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국외인물

무솔리니

by 자한형 2024. 9. 10.
728x90

무솔리니/지후니 74

193991,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전 제1차 세계대전과 달리 전장이 유럽을 포함해 아시아까지 광범위했고, 발전된 기술은

살상 무기의 파괴력을 향상시켜 수많은 사상자와 재산 피해를 발생시켰다.

이 전쟁과 관련해 전쟁의 원흉으로 나치 독일의 지도자 히틀러가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지만,

그와 보조를 맞춘 이들도 있었다.

특히,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은 추축국으로 동맹관계에 있었고 전범국가의 길을 걸었다.

그중 이탈리아의 지도자 무솔리니는 전쟁과 관련해 그 존재감은 크지 않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세계 최초 파시즘 국가 그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극우적 정치 이념

파시즘의 이론을 정립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정권을 창출하고 이탈리아를 세계 최초의 파시즘 국가로 만들었다.

이 파시즘은 강력한 지도자와 그 정권을 국가로 동일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적 통합과 단결을 이유로 독재를 정당화하고 반대 세력을 폭력적으로 탄압한다.

이런 파시즘은 무솔리니를 시작으로 나치 독일이 이를 벤치마킹해 나치즘으로 발전했고 또 다른 전범국 일본 군국주의에도 영향을 줬다.

이 점에서 무솔리니와 파시즘은 제2차 세계대전을 고찰하는 데 있어 꼭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극과극의 성장기

무솔리니는 18837, 이탈리아 북부 한마을인 포를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무솔리니도 이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청년 시절 사회주의 정당에 소속되어 활동한 것도 이에 근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솔리는 영특함과 폭력성을 함께 가진 유년기와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는 학교에서 동료들과 시비가 붙으면 폭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독선적 성격을 보였다.

심지어 교사에게도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 이에 무솔리니는 다니던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기도 했다.

문제 학생이었던 무솔리니였지만, 그는 학업성적이 우수한 우등생이기도 했다.

1901년 무솔리는 18살 나이로 학교 교사가 됐지만, 학창 시절의 성격을 바꾸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켰고 학교에서 퇴출됐다.

이후 무솔리는 사회주의자로 관련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세력은 이탈리아의 대외 침공과 전쟁을 강력한 반대했고 반정부 투쟁을 전개했다.

무솔리니는 이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투옥되기도 했다. 이런 경력은 무솔리니의 전국적 인지도를 높였다. 이를 바탕으로 무솔리니는 사회주의 계열의 신문사에서 언론인으로 명성을 얻었다.

무솔리니 사회주의자에서 극우 정치인으로

그가 언론인에서 대중 정치인이 된 계기는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개전 초기 이탈리아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을 유지했다. 하지만 참전과 반전 사이에서 국민적 여론이 맞서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반전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얼마 안 가 참전을 지지하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사회주의자였던 그로서는 그의 정치적 성향을 바꾸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무솔리니는 사회주의정당 신문사에서 퇴직을 당했고 개인 신문사를 창간했다.

그는 이 신문사를 기반으로 반 사회주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극우적 성향을 표출했고

대중 정치인으로서 인지도를 높였다.

1915년 국민적 여론과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과의 전후 보상 등을 포함한 비밀 협정을 통해 이탈리아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탈리아는 이를 통해 승전국 지위를 얻었지만, 전쟁 배상금이나 영토 확보 등에서 애초 약속된 부분을 모두 얻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막대한 전비를 쏟아부었고 국가 재정에 어려움이 커진 상황이었다.

전후 배상마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이탈리아 경제는 침체에 빠졌다. 이에 국민들은 당시 정권과 연합국에 대한 반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검은 셔츠단 사진

파시즘의 원조 이런 국가적 어려움은 무솔리니에서 기회가 됐다. 그의 극단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선동 정치는 현실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민족주의, 국가주의를 바탕으로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하는 전체주의를 추구하는 파시즘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면서 무솔리니는 과거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 재현과 부활을 외치며 대중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허황되고 민주주의 가치를 흔드는 선동이었지만, 많은 이탈리아 국민들이 이에 호응했고 무솔리니의 정치적 입지도 강화됐다.

무솔리니는 이와 함께 자신을 추종하는 친위 세력을 조직했다. 검은 셔츠단이라 불리는 이 단체는 파시즘을 실현하는 일종의 행동대로 선동과 선전에 앞장서고 필요시 반대파에 대한 폭력과 테러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은 과거 우리나라의 독재 정권에 기생해 이권을 얻고 야당에 대한 테러를 일삼았던 정치 깡패들과 다르지 않았다.

검은 셔츠단은 특히, 사회주의자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이탈리아의 중산층 이상 국민들은 사회, 경제적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정당과 세력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파시즘 단체를 지지했다.

이런 지지는 파시즘 단체를 정치세력화 하도록 했다. 무솔리니는 소수의 파시즘 단체를 넘어 파시즘을 표방하는 정당을 창당하고 제도권에 포함된 유력 정치인으로 발돋움했다.

이후에도 검은 셔츠단을 중심으로 무솔리니 정당은 반대파에 대한 테러를 지속했고 정부 전복을 위한 쿠데타를 시도했다.

연설하는 무솔리니

파시즘 정권 수립 이 쿠데타는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지만, 당시 이탈리아와 국왕의 지지 속에 점점 힘을 얻었고 그의 세력은 1922년 수도 로마에 입성하며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무솔리니는 쿠데타 시작 후 성공에 확신을 가지지 못했고 스위스 망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는 그의 기회주의적 속성과 선동 정치가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후 무솔리니는 39살의 나이에 총리로 지명됐고 그의 내각을 출범시키며 이탈리아는 세계 최초의 파시즘 국가가 됐다.

 

무솔리니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일당 독재를 가능하게 하는 선거법 개정을 했다.

1924년 총선에서 검은 셔츠단 등 친위조직을 동원한 전방위적인 부정선거로 의회에서 무솔리니 당은 절대다수의 의석을 차지하는 1당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독재자의 길을 가는 무솔리니에 대한 야당과 국민적 저항은 지속됐다.

이에 무솔리니 정권은 더 강력한 철권통치로 권력을 강화했다. 이를 위해 야당 정치인 등

반대 세력에 대한 암살과 폭력을 지속했고 제1 야당 정치인이 테러로 목숨을 잃었다.

이는 반정부 시위를 더 강하게 일어나게 했다.

1당 독재 절대 권력자로

무솔리니 정권은 이런 반대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1925년 무솔리니는 공식적으로

파시스트 독재를 선언했다. 언론과 출판을 통제하고 반대파를 탄압하고 정권에 충성할 친위대를 조직해 운영했다. 이들은 더 폭력과 테러 활동을 통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무솔리니의 독재를 공고히 했다.

이렇게 절대 권력자 반열에 올랐지만, 무솔리니에 대한 저항 운동은 계속 이어졌다. 수차례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무솔리니는 지금의 계엄령과 같은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반독재 세력에 대한 대대적 숙청에 들어갔다.

자신과 그의 추종세력에 반대하는 이들은 반 국가 세력을 규정하고 국가의 폭력을 공공연하게

휘둘렀다.

또한, 자신의 정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해산 시킨 후 치른 1929년 총선에서 무솔리니 정당은 모든 의회 의석을 점유했다.

이제는 무솔리니를 견제한 어떠한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고 무솔리는 사실상 황제 자리에 올랐다.

우상화 작업 이렇게 권력을 공고히 한 무솔리니는 로마제국 부활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일환으로 로마 시내 고대 로마 유직지에 대한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국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정권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는 일종의 전시성 사업이었다.

이를 위해 막대한 예산이 들어갔다.

과거 독재자들이 거대한 건축물이고 토목 공사를 통해 국민적 지지를 얻고 자신의 업적을 쌓으려는 행태 그대로였다.

이와 함께 무솔리니는 미디어와 언론 등을 통해 지속적인 선전 선동 활동을 했다.

그 속에서 자신을 로마의 황제와 동일시되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 다소의 선전 영화가 제작되고 상영됐다.

그 과정에서 지금도 세계적인 영화제인 베니스 영화제가 1932년부터 무솔리니의 후원 속에 시작되고 발전하는 아이러니도 있었다.

이에 더해 무솔리니는 1934년 대형 스포츠 이벤트인 월드컵을 유지했다.

당시 월드컵은 체제 홍보와 무솔리니의 업적 쌓기용으로 기획됐다.

개최국 이탈리아는 다수의 귀화 선수로 전력을 보강하고 유리한 대진, 군대를 동원해 상대 팀에 위협을 가하는 공포 분위기 조성 속에 첫 월드컵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이에 1934년 월드컵은 월드컵 역사에서도 추악한 월드컵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폭력에 근거한, 사상 자유를 통제하는 철권 통치와 우상화 작업으로 내부의 권력을 공고히 한 무솔리니는 대외 정복에 눈을 돌렸다.

로마제국 부활이라는 정권 장악의 명분을 실현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대외적 성과가 필요했다.

대외 팽창 침략 전쟁 이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1935년 이탈리아는 아프리카의 마지막 독립

국가라 할 수 있는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이미 19세기 말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침공했지만, 강력한 저항에 밀려 패한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아프리카 국가들이 서양 열강들에게 의해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이탈리아가 아프리카 영토 확장을 위한 대상은 에티오피아가 유일했다.

이탈이라는 압도적인 전력으로 빠른 승리를 자신했지만, 에티오피아 군의 강력한 저항과 험준한 지형과 무더운 날씨 등 변수로 전쟁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결국, 이탈리아는 승리를 위해 제1차 세계대전 사용 후 국제연맹에 의해 사용이 금지된 독가스를 살포하기에 이른다.

이탈리아의 독가스 공격은 에티오피아 군인을 물론이고 일반인들에게도 큰 피해를 발생시켰다.

이런 무자비한 공세를 통해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고 식민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명분 없는 침략 전쟁은 이탈리아를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도록 했다.

국제연맹은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고 강력히 비판했다. 또한, 강력한 경제제재를 이탈리아에 가했다.

물론, 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서 식민지를 건설하고 각종 수탈을 자행했던 서구 유럽 국가들의 형태를 고려하면 모순적인 면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솔리니의 명분 없는 침략전쟁을 정당화 할 수 없었다.

무솔리니는 이런 국제사회의 압력을 국민들을 결속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더 어려워진 국가 재정에 보탬이 되도록 국민적인 모금 운동이 전개되고 과거 IMF 경제 위기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던 대대적인 금 모으기 운동도 일어났다.

무솔리나와 히틀러

전범국의 길로 결국, 이탈리아는 1937년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일이었지만, 무솔리니는 나치 독일과의 협력으로 이를 극복하려 했다.

마침 나치 독일의 지도자 히틀러는 무솔리니가 주창한 파시즘 신봉자였고 그의 선동정치와 그에 필요한 여러 방법들을 답습해 정권 탈취와 유지, 강화에 그대로 활용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강한 제스처의 연설을 그대로 따라 했고 미디어를 적극 활용한 선전, 선동과 우상화를 작업을 했다. 정권의 안정과 국민적 단결을 위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하기도 했다. 무솔리니의 길을 히틀러는 그대로 따랐다.

이는 자연스럽게 두 파시즘 지도자를 가깝게 했다. 이미 나치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파시즘이라는 하나의 공통분모에 더해 세계질서를 파괴하는 팽창정책으로 펼치고 있었다.

당연히 세계 각국의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국제적 고립을 피할 수 없었다.

두 독재자의 밀월은 양국의 관계를 군사동맹으로 격상토록 했다.

이런 두 나라에 이미 1933년 만주 침공과 괴뢰국인 만주국 수립 등으로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고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이 합세했다. 이들 세 나라는 파시즘 이념을 공유하는 전체주의 국가라는 공통분모에 묶였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의 일원이 됐다.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사 동맹 조약이 체결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399월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전격 침공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개전 초기 무솔리니는 전쟁에 바로 참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치 독일이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서유럽을 빠르게 점령하고 승기를

잡아가자 참전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무솔리니, 히틀러 무능한 군대 거듭된 패전

1940년 이탈리아는 추축국의 일원으로 참전했고 프랑스로 진격했다.

문제는 이탈리아군은 장비가 군대의 훈련 등 준비가 부족했다. 공업이 상대적으로 발전하지 못해 군수 지원도 원활하지 않았다.

이에 이탈리아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는 상황에도 이탈리아군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전쟁을 통해 상응하는 대가를 기대했던 무솔리니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무솔리니는 또 다른 침공 대상으로 0영국이 지배하던 아프리카 국가 이집트를 지목하고 공격을 강행했다.

영국은 나치 독일의 공세를 막는 게 시급했고 아프리카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기 힘들었다.

이탈리아 군은 이집트 내 영국군보다 월등한 전력으로 전쟁에 나섰다.

초기 이탈리아 군은 빠르게 이집트를 점령해갔지만, 승리를 낙관한 나머지 느슨한 전시 운영과 이로 인해 불필요하게 진격 속도를 늦추면서 영국군이 반격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했다.

더군다나 무솔리니는 로마제국 부활이라는 망상에 빠져있었고 이는 이집트에서의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그리스 침공을 강행하게 했다.

이는 전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를 침공한 이탈리아군은 우세한 전력에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심지어 그리스군의 반격에 밀려 점령지 알바니아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됐다.

결국, 군사동맹이었던 독일이 이탈리아 전쟁에 개입했다.

독일군은 강력한 전력으로 빠르게 그리스군을 제압하고 그리스를 점령했다.

하지만 이집트 전선 상황은 나치 독일의 대표적 장군인 롬멜과 독일의 전차부대를 투입했음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군은 아프리카 전선에서 기존 점령지 라비아에서 밀리며 다수의 사상자와 함께 포로를 발생시키고 말았다.

이런 상황은 독일의 전력을 뜻하지 않게 전장이 확대되도록 했다. 이는 독일이 영국 침공에

집중할 수 없도록 했다.

이는 영국이 서유럽의 최후 보루로 남아 연합국 반격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 군의 무능은 독일에 큰 부담이 됐고 패전의 원인을 제공했다.

히틀러 역시 무솔리니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치 독일은 교착상태의 전쟁 상황을 극복하고 부족한 자원 확보를 위해 불가침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기에 이른다.

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인 독. 소전쟁의 시작이었다.

1941년부터 시작된 독. 소 전쟁에 이탈리아 군도 참전했지만, 그 역할은 미미했다. 사실상 총알받이나 다름없었고 패전만 이어졌다.

깨진 허상과 실각

나치 독일에 기댄 권력 이런 전쟁의 패배는 무솔리니에 대한 국내 여론을 악화시켰다. 그의 선동 정치의 허상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국이 연합국 일원으로 본격 참전하면서 전황이 연합군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연합군은 독일은 약한 부분인 이탈리아를 적극 공략했고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하며 압박했다.

그 과정에서 수도 로마가 연합군의 폭격에 크게 파괴됐다. 로마의 역사적 상징성을 고려하면

이탈리아 국민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런 전쟁 상황은 무솔리니 정권 내부에서도 그에게 등을 돌리게 했다.

1943년 무솔리니는 총리직에서 해임되며 권력을 잃고 연금됐다.

여기서 히틀러가 그의 구세주로 등장했다. 독일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장악했고 특수부대를 동원해 무솔리니를 구출했다.

무솔리니는 독일이 점령한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만들어진 괴뢰국의 지도자가 됐다. 물론, 그 위상이나 권한은 극히 제한된 상징적 존재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전쟁 상황이 연합국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연합군의 서유럽 수복이 본격적을 이루어지면서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무솔리나와 병사

비참한 최후

19454월 무솔리니는 패망이 명백해진 상황에서 스위스로의 탈출을 시도했다.

그는 독일 군복을 입고 신분을 숨겼지만, 그의 정체를 금방 들통이 났다.

탈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반 파시즘 유격대인 파르티잔들에 체포된 무솔리니는

그와 마지막까지 함께 한 애인 측근들과 함께 총살되며 생을 마감했다.

1945428일의 일이다. 그의 시신은 그의 정치적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밀라노로 옮겨졌고 그에게 분노한 시민들에게 의해 또 한 번 훼손됐다.

한때 이탈리아를 철권통치했던 절대 권력자의 비참한 최후였다.

무솔리니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얼마 안 된 시점인 430일 나치 독일의 수장 히틀러 역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히틀러는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도록 했다.

일설에는 히틀러가 무솔리니의 비참한 최후에 충격을 받고 같은 일을 당하지 않도록 이런

유언을 남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파시즘으로 연결된 대표적 전범인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그 최후 역시 비참하게 마무리됐다.

이들은 모두 사회적 혼란과 어려움 속에 선전 선동을 통해 대중들에게 근거 없는 희망과 맹신을 가지도록 했고 자신의 망상에 가까운 야망을 위해 국가를 위험으로 빠뜨리고 파멸로 이끌었다.

특히, 무솔리니는 이런 파시즘의 선구자로 전쟁의 근원적 원인을 제공한 최악의 독재자였다. 그 점에서 무솔리니는 역사적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선전 선동 정치,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극단적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극우 정치 세력들은 여전히 전 세계 곳곳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빈부의 격차가 커지고 경제 불황이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이런 극우 정치세력은 점점 더

힘을 얻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중들은 기존 정치권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극우 세력들의 극단적 주장에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간다.

다수의 합리적 사고를 가진 대중들이 여전히 더 많지만, 사회 문제들이 여전한 상황에서 극우 정치세력의 위험성을 나날이 커지고 있고 실제 극우 세력이 정권을 잡는 일도 생겨나고 있다.

파지즘 반대 이미지

항상 경계해야 할 파시즘의 폐해 다만, 서구의 극우 세력들은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국익 우선의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극우 세력들은 일본 극우의 논리를 대변하고 오히려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또한, 국익보다는 그들 집단의 사익을 추구하고 기득권의 이익에 부합하려는 형태를 보인다.

그러면서 정권을 국가와 동일시하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을 적대시하고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는 모습도 있다.

이는 민주주의 기본 질서와 가치를 파괴하는 독재 권력들의 행태와 다를 게 없고 이는 무솔리니와 히틀러, 군국주의 일본과 다를 게 없는 일이다.

특히, 독일이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의 역사를 끊임없이 교육하고 철저히 법으로 이를 배격하는 건 그 위험성을 역사를 통해 학습했기 때문이다.

무솔리니의 삶은 이 점에서 역사의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대중들은 이런 선전 선동 정치에 휩쓸리지 않는 깨어있는 사고를 항상 유지해야 한다.

또한, 정치인들 역시 무솔리니와 같은 형태의 끝이 정해져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국외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데이비드 린(영화감독)  (8) 2024.10.07
최악의 독재자 히틀러  (3) 2024.09.11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  (0) 2024.08.07
도널드 트럼프  (1) 2024.07.27
리 소테츠  (6) 2024.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