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외국영화

경계선

by 자한형 2024. 8. 24.
728x90

나를 성장시켜 줄 영화 <경계선> (2018)/김중혁 작가

 

1943년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난 인종 폭동은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폭동 사건일 것이다. 자동차 생산이 호황이던 1940년대, 30만 명이 넘는 백인 노동자와 5만 명이 넘는 흑인 노동자가 디트로이트로 밀려들었다. 백인 거주자들은 흑인들이 지역과 사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고, 강력한 분리를 원했다. 한 자동차 회사에서는 백인들과 같은 생산 라인에서 일할 수 있게 흑인 노동자 3명을 승진시켰다가 2만 명이 넘는 백인 노동자로부터 격렬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곪아가던 상처가 터진 것은 19436. 백인과 흑인들이 맞붙으면서 34명이 죽고, 43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000명이 체포되었고, 200만 달러 상당의 재산이 파괴되었다.

 

<휴먼카인드>에서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디트로이트 폭동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웃이 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웨인대학의 흑인과 백인 학생들은 피의 월요일 내내 평화롭게 수업을 같이 들었다. 그리고 군수공장에서의 백인 노동자와 흑인 노동자 사이에는 아무런 혼란도 없었다.” “이웃은 서로 도왔으며, 폭도들이 몰려오자 일부 백인 가족은 흑인 이웃을 보호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디트로이트 폭동을 조사하던 사회학자들이 밝혀낸 사실이었다. 흑인과 백인의 격렬한 무력 충돌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감춰진 진실을 알려준 것이다.

 

휴먼카인드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출처 | 네이버 책)

많이 접촉할수록 더 많은 분쟁과 다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상상 속의 적, 만나본 적 없는 위협적인 존재가 가장 위험하다. 직접 대화를 나누고 가까워지고 나면, 그 사람의 삶을 알고 나면, 나와 똑같은 사람이란 걸 알고 나면, 미워할 수 없게 된다는 얘기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이 사건을 설명한 후에 감동적인 문장을 덧붙인다.

 

만일 우리가 부정적인 경험을 더 잘 기억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접촉이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대답은 간단했다.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불쾌한 사건들 속에도 즐거운 소통

의 경험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악이 더 강해 보이더라도 선의 숫자가 더 많다.”

 

이웃끼리 때로는 오해하고 작은 다툼도 생기겠지만, 함께 살다 보면 결국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는, 나쁜 경험이 강렬해 보이더라도 결국 서로의 착한 마음이 쌓여 관계가 두터워진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문장을 읽으면서 떠오른 영화가 바로 알리 아바시 감독의 <경계선>이다.

 

영화 <경계선> 포스터

<경계선>은 남들과는 조금 다른 외모 때문에 세상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지만, 후각으로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티나가 주인공이다. 어느 날 티나 앞에 수상한 짐을 가득 든 남자 보레가 나타난다. 보레의 외모는 어쩐지 티나와 닮았고,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 속에서 하나둘 비밀이 밝혀진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경계선에 대한 탐구라 할 만하다. 출입국 세관 직원이라는 티나의 직업부터 의미심장하다. 불법적인 물건을 들고 경계선을 넘으려는 자들을 색출하는 것이 티나의 임무다. 티나는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셈이다. 티나의 존재 역시 경계선과 상관이 있다. 티나는 자신이 인간의 몸에서 태어났고, 염색체 결함이 있는 못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레와 만나면서 자신이 인간이 아닌 트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티나에게 찾아온 보레 역시 트롤임이 밝혀진다. 트롤은 인간과 야생동물 사이의 존재다.

 

영화 <경계선> 스틸

영화에 등장하는 두 명의 트롤, 티나와 보레는 상반된 존재다. 티나는 인간의 손에 의해 자란 문명화된 트롤이고, 보레는 인간의 폭력을 경험한 적 있는, 인간을 증오하는 트롤이다. 문명화된 티나는 트롤과 인간 사이의 존재이기도 하다. 보레는 자신에게 고통을 준 인간에게 복수하고 싶어하지만, 이미 인간과 살면서 정이 들어 있던 티나는 그럴 마음이 없다. 티나의 이웃인 에스테라와 스테판은 편견 없이 티나에게 사랑을 준 존재들이고, 티나는 그들을 해치고 싶지 않다. 티나는 트롤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문명화된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는 스스로를 균형 잡힌 인간, 중립적인 인간이라 생각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가 얼마나 편견 가득한 존재인지 알게 된다. 영화에서는 티나의 얼굴을 향해 못생겨가지고.”라는 폭력적인 말을 하는 사람도 등장한다. 우리의 속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의 외모에 대한 정보밖에 없는데도 마음껏 그 사람을 비판하고 단정 짓는다. <경계선>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선을 긋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국경을 나누고, 자연과 도시를 나누고,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고,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나눈다.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을 나누고,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사람을 나눈다. 티나는 수많은 편견과 무시를 참으면서 고통스럽게 살아왔지만,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이웃 에스테라와 스테판을 떠올리며 인간에 대한 보레의 복수를 멈추게 한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자주 절망한다. 이기적이고, 지구를 망가뜨리고, 툭하면 전쟁을 일으키고, 말도 안 되는 기준으로 차별을 일삼고,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도무지 사랑할 구석이 없다. 그렇지만 멀리 보지 말고 가까운 곳을 보자. 나를 지지해주는 부모, 사랑스러운 배우자, 함께 일하는 믿음직스러운 동료,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를 보자. 먼 곳의 적을 사랑할 수는 없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충분히 사랑할 수 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집중하면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가까운 사람을 지키기 위해 선을 긋고 경계선을 만들고 외부의 침입자를 경멸하게 된다는 점이다.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편견도 생기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2003, 한 심리학자팀이 3세에서 5세까지의 아이들에게 실험을 했다. 모든 아이들에게 빨간색 또는 파란색의 셔츠를 각기 다르게 입혔다. 어른들은 색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모든 아이들을 똑같이 대했다. 3주 만에 몇 가지 결론이 나왔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입은 티셔츠의 색깔이 더 똑똑하고 더 좋다고 이야기했다. 자신과 다른 색깔의 옷을 입은 아이들에게 더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다. 폭동이 일어나던 디트로이트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영화 <경계선> 스틸

타고난 차별주의자들인 우리에게 방법은 없는 것일까? <휴먼카인드>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뤼트허르 브레흐만은 열 가지 규칙을 제시한다. 자세한 내용은 책에서 읽으시고 (정말 좋은 책이니 꼭 읽어보시길) 나 역시 꼭 지키고 싶은 세 가지 규칙만 이야기하겠다.

 

첫째, 윈윈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생각하라. 누굴 이길 생각보다 함께 이길 생각을 하자는 것이다. 둘째,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비록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고 할지라도. 이 규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경계선> 같은 영화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뉴스를 멀리하라. 뉴스는 지속적으로 나쁜 소식을 전하고, 나쁜 소식을 과장하고, 나쁜 소식을 반복한다. 세상에는 나쁜 소식 바깥의 좋은 소식이 훨씬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착해질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내가 상대를 사랑하면 그 사랑이 돌아올 것을 믿어야 한다. <경계선>의 티나가 그랬던 것처럼.

 

'외국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인의 향기  (2) 2024.12.22
멕시칸(영화)  (2) 2024.09.07
카게무샤  (0) 2024.04.05
철의 여인  (1) 2024.02.15
Life is not a right answer, but a process of finding the answer  (4) 2023.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