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개척자들(18)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 /이한구
국민교육진흥 앞장선 애국 경영인이자 참스승
전후 조국 재건 중시한 신용호, 교육보험 상품 개발해 성공 발판으로
난관 봉착해도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한다”는 신념으로 타개
교보생명은 창립 이래 30여 년 동안 교육보험의 혜택을 받은 300만여 명의 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사진은 지난 1958년 8월 7일 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를 창립하는 신용호 창립자. / 사진:교보생명
교보그룹 창업자 신용호(愼鏞虎, 1917~2003)는 1917년 8월 11일에 전남 광주 금동에서 한학자이자 애국지사인 신성언(愼聖彦, 1884~1962)과 문화류씨 슬하의 6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신용호는 전남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솔안마을로 이주했다. 이곳은 사대부 가문의 거창신씨 일가들이 대대로 거주해 온 곳이었다. 신용호 가족은 솔안마을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목포로 이주했다. 맏형 신용국이 항일농민운동 주동자로 지목돼 투옥된 데다 셋째 형 또한 항일 학생운동에 가담해서 투옥된 전력이 있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신용호가(家)에 대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소년 신용호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었고 일제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했다. 그는 나라를 잃은 국민의 슬픔을 체험을 통해 직접 느꼈다. 어려운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소년 신용호의 향학심은 불타고 있었다. 유교적인 보수적 가풍에서 자라난 그는 학문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신학문을 배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黃明水]
어려운 가정형편뿐 아니라 신용호가 7세 무렵에 폐결핵에 걸려 10세 때까지 투병생활을 한 탓이다. 가장 역할을 한 어머니의 집안 살림을 돕다가 17세에 독학을 결심, ‘1000일 독서’ 계획을 세워 3년 동안 도서관이나 친구 등에게서 빌린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의 롤모델은 헬렌 켈러(1880~1968)와 앤드루 카네기(1835~1919)였다. 신용호는 헬렌 켈러의 불굴의 도전 정신을 동경했으며, 무학(無學)의 카네기가 세계 제일의 철강왕이 된 점을 높이 샀다.
신용호는 20세이던 1936년 카네기 같은 큰 사업가가 되겠다며 중국 다롄으로 향했다. 다롄중학에서 학업을 이어가던 중 친척 어른이자 애국지사인 신갑범(愼甲範)의 소개로 이육사(李陸史) 등 다수의 애국지사들을 접했다. “신갑범, 이육사 등 두 지사와의 교류와 지도로 그는 목적과 목표를 더욱 확고하게 인식하는 투철한 소신의 청년으로 급속히 성장해 갔다. 그의 민족관, 사회관이 확고히 형성되어간 것이다.”[黃明水]
그의 꿈은 이육사 시인에 감화를 받아 민족기업가로 바뀌었다. “모쪼록 큰 사업가가 되어 헐벗은 동포들을 구제하는 민족자본가가 되길 바라네”라고 격려했던 것이다. 이육사, 신갑범 지사는 신용호 인생 도야의 길잡이였으며 동시에 스승이었다. 신용호는 그들에게서 투철한 민족관과 삶의 길을 배운 것이다.
신용호는 1940년 중국 베이징에서 곡물유통업체인 ‘북일공사’를 설립했다. 북일공사의 수익을 통해선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했다. 이 때문에 종종 일제의 추적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중국의 화북대학, 북경대학 등에 합격했으나 조국 광복을 계기로 만학(晩學)의 꿈을 접고 만 30세이던 1946년에 귀국했다. 고국을 떠난 지 10년 만이다. 해방된 내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다.
대동계(契)에 주목해 세계 최초 교육보험사 설립
1958년 7월 26일 창립총회 개최 당시 신용호 창립자. / 사진:교보생명
귀국 후 그는 ‘민주출판사’를 설립, 경영했다. ‘평화고무’, ‘한국제철’ 등에도 관여했다. 하지만 해방 직후의 극심한 좌우 대립과 6·25전쟁 등 척박한 경영환경 때문에 신통치 못했다. 그러나 신용호는 오뚝이처럼 다시 사업에 도전했다. 조국에 헌신할 수 있는 새로운 과업을 찾고자 전국을 순회하던 중 한국인들의 각별한 향학열에 주목했다. 일제 치하에서 억눌리고 굶주렸던 우리 민족의 배움에 대한 한(恨)은 뿌리 깊었다. 특히 조국 재건의 기초를 닦기 위해서는 국민교육 진흥이 무엇보다 귀중하고 선도적인 과업이라 믿었다. 신용호의 일생에서 국민교육 진흥과 사업보국의 기업가정신이 형성된 시기로, 1953년 휴전 무렵에 새로운 비즈니스로 교육보험사업을 구상했다.
이 무렵 국내에는 협동생명, 고려생명, 흥국생명, 조선생명(1955년에 한국생명으로 개칭), 대한생명, 제일생명(1954년 12월 설립) 등 6개 생명보험업체가 있었다. 하지만 6·25전쟁 탓에 개점휴업 상태였다. 시중은행 수도 부족한 터에 문턱까지 높아 서민들 간에는 저축수단으로 계(契)와 같은 사금융이 매우 성행했다. 그러나 계는 조직 규모가 영세할 뿐 아니라 운영 미숙 등으로 피해자가 속출하는 등 문제가 많았다.
그럼에도 신용호는 ‘계’에 주목했다. 영암 사람들은 조선조 전기부터 향민(鄕民)들의 유대와 협력을 전제한 대동계(大同契)를 무려 400여 년 동안 이어왔다. 지역민들의 공동번영을 추구한 것이다.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하는 마을의 대동계는 계원(契員)들에게 장래의 과중한 비용부담을 덜어주는 등 후생복지를 목적으로 하는 보험의 원리와 같았다. 영암지방의 향속(鄕俗)에 익숙했던 그는 주저 없이 교육보험업에 뛰어들었다.
신용호는 교육보험사업에 대한 타당성 조사에 착수했다. 1955년 전국의 각급 학교 수는 총 6090개교였으며, 학생 수는 320만 명 수준이었다. 급격한 교육수요 증가로 교육인구는 연평균 30만 명 이상 증가했지만 국민소득 수준은 매우 낮았다. 교육보험 가입희망자 수가 미미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1개 학급당 학생 1명씩만 교육보험에 가입한다고 가정해도 최소한 7만 건은 확보돼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또 향후 국민경제 발전으로 교육수요가 점증할 경우 교육보험 수요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원조경제나 특혜, 금융 등에 의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더구나 부당하고 불투명한 권력과의 결탁 등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적은 서민자금을 모아 거대자본으로 만드는, 이른바 대중 참여에 의한 집소성대(集小成大)의 원리에 입각해야만 진정한 민족자본 형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경제관과 기업관을 신봉하고 있었다.”[黃明水]
“담배 끊고 그 돈으로 교육보험 가입하라” 권유
지난 1983년 7월 11일 교보문고를 둘러보는 신용호 창립자. / 사진:교보생명
1957년 3월 서울 중구 을지로1가 52번지의 목조건물 2층(30여 평)에 창립사무소를 확보하고 동조자들을 규합해서 5월 15일에 발기인대회를 개최했다. 신용호를 비롯해 조준호(趙俊鎬), 이규갑(李奎甲), 최봉열(崔鳳烈) 등이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정부는 보험업법 제4조를 들어 상호에 생명보험을 명시하지 않을 경우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고집해서 상호에 교육보험이란 명칭을 사용할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1958년 6월 30일에 태양생명보험주식회사로 발족하고 대표취체역 사장에는 신용호가, 전무취체역에는 조준호가 취임하면서 사업을 개시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도 안 되는 최빈국이었다. 자연스레 절대다수의 서민들은 보험에 가입할 여유가 없었다. 이 무렵 20대 이상 성인 남성의 열 명 중 여덟 명 정도는 흡연자들이었다. 신용호 사장의 재기(才氣)가 번뜩였다. 무작정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찾아서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보험에 가입하면 당신의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권유한 것이다. 신상품인 교육보험은 개인 보험뿐이어서 태양생명 임직원들은 맨투맨 영업을 했다.
이 회사가 교육보험을 목적으로 설립된 만큼 상호에 교육보험을 표기하기 위해 재무부 관리들을 설득했다. 그 결과 재무부 ‘이재(理財) 제3370호’에 의거, 상호변경 허가를 얻어 1958년 7월 11일 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로 변경했다. 세계 최초의 교육보험 상품인 ‘진학보험’에 대한인가도 취득했다. 진학보험은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면 16.7%, 대학 재학 중에는 7회에 걸쳐 매 학기 11.9%씩 학자보조금으로 지급하도록 했다. 가입대상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였다.
그러나 진학보험의 보험금 지급이 대학 학자금에 한정돼 소득계층별, 고객별로 다양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결국 1958년 9월에는 ‘아동보험’, 1959년 1월에는 ‘육영보험’을 각각 인가 받아 판매하기 시작했다. ‘아동보험’은 0세부터 국민학교 3학년까지 가입해 국민학교 입학 시 5%, 국민학교 졸업 시 50%, 고등학교 졸업 시 50%를 분할 지급하는 상품이다. ‘육영보험’은 보험기간을 6세, 12세, 15세, 18세, 22세 등으로 구분해서 만기 시에 보험금 전액을 지급하는 상품이다. 계약자가 사망하면 보험료 납입을 면제해주는 최초의 연생(連生)보험이었다. 대한교육보험은 진학보험, 아동보험, 육영보험을 주력 상품으로 자본금 2억환, 전국 11개 지사를 갖춘 보험업체로 거듭났다.
신용호는 생면부지의 교육보험 상품을 팔아야 했지만 마땅한 벤치마킹 사례가 없어 “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한다”는 경영철학을 임직원들과 공유하면서 난관을 타개했다. 또한 그는 영업대책회의 때마다 “매사에 따뜻한, 땀내 나는 잔정을 베풀어라. 그럼 (상대방이) 오래 있게 된다”며 임직원들을 독려했다. 그 결과 대한교육보험은 창업 당해인 1958년 2억4200만환의 계약실적을 기록, 국내 전체 생명보험 계약액의 점유율 3.0%를 기록했다. 이후 새로운 보험상품 개발과 적극적인 영업확대로 1959년에는 계약액 8억7400만환으로 점유율이 16%로 제고됐다. 신용호의 발명가적 창의와 개척정신, 그리고 ‘맨손으로 생나무를 뚫는 집념과 피나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 경제 규모가 점차 확대되고 정부의 보험업 육성정책에 힘입어 대한교육보험의 사세도 신장됐다. 특히 1962년 2월 9일 법률 제1020호로 제정, 시행된 ‘국민저축조합법’은 국내 생명보험업계에 커다란 전기를 초래했다. 이 법은 당시 박정희 군사정부가 국민들에게 저축 의지를 고무해서 가정경제를 튼실히 할 뿐만 아니라 이 자금을 같은 해부터 추진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의 시행에 소요되는 재원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강력하게 추진한 전 국민 저축 캠페인이었다. 정부주도의 경제개발에 내자(內資) 동원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였다.
사장이 직접 영업활동, 창립 9년 만에 업계 정상 등극
정부는 전국의 도, 시, 군, 읍, 면, 리, 통, 부락 단위와 모든 관공서, 학교, 기업, 각종 사업장, 농업협동조합, 상업조합, 공업조합 등에 각각 국민저축조합을 결성하게 했다. 이 밖에도 조합원들이 납부하는 돈을 국공채 매입과 금융기관 예치, 생명보험의 보험료 불입 등에 사용하도록 강제했다. 조합을 통한 저축에 대해서는 이자소득세를 면제하는 대신 조합 결성이나 조합규약 변경 등에 대해서는 재무부 장관에게 보고하도록 의무화했다. 전 국민 허리띠 졸라매기 캠페인이었다.
이로써 국내의 금융계에는 새로운 큰 장이 섰다. 특히 생명보험업계엔 단체보험이 대거 생겨나 호박이 넝쿨째 떨어지는 격이었다. 단체보험이란 특정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 전체를 대상으로 일괄계약을 맺어 그 소속원 전부가 포괄적으로 피보험자가 되는 보험을 총칭하는 것으로, 개인보험보다 보험료가 저렴하다. 1945년 해방 이래 지지부진했던 보험업체들이 단비를 만난 것이다.
경험과 자본력이 취약한 신생 대한교육보험에는 결코 녹록지 않은 도전과제였다. 그런데 1962년 1월에 문교부가 대한교육보험을 전국 교육공무원 저축기관으로 추천했다. 신용호 사장이 앞장서서 전국을 4개 지역으로 나눠 독려반을 편성, 총력적인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1차로 3억4000만원의 계약을 체결했다. ‘공무원 단체계약’은 당시 대한교육보험의 점포 규모나 사세, 향후의 보험계약 유지 등 감당하기 어려웠지만 전국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이 밖에도 장차 대한교육보험이 굴지의 보험업체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1962년 6월에는 엽연초생산조합 연합회와 국민저축계약을 성사시켜 당시 단일계약으로는 최고인 12억원의 계약액을 기록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해군 국민저축조합과 1억5000만원의 단체복지보험 계약을 체결하는 등 주로 단체보험 중심으로 판촉했다. 1964년에는 보유계약 100억원을 돌파하여 생명보험업계 2위로 부상했다. 이후 1967년에는 국내 보험업체들 중 최고인 394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당시 대한교육보험의 업계점유율은 41%에 육박했다.
이 무렵 신용호 사장이 직접 영업활동에 나서 1967년 4월 육군과 170억원에 이르는 특종저축보험 계약을 성사시킴으로써 대한교육보험은 창립 9년 만에 업계 정상을 차지했다. 그 결과 총자산도 1958년 2200만원에 불과하던 것이 1967년에는 22억2700만원으로 급증했다. 당시 높은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더라도 대한교육보험은 짧은 기간 동안에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경영혁신운동인 ‘제2의 창사운동’ 전개
신용호 창업주는 지난 2000년 경영권을 장남인 신창재 서울대 의대 교수에게 물려줬다. 지난 1999년 광화문 교보생명 1층에서 신용호(왼쪽) 창립자와 신창재 회장. / 사진:교보생명
대한교육보험은 1960~70년대 한국인 특유의 교육열과 맞물려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신용호는 1967년 5월 대한교육보험 사장직을 조준호 부사장에게 맡기고 자신은 회장으로 취임했다. 신 회장은 창업 이래 10여 년 동안 경영 일선에서의 체험을 근거로 대대적인 경영혁신 작업을 추진했다. 1967년 7월과 1968년 2월 두 차례에 걸쳐 전국 지사들을 순회하면서 운영상태, 외근직원들의 의식, 계약자 요구사항 등을 면밀히 조사하는 한편 1968년 8월과 1969년 7월 두 차례의 해외 순방을 통해 선진국 보험업체들의 경영 동향을 연구했다. 이를 토대로 대대적인 경영혁신운동인 ‘제2의 창사운동’을 전개했다.
예산관리제 도입(1967.6.), 학사지부장제도 도입(1968.8.), 보험기술혁신대회 개최(1970.3.), 지표 제정(1970.4.), 외야신제도 도입(1970.4.), 연수지부장제도입(1970.4.), 경영기업이념 제정(1970.6.), 사무전산화 추진(1971.2.), 계약선택제 확립(1971.2.) 등이 대표적이다. ‘제2의 창사운동’은 1970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해서 창립 20주년이 되는 1978년에 끝났다.
1971년 3월 국내 생명보험 역사상 최초로 보유계약 1000억원을 돌파, 1977년 5월 5000억원, 1978년 7월에는 보유계약고 1조원을 달성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국민들의 사교육비가 크게 증가해 한정된 금액의 교육보험만으로는 가입자들의 교육비 충당이 불가능했다. 반면 국민소득 증가에 따라 양로보험, 종합보장생활보험 등 일반 생명보험 상품 비중은 빠르게 증가했다. 대한교육보험의 경우 주력 상품인 교육보험만으로는 매출 제고에 한계가 있어 일반 생명보험 상품 취급을 확대했다. 1995년 4월에는 회사명을 교보생명주식회사로 변경했다. 그러나 이 무렵 급격히 성장한 삼성생명에 생명보험업계 1위 자리를 내줬다. 창업 이래 교육보험 외길을 걸어온 교보생명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교보생명은 창립 이래 30여 년 동안 교육보험의 혜택을 받은 300만여 명의 학생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졸업 후에는 경제성장의 주역이 되도록 했으며, 학부모들이 맡긴 보험금은 국민자본이 돼 도로와 항만 등 국가기간산업 구축에 활용됐다. 창업자 신용호가 “민족자본가가 돼라”는 이육사의 권유를 실천으로 옮긴 결과였다.
대한교육보험이 다각화에 착수한 것은 경영기반이 확립된 1966년이다. 당시는 대교산업(大敎産業)이 설립된 시점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본격화하면서 전국적으로 주택의 수요 대비 공급이 턱없이 부족했는데 주택건설 시장에 참여하고자 대교산업을 설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1968년 삼청주택단지 사업이 부진해짐에 따라 대교산업은 주력사업을 주택건설에서 제조수출로 전환해서 재미를 봤다. 대교산업은 1973년 2월 전북 군산에서 합판을 제조하던 신흥목재(新興木材)를, 5월에는 풍국제지(豊國製紙)를, 7월에는 부산 영도의 대한도기(大韓陶器)를 각각 인수했다. 그러나 대교산업은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경영환경이 악화되면서 정리됐다. 모기업인 대한교육보험의 창립이념과도 거리가 멀어 더 이상 미련도 없었다.
1971년 7월에는 한·일 합작으로 ‘한국전산주식회사’를 설립해서 대한교육보험은 국내 보험업계 최초로 컴퓨터시스템을 운영했으며 1979년 11월에는 교보부동산관리㈜(교보실업)를 설립했다. 1980년 12월 24일에는 자본금 10억원의 ㈜교보문고를 설립하는 한편 서울 종로 1번지에 대한교육보험 본사 사옥용으로 지하 3층, 지상 22층 연건평 2만8627평의 대규모 빌딩을 신축했는데 1980년에 준공되었다.
국민교육진흥 구현 위해 교보문고 설립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 그는 ‘한우물 경영’에 매진하면서 언제나 국익을 우선 염두에 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유상(儒商)이자 지사(志士)형 경영자였다. / 사진:교보생명
전국의 서적유통업체들과 서점들의 반발이 매우 심했다. 대자본을 등에 업은 교보문고가 국내의 서적유통 및 최대 규모의 서점을 오픈하면 서적유통업체와 영세 서점들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회사의 고위 간부들도 교보문고 설치에 반대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금싸라기 땅에 상가를 건축하면 떼돈을 벌 텐데 잡다하게 일은 많고 수익도 별로인 서점을 차리겠다니 말이다. 허가 관청인 재무부도 교보문고에 적자가 발생하면 대한교육보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신용호 회장은 평소 신념이자 대한교육보험의 경영이념이기도 한 국민교육진흥의 구현을 위해 교보문고 설립을 밀어붙였다. 교보문고는 1981년에 광화문 본사 사옥 지하 1층에 매장 678평, 장서보유량 60만 권 등 국내 최대 규모의 서점을 오픈했다.
대한교육보험은 전국 도처에 지사 사옥 신축에 주력했다. 1982년 12월 인천사옥 신축기공식을 필두로 1983년에는 대전, 울산, 부산, 전주, 광주, 마산, 천안, 대구 등에 사옥건설 공사를 착공했다. 1988년에는 청주 사옥을 완공함으로써 지방에 총 12개의 사옥을 확보했다. 보험업체들은 장기금융상품인 보험업을 통해 유치한 자본으로 안정성이 뛰어나고 부가가치가 큰 투자에 주력했다. 개발경제시대의 고물가 하에서 가장 확실한 가치증식 수단은 부동산이었다. 신용호 회장은 새로 신축한 지방 도시의 사옥 지하 1층에는 예외 없이 교보문고를 개설했다. 그 결과, 교보문고는 한국 최대의 오프라인 서점이자 도서 유통 기업인 교보문고로 발전해 대성공을 거뒀다.
1980년대에 자력 성장을 위한 기초를 공고히 한 대한교육보험은 1991년 10월 대산농촌문화재단을, 1992년 12월에 대산문화재단을 각각 설립했다. 창업자 신용호의 아호를 따서 대산(大山)이란 명칭을 부여했다. 1993년 12월에 서울신탁은행으로부터 대한증권(현 교보증권)을 인수해 새로 증권업에도 진출했다. 1995년 5월에는 장기신용은행 소유의 하나은행 주식지분 8%를 인수해 은행업에도 진출했다. 1995년 상호를 변경한 교보생명은 8월 말 기준 총자산 12조원으로 국내 33개 보험업체 중 2위로 성장했다.
선공후사의 유상(儒商), 지사(志士)형 경영자
굴지의 보험업체로 성장한 교보생명은 금융업 외에도 교보실업과 교보정보통신, 교보투자자문 등을 설립함으로써 산하에 교보문고, 교보증권, 교보투자자문, 교보실업, 교보정보통신과 2개의 재단을 거느린 금융 전업 대기업집단으로 도약했다.
신용호 창업주는 지난 2000년 경영권을 장남인 신창재 서울대 의대 교수에게 물려줬다. 2003년 9월 그는 그를 괴롭히던 간암으로 타계했다. 향년 86세였다. 신용호는 어린 시절에 초등학교 문턱도 못 넘었지만 국내 최초로 교육보험 업체를 설립, 정상의 교보생명그룹을 형성했다. 이뿐 아니라 무수한 반대에도 국내 최대의 교보문고도 오픈했다. 그의 기업가정신은 시인 고은의 시 ‘길’의 한 대목인 “길이 없으면 만들어 간다”이다. 그는 발명가적 창의와 개척정신, 그리고 맨손으로 생나무를 뚫는 집념의 노력으로 교보생명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슘페터(J.A.Schumpeter)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발달은 기업의 혁신에 의해서 이뤄지며 그러한 혁신의 추진자가 기업가이다. 기업가란 혁신을 추구하는 창조적 기업가(creative entrepreneur)인 것이다. 신용호는 교육보험이란 새로운 보험상품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을 뿐 아니라 다수의 신종 보험상품을 개발한 창조적 기업가였다.
현대 경영학의 구루(스승)인 드러커(P. Drucker)는 윤리야말로 기업의 발달, 나아가서는 자본주의 발달을 지탱하는 기둥이라고 했다. 기업가 윤리는 기업가의 경영철학 내지 경영신조로 나타나는데, 이를 경영이념이라 부른다. 신용호는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이라는 창립 정신을 기업의 윤리적 지주로 확립시켜 교보그룹을 완성했다. 그는 드러커가 말하는 기업윤리의 확립자였다. 대산은 기업의 이윤추구를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는 ‘한우물 경영’에 매진하면서 언제나 국익을 우선 염두에 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유상(儒商)이자 지사(志士)형 경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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