부자 아이는 어떤 장난감을 가지고 싶을 때 부모에게 사달라고 조르면 되지만 가난한 아이는 돈이 없어 그 장난감을 대체할 다른 장난감을 찾는다. 그래서 가난한 아이들이 더 창의적이니 그들에게서 배우라는 것이다.

유대인이 뛰어난 창의력으로 노벨상을 휩쓰는 것은 돈이 많고 과외를 많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돈이 없고 보호해줄 나라가 없었던 역경 극복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돈 자체는 세습이 될지 몰라도 돈이 없어 가난이 대물림 된다는 우리의 현실은 그들에게는 성립되지 않는다. 이는 단지 패배주의적 사고를 하는 우리들의 세속화된 주장일 뿐이다.

최근에 어느 고등학생의 말은 현실 극복에 대한 핵심을 짚었다. 정규 수업 이후에 대부분이 학원으로 달려가는 학교에서 혼자서 면학실에 남아 꾸준하게 공부하는 이유를 묻자, “남들이 모두 한다고 따라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학원은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라고 했다.

그렇다. 이 학생은 학원 공부의 허상을 잘 알고 있었다. 또 자기주도 학습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이처럼 우리에게 사교육의 허상을 깨닫는 것은 극히 소수의 경우이고 따라서 불가능한 것인가?

학교는 또래끼리 묻고 답하는 학습 공간, 요즘 청소년들이 즐겨 찾는 스터디카페식의 자유로운 학습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단 한 명의 학생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에게 자긍심과 작은 성취감이라도 불어 넣어 주어야 한다.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

주입식 학습의 부끄러운 사교육, 문제 풀이 기능형 인간으로 만드는 사교육의 허상을 알면서도 언제까지 울며 겨자 먹기식의 입시교육만을 반복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