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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세계사 , 기타 전쟁사, 문화사, ) 사건, 전투 , 등

프랑스 혁명 1

by 자한형 202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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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1) 배경이 된 7년 전쟁 /누들스

유럽 7년 전쟁은 1756~1763년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벌어진 대규모 전쟁.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 영국, 프랑스 왕국, 스웨덴, 스페인 왕국 등 당시 유럽 열강 전부와, 기타 포르투갈 왕국이나 신성 로마 제국과 이탈리아반도의 크고 작은 제후 국가들까지 참전했음.

아시아 쪽에서는 무굴 제국도 끼어들었음. 게다가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가 있는 신대륙에서는 아예 유럽 본토와 별개로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 부를 정도로 판이 커져버려 이 식민지들이 모국을 따라 서로 싸우고, 이 싸움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끌어들이며 싸웠음.

1. 배경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으로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빼앗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를 되찾고,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들고 일어남.

게다가 지난 전쟁으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끊고 정치적으로 완벽히 독립한 프로이센의 국력을 철저히 박살내고 프로이센 왕을 과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처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으로 되돌려놓고 프로이센을 철저히 분할, 과거 공국 수준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의도까지 있었음.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강대국으로 부상한 프로이센을 혼자서 압도할 순 없어서 동맹국을 끌어들여야 했고, 당시 유럽의 외교 관계는 여러 국가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음.

참고로 프로이센은 1701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한 독일 제국 내의 왕국으로, 신성로마제국 동북쪽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출발하여 독일 제국 수립의 주역으로 성장한 국가임. .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으로 영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팽창 야욕에 대항하고 있었고, 프로이센은 이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음. 그렇기 때문에 만약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공격한다면 프랑스가 프로이센 편에서 참전하는 것은 기정사실과도 같았음.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프랑스는 예전부터 눈독들이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3]와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할 것인데, 이미 프로이센만으로도 버거운 오스트리아 입장에서 강력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또 다른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음.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를 이탈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동맹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음.

한편, 영국의 하노버 왕가는 오스트리아 편으로 참전할 경우 프로이센과 프랑스라는 두 육군 강국 사이에 끼어있는 하노버를 방어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 불안에 떨고 있었음. 당시 영국은 하노버 선제후국과 동군연합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조지 2세는 영국의 왕인 동시에 하노버의 선제후로써, 하노버의 안전을 우선 순위로 두고 있었음.

영국의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프로이센을 붙잡아 두는 탱커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지난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한심한 전과를 보인 터라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미덥지 못하다고 여겼음. 이 때문에 영국은 하노버를 지키기 위해 러시아에 군자금을 지원해서 러시아 군대로 프로이센을 견제하는 동시에, 프로이센에도 접근하여 하노버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였음.

러시아의 경우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북부의 발트해 연안으로 진출하고자 하고 있었으며, 이를 완수하기 위해 프로이센과 대결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음. 그리고 스웨덴이나 독일의 작은 공국들 등 크고 작은 나라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유럽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음.

한편 영국과 프랑스는 7년 전쟁 발발 이전에도 북미와 인도에서 식민지를 두고 이미 무력 충돌을 벌이는 중이었음. 거기에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연합왕국을 계기로 앤 여왕 때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1801년까지 프랑스의 왕을 자칭하기도 했음. 물론 진지하게 왕위를 요구한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폼이었음.

이렇게 얽히고설킨 유럽 국가들 사이의 교착 관계는 미묘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서 잘 싸운다고 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군주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으로부터 슐레지엔을 회복하겠다는 집념에 불타고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외교를 통해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자 하였음.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넘겨준다는 강수까지 두면서 프랑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고, 비밀리에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음. 이 소식을 들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영국과 동맹하기로 하였음. 프로이센이 영국편으로 돌아서 버리자 동맹국 없이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버린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오스트리아는 이른바 동맹의 역전을 통해 단숨에 프로이센을 3면에서 포위하게 되었음.

원래

'오스트리아-영국 동맹 vs 프로이센-프랑스 동맹'이였던 외교 관계가

순식간에 '오스트리아-프랑스-러시아 vs 프로이센-영국'으로 바뀐 것.

전쟁은 프랑스 해군이 영국령 미노르카 섬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음.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은 예방전쟁 차원에서 작센 선제후국을 침공하여 점령했음. 이는 독일 내에서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프랑스를 자극했음.

2. 경과

3차 슐레지엔 전쟁이라고도 함.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 때에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을 빼앗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탈환을 기도하여 군비증강에 주력함과 동시에 200년 동안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와 제휴하고 다시 러시아 ·스웨덴 ·작센 기타 독일의 제국과도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포위할 체제를 정비하였음.

한편 영국과 결탁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17568월 기선을 제압하여 작센에 침입함으로써 전쟁이 터졌음. 이 전격전으로 프로이센은 서전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얼마 후 우세한 적군의 반격을 받아 점차 병력이 소모되어 수세에 몰렸음.

특히 17598월 오스트리아 ·러시아 연합군에게 쿠네르스도르프 회전에서 대패한 후로는 일시 베를린도 점령당했고 게다가 영국의 대()피트가 실각하여 군자금의 원조도 끊어져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프리드리히는 절망 끝에 자살을 결의한 때도 있었음.

그런데 1762년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女帝)가 급사하고 프리드리히를 숭배하는 표트르 3세가 즉위하고부터는 형세가 일변하여, 17632월 후베르투스부르크 화약이 성립되고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의 영유를 확인받게 되었음.

그 결과 프로이센은 유럽 열강의 지위에 올라 독일에서의 패권의 기초를 확고히 하였음. 또 세계적으로 보면 7년전쟁은 해외 식민지를 둘러싼 영국 ·프랑스 양국의 오랜 싸움의 일환이며 이로 인하여 영국은 대식민제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음.

쿠너스도르프 전투, Alexander Kotzebue, 1848년작

3. 결과 : 프로이센, 영국 연합군의 승리

- 1763년 파리조약, 후베르투스부르크조약 체결

- 영국의 북아메리카, 인도 식민지 획득

-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 확정

1757년 콜린의 프러시아 라이프가르데 대대

4. 각국 피해 상황과 이후 영향

프로이센은 18만 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33천 명이 사망.

오스트리아군은 15만 명 전사하고 2만 명 실종, 8만 명 포로.

프랑스군은 20만 명 전사하고 8만 명이 포로다.

러시아군은 전사, 실종, 장애 인원 및 포로가 약 138천 명,

영국군은 전사 및 장애 인원이 총 6만 명,

스페인군은 전사, 실종자 및 포로가 약 3만 명.

스웨덴군은 28천 명이 전사.

7년 전쟁은 참전한 모든 국가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남겼음. 전쟁 발발 전에도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대부분의 참전국들의 재정 상태가 영 좋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서 수년간 사방에서 전투를 벌인 탓에 이미 전쟁 4년차인 1760년 경이 되면 모든 참전국들이 그로기 상태에 빠졌음.

가장 부유하다는 영국조차 7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정부 부채가 58백만 파운드나 증가했는데, 이 액수는 영국의 1년 국민총생산과 맞먹는 금액이었음.

프로이센은 영국의 원조금을 받고도 부족해서 자국의 화폐를 평가절하하는 극단적인 처방으로 빚을 해결해야 했으며, 오스트리아는 전쟁이 한창인 시절에 장교의 수를 줄여야 했고, 러시아는 황태자비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석을 팔아서 군자금에 보탤 정도였음.

만약 전쟁이 한쪽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면 이긴 쪽은 상대로부터 많은 배상금을 뜯어내거나 새로 얻은 땅에서 세금을 걷어서 전쟁이 끝난 뒤에 어떻게든 해결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쟁은 백중세로 끝났고 유럽의 국경선은 7년 전쟁 이전과 거의 바뀐 것이 없었음.

오스트리아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고, 또 불구대천의 원수 프랑스와 혼인동맹까지 맺었음에도 또 패배하여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완전히 상실했음. 물론 슐레지엔 자체는 이미 전쟁 전부터 프로이센이 실효 지배하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잃은 것은 거의 없었지만, 이후로 두 번 다시 슐레지엔에 대한 영유권을 명목상으로도 주장하지 않았음. 전략적으로 실패한 마당에 경제적으로도 손실만 본 전쟁이었음.

슐레지엔이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 전체 세입의 22%가 걷히는 중요한 지역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수복하겠답시고 전비로만 무려 오스트리아의 11년치 예산을 쏟아부었기 때문. 덕분에 종전 시점에서 오스트리아 국가 재정은 부도 직전이었지만 남편인 프란츠 1세의 뛰어난 재정 운용 능력으로 불려놓은 어마어마한 왕실의 사유재산을 써서 재정 파탄은 피할 수 있었음.

그래도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이 없지는 않았음.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쟁을 통해 대외적 이미지를 일신하고 국력의 굳건함을 과시했음. 이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절 때 한 수 아래 국가로 보았던 프로이센에 계속 털리면서 '이제는 지는 해'라는 이미지가 박혔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프로이센과 대등하게 싸우면서 타국이 오스트리아를 무시할 수 없게 된 것.

동맹의 역전으로 프로이센을 단숨에 포위하는 외교적 수완에 힘입은 것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군사 강국인 프로이센의 수도까지 털어볼 정도였음. 전쟁 준비와 수행 과정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도력을 의심했던 헝가리인 귀족과 체코인 도시민들을 상대로 다시 오스트리아의 지배권을 확립할 수 있었고, 이후 프로이센에게도 오스트리아는 함부로 더 이상 도발하기 힘든 여전한 강대국이라는 위신을 새웠음.

프로이센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막대한 전쟁 피해를 회복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음. 전쟁 과정에서 국토가 초토화됐고 주변을 포위한 강대국들의 침공에 거의 단독으로 맞서야 했으니 물리적인 손해는 프로이센이 가장 컸다고 할 만함. 특히 장교진의 손실이 엄청났으며, 이 손실은 프리드리히 2세 사후에 일어난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도 제대로 회복되지 못해 결국 프로이센군이 나폴레옹군에게 참패하여 굴욕을 겪는 주 원인이 되었음.

더군다나 슐레지엔은 이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부터 실효 지배하고 있던 터라 승전으로 얻은 물리적인 이득은 거의 없었음. 그나마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고하게 다져 오스트리아가 다시는 슐레지엔을 넘보지 못하게 했고 전 유럽에 프로이센의 군사적 강대함을 알렸다는 것이 소기의 성과였음.

러시아의 표트르 3세는 이 전쟁에서의 실책으로 몇 달 만에 부인 예카테리나 2세의 궁정 쿠데타로 실각. 지나친 친독정책으로 전쟁 승리를 날려먹은 것에 대한 러시아 제국 내부의 반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음. 무능의 대가로 표트르 3세는 폐위 후 목숨을 잃었음. 이와 별개로 이 전쟁은 러시아가 유럽의 국제 정치에 참여하는 시발점이었음. 러시아는 이전까지는 후진적인 사회구조와 경제 수준, 야만적인 문화 때문에 유럽의 일원으로 대우받지도 못했으며 아예 야만족으로 취급받기도 했음.

그러나 그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바탕으로 유럽에서 일어난 국제전에 러시아가 소방수 역할을 하면서 서구 열강 정치에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할만한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가 7년 전쟁에서 국력을 거의 소진한 틈을 타서 7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을 일으키고 폴란드를 분할하면서 흑해 연안과 동유럽에서 영토를 크게 확장할 수 있었음.

영국은 이 전쟁으로 인해 인도와 북미의 식민지 전쟁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이들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음. 하지만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지나친 전비 부담은 영국의 재정을 악화시켰음. 거기에 프로이센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실책까지 저지렀는데, 유럽 한복판에서 프로이센이 여러 강대국에게 얻어맞는 것을 보고 있음에도 해외 식민지를 싹쓸이하고, 심지어 재정지원까지 중단해 프로이센을 어려움에 빠뜨린 일까지 저지르는 바람에 프로이센은 영국에 원한을 갖게 되었고, 훗날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영국에게 보복을 하였음. 심각한 재정난을 겪기는 했지만 영국 본토는 전란의 피해애서 벗어났기에, 그리고 대량의 식민지를 얻어내며 유럽의 패권국으로 부상할 준비를 갖췄음.

세계사 큰 영향

1) 미국 독립전쟁 발발 계기

2) 프랑스 혁명 발발 계기

프랑스 혁명 (2) 루이 15세와 16& 마리 앙투와네트

루이 15세의 무능 : 재위 17151774.

루이 16: 재위 1774~1792. 바스티유 습격 1789

1745년 이후 루이 15세가 정치적으로 무능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점차 그 권위를 상실. 수많은 정치적 파벌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루이 15세에게 다양한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는데 이에 대해 루이 15세는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못한 채 우유부단한 모습만을 보였음. 루이 14세와 같지 않았던 루이 15세는 그럴 때마다 궁정에서 도피하였고, 정치는 더더욱 여러 파벌들 사이의 치열한 투쟁의 장이 되어 갔음.

그러는 사이 루이 15세의 프랑스 정부는 1756년 다시 한 번 유럽 전역에 걸쳐서, 식민지까지 연루되어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걸쳐서 벌어진 7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말았음. 이번에는 프랑스가 전무후무하게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영국 및 프로이센과 대적.

1763년 파리 조약으로 끝난 7년 동안의 전쟁에서 프랑스는 유럽에서는 프로이센군에게, 아메리카와 인도에서는 영국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게 되었고, 누벨프랑스와 인도 식민지를 영국에게 양도해야만 했음. 그리고 다시 한 번 프랑스는 막대한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었음.

유럽 7년 전쟁은 1756~1763년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벌어진 대규모 전쟁

1763년 파리 조약 (7년 전쟁 결과)

유럽의 7년 전쟁과 북미대륙의 프렌치 인디언 전쟁의 결과로 맺어진 강화 조약. 1763년에 영국, 프랑스, 스페인 간에 체결. 프랑스는 퀘벡 등 캐나다의 영토와 미시시피강 이동의 루이지애나를 영국에 할양하고 미시시피 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 할양했음. 이것은 프랑스가 북미대륙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것을 의미했음. 또한 세네갈을 영국에 할양하고, 일부 상업 도시를 제외한 인도의 식민지를 포기해야 했음. 이는 인도에서 사실상 철수를 뜻하는 것이었음.

이로 인해 영국이 인도와 북미 식민지 패권을 확립. 이후 덕택에 영국은 거대한 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산업 혁명의 진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음. 그러나 한편으로 장기적인 식민지 항쟁은 영국, 프랑스 양국에 심각한 경제 난을 초래했고, 따라서 영국은 북미 식민지에 대해 경제 통제를 강화하면서 북미 이민자들의 반발을 불러 미국 독립 전쟁을 초래하게 되었음.

루이 15세 암살 시도 사건

18세기 후반에 접어든 프랑스는 정치, 사상, 문화적으로 대격변의 시기였음. 스스로가 정치적 주체임을 내세우는 자들이 왕권에 도전하는가 하면 퐁파두르 부인을 감싸고도는 루이 15세에 대한 비난이 곳곳에서 흘러나왔음. 루이 15세에 대한 증오는 17571월 다미앙이라는 자에 의한 암살 시도로 이어짐. 다행히 겨울철 두터운 외투로 치명적인 상처를 피할 수 있었던 루이 15세는 그를 용서하려고 했지만 앙리 4세 암살 이후 150여 년 만에 발생한 국왕 살해 시도는 엄중한 법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 같은 해 3월 다미앙은 그레브 광장에서 네 마리의 말에 사지를 묶인 후 능지처참에 처해지게 되었음. 이러한 상황에서도 루이 15세에 대한 대중의 여론은 동정적이라기보다는 싸늘한 편이었음. 친정이 시작된 지 15년이 지난 당시 그는 더 이상 친애왕(사랑 받는 왕)’이 아닌 미움받는왕이 되었음. 이는 그의 악행보다도 그의 무능력함이 초래한 상황이었음.

루이 15세 암살 미수범의 사형 집행 (능지처참)

모푸의 개혁

1769년과 1771년에 정치적으로 더욱 무능해진 말년의 루이 15세 치세에 마지막 개혁의 시도들이 펼쳐졌음. 재무총감조제프 마리 테레와 국새상서이자 국상인 르네 니콜라 드 모푸를 중심으로 법복귀족들의 세습 특권과 면세 특권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이 시작되었음.

특히 그 자신이 고등법원 법복귀족 출신인 모푸는 누구보다 자신이 속한 계층의 특권이 프랑스 재정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 법복귀족들은 사상적·정치적으로는 왕권의 제약을 부르짖으며 영국식 체제를 꿈꿨지만 사회적·경제적으로는 자신들의 구체제적 특권들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순을 보여 주었음.

1774년 루이 15세 사망, 루이 16세 즉위

모푸의 개혁이 루이 15세의 동의 아래 한창 전개되고 있을 때 1774510일 루이 15세는 천연두로 사망.

루이 15세는 결코 악독하거나 잔인한 왕이 아니었음지만 유약하고 부드러운 성격은 그의 정치적 무능함으로 이어졌고, 퐁파두르 부인에 대한 의존은 그의 모습을 소수의 파당들로 둘러싸인 폭군의 이미지로 나타나게 하였음. 즉 그는 루이 14세 같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왕정에 대한 모든 비판과 비난을 뒤집어써야만 했음. 이제 왕위는 루이 15세의 손자인 스무 살의 루이 16세에게 돌아갔음. 하지만 모푸의 개혁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 그리고 프랑스 구체제의 구조적 모순은 더욱 깊어만 갔음.

열다섯 살이 되는 17705월 루이 16세는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 7년 전쟁 때부터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여론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을 프랑스의 숙적이자 7년 전쟁 패배와 연관된 세력으로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 즉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은 국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고, 이에 따라 루이 16세는 공식석상에서 왕비를 친근하게 대할 수가 없었음.

1774년 루이 15세가 사망하자 스무 살이 된 루이 16세는 부르봉 왕조의 다섯 번째 왕으로 즉위. 그는 그 어떤 왕보다도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군주가 되고 싶어 했고, 충분히 그러한 성격을 지녔으나 정치적 결정력이 부족한 소심한 성격은 그의 치세를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음.

하지만 다양한 여론들 중에서 그에게 강한 정치적 압박을 가한 계층은 바로 특권 계층인 고등법원의 법복귀족들이었음. 이들은 루이 16세가 즉위하자 루이 15세 말기에 추진되었던 모푸의 개혁을 좌절(즉위 후 모푸 해임)시키고 다시 한 번 자신들의 특권을 수호하는 데 성공하였음. 다른 한편 그는 종교적인 차원에서도 선왕들에 비해 가장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음. 1787년 반포된 베르사유 칙령을 통해 루이 16세는 드디어 프랑스 왕국 내에 비가톨릭교도들, 즉 칼뱅파 개신교도와 루터교도, 유대교도들에게 법적 지위를 보장하였고 그들의 신앙 활동을 인정하였음.

루이 15& 루이 16

재정 악화 심화와 미국 독립전쟁 개입

하지만 그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크고도 심각한 문제는 바로 루이 14세 말기부터 내려 온 재정 문제였음. 루이 15세 당시 플뢰리 추기경에 의해 어느 정도 완화될 수 있었던 재정문제는 이후 재발된 국제전들, 특히 프랑스의 패배로 끝난 7년 전쟁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갔음. 튀르고, 말제르브, 네케르와 같은 유능한 행정가들에 의해 왕국의 개혁안들이 추진되었으나 번번이 특권계층들, 특히 고위 성직자와 법복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음.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왕국 내 가장 많은 부를 차지하고 있던 이들에 대한 과세가 이루어져야 했지만 이들에 대한 과세 시도는 폭군의 절대주의적 정책으로 비난받았음.

이러한 재정 악화 가운데 루이 16세 정부는 7년 전쟁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1775년에 발발한 아메리카 독립혁명 전쟁에 개입하기 시작. 1778년부터 루이 16세 정부는 아메리카 혁명군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하기 시작했으나 프랑스 국익을 위해서는 그다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 1783년 파리조약으로 북아메리카 13개 주는 독립을 획득했으나 프랑스는 옛 누벨 프랑스의 영토를 회복하는 데 실패하고 전비만을 지출하여 재정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음.

1783년 파리조약 (미국 독립)

대영제국과 미합중국과의 미국 독립 전쟁 이후 1783년 미국의 독립을 승인한 조약. 17824월 본국(영국)과 식민지는 강화 협상을 시작. 프랑스는 영국이 에스파냐에게 지브롤터를 돌려주지 않으면 협상에 응할 계획이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음. 그러나 식민지는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을 우려하여 영국과 예비조약을 논의하였고, 178211월 합의에 도달하였음. 외교적 노력 끝에 프랑스와 에스파냐도 종전에 동의하였고, 17839월 파리에서 독립전쟁의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음. 강화조약에는 영국은 식민지, 즉 미국의 독립을 무조건 승인하며, 미국의 영토는 동쪽으로 대서양, 서쪽으로 미시시피강, 남쪽으로 플로리다 경계, 북쪽으로 캐나다 경계까지로 인정하고, 미국은 영국에게 빚을 갚고 몰수한 영국인의 재산을 보상하기로 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음. 이로써 미국은 더 이상 영국에 간섭받지 않은 독립국이 되었음.

1785년 마리 앙투아네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

프랑스 역사상 희대의 사기 사건이자 프랑스 혁명의 발판을 놓은 사건. 국왕 루이 15세는 자신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을 위해 왕실 보석상 뵈머에게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다이아몬드들을 모아서 목걸이를 만들어 오라고 명했음. 뵈머는 신바람이 나서 무려 값비싼 다이아몬드 600개로 목걸이를 만들었는데 루이 15세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줄 사람이 없어져 버림. 뵈머는 새 국왕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이 목걸이를 사 달라고 간청했지만 프랑스의 재정 상태를 알고 있던 앙투아네트는 이 목걸이가 너무 비싸다며 거절.

한편 프랑스 대귀족 출신인 로앙 추기경은 앙투아네트의 신뢰를 얻고자 동분서주했으나 앙투아네트는 이 타락한 추기경을 싫어했음. 이유인즉슨 앙투아네트가 결혼 전 고향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 로앙이 프랑스 대사로 와 있으면서 온갖 스캔들과 사치스런 생활을 일삼았고 이후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를 험담하고 다녀서 여제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눈 밖에 났기 때문.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에 시집 온 후 로앙 추기경을 멀리하고 어머니의 부탁으로 로앙을 프랑스로 소환시켜 버렸음. 로앙의 입장에선 앙투아네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출세길이 막힐 위기였음.

이런 정황들을 알고 접근한 여자가 있었는데 바로 발루아 라 모트 백작부인. 백작과 결혼한 게 아니라 발루아 왕조의 방계 후손이라고 칭했기 때문에 정확히 표현하면 '여백작'이 맞음. 그런데 라모트의 남편은 평민이었음에도 '아내가 백작 부인이니까 나는 백작'이라면서 자신을 백작으로 칭했음. 부르봉 이전의 프랑스 왕조인 발루아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던 이 여자는 로앙 추기경에게 접근해서 자신이 앙투아네트의 신임을 받는다고 속이는 데 성공했음. 라모트 부인은 로앙 추기경에게 앙투아네트가 루이 15세가 주문한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고 싶어한다면서 그 목걸이를 사다가 바치면 왕비의 환심을 얻을 것이라고 꾀어내었음.

그후 부인은 다른 공범들과 함께 앙투아네트의 필적을 따라하여 편지를 여러 통 위조해 로앙에게 보내서 앙투아네트가 로앙에게 마음을 연 것처럼 속였음. 그리고 왕비와 닮은 한 소녀를 찾아내 이 소녀를 왕비라 속여 야밤에 로앙 추기경과 베르사유 궁의 숲에서 만나게 해줬음. 로앙은 어두운 밤이라 상대방의 얼굴을 제대로 못 봤음에도 앙투아네트가 완벽하게 자신을 총애하게 되었다고 착각하였음.

결국 로앙은 뵈머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서 앙투아네트에게 전해 달라며 부인에게 넘겨주었고 부인은 남편을 런던으로 보내 이 다이아몬드를 분해하여 매각해 버림. 남편은 런던에 머물렀으나 부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파리에 그대로 남아서 정부들을 사귀며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음.

로앙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서 백작부인에게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몇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앙투아네트에게 자신이 선물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어떻게 했느냐고 용기를 내서 묻게 되었음. 그러나 전혀 그런 사실이 없던 앙투아네트는 분개하며 의회에서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했음.

로앙은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자신은 그저 속았을 뿐이라고 주장하여 무죄로 풀려났고, 오히려 앙투아네트만 궁지에 몰렸음. 백성들은 평소 사치스런 이미지로 유명한 왕비라면 그런 엄청나게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가로채고도 남고 로앙이 앙투아네트에게 이용당하고 버림받았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

백작부인은 사기 혐의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지만 혁명 세력에 힘입어 탈옥하여 영국으로 도망친 후 "잔 발루아의 회고록"이라는 책을 내서 자신은 앙투아네트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음. 더구나 목걸이 사건과는 별도로 앙투아네트가 매우 사치스럽고 방탕하며 남자 애인은 물론이고 여자 애인까지 여러 명 거느리는 등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악담을 퍼뜨렸음. 이렇게 날조된 앙투아네트의 이미지는 다시 프랑스로 유입되어 왕비를 창녀로 묘사하는 포르노 찌라시가 인쇄되었고 이는 파리의 하층민을 중심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 왕실의 권위가 추락했음. 여기에는 물론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의 전통적인 라이벌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이라는 점도 한몫했음. 거짓투성이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려서 백작 부인 잔은 짭짤한 수입을 거두었음.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앙투아네트라고 할 수 있는데 나중에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정부는 앙투아네트를 심문하면서 잔과의 관계 및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 대해서 심문했음. 앙투아네트는 당연하게도 결백을 주장했지만 민중은 그것을 믿지 않았음. 그리고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하고 앙투아네트를 구렁텅이로 밀어넣은 잔도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한 후 파리에서 빚쟁이들을 피하다가 추락사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