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린/이상용
1984년에 <인도로 가는 길>을 선보였던 데이비드 린 감독은 조셉 콘라드의 작품 <노스트로모>를 영화화하는데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1991년 1월에 목구멍에 종양이 있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그는 오랫동안 골초로 살아왔다. 암 선고를 받은 후 그는 말했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여전히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어.”
데이비드 린은 1년 전인 1990년 3월 8일에는 미국영화연구소(AFI,American Film Institute)로부터 평생공로상을 수여 받았다. 그는 좋지 않은 건강 때문에 휠체어를 사용했지만 이 자리에는 직접 걸어 나왔다. 시상식 장에서 그는 상을 수상했던 역대 감독들을 떠올렸다. 알프레드 히치콕, 윌리엄 와일러, 빌러 와일더 등이 떠올랐다. 그는 이들이 수상한 의미를 되새기며 말을 이어갔다.
“그들은 모두 영화의 혁신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일은 창조적인 탐험가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젊고 새로운 감독들에게 기회를 줘야 합니다. 물론 그들의 길에는 약간의 위험도 있고, 다소의 돈도 필요합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무척 예민한 일입니다. 누군가는 행운을 필요로 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1970년 어느 날의 데이비드 린. 드라마틱한 이야기 속에, 가늠하기 힘든
인간의 깊이를 영상화한 것. 그것이 그를 영화사적인 감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린의 행운은 계속되지 못했다. 시상식 이후 데이비드 린은 <노스트로모>의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1991년 3월에는 영화의 촬영 일정이 잡혀 있었고, 시나리오 작업을 끝마치고는 프랑스의 유명한 작곡가이자 영화음악가인 모리스 자르(Maurice-Alexis Jarre)에게 영화음악을 상의하기도 했다. 모리스 자르는 그가 영화에 사용할 음악에 대한 풍부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평생을 걸쳐 영화에 대한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였고, 시상식장에서의 말처럼 새로운 것을 꿈꾸었다. 그를 찾아왔던 존 부어맨 감독이 듣게 된 것 역시 그가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이를 위해 싸울 거라는 말이었다.
문제는 그의 목구멍 속에 있는 암은 린의 새로운 영화를 기다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1991년에 그의 건강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고, 결국 4월 22일 런던에서 데이비드 린의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이곳에는 데이비드 린 영화에 단골이라 할 수 있는 알렉 기네스를 비롯하여 여러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2피터 오툴, 오마샤리프, 알렉 기네스···데이비드 린은 대작들 통해 스타들을 만들어내
새로움에 대한 갈망은 데이비드 린의 영화 세계에도 어느 정도 적용이 된다. <아라비아 의 로렌스>(1962)에서 알리 족장 역으로 등장하였고, <닥터 지바고>(1965)에서는 지바고 역할을 맡았던 오마 샤리프는 한 인터뷰에서 데이비드 린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매력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당신에게 돈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등장해서 스타도, 여성도, 러브스토리도, 액션도 나오지 않는 4시간짜리 영화를 만드는데 그 돈을 쓰자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더군다나 사막에서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찍는 영화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라비아의 로렌스>독일어판 포스터.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석권. 전세계에서 관객을 휩쓸었다.
얼핏 보기에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다소 광기 어린 인물처럼 보이는 영국의 장교 로렌스가 전쟁에 참여하여 아랍 부족을 이끌고 승리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 영웅담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영웅담 속에는 개인의 고뇌와 함께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숙연한 그림자들이 느껴진다.
대작영화임에는 분명하지만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이야기의 웅장함 이상으로 개인에게 드리워진 복잡 미묘한 성격들을 부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거대한 사막의 풍경이다.
개인적으로 데이비드 린이 펼치는 풍경의 위대함을 느꼈던 것은 지금은 멀티플렉스 형태로 바뀐 충무로의 대한극장이 공사를 앞두고 70밀리 영화들을 상영하던 자리에서였다.
70밀리 스크린으로 펼쳐지는 와이드한 화면의 느낌은 당시의 낡은 극장의 스크린이 아니면 경험하기 힘든 것이었다. 당시 시사회를 통해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를 보았던 인상은 또렷하다. 그것은 DVD로는 느낄 수 없는 경험들을 제공해 준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에는 주인공 로렌스가 자신의 하인을 구하기 위해 사막을 되돌아가는 유명한 장면이 있다. 새벽의 어스름한 빛 속에서 사람들은 로렌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 커다란 화면 저편에 하나의 점과 같은 인상이 보인다. 그 점은 점점 더 다가와 로렌스가 하인을 데리고 귀환하는 것이 또렷하게 확인이 된다.
사막의 한 점이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처럼 뚜렷하게 제시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그리하여, 혹자가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두고 일종의 순수영화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다. 사막이라는 단순한 배경 속에서 펼쳐지는 영화의 기본적인 구도와 인상들은 오늘날의 감독들이 쉽게 선택하지 않는 ‘인상적인 경험’을 구성한다.
<콰이강의 다리>에 나온 알렉 기네스.
그는 후에'스타워즈'에서 제다이의 기사 오비완 케노비로 나왔다.
순수한 풍경의 구현과는 달리 한편으로 데이비드 린은 이 경험이 곧 파괴되고 얼룩지는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제시한다. 아랍의 관습법을 따라 로렌스는 범죄를 저지른 인물을 판결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는데, 그가 바로 사막에서 구해낸 자신의 하인이었다.
영국의 규칙과 관습을 따르자면, 그를 용서할 수 있겠지만 로렌스를 둘러싼 아랍인들은 그에게 자신들의 법을 요구한다. 로렌스는 아랍인 하인에게 총구를 겨눈다. 그것은 로렌스가 아랍인들에게 편입되는 순간이자 영국 제국주의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로렌스 자신의 일그러진 초상을 직면하는 순간이 된다.
이처럼 복잡 미묘한 순간을 거대한 화면에 담아내던 시기는 영국 출신의 감독인 데이비드 린이 할리우드에서 전성기를 꽃피우는 시절이었다. 할리우드로 건너간 데이비드 린은 1957년에 <콰이강의 다리>를 시작으로,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라이언의 딸>, <인도로 가는 길>로 이어졌다. 이러한 영화들 덕분에 영국에서 작위를 수여 받기도 하고, 오스카의 명예를 얻기도 했지만 일부에서는 그의 전성기가 영국 시절에 시작됐다는 의견도 있다.
평가야 엇갈릴 수 있는 것이겠지만 이 시절에 보인 그의 영화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활용과 평소 데이비드 린이 지니고 있는 고전주의적인 드라마와의 조화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데이비드 린의 인물들이다.
로렌스 역을 맡았던 피터 오툴, 지바고 역을 맡았던 오마 샤리프, <콰이강의 다리>에서 니콜슨 대령 역을 맡았던 알렉 기네스는 데이비드 린의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된 인물인 동시에 그들이 지닌 감성을 캐릭터에 풍부하게 쏟아 넣은 연기자였다.
3태생지인 영국에서 보여준 아기자기한 드라마들이 할리우드로 와선 대작 중심으로 바뀌어져
<닥터 지바고>의 포스터.
오마 샤리프(가운데)는 이 영화 한편으로 세계적 스타가 됐다.
영국 런던의 크로이던 태생인 데이비드 린이 영화계에 편집기사로 활약하면서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그는 <분홍신>, <피핑 톰>으로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는 마이클 포웰 감독의 초기작들을 편집하였고, 1942년에는 <우리가 복무하는 곳>(I'm Which We Serve)이라는 작품을 공동으로 연출한다.
그가 단독으로 연출한 작품은 국내에 <깁슨 가족 연대기>(This Happy Breed, 1944)로 알려져 있는 영화이다. <우리가 복무하는 곳>에 이어 시나리오 작가이자 제작자를 겸한 노엘 코워드와 두 번째로 손을 잡고 만든 이 작품은 영국 중산층의 삶과 인간애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명성이 있는 이 작품은 깁슨의 아내를 통해 영국 가족사의 해체와 강한 여인상을 보여준다. 깁슨의 아내는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데이비드 린 특유의 연대기적인 서술을 엿볼 수 있는 이 작품은 한 가족의 일대기를 다루면서도 변화하는 가족의 모습과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를 요령 있게 풀어놓는다.
1945년에는 데이비드 린의 명성을 높인 <밀회>를 선보인다. 이 작품은 아카데미 후보로 선정된 최초의 영국영화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만든 <위대한 유산>으로 아카데미 영화제 3개 부문을 수상한다. <위대한 유산>은 훗날 알폰소 쿠아론 감독에 의해 다시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데이비드 린의 고전적인 품격이 한발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찰스 디킨스와 시작된 인연은 1948년 작 <올리버 트위스트>로 이어지면서 데이비드 린 감독이 문학작품을 영화로 옮기는 데 특출한 재능이 있음을 증명하게 되었고, 이러한 행보는 E.M 포스터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인도로 가는 길>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데이비드 린의 영국 시절 영화를 선호하는 이들에게 이 시절의 영화들은 소시민적인 삶과 애환을 다루면서도 인간에 대한 통찰과 고전적인 품격을 유지한 영화들로 인정을 받는다. 1957년에 <콰이강의 다리>로 할리우드 깊숙이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의 수상 경력은 화려했다.
<콰이강의 다리>는 감독상을 비롯하여 아카데미의 7개 부문을 석권하였으며, <아라비아의 로렌스> 역시 감독상을 포함한 7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당시 할리우드는 텔레비전 방송 산업에 맞서기 위해 대작을 만드는 것에 주력하였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스펙터클한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그가 영국 시절에 보여준 아기자기한 드라마의 솜씨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견해도 있었다.
4영화의 스케일 보다는 그 속의 인간들이 보여준 깊이와 넓이 때문에 찬사 받아온 린의 작품들
하지만 두 시절을 관통하는 인간의 강박관념은 영화의 규모가 크던 작던 동일하게 드리워진 데이비드 린의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유산>의 주인공인 핍이 느끼는 성공에 대한 갈망과 집착은 그를 파국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인간의 자존심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파멸로 몰고 가는 지름길이 된다.
<콰이강의 다리>의 알렉스 기네스의 모습이야말로 대표적이다. 니콜슨 대령의 역할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그는 시종일관 제 시간에 다리를 완성하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일본군에게 수용되어 있는 영국군과 함께 있다. 일본군이 완성해야 하는 다리를 함께 짓자는 지휘관 사이토의 말에 니콜슨 대령은 제네바협정을 들먹이며 거부를 한다.
이로 인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인 함석으로 된 오두막에 니콜슨이 갇히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곳은 마치 ‘오븐’처럼 열기로 가득하다(이 장면의 느낌은 앞에서 언급한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사막 장면과 흡사하다). 이후 두 사람은 일종의 자존심 대결을 펼치며 다리 만들기를 실행한다. >
그것은 전쟁의 비극과 참상을 말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전쟁 속에서도 굽힐 수 없는 인간의 자존심에 대해 인상적인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인간이란 참으로 기묘한 존재이다. 적군을 도운 죄로 기소 당하지 않겠냐고 동료가 묻자 니콜슨 대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젠가 전쟁이 끝나면, 이 다리를 오랫동안 사용할 사람들이 와서 이 다리를 어떻게 지었는지, 그리고 누가 지었는지를 가슴에 새기게 되기를 나는 바라네.” 니콜슨은 로렌스만큼이나 낭만적인 생각과 이상으로 가득 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첫 열차가 통과하기 전날 밤, 그는 다리 밑에 “영국군 장병들이 설계하고 지었다.”는 명판을 망치질 한다.
아군과 적군의 구별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니콜슨이나 로렌스는 쉽게 용인 받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인간은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에도 자신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의 기이함을 보여주는 데이비드 린의 세계가 아닐까.
그가 영국 시절에 이어 미국에서 만든 영화들은 규모의 웅장함 때문이 아니라 그가 보여준 인간의 넓이와 깊이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계속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린의 세계는 이를 보여주는 거대한 서사시를 완성해 간 여정이었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아쉽게도 데이비드 린 감독에 대한 참고할만한 서적은 국내에는 드물다. 이 원고에 참고한 것은 켄터키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Beyond the Epic - 데이비드 린의 삶과 영화이다. 참조할만한 것이 있다면,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주인공인 T.E 로렌스와 관련된 것들이다. <지혜의 일곱 기둥> 은 전 3권으로 나온 로렌스가 쓴 자서전적인 책이다. 아라비아의 사막을 헤치던 그의 내면의 기록을 담고 있다. 그를 아라비아로 파견한 영국 정부와 충돌하는 장면을 비롯하여 영화 속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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