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방통위'를 정상화시켜라!/고삼석 동국대 AI융합대학 석좌교수(前 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원)
1년 넘게 파행을 넘어서 마비 상태에 빠진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 정상화의 물꼬가 드디어 트였다. 더불어민주당이 '식물위원회'가 된 방통위 정상화에 본격 나섰기 때문이다. 이번 주 국회 몫 방통위원 후보자 인선을 위한 절차와 일정을 확정하겠다고 한다. 만시지탄이다.
현재 방통위 운영을 둘러싼 대통령실ㆍ여당 대 야당의 주도권 다툼은 진영 간 대결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어느쪽도 쉽게 양보를 하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방송 영역을 넘어서 국정 전반의 정상 운영을 가로막고 있다. 최대 장애물이다. 지켜봐야하는 국민들은 고통스럽다.
방통위는 '민주화의 산물'이자, 동시에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국회에서 여야가 추천(3인)하고 대통령이 임명한 5인의 상임위원들이 토론 및 숙의, 양보와 타협을 통해서 주요 의사결정을 하도록 만들어진 '합의제 행정위원회'이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하 '방통위설치법')은 '방송의 자유와 독립 보장'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지키고 구현하기 위해서 방통위를 독임제가 아닌 합의제 방식으로 구성 및 운영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위원장이 단독으로 처리할 수 있는 업무와 위원회에서 합의제로 처리해야 할 업무(안건)를 분명하게 구분해 놓고 있다. 또한 방송 관련 업무를 비롯한 일부 업무에 대해서는 국무총리의 지휘 및 감독권도 적용받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목적이나 결과 못지 않게 제도와 절차의 민주성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최근 방통위 운영을 보면 '껍데기만 합의제'일뿐, 실제는 독임제 부처의 형식을 띠고 있다.
국회 추천 몫 상임위원은 합당한 이유없이 임명하지 않은 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위원장과 부위원장 등 2인이 의사결정을 독점하고 있다. 조직 구성과 운영이 독임제와 다를 바가 없다. 방통위 안밖의 이견과 반대는 조금도 용납되지 않는다. 의사결정과정 또한 외부에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깜깜이 '블랙박스'다. "전횡을 일삼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방통위설치법의 입법취지를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다.
'2인 방통위 체제'의 문제점은 법원 판결을 통해서 잇달아 확인되고 있다. 지난 달 말 서울행정법원은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등이 방통위를 상대로 "(2인 방통위 체제 하에서 결정된) 새 이사 임명 처분을 막아달라"며 낸 집행정지 신청을 인용했다.
재판부는 "방문진 이사로서 수행하는 직무 등은 언론 자유나 방송 자유의 보호영역에 해당하거나 근접한 위치에 있다"며 "방문진 이사 지위는 민법상 법인의 이사 등에 비해 더 두텁게 보호돼야 하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라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또한 이러한 판단 근거로 재판부는 "단지 2인의 방통위원으로 피신청인에게 부여된 중요 사항을 심의·의결하는 것은 방통위설치법이 추구하는 입법 목적을 저해하는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며 "신청인들이 본안소송을 통해 2인 위원 심의·의결에 의한 임명처분의 적법 내지 위법 여부를 다툴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물론 “집행정지 판단이라, 본안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는 방통위의 입장도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2인 방통위 체제' 결정이 방통위설치법 입법취지를 위반할 소지가 있고, 그래서 방통위를 5인 합의제 위원회로 정상 운영하라는 법원의 일관된 판결을 정부가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행정행위는 적법하게 이뤄져야 하고, 그것을 둘러싼 법적 논란이 있을 때 법원의 판결을 통해 행정부를 '사법 통제' 하는 것은 민주주의 제도의 기본원칙이다.
정부ㆍ여당은 물론, 야당도 이번 법원의 판결을 '방통위 정상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사회적ㆍ정치적 논란과 갈등을 증폭시키기 보다는 이를 해결하는데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 그것이 국정 운영을 책임진 세력들의 합당한 자세이다. 특히 지금은 대통령과 여당이 행정권을, 야당이 입법권을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양 세력의 대화와 타협, 이를 통한 협치없이 국정의 정상적 운영은 불가능하다.
때마침 민주당이 국회 몫 방통위원 추천을 통해서 방통위 정상화에 협조하겠다고 한 만큼, 대통령실과 여당은 여기에 화답해야 한다. 최근 대통령실과 여당이 야당에게 국회 몫 방통위원 추천을 요구해 온 만큼 야당의 입장 전환에 반대할 이유도 없다. 국정운영의 최종 책임은 대통령, 정부ㆍ여당에게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합의제 행정위원회의 의사형성(결정)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합치의 원리가 적용"되어야 하고, "법률의 입법목적 등에 부합하는 참여 가능성 등이 보장되거나 각 절차법적 한계 내에 있어야 한다"는 이번 행정법원 판결을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와 정치권을 비롯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한번쯤 다시 상기하기를 바란다.
소통의 불협화음, 읽고 이해하는 힘이 필요하다/ 이재은
‘감잡았지?’는 과일을 잡았냐고 묻는 게 아니다. ‘조짐이 보인다’는 누굴 조진다는 게 아니다. ‘사생대회’는 죽고 사는 대회가 아니고, ‘유선상으로 연락 바람’은 유선상 씨에게 연락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본래 의미는 다들 아시리라 믿는다. 문해력 논란은 2024년 한국 사회의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다. 문해는 문자로 된 기록을 읽고 거기에 담긴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이다. 문해한 정도를 문해력(文解力)이라고 한다.
문해력 파장의 대표 사례는 많이 들어보셨을 터. 모 웹툰 작가가 사인회 관련 안내문을 올렸다.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잇달아 댓글이 달렸다. 지루한 사과 왜 함? 재미없는 사과 따위 하지 말라고! ‘심심한’은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정의 외에 매우 깊고 간절하다는 의미도 있다.
어느 개그 유튜브가 사이트에 공고를 올렸다. “모집 인원 0명.” 줄줄이 댓글이 붙었다. 0명 뽑는데 공지 왜 올림? 장난하냐? ‘0명’은 한 자릿수 인원을 모집한다는 뜻이다. 월요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토일월, 사흘간 연휴를 즐길 수 있습니다.” 항의 댓글이 올라왔다. 4일이 아니라 3일 아님? 3일을 왜 사흘이라고 씀? 사흘을 4일로 오해하거나 숫자로 표기하면 될 걸 굳이 그런 단어를 써야 하느냐는 불만이었다. ‘사흘’은 3일의 순우리말 표현이다.
‘금일(今日:오늘)’을 금요일로, ‘중식(中食:점심)’을 중국 음식으로, ‘십분(十分:충분히)’을 10분으로, ‘고지식(융통성이 없다는 순우리말)’을 높은(高:높을 고) 지식으로, ‘가제(假題:임시 제목)’를 갑각류로 착각한다는 사례가 곳곳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병원이나 약국에서 처방된 투약설명서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보험 규정을 해석하지 못하는 등 생활에서 불편을 겪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다고 한다.
학생들의 문해력 실태를 다룬 방송이 있었지만 비단 학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성인이 글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은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발표한 ‘제3차 성인문해능력조사’(2021)에 따르면, 일상에 필요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수준1’(초등1,2학년)은 4.5%,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 계산 등은 가능하지만 활용이 미흡한 ‘수준2’(초등3~6학년)은 4.2%다. 전체 성인의 8.7%가 한국어의 뜻과 맥락을 제대로 짚지 못한다는 것이다. 소통의 불협화음이다.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 <컬처쇼크>에는 ‘균일’의 세계에 사는 부녀가 나온다. 아버지는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면 더더욱 예민해져서 “똑같은 빌딩, 똑같은 광경, 똑같은 음식. ‘균일’은 이제 질렸어!”라고 소리 지른다. 반면 ‘나’는 나란한 치아처럼 동일한 광경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를 따라 옛 도시인 ‘컬처쇼크’에 온 아이는 한밤중 몰래 호텔에서 나왔다가 화려한 옷을 입은 노파를 만난다. 놀란 아이는 ‘균일어’로 말하는데 표현되는 건 “아-----! 아-----” 뿐이다. 노파가 인상을 쓰자 아이는 애니메이션에서 본 멸망한 옛 도시의 언어를 가까스로 생각해 낸다. 균일에서 왔다고 말하자 노파는 가엾은 표정으로 아이를 본다. 그러곤 자기가 먹던 음식을 내미는데 아이는 맛이 뭔지 모른다고, 맛이란 건 어쩐지 기분 나쁘다고 대답한다. ‘균일’에서 먹는 음식은 맛도 냄새도 없기 때문이다. 노인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문화를 모르는구나. 불쌍한 녀석이로군.”
문화는 사회에서 습득되는 행동이나 생활에서 얻어지는 물질적, 정신적 소득이다. 여기에는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등이 포함된다. 특정 지역에서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비슷한 문화를 향유하고 소통하기 마련이다. 그 첫 단추가 ‘언어’가 아닐까. 균일의 세계에서 온 아이가 “아-----! 아-----”를 언어로 인식하는 건 오감을 표현할 기회도, 감정을 드러낼 기회도 없어서였다. 그 세계에서는 똑같은 얼굴, 똑같은 말씨, 똑같은 교육을 당연하게 여겼다. 다름을 읽어낼 수 없는 사회에서는 소통이 무의미하다.
격변하는 현대사회에서는 다양성의 인정이 필요불가결하다. 사회가 다방면으로 변화하고 확장됨에 따라 문해력의 범위도 확대되고 있다. 텍스트를 넘어 영상, 춤, 음악, 키오스크까지 다수의 콘텐츠를 접하고 표현하는 능력까지 문해력의 범주에 속한다. 사회, 문화뿐 아니라 심리 영역에서도 읽고 이해하는 힘은 중요하다. 지금은 ‘금일과 중식, 십분’이지만 앞으로 어떤 단어가 ‘불협화음의 불씨’로 떠오를지 모른다.
문해력 저하 원인에 관한 일각의 분석은 이렇다. 독서 부족, 스마트폰 과다 사용, 유튜브 및 숏폼 중독, 한자 공부 경시의 폐해 등등.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짧고 자극적인 단어에 도취 돼 있고, 점점 자기표현 기회를 잃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어떻게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방법은 책 읽기다. 책은 처음, 중간, 끝이 있고 발단부터 결말까지의 모든 과정이 들어있다. 흐름을 파악하며 한 세계를 만나기에 더없이 적당한 매체다. 세상에 대한 넓은 시야와 비판적 사고를 기르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기에 독서만큼 효율적인 건 없다. 타인의 삶을 간접 경험하며 자신의 관점을 돌아보고 자기 성찰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닐 것이다. 실천이 어렵다면 작은 독서 모임에 참여해보는 건 어떨까. 많이 읽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양보다는 질. 여기서 멈춤이 아닌 한 걸음 더. 깊이 있는 독서와 함께 하는 독서가 불통을 소통으로, 불협화음을 고운 화음으로 만드는 정도(正道)일 것이다.
'어린 왕자'와 마음을 읽는 시 /김정숙 충남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나의 많은 시간과 일은 학생들을 만나는 데 놓여 있다. 20대 대학생의 생각과 마음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가에 기본적인 교육 목표를 두고 그 위에 이론과 지식의 담론을 쌓아 나간다. 이번 학기 ‘인문학세미나’의 목표는 ‘자기 읽기’와 인문학 개념에 대한 새로운 정립이었다.
학생들과 함께한 활동 중 하나는 『어린 왕자』 깊이 읽기였다. 한 번쯤 접해보았을 익숙한 책을 선정한 이유는 한 권의 책은 언제, 어떻게, 누구와 함께 읽는가에 따라 새로운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책 읽기의 방법은 ‘낭독’이었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한 읽기는 주로 짧은 글과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보는 것에 가깝기에 집중하며 듣기와 긴 글 읽기로 공부에 자극을 주고 싶었다.
3년여의 코로나19 시기를 경험한 학생들은 대학 생활의 절반 이상을 비대면으로 보냈기 때문에 대면 토의와 토론, 조별 활동과 발표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 상황도 고려한 방법이었다. 한 학생이 정해진 분량을 읽는 동안 다른 학생들은 듣고 다시 다른 학생이 읽는 과정을 거친 후 인상 깊은 구절과 의미를 발표하며 현재의 자신과 우리 사회에 적용해보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는 방식에 학생들은 처음에는 낯설어했지만 점차 그 과정에 스며들고 있음을 느꼈다. 같은 내용과 장면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과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경험을 학생들은 매우 즐겁고 의미 있게 수용하였다.
‘어린 왕자’와 그가 만난 장미, 행성의 여섯 사람들, 여우를 통해 본 모순 속 조화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다양한 형태, 크고 작은 공동체 내의 이상과 이면의 모습이 공유되었다. 다름 속에서 찾는 특별한 연결 고리와 무상함, 사랑의 녹아듦과 사무침, 관계의 시작,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것, 죽음과 운명에 대한 깊은 주제들은 마음을 통해 ‘어린 왕자’를 읽은 덕분이었다.
매 시간 자신들의 경험을 넘나들며 스스로 찾은 질문들은 생각의 품을 한 뼘 크게 해주었다.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학생들을 보며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스스로 정립한 인문학을 통해 “사람을 생각하고 사람을 배우며 결국 그 사람과 살아갈 세상을 배운다.” 고전을 이해하고 자신의 감정을 느끼며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쳐 미래를 위한 방향을 찾아볼 수 있는 『어린 왕자』 읽기를 권한다.
학생들과 서로 배우고 함께 성장하며 마음을 읽은 소중한 시간이 고맙고 그립다. 또 다른 그리고 새로운 질문을 품게 해준 『어린왕자』 안녕!
'칼럼 , 언론사 연재물 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일남 (7) | 2024.09.24 |
---|---|
이어령 (2) | 2024.09.24 |
정혁훈의 농업이 미래인 이유 (3) | 2024.09.01 |
농업 소득에 대한 불편한 진실 (6) | 2024.09.01 |
비만에 대하여 (15) | 2024.0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