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개가 섬광이 되는 순간/김태완 (문장에 물들다 〈3〉)
‘사투리처럼 구불러 댕기는 돌삐도 착하게 지키보고 있을까’(서하)
‘먹구름이 산허리 휘감아 돌고 노인복지관 뒤 안개가…’(한영식)
‘병을 깨선 안 돼. 자, 어떻게 하면 새를 꺼낼 수 있을까?’(김성동)
‘저건 부처님도 아니다! 불상도 아니야!’(김동리)
한 초등학생들이 초등학교 운동장 철봉에 매달려 있다. 사진=조선DB
서하(본명 徐庭禮·61) 시인을 만난 적이 없지만 최근 펴낸 시집 《외등은 외로워서 환할까》(걷는사람 간)를 읽으며 친숙해짐을 느낀다. 글을 다루는 솜씨가 비범하다. 괜히 무게를 잡고 진지한 척 독자에게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개구쟁이가 딱지 뒤집듯이 말의 의미를 뒤집는 시원시원한 솜씨가 있다”(장옥관 시인). 어쩌면 그가 하는 말이라면 “꿈에 마스크를 쓴 아이를 낳았다”고 해도, “입이 저지른 일을 똥구멍으로 씻어내는 중”이라고 해도, 기꺼이 믿을지 모른다.
카자흐스탄에는 거꾸로 자라는 가문비나무가 있다는데
체육공원 거꾸리에 누워 올려다본 하늘에 물고기처럼 파닥이는 신갈나무 잎, 하얀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연못
나무늘보처럼 거꾸로 매달려 땅과 더 가까워진 머리는 발이 되고, 높이 뜬 발이 머리가 되더라 칠십 세 노인이 십칠 세 소년이 되고, 엄마는 죽은 듯이 살아 있고 아버지는 살아 있는 듯이 죽었다고 중얼거리는
아가미를 떼었어도 눈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더 가파르게 기울어져 볼까 사우나실 모래시계처럼 세상을 훌렁 뒤집는다
저쪽과 이쪽을 뒤바꾸듯이, 무너질 것 같은 역경도 경력이 되는 거꾸리, 거기 달라붙어 자라는 거머리 같은 그늘은 그냥 덤이래!
— 서하의 ‘거꾸리’ 전문
문학평론가 이성혁은 그의 시집을 읽고 ‘거꾸리 시학(詩學)’이라고 했다.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 “저쪽과 이쪽을 뒤바꾸”는 거꾸로 보기를 통해 보이던 것이 새롭게 보이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말장난 같으면서도 왠지 행간 속에 따스하고 재미있는 사연이 담겨 있어 또 읽고 싶어진다.
삶은 계란이 맞을 짓 한 적 없는 바위의 뒤통수를 한 대 탁 칩니다 친 사람이 더 아프다는 말, 잘 맞춘 퍼즐 같습니다 깨어진 만큼 더 넓은 세상이 보인다고 누가 그랬습니다 깨어지는 힘도 스펙입니다
계란 안에서는 계란이 안 보입니다 균열된 금 사이로 엄지와 검지를 밀어 넣으며 살살 벗깁니다 햇살이, 구름이, 나무가 보고 있는데 바보같이 속옷까지 다 벗습니다 종이도, 플라스틱도, 철제도 아닌, 깨어짐이 만든 훈장, 그들을 보고 누가 껍데기라 이름 지었을까요 알몸을 감싸며 사는 일, 꼭 쥐면 바스락대며 울 것 같아 목이 멥니다
설령 멋진 신세계가 멋지지 않다 해도 깨어져서야 열릴 신세계, 깨진 적 없이 먼저 가 버린 동생은 절대로 모를 일, 깨지지 않은 계란은 고장 난 수류탄 같은 것
작은 틈을 비집고 나오는 풀잎처럼, 길게 목 빼며 까치발을 해 봅니다만, 견고한 내 틀은 어느 바위가 깨부숴 줄지요 아직은 뒤통수만 벅벅 긁어대는 삶은, 계란입니다
— 서하의 시 ‘삶은 계란입니다’ 전문
이번에는 경상도 방언이 종합 선물세트처럼 담긴 시를 소개한다. 이 시를 읽으면 ‘우짜다가 마주친 눈길엔 돈 없어 몬 사묵은 칠성사이다를 마신 듯 화했다’는 고백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세월이 흘러 “인자는 갱죽거치 다 늙어뿌겠”지만, 추억 속에는 지금도 칠성사이다를 처음 땄을 때처럼 탄산이 흥건하고 달콤쌉쌀한 맛이 난다.
눈이 내리는데 그가 왜 떠오르는지, 중학교 3학년 때 전근 온 수학 샘이 생각만 해도 좋았다 무시로 가심이 콩닥거리가 옆 짝지가 들으까 봐 손바대기로 꾸욱 누질렀다 차마이 비예고 싶어가 수학 공부만 쌔가 빠졌고 알면서도 모리는 척 고요한 호수에 돌삐이 던지듯 툭툭 질문하곤 했지 우짜다가 마주친 눈길엔 돈 없어 몬 사묵은 칠성사이다를 마신 듯 화했다 옆자리 애 연애편지 대필해 주고 받은 자두 두 개를 드리고 싶어서 갯주미에 넣어 댕겼다 기회를 엿보메 시간이 좀 흘렀나 싶었는데 자두가 울었는지 교복에 축축한 얼룩이 번지기도 했다 입수불에 엄마가 바리던 구찌 배니를 살짝 바린 거는 끝내 눈치채지 못했겠지 비 온 뒤에 반질거리는 자스민 이퍼리거튼 멀끄디까지도 좋았다 그런 그가 내 담임 샘과 결혼을 한다는 소무이 돌아댕겼다
더 기맥히는 거는 담임 샘이 반에서 뜨개질 잘하는 가시나들 매키 방과 후에 남아라 캐가 혼수로 가주고 갈 자부동, 식탁보를 뜨라고 한 일! 나의 허전하고 아린 속내도 모리고 신혼집을 뀌밀 것들을 뜨라고 하다니 아! 낮째기 찡거리 부치가 주디 빼물고 한 코 한 코 뜰라카이 부글거리는 내 속을 확 디비시 놓은 담임 샘이 엄청시리 미깔시럽었다 한 코 한 코 뜰 때마다 코바늘로 콕콕 찌리고 싶었다 안 그라머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일부러 한 코씩 빼묵고 떴는데 더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카메 입이 귀에 걸린 거 보니 복장이 확 디비지는 기라 담임 샘께 반항하니라 가정 시험지도 깔깔한 백지로 내뿌고 찔룩거리던 그날맹크로 배긑에는 아작아작 눈이 온다 민경에 비친 그녀의 낮째기맹크로 수학 샘도 담임 샘도 인자는 갱죽거치 다 늙어뿌겠다 카메 펄펄 누이 내린다
창자거치 미끌거리는 질가새로 사투리처럼 구불러 댕기는 돌삐도 착하게 지키보고 있을까, 어쩔까
— 서하의 시 ‘눈 내리는 날’ 전문
칠성사이다와 장애인복지관
인천 남구 학익동에 위치한 시각장애인 복지관. 사진=조선DB
서하 시인은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1999년 《시안》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아주 작은 아침》 《저 환한 어둠》 《먼 곳부터 그리워지는 안부처럼》을 냈으며 33회 대구문학상, 제1회 이윤수 문학상을 수상했다.
한영식(韓營植·58) 시인의 첫 시집 《장애인복지관》(모악 간)을 읽는다. 시인은 1964년 여수 앞 돌산 방죽포에서 태어나 부산과 대구에서 성장했다. 지금은 부산에서 살고 있다. 복지관에서 장애인을 차량으로 이동시키는 일을 한다. 고되지만 귀하고 중요한 일이다.
“장애인복지관을 배경으로 하는 인간 소외 문제와 ‘동자승’ 모티브를 통한 존재의 비극과 초월 의지, 그리고 모성 회귀의식과 귀향”(이진엽 시인)을 다루고 있다. 평론은 좀 복잡하지만 시는 따스한 수채화처럼 투명하다.
장애인복지관에 맑은 가을비 내립니다
긴 장마
먹구름이 산허리 휘감아 돌고
노인복지관 뒤
안개가 산을 힘겹게 넘어 갑니다
시각장애인 주간보호센터 차가
장애인복지관 정문에 서면
혼자서 복지관으로 올 수 없는 노인들이
지팡이 하나씩 주름진 손에 힘껏 쥐고
도우미 선생님 손을 잡고
천천히 주간보호센터로 들어갑니다
몹쓸 놈 코로나로
식당은 열려 있지만 직원들은 이용금지된 지 오래
시각장애인 노인들만 점심 드시러 갑니다
주간만 보호되는 노인들
장애인복지관 위로
가을비 내립니다
- 한영식의 시 ‘장애인복지관’ 전문
연작시들이 모두 고요하고 맑고 소슬하다. 김준태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어디 긁히지 않고, 그렇다고 큰 다침이 없는, 손톱자국도 내본 적이 없는 시”다. 이런 시는 은유나 비유와 같은 수사(修辭)가 불필요하다. 하지만 자꾸 읽다 보면 시가 정색을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시인의 마음에, 그의 슬픔에 압도되고 만다.
아파트 지하 2층
차로 옮길 봇짐 둘 주차장 바닥에 내려놓고
어서 오라고 어서 오라고
허공에 손을 흔드는 할머니
두 살 때 시력을 잃었다는 할머니
양산에서 밀양 가는 길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초행길인 내게 친절하게 설명을 하신다
밀양역 앞 주공아파트로 가면 된다고
경찰서를 지나면 다리가 나오고
다리가 끝나는 곳에서
우회전하면 아파트가 보이고
입구에서 바로 좌회전을 하면
혼자 살고 있는 집이 14층에 있다고
나는 봇짐을 들고
14층 할머니가 홀로 사시는 집에
할머니를 남겨두고 내려왔다
눈에 보이는 것도 제대로 못 보는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할머니를 걱정하면서
- 한영식의 시 ‘장애인에 관한 기록3 - 시각장애 할머니’ 전문
시집의 또 다른 시들은 ‘동자승’을 모티브로 한 시들이 많다. ‘새 한 마리’ ‘대웅전 목탁’ ‘노란 달덩이’(와 ‘노란 새’), ‘깊은 산 조그만 움막 하나’ 등의 이미지가 동자승과 연결돼 있다. 불교적인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지만 시인이 표현하고픈 슬픔의 정수(精髓)가 아닐까.
해맑은 동자승만큼 비극적이면서도 인간사의 욕망을 뛰어넘는 존재도 없다. 니체의 초인(超人), 홉스의 리바이어던,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 나오는 키릴로프가 온다고 해도 동자승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을 것 같다. 신약의 마태오 복음 18장 2절의 예수 말씀처럼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저 조그만 산에
집 한 채 있네
저 조그만 산에
절 하나 있네
저 조그만 산에
동자승이 있네
저 조그만 산에
대웅전 기와에
새 한 마리 앉았네
저 조그만 산에
가만가만 목탁소리
저 조그만 산이
수미산일지도 몰라
저 조그만 산이
- 한영식의 시 ‘동자승 1
- 저 조그만 산에’ 전문
동자승과 만다라
영화 〈만다라〉에 출연한 배우 안성기 모습이다. 사진=리틀빅픽처스
동자승을 생각하니 김성동(金聖東·1947~2022년)의 소설 《만다라》가 떠오른다. 《만다라》는 1978년 《한국문학》이 공모한 100만원 고료 신인상 당선작이다. 작가 자신의 종교적 갈등과 고뇌가 담긴 체험소설로 알려져 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작가의 아버지가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처형당한 아픈 가족사와 연좌제로 인해 고교를 중퇴하고 10년가량 승려 생활을 했던 이력이 그의 작품 세계를 이끌었다고 한다. 만다라는 법계(法界)의 온갖 덕을 갖춘 것이란 뜻이다.
〈역마(驛馬)처럼 떠들다 경기도 S군에 있는 벽운사(壁雲寺) 객실의 문을 열자 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객승(客僧)문안입니다”라고 내키지 않는 한마디를 던지며 객실로 들어갔다.
객실엔 비쩍 마른 30대의 승려가 소주병을 기울이고 있었는데(中略) 나는 심히 기분이 나빠 “개판이군!” 하고 잔뜩 경멸을 담아 쏘아붙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세상이 개판이지.” - 비로소 내게로 눈길을 던지며 그 승려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 장면은 소설 《만다라》의 시작 부분이다. 두 작중 인물 중에 법운(法雲)은 인간사의 고뇌와 어려움을 극복하며 구도(求道)의 길로 나가나 파계승 지산(知山)은 끝내 자살하고 만다는 줄거리. 한국 불교문학의 백미로 손꼽히는 장면이다. 훗날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는데, 법운 역(役)에 안성기, 지산 역에 전무송이 캐스팅되었다. 이 대목도 잊히질 않는다.
〈여기 입구는 좁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고 넓어지는 병이 있다. 조그만 새 한 마리를 집어넣고 키웠지. 이제 그만 새를 꺼내야겠는데 그동안 커서 나오질 않는구먼…. 병을 깨트리지 않고는 도저히 꺼낼 재간이 없어. 그러나 병을 깨선 안 돼. 새를 다치게 해서두 물론 안 되구. 자, 어떻게 하면 새를 꺼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새를 꺼낼 수 있을까? 병을 깨는 방법 외에 다른 무슨 방법이 있을까. 올해도 어쩌면 ‘병 속에 갇힌 새’를 화두로 동안거를 마친 스님이 있을지도 모른다.
김동리(金東里·1913~1995년)의 단편소설 〈등신불(等身佛)〉(1960)도 떠오른다. ‘신을 내포한 인간상’ ‘신성을 곁들인 인간상’을 담은 소설이다. 주인공 ‘나’는 일본 대정대학 출신의 학도병이다. 중국까지 끌려갔다가 손가락을 자르고 혈서를 써서야 겨우 중국의 스님들로부터 보호를 받게 된다. 삶의 대가로 손가락을 자른 것이었다.
김동리의 소설에서 중요한 가치는 ‘진정성’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방법은 ‘진정성’을 드러내는 길뿐이다. ‘진정성’은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씀으로써 진심을 드러내려 하는 것도 ‘진정성’ 때문이다. 김동리는 인간의 가장 숭고한 진정성을 불교의 소신공양을 통해 드러내려 한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은 스스로의 몸을 불살라 공양하는 것을 말한다. ‘공양’의 사전적 의미는 웃어른에게 음식을 대접하거나 부처 앞에 음식물을 올리거나 음식을 먹는 일을 뜻한다.
〈허리도 제대로 펴고 앉지 못한, 머리 위에 조그만 향로를 얹은 채 우는 듯한, 웃는 듯한, 찡그린 듯한, 오뇌와 비원(悲願)이 서린 듯한,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 같은 것이 보는 사람의 가슴을 콱 움켜잡는 듯한, 일찍이 본 적도 상상한 적도 없는 그러한 어떤 가부좌상이었다.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나는 미묘한 충격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 미묘한 충격을 나는 어떠한 말로써도 설명할 길이 없다. (중략) 나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며 정강마루와 아래턱을 그냥 덜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다.
—저건 부처님도 아니다! 불상도 아니야!〉
인간의 ‘진정성’이 발휘되는 섬광 같은 순간
인천시립극단의 연극 〈등신불〉의 한 장면.
소설 〈등신불〉은 액자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1200년의 긴 세월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나’와 만적)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등신불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나’는 두꺼운 표지 위에 금 글씨로 적힌 〈만적선사(萬寂禪師) 소신(燒身) 성불기(成佛記)〉를 읽게 된다. 이른바 〈성불기〉를 통해 만적이 자신의 영혼을 성불한 것이 아니라 육신마저 바친 것을 알게 된다. 영혼과 육신 모두 성불을 이룬 것이다. ‘나’는 큰 충격을 받는다. 소설이 말하는 핵심은 결국 범상한 인간조차도 어느 순간 섬광같이 빛나는, 아무리 보잘것없는 인간일지라도 자신의 거룩한 ‘진정성’이 발휘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김정숙의 《김동리 삶과 문학》 참조)
〈만적은 법명이요, 속명은 기(耆), 성은 조씨(曺氏)다. 금릉서 났지만 아버지가 어떤 이인지는 잘 모른다. 어머니 장씨는 사구(謝仇)라는 사람에게 개가를 했는데 사구에게 한 아들이 있어 이름을 신이라 했다. 나이는 기와 같은 또래로 모두가 여남은 살씩 되었었다. 하루는 어미(장씨)가 두 아이에게 밥을 주는데 가만히 독약을 신의 밥에 감추었다. 기가 우연히 이것을 엿보게 되었는데 혼자 생각하기를 이는 어머니가 나를 위하여 사씨 집의 재산을 탐냄으로써 전실 자식인 신을 없애려고 하는 짓이라 하였다. 기가 슬픈 맘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신의 밥을 제가 먹으려 할 때 어머니가 보고 크게 놀라 질색을 하며 그것을 뺏고 말하기를 이것은 너의 밥이 아니다. 어째서 신의 밥을 먹느냐 했다. 신과 기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 뒤 신이 자기 집을 떠나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기가 말하기를 신이 이미 집을 나갔으니 내가 반드시 찾아 데리고 돌아오리라 하고 곧 몸을 감추어 중이 되고 이름을 만적이라 고쳤다. (중략) 만적이 스물네 살 되던 해 봄에, 나는 본래 도를 크게 깨칠 인재가 못 되니 내 몸을 이냥 공양하여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함과 같지 못하다 하고 몸을 태워 부처님 앞에 바치는데, 그때 마침 비가 쏟아졌으나 만적의 타는 몸을 적시지 못할 뿐 아니라, 점점 더 불빛이 환하더니 홀연히 보름달 같은 원광이 비치었다. 모인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크게 불은을 느끼고 모두가 제 몸의 병을 고치니 무리들이 말하기를 이는 만적의 법력 소치라 하고 다투어 사재를 던져 새전이 쌓였다. 새전으로써 만적의 탄 몸에 금을 입히고 절하여 부처님이라 하였다. 그 뒤 금불각에 모시니 때는 당나라 중종 십육년 성력(연호) 이년 삼월 초하루다.〉
그러나 ‘나’는 원혜대사로부터 구전(口傳)으로 내려온 또 다른 만적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만적이 23세 나던 해 겨울에 금릉 방면으로 나갔다가 전날의 사신을 만난다. 13세 때 자기 어머니의 모해를 피해 집을 나간 그였다. 만적 역시 사신을 찾아 집을 나섰다가 중이 된 채 꼭 10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었다.
사신을 보고 만적은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착하고 어질던 사신이 어쩌면 하늘의 형벌을 받았단 말인고.” 사신은 한센병에 걸렸던 것이다. 만적은 자신의 염주를 사신의 목에 걸어주고 그 길로 곧장 절로 돌아가 화식(火食)을 끊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분신(焚身)공양을 선택한다.
〈만적의 머리 위에 화관같이 씌워진 향로에서는 점점 더 많은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오랜 동안의 정진으로 말미암아 거의 화석이 되어가고 있는 만적의 육신이지만, 불기운이 그의 숨골(정수리)을 뚫었을 때는 저절로 몸이 움칫해졌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게 그의 고개와 등가슴이 조금씩 앞으로 숙여져 갔다.
들기름에 절은 만적의 육신이 연기로 화하여 나가는 시간은 길었다. 그러나 그 앞에 선 오백의 대중(승려)은 아무도 쉬지 않고 아미타불을 불렀다.〉
소설 〈등신불〉을 통해 ‘나’의 손가락과 만적의 몸을 동궤에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몸이든 손가락이든 진정성을 드러내는 데 크고 작음이 중요하지 않다. 만약 신이 있다면, 우리의 진정성을 ‘그분’만이 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목어(木魚)소리가 듣고 싶어진다.
〈태허루에서 정오를 알리는 큰 북소리가 목어와 함께 으르렁거리며 들려온다.〉
불쌍한 생명을 지킨 간난이 할아버지
어린 흰둥이 개의 모습이다. 사진=조선DB
‘진정성’은 사람만의 것일까. 황순원(黃順元·1915~2000년)의 단편소설 〈목넘이 마을의 개〉(1948)를 읽으며 때로 사람보다 개가, 죽음보다 생명이 더 위대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잘것없는 한 마리 개(신둥이)를 두고 ‘큰동장’ ‘작은동장’이 아무리 설쳐도 간난이 할아버지 같은 인물만 있으면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만주 이주의 길목인 목넘이 마을에 어느 날 황토에 물들어 누렇다 되다시피 한 신둥이(흰둥이) 한 마리가 흘러 들어온다. 다리까지 저는 개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미친개라고 잡으려 든다. 딱 한 사람, 간난이 할아버지만 신둥이를 보살핀다. 동장 형제들은 동네 개들이 신둥이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로 모두 잡아먹어 버린다.
어느 날 간난이 할아버지는 산에서 ‘신둥이’ 새끼들을 발견하게 되고 이 새끼를 다른 동네에서 얻어 온 것이라며 동네 사람들과 옆 마을에 나누어 준다.
〈간난이 할아버지는 서산 너머의 옛날부터 험한 곳이라고 해서 좀처럼 나무꾼들이 드나들지 않는, 따라서 거기만 가면 쉽게 나무 한짐을 해 올 수 있는 여웃골로 나무를 하러 갔다. 손쉽게 나무 한짐을 해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무심코 길 한옆에 눈을 준 간난이 할아버지는 거기 웬 짐승의 새끼가 뭉켜 있는 걸 보았다. 이게 범의 새끼나 아닌가 하고 놀라 자세히 보니, 그것은 다른 것 아닌 잠든 강아지들이었다. 그리고 저만큼에 바로 신둥이 개가 이쪽을 지키고 서 있는 것이었다. 앙상하니 뼈만 남아가지고.
간난이 할아버지가 강아지께로 가까이 갔다. 다섯 마린가 되는 강아지는 벌써 한 스무날은 넉넉히 됐을 성싶었다. 그러자 간난이 할아버지는 다시 한 번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잠이 들어 있는 다섯 마리 강아지 속에는 틀림없는 누렁이가, 검둥이가, 바둑이가 섞여 있는 게 아닌가. (중략)
간난이 할아버지는 여웃골에서 강아지를 본 뒤부터는 한층 조심해서 누가 눈치채지 못하게 나무하러 가서는 이 강아지들을 보는 게 한 재미였다. 사람이 먹기에도 부족한 보리범벅이었으나, 그 부스러기를 집안사람 몰래 가져다주기도 했다. 아주 강아지가 밥을 먹게쯤 됐을 때 간난이 할아버지는 집안사람들보고 아무 곳 아무개한테서 얻어 오는 것이라 하며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내려왔다. 한동네 곱단이네도 어디서 얻어준다고 하고 한 마리 안아다 주었다. 그리고 여웃골에서 그냥 갈 수 있는 절골 사는 아무개네도 한 마리, 서제곡 사는 아무개네도 한 마리, 이렇게 한 마리씩 다섯 마리를 다 안아다 주었다.〉
결국, 세월이 흘러 목넘이 마을에서 기르는 개란 개는 거의 다 신둥이의 증손 아니면 고손이 되었다. 신둥이의 생명력에 놀라지만, 신둥이를 끝까지 지킨 간난이 할아버지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큰동장’ ‘작은동장’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미친개를 잡으려 할 때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간난이 할아버지가 있어 불쌍한 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남이 뭐라고 해도 생명을 지키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의지가 세상을 변화시킨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인상적이다.
〈크고 작은 동장네 두 집에서까지도 요새 자기네 개가 낳은 신둥이개의 고손자를 얻어 갔다는 말도 했다. 이런 말을 하는 간난이 할아버지는 이제는 아주 흰서릿발이 된 텁석부리 속에서 미소를 띠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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