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멀고 험한 길이나 악업(惡業) 바람 두렵지 않네/김태완 (문장에 물들다 〈8〉)
인도를 찾아간 신라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문
한민족 모험 유전자를 떠올리게 한 신라 최치원의 명문 〈토황소격문〉… 한국 한문학사(漢文學史)의 첫머리
고구려 기상을 세상에 알린 을지문덕의 시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
KBS 교양 프로 〈역사스페셜〉에 방영된 ‘해동의 첫 번째 세계인 혜초’의 한 장면을 캡처했다.
서기 723년 신라의 스님 혜초(慧超·704~787년)가 길을 떠났다. 해로와 육로를 거쳐 큰 바다와 사막, 설산(雪山)의 산맥을 따라 인도와 주변 여러 나라를 순례하고 727년 돌아왔다. ‘천축국(天竺國)’은 인도를 말한다. 당시 인도는 다섯 지방, 즉 동천축, 서천축, 남천축, 북천축, 중천축으로 나뉘어 있어서 ‘오천축국’이라고 불렀다.
혜초가 인도를 찾아간 길을 지도에 표시하면 이렇다. 해상과 육상을 거쳐 사막과 설산을 넘는 4년간의 대장정이었다. 사진=조선DB
왕(往)은 그곳에 갔다는 의미여서 《왕오천축국전(傳)》은 인도 지방 여행기라는 뜻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문이자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여행기다.
길 떠난 자의 노래
신라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폴 펠리오가 1908년 3월 처음 세상에 공개했다.
1908년 3월 프랑스의 탐험가였던 폴 펠리오(Paul Pelliot·1878~1945년)가 중국의 둔황(敦煌)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해 세상에 알렸다. 앞뒤가 잘린 채 발견되었는데, 원래 3권이었다는 설, 4권이었다는 설이 있다. 현존본은 그 약본(略本)이다. 번역본은 독일에서 가장 먼저 나왔고 이후 1943년 최남선(崔南善·1890~1957년)이 원문과 해제를 발표하면서 국내 널리 알려졌다.
보리사가 멀다고 근심할 것 없었는데
녹야원이 먼들 어찌하리오.
다만 멀고 험한 길이 근심이 되나
불어 닥치는 악업(惡業)의 바람은 두렵지 않네.
여덟 개의 탑을 보기 어려움은
여러 차례의 큰 불에 타버렸음이라.
어찌해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줄거나
오늘 아침부터 이 눈으로 똑똑히 보리.
(不慮菩提遠 焉將鹿苑遙 只愁懸路險 非意業風飄 八塔難誠見 參著經劫燒 何其人願滿 目覩在今朝)
이 시는 혜초 스님이 마하보리사(寺)를 예방하는 기쁨을 읊은 시다. 그렇게 먼 길을 떠나온 구도자 혜초의 시(노래)는 절제되어 있다. 들뜬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오늘 아침부터 이 눈으로 똑똑히 보겠다’고 흥분하지 않겠노라 다짐한다.
오히려 이런 다짐 속에 길 떠난 이의 설렘을 역으로 느낄 수 있다. ‘불어 닥치는 악업의 바람은 두렵지 않네’라는 표현이 몹시 여운을 준다. 참고로, 시 속 녹야원(鹿野苑)은 부처가 처음 설법한 곳이라고 한다.
《왕오천축국전》에는 혜초가 ‘구시나(拘尸那)’에 들렀을 때의 일화가 나온다. 구시나는 부처가 열반한 곳이다. 당시 구시나는 들짐승이 우글거리는 무서운 밀림지대였던 것 같다. ‘이곳은 황폐(荒廃)하여 사람도 살지 않으며 임목(林木)이 울창하여 순례 온 이들은 들소와 큰 뱀의 해침을 곧잘 받는다’고 썼다. 100여 년 전인 1920년대에 인도의 소녀 둘을 물어간 늑대가 10년간 이 아이들을 기르다 사람들에게 발견된 곳이 바로 구시나 인근 밀림이었다고 한다. 혜초 스님은 이런 시도 남겼다.
길은 거칠고 설산 높은데
험한 골짜기마다 도둑도 많기로 해라.
나는 새도 험한 산세에 놀라
고통나무 다리 건너기에
사람이 겁을 먹는다.
내 평생 눈물을 몰랐는데
오늘따라 천 줄기 눈물이
내 볼을 적신다.
(君恨西蕃遠 余嗟東路長 道荒宏雪嶺 險澗賊途倡 鳥飛驚峭嶷 人去難偏樑 平生不捫淚 今日灑千行)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것을 ‘운수행각(雲水行脚)’이라 한다. 흔히 쓰는 불교 용어일 수 있으나 구름처럼 떠다니다 물처럼 흐르는 혜초의 긴 여정이 떠오른다.
그런데 혜초는 도둑을 많이 만난 모양이다. 《왕오천축국전》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길에는 도적이 많기는 하나 물건만 빼앗고는 즉시 풀어 보내고, 그 자리에서 죽이거나 해를 끼치지는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도 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마음이 착하여 살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에서나 가게에서 짐승을 잡아 죽이거나 고기를 파는 곳은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을 보면 구법(求法)을 향한 혜초의 신앙적 목마름, ‘천 줄기 눈물’이라는 문장에서 보듯 고단한 걸음이 드러나지만, 혜초를 통해 우리 민족 내부의 정신적 모험 유전자를 떠올리게 한다. 혜초는 만주 일대 동북아를 호령하는 한민족(韓民族)의 자손이다.
‘태산 밑에 참새 알이 깔린 것과 같아’
신라인 최치원과 그의 문집 《계원필경(桂苑筆耕)》
신라 최치원(崔致遠·857~?)이 남긴 〈토황소격문〉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모험 유전자를 드러내는 기록이다. 토(討)는 꾸짖고 야단친다는 뜻이다. 격문(檄文)은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의분을 고취하려고 쓴 글을 말한다.
서기 881년(신라 헌강왕 7년) 당나라에서 황소(黃巢)가 모반을 일으키자 당 희종이 고변(高騈·?~755년)을 토벌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최치원이 고변의 휘하에서 종군하며 황소에게 격문을 썼는데 이 글이 〈토황소격문〉이다. 이 글은 신라인으로서 당나라 사람들까지 놀라게 한 명문(名文)으로 중국문학사에 있어 한국인의 명성을 크게 떨치게 했다.
〈《도덕경》에 이르기를, 갑자기 부는 회오리바람은 한나절을 지탱하지 못하고, 쏟아지는 폭우는 하루를 계속하지 못한다 하였다. 천지에 있어서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화는 이와 같이 오래가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의 일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
온 세상을 널리 살펴보고 만 리 길을 거침없이 횡행함에 너와 같은 좀도둑은 마치 활활 타는 용광로 속에 기러기 털을 넣는 것과 같고, 높이 솟은 태산 밑에 참새 알이 깔린 것과 같아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
그러나 만일 네가 헛된 욕망에 이끌려 함부로 날뛰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지네가 수레바퀴에 저항하는 형상이고, 세상의 변화를 모른 채 옛것만 고집하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마침내 곰을 잡고 표범을 쫓는 우리 군대가 몰아친다면 큰소리만 치던 너의 오합지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칠 것이요, 너의 몸은 도끼에 묻은 기름이 될 것이며, 너의 뼈는 전차에 치어 부서진 가루가 될 것이다. (하략)〉
최치원의 이 격문은 적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명문으로 뜻이 장엄하고 위압의 힘이 있다. 적장의 죄를 꾸짖고 힐책하는 기세 높은 문장을 읽던 황소가 겁을 먹어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최치원 전(傳)’에 의하면 그의 자(字)는 고운(孤雲), 해운(海雲)이다. 서기 857년 경주에서 태어나 12세에 당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가 이 나이에 견당(遣唐) 유학생이 된 것은 ‘어려서부터 정민호학(精敏好學)하였다’고 하는 그의 자질을 말해준다. 《삼국사기》에 ‘최치원의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고 적은 것으로 보아 육두품 출신으로 보인다.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 장군의 활동 무대였던 파미르 산중의 와칸 계곡. 사진=조선DB
최치원은 도당(渡唐) 6년 만인 18세 때에 급제하여 지금 장쑤성 강녕의 현위(縣尉)가 되었다. 이후 시어사(侍御史)에 올랐다. 어느 정도 높은 벼슬인지는 모르나 3품 이상에 해당한다고 한다. 〈토황소격문〉은 서기 881년, 그러니까 최치원이 25세에 남긴 글이다.
황소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서기 875년. 대규모 전란(戰亂)이 중국을 휩쓸 때였다. 그 무렵 반란을 평정하는 장수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고 전한다.
고변이 누구인가. 고변은 바로 그 유명한 고선지(高仙芝) 장군이다. 고구려계로 그의 3대가 모두 당나라 절도사를 역임했다. 당의 시성(詩聖) 두보(杜甫·712~779년)조차도 그의 용맹을 기리는 시 ‘고도호총마행(高都護驄馬行)’을 남겼을 정도다.
고선지는 훗날 당나라 수만 대군을 거느리고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을 3차례나 넘나들며 서역 원정을 감행한, 몸속에 모험 유전자로 가득했던 한국인이었다. 20세기 초 그의 원정길을 답사한 어느 영국 탐험가는 이 장거리 행로를 두고 “나폴레옹의 알프스 돌파보다 더 성공적”이라고 했다. 희대의 맹장이자, 중세 국제관계사나 동서 문화 교류사에 남긴 고선지의 업적은 너무나 엄청나다는 것이다. 그가 이끈 아프가니스탄 탈레스전(戰)이 계기가 되어 제지술이 중앙아시아와 아랍제국에 퍼졌고 그것이 다시 12세기 중엽 유럽에 전해지게 되었다고 한다.(《조선일보》 1991년 4월 11일 자 11면 참조)
‘만족할 줄 알고 그만 그치는 것이 어떠하리’
을지문덕이 수나라 군대를 무찌른 살수대첩을 재현한 그림이다. 사진=전쟁기념관
최치원이 어느 해부터 황소 토벌군에 참가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양자강 방면에서 고변의 휘하에 있던 기간에 지은 1만여 편의 시문 가운데서 뽑은 것이 바로 《계원필경(桂苑筆耕)》(전 20권)이다. 필경이란 진중(陣中)에서 문필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겸손의 뜻이라고 한다. 이 문집은 현재도 남아 있고 한국 한문학사(漢文學史)의 권두를 장식한다.
최치원의 시를 떠올리니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가 생각난다.
을지문덕은 고구려 영양왕대(재위 590~618년) 활약한 장수다. 《삼국사기》에는 ‘침착하면서도 날쌔고 지략과 술수가 뛰어났고, 글을 잘 지었다’는 평가만 전한다. 안타깝게도 생애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 을지문덕 성씨도 사라져서 그가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중국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1019~1086년)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그의 이름이 울지문덕(尉支文德)이라 기록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울지(尉支)를 선비족(鮮卑族) 계통의 성씨로 보는 견해, ‘을지’가 아니라 고구려 명재상 을파소(乙巴素)와 같은 ‘을’씨로 보는 견해, 성이 아니라 고구려 관등 중 하나인 ‘우태(于台)’와 같이 연장자나 가부장을 뜻하는 존칭으로 보는 견해 등 다양하다.
을지문덕은 고구려와 수(隋)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활약했다. 612년(영양왕 23년) 수의 2차 침공 때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여 수나라 30만 별동대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을 뿐 아니라, 후퇴하는 적군을 살수(薩水·지금의 청천강)에서 전멸시켜 고구려의 대승을 이끌었다. 이 대첩(大捷)으로 고구려는 수의 야욕을 분쇄할 수 있었다.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건넨 그 유명한 시는 이렇다.
그대의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신묘한 계산은 지리를 다했네.
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할 줄 알고 그만 그치는 것이 어떠하리.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조선일보》 1936년 5월 24일 자 2면 〈호족(護族)의 성장유체(聖將遺體) 보위(保衛)의 적성흡연(赤誠翕然)!〉 기사다.
일설에 따르면 우중문이 이 시를 받자 때마침 피로하고 굶주린 군사들은 싸울 기력을 잃었다고 한다. 《조선일보》 1936년 5월 24일 자 2면에 〈호족(護族)의 성장유체(聖將遺體) 보위(保衛)의 적성흡연(赤誠翕然)!〉이란 기사가 실렸다. ‘민족을 보호[護族]하는 성스러운 장군[聖將]의 시신[遺體]을 지키려는 정성[赤誠]이 대단[翕然]하다’는 내용이다.
기사는 조만식(曺晩植·1882~?) 선생을 중심으로 을지문덕 장군의 묘를 새롭게 단장하자는 평양 시민들의 열기를 담고 있다. ‘을지장군묘산수보회(乙支將軍墓山修保會)’라는 모임도 결성했다고 전한다. 다음은 《조선일보》 기사 중 일부다.
〈오랫동안 잡총(雜塚) 속에 깔아 두어 이 민족에게 가위 버림을 받아온 을지문덕 장군의 묘를 바로잡아 수축(修築)하자는 소리가 평양 인사들의 입으로부터 터지자 울연히 모여드는 찬동은 약속한 듯이 이 문제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조선 민족이 가진 대표적 명장으로 그 공과 업이 비할 데 없이 큰 어른의 무덤을 지금까지 박대해 오다가 과거의 허물을 이 자리에서 깨끗하게 씻어버리자는 뜨거운 정성으로 모인 ‘을지장군묘산수보회’는 22일 오후 8시부터 평양기독교청년회관 안에서 발기인회를 열게 되었는바 조만식씨의 개회사가 있은 후 김성업씨의 경과보고가 있고 축문들을 낭독한 다음 (…)
▲실행위원장(實行委員長) 조만식 ▲회계 오윤선(吳胤善) ▲서무 김중성(金衆成) ▲위원 김병연(金炳淵) 최윤옥(崔允鈺) 이훈구(李勳求) 김동원(金東元) 한근조(韓根祖) 노진설(盧鎭卨) 김성업(金性業)
을지장군이 누구냐. 우리로서 누가 모르며, 을지장군이 어떠한 공적(功績)을 끼치었느냐. 우리로서 누가 모르며, 을지장군이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1300여 년 전 그때 우리의 판도(版圖)가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우리로서 누가 모르랴. (하략)〉
을지문덕 묘를 찾아서
《동아일보》 1935년 10월 1일 자 1면에 게재된 〈수(隋)군 100만을 격퇴한 을지문덕 묘를 찾아서〉 기사다. 사흘 동안 연재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기사가 나오기 반년 전인 1935년 10월 1일 《동아일보》는 사흘에 걸쳐 1면에 을지문덕 묘를 답사한 기사 〈수(隋)군 100만을 격퇴한 을지문덕 묘를 찾아서〉를 실었다. 묘는 옛 주소로 ‘평남 대동군 대보면 태평외리’(당시 강서군 잉자면 2리 현암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직계 후손 이름이 을지씨가 아니라 돈(頓)씨였다는 이야기를 신문은 전한다.
《동아일보》에 답사기를 쓴 김준연(金俊淵·1895~1971년·당시 《동아일보》 주필. 1년 뒤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물러났다)에 따르면 그해 9월 27일 일행 안창호, 김동원, 송진우, 김성업 등과 함께 평양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정도 달려 대보산(大寶山) 아래에 도착해 취명학교(就明學校) 교장인 최병선(崔秉善)씨를 만났다. 최 교장이 이 지역 주변 사정에 밝아서 을지문덕 후손을 소개했다.
후손 이름은 돈종각(頓宗珏). 나이는 52세. 대서(代書)를 업으로 하는 그를 따라 을지문덕 묘를 찾아가는데 태평외리 뒤에 있는 밭을 지나니 송림(松林)이 나왔다고 한다. 산은 높지 않았지만 길이 없어 나뭇가지를 붙잡아 가며 약 30분을 올라갔다.
돈종각씨는 한 개의 장군석을 가리키면서 “이것이 여기 넘어져 있었는데 내가 일으켜 세웠다”고 했다. 거기서 수십 보를 더 올라가니 거기에 상석(床石)이 놓인 어느 무덤이 나왔다. 돈씨는 그 뒷머리로 돌아가며 발로 쿵쿵 구르더니 “여기가 을지공의 묘올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음은 《동아일보》 내용이다.
〈우리는 놀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조선을 한족(漢族)의 침입으로부터 구제해서 4000년 역사의 기초를 세워둔 거인(巨人)의 유해를 이와 같이 소홀히 대우하는 것이 어찌 사람의 도리일까 생각하였다. 조선 사람들은 어떤 마술에 걸려서 자기 것은 전연 망각하였었던 것이었다. 민족을 멸망에서 구하여준 은인을 이와 같이 대우하고 어찌 잘되어 갈 리가 있을까?〉
돈씨에 따르면 을씨가 을지씨, 돈씨로 변한 과정이 돈씨가승(頓氏家乘) 기록에 자세히 나오는데 더불어 ‘평양의 서쪽 대보산의 남쪽인 현암산(玄岩山)에 공(公)의 무덤이 있다’는 기록도 있다는 것이었다. 계속된 신문 기사의 내용이다.
〈을파소의 6세손이 을지문덕인데 을지장군은 고구려 영양왕을 도와서 수양제의 백만 대병을 섬멸하야 한족 동침(東侵)의 의기를 좌절하고 국민의 의기를 크게 진작하야 후일에 천합소문(泉合蘇文)이 당 태종을 격파하는 원인을 작(作)한 것이었다.
을지문덕의 15세손에 을지수(乙支遂), 을지달(乙支達), 을지원(乙支遠)의 3형제가 있었는데 고려 인종 시(時)이었다. 그때에 묘청(妙清)의 난이 있었는데 수·달·원 3인이 의병을 모득(募得)하여가지고 정서장군(征西將軍) 김부식(金富軾)을 도와서 그 난을 평정하였으므로 3인을 돈산(頓山)에 봉하고 인(因)하여 돈(頓)으로 성(姓)을 삼게 하였으니 이때부터 을지성이 돈성으로 변한 것이었다.〉
乙씨가 乙支씨로, 다시 頓씨로… 첫 기사는 잡지 《별건곤》
신문 내용을 요약하면 고구려 명재상 을파소의 6세손이 을지문덕이고, 그의 성씨는 을지씨가 아니라 을씨다. 을지문덕이 큰 공을 세운 후 을지 성씨를 갖게 됐는데 고려 인종 때 을지문덕의 15세손이 묘청의 난에서 공을 세운 뒤부터 돈씨 성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을지문덕의 고향이 평양이고 그 묘소 역시 그 부근에 있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능히 생각할 수 있으며, 다만 문헌의 미비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 지방 사람의 구비(口碑)로 전해 내려오는 것을 깨뜨릴 증거가 없으리라고 생각된다’고 신문은 적고 있다.
그런데 한 해 전인 《동아일보》 1934년 5월 26일 자 3면에 을지문덕 후손인 돈씨 종장(宗長)의 집을 찾아갔다는 기사가 나온다. 을지문덕 묘를 찾아가니 왼쪽엔 백양산, 오른쪽엔 달마봉, 앞으로는 아득한 평야가 있는데 숲속에서 두견이 한낮에 울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을지문덕 묘에 가보니 누군가가 몰래 전주이씨(全州李氏)의 무덤과 비상(碑床)을 놓았다고 전했다. ‘묘지의 훌륭함을 탐하여 강제로 여기다 새 무덤을 묻었다’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돈씨 촌로(村老)들이 분개하는 내용을 담았다.
〈여기 이 새 무덤을 묻은 사람들아! 이 딱하고 가증한 사람들아! (…) 조선 민족을 도탄에서 구원한 대영웅, 대은인의 거룩한 무덤 위에 이런 짓을 감행하였다. 이 미련한 사람들아!〉
《조선일보》 1969년 12월 18일 자 4면 기사 〈인물로 본 한국사 인맥(人脈)〉에도 을지씨가 돈씨로 개성(改姓)한 유래가 나온다. 인용하면 이렇다.
〈을지문덕부터 을지로 개성(改姓)되어 그의 16세손이 고려 인종 때 묘청 난에 의병장으로 서경(西京) 탈환을 한 을지수 을지달 을지원이며 그 공(功)으로 돈산(頓山) 땅을 주고 돈산백(頓山伯)으로 사작(賜爵), 그 후부터 을지씨를 돈씨로 개성하였다고 돈씨가보(頓氏家譜)에 적혀 있다. 을지의 17대손이 돈정신[頓貞臣·당시 임란조방장(壬乱助防將)]이며 그 후손이 해방 전까지 평남 선대평역(線大平駅) 근처 둔메[돈산(頓山)]에 40여 호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신문보다 앞서 잡지 《별건곤》 34호(1930년 11월 1일 발행) 〈을지문덕묘 참배기(參拜記)〉에도 돈종각씨를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신문보다 5년이나 앞서서 잡지가 먼저 을지문덕 묘를 세상에 알린 것이다. 다음은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 소개된 《별건곤》 기사 중 일부다.
〈“을지공(公)의 후손이 어찌하여 돈씨로 되었습니까.”
“네, 그는 우리 목천돈씨(木川頓氏)의 족보에 그렇게 된 내력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때부터 을지씨가 돈씨로 되었나요.”
“고려 인종 때인가 봅니다. 공의 10대손 ‘을지수’와 그 아우 ‘달’이 묘청의 난에 전공이 있음으로 돈씨백(頓氏伯)을 봉(封)하고 사성돈(賜姓頓)하였는데 그때부터 돈가가 되었습니다.”
“돈씨라는 성은 다른 데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데 아마 이 동리에는 여러 댁이 사시겠지요?”
“이 동리에는 불과 다섯 집밖에 없습니다. 모두 농사나 하고 지내고 형세가 매우 미천합니다.”(…)
을지문덕의 묘가 있는 현암산은 강서(江西), 대동(大同) 두 고을을 접경한 강서군 잉자면 2리에 속한 땅이다. 과히 높지 아니한 나지막한 산인데 동은 백양산(白楊山)이 마주 보이고, 북은 태평동(太平洞)을 사이하여 대보산(大寶山)이 건너다 보이고, 서는 천진산(天津山)이 가려 있고, 남은 2리라는 동리가 있다. 인적부도(人跡不到)인 것처럼 길이 없음으로 콩밭 골로, 송림 사이로 헤매어 위에까지 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을지공의 묘는 간 곳이 없고 바로 그 자리라는 곳에 웬 딴사람의 묘만 우뚝 솟아 있다. 어허 참, 숨이 막히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 상석에 각자(刻字)한 것을 보니 ‘전주이씨지묘(全州李氏之墓)’라 대자(大字)가 쓰여 있고, 그 아래에 ‘휘정우생우임인졸우신미칠월(諱廷愚生于壬寅卒于辛未七月)’이라 하였으며 그 끝에는 자손들의 이름을 벌여 적었다. 나는 돈군을 돌아보며
“이건 어찌 이렇게 되었소?”
하고 물으니 그는 한숨을 쉬며 “우리 선산(先山)을 우리가 잘 수호하지 못하여 이 꼴을 만들어 놓았으니 조상께 죄 되는 것은 말할 수 없거니와 세상사람 앞에서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습니다.” (하략)〉
《별건곤》 34호(1930년 11월 1일 발행)와 《동아일보》 1934년 5월 26일 자, 《조선일보》 1969년 12월 18일 자 기사에 실린 돈씨 성의 기원은 각기 을지문덕의 10세손, 15세손, 16세손으로 나오는데, 아마도 현재와 가까운 시기 쓰인 《조선일보》 기사가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을지문덕함으로 부활하다
지난 1월 4일 오후 태안 서방 해역에서 열린 해상기동훈련에 참여한 해군 2함대 을지문덕함(DDH-I)에 와일드캣(AW159) 해상작전 헬리콥터가 착륙하고 있다. 사진=조선DB
분단이 되면서 을지문덕 묘는 더는 확인할 길이 없게 되었지만 그 이름은 우리 해군의 구축함으로 다시 부활했다.
함번 DDH-972인 을지문덕함은 지난 1997년 10월 16일 진수식을 가지며 세상에 나왔다. 3200t급 구축함으로 승조원 286명이 한꺼번에 승선할 수 있다. 길이 135m, 폭 14m 규모로 항속거리는 4500해리인데 우리 기술로 만든 국산 구축함 2호란다.
2021년 12월 경남 진해 해군기지에서 한국형 구축함(KDX-I) 을지문덕함이 성능개량이 완료돼 실전에 배치되었다고 전한다. 유도탄, 함포, 어뢰 등의 무장을 탑재한 을지문덕함은 해역 함대 지휘함으로 핵심 역할을 수행하며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있다.
'문장에 물들다 (월간조선 연재물) 김태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술이 참혹한 비극을 노해하는 까닭은 (9) | 2024.07.24 |
---|---|
헤엄쳐야지 별 수 있나요 세상은 바닥 없는 물이기도 하고 (16) | 2024.07.24 |
왜 그랬는지 그건 나도 모르겠어 (22) | 2024.07.24 |
너희가 어찌 높이, 멀리 나는 도요새를 알겠느냐 (8) | 2024.07.23 |
문자 문해력 그리고 문명 (3) | 2024.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