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5) 1790~1792년 혁명 전쟁/누들스
국민의회의 사회 개혁 작업
파리에 거주하게 된 루이 16세는 사실상 입헌군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정국의 주도권은 국민의회가 발휘하였음. 자코뱅 클럽과 같은 정치 클럽이 활성화 되면서 정치활동도 활발해졌음. 1790년에 풍작으로 시위와 소요가 줄어들고 민심도 안정화된 가운데 프랑스 사회의 전반에 대해서 다양한 개혁이 진행되었음. 재정적자와 50억 리브로에 가까운 부채 문제 해결 위해 성직자의 재산을 국유화하고 국유재산을 담보로 공채인 아시냐를 발행했음.
교회에 대한 개혁작업은 1789년 11월 2일에 성직자와 교회 재산에 대해 국유화가 추진하면서 시작되었음. 수도원을 해체하고 1790년 7월 성직자 기본법을 제정하여 성직자를 국가 공무원화하여 월급을 지급하였음. 이를 통해 사실상 교황을 대신하여 서임권을 행사하는 등 국가가 성직자를 관리했음.
이를 위해 국민의회는 성직자 기본법의 준수에 대한 선서를 성직자들에게 요구하였는데, 이를 거부하는 교회의 일부 세력은 반혁명 운동에 가담하는 등 저항하였고, 교황 비오 6세도 이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였으며 양국의 외교는 단절되었음.
이 밖에도 길드(동업조합)폐지, 재판제도 등 사법부 개혁, 조세제도를 개편하였고 행정구역을 재조직하여 전국을 83개의 도와 그 하위 행정구획으로 나누었음. 재산 제한 선거제가 도입되어 일정 이상 세금을 납부하는 평민(남성)들도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음. 이러한 국민의회의 개혁작업은 마냥 순조롭지만은 않았음. 공채 아시냐는 단기간 내 재정 확보에는 기여를 했지만 인플레이션을 조장하고 경제를 악화시켰으며 종래에는 가치가 하락하였음.
의회 내 개혁파 정치세력도 분열하는 흐름이 있었음. 알자스에서는 독일 제후들과 영토분쟁이 있었고, 아비뇽 그리고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특권파 인사들이 소요도 있었음. 또한 외국의 군주들은 프랑스 혁명을 점차 불안한 시각으로 바라보았으며 망명파 프랑스 귀족들은 이런 불안감을 부풀리고 조장하기도 하였음.
아시냐 공채 (1792년 발행)
국왕 일가 바렌 도망 사건
혁명 발발로 귀족과 성직자들 중 국외 망명자가 증가함에 따라 국왕이 의지할 국내 세력은 점차 약해져 갔음. 1791년 4월, 국왕과 혁명 세력간에 중개자 역할을 해오던 미라보가 갑자기 사망하자, 과격한 혁명을 반대해온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친분이 있는 스웨덴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의 도움을 받아,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피신할 계획을 세웠음.
1791년 6월 20일, 파리를 탈출한 루이 16세 일가는 국경 앞의 바렌에서 민중들에게 발각되어, 6월 25일 파리로 되돌아옴. 프랑스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으며 동시에 이 사건으로 루이 16세의 반혁명 의도가 드러나게 되었음.
의회는 프랑스인들을 실망시킨 루이 16세의 왕권을 중지시켰으나 의회 내 내분이 생기면서 7월 15일경 루이 16세의 권한을 복위시킴. 그러자 이에 대한 반발이 있었는데, 7월 17일에는 급진적 공화정을 주장하는 코르들리에(cordeliers)라는 정치 클럽의 주도하에 민중들이 파리에서 국왕 폐위와 재판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가 국민방위대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하여 수십 명이 사망하는 샹 드 마르스의 학살 사건이 발생함.
한편 망명 실패 소식을 접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 2세는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프랑스 왕비)와 부르봉 왕가의 신변 안전과 왕권 복위를 돕고자 각국 군주들에게 파두아 회람을 돌려 프랑스의 상황을 알리고 협조를 구함. 또한 프로이센과는 동맹을 맺고 8월 27일 《필니츠 선언》을 통해 국민의회를 외교적으로 압박하였음. 잡혀서 비탄에 빠진 앙트와네트 왕비 Arrest_of_Louis_XVI_and_his_Family,_Varennes,_1791
듀플레시 베르트랑의 그림 "파리로 귀환하는 국왕 가족" (6월 25일)
필니츠 선언
오스트리아 및 신성로마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발표한 공동선언. 프랑스 혁명이 진행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행하였음. 바렌 도피 사건 후 프랑스의 왕위가 위태로워진 것을 보고 레오폴트 2세는 질서를 회복하고 루이 16세를 원조하기 위하여 열국 군주가 공동으로 항의할 것을 요청,
1791년 8월에 독일의 필니츠(Pillnitz)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회견하여 프랑스 왕의 지위 회복을 요구하는 선언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역효과를 발생시켜 파리시민들을 자극하였음. 루이 16세가 외국과 내통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국왕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만 커지고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충성심이 사라져 버렸음.
현재의 필니츠 성
입법 의회
1791년 10월 1일부터 1792년 9월 20일까지 있었던 프랑스 왕국의 입법의회. 프랑스 최초의 입헌군주제 정권하에 있었던 의회였음. 일원제로 〈헌법제정 국민의회〉(입헌의회)에 의해 제정된 '1791년 프랑스 헌법'에 따라 소집되어 8월 10일 사건 이후 국민 공회를 위한 의원 선거를 실시하고 해산했음. 정식 명칭은 ‘입법국민의회’이고 ‘입법의회’는 약어.
1791년 9월 3일에 제한 선거와 입헌 군주제를 골자로 한 새로운 헌법(1791년 프랑스 헌법)이 공포되었음. 이 헌법을 바탕으로 그해 10월이 되어 첫 번째 선거가 실시되었음. 선거를 통해 절대군주제가 폐지되고 의회주의와 입헌군주제가 채택되어 새로운 의회인 입법 의회가 구성되었음.
입법의회에는 중도파가 340석, 입헌군주제를 지키려는 온건파인 푀양파가 240석, 국왕 없이 공화제를 주장하는 자코뱅파가 130석을 차지했음. 푀양파는 주로 의사당의 우측에 앉았고 자코뱅파는 주로 죄측에 앉았는데, 이로 인해 온건한 세력은 우파, 급진적인 세력은 좌파라고 부르는 관행이 생기게 되었음.
1791년 프랑스 헌법 승인의 우의화Augustin Challamel, Histoire-musée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depuis l'assemblée des notables, Paris, Delloye, 1842
자코뱅파의 기원과 분파들
클뢰브 데 자코뱅(Club des jacobins)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자유와 평등의 벗, 자코뱅회(Société des Jacobins, amis de la liberté et de l'égalité)은 프랑스 혁명 시기에 생긴 정파 중 하나. 자코뱅이라는 이름은 파리 자코뱅 수도원을 본거지로 한 데서 유래.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가 중심이 되어 급진적인 혁명을 추진한 시기로 유명.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주류로, 공포 정치로 활약하고 테르미도르의 쿠데타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음.
자코뱅의 주도 세력은 주로 산악파였기 때문에 자코뱅은 산악파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나, 다른 의미임.
원래는 클뢰브 데 자코뱅이라는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정치 클럽이었음. 이 정치적인 클럽은 프랑스 전국에 지부를 가지고 체계적으로 혁명을 추진했음. 그러나 혁명을 거치면서 신념과 정책에 의해 분열되었고,
먼저 입헌군주파이던 푀양파가, 이어 절충공화파인 지롱드파가 이 클럽에서 탈퇴하고 궁극적으로 산악파(Montagnards)라는 급진공화파의 집단이 자코뱅 클럽에 남아 있고 주도권을 쥐게 됨. 그러나 루이 16세의 '국가방위군'에 의해 진압되는 일이 있으나 3년 후 다시 일어나게 됨.
따라서 자코뱅파는 넓은 의미로 자코뱅 클럽에 속해 있던 시민, 또는 간단하게 혁명을 지지했던 혁명파를 가리키는 자코뱅파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후자의 급진공화파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음. 실제로, 라파예트, 브리소와 같은 등의 푀양파나 지롱드파의 대표 주자도 한때 자코뱅 클럽에 속해 있었지만, 그들을 가리켜 자코뱅파라고 하지는 않음. 그러나 지롱드파가 자코뱅의 지류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파벌 간 충돌이 심각해지기 이전에는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 세 명을 가리켜 “자코뱅 세 거두”라고 불렀음. 파벌로는 이하 일곱 파벌.
1) 산악파
빈민과 노동자 및 급진 지식인들로 구성된 자코뱅 내 좌익 파벌. 몽타뉴는 ‘산악’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몽타뉴파로 분류된 좌익 계파의 의석은 국민공회 의석에서 제일 위에 위치했기 때문. 지롱드파 중 평원파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설정되며, 급진적인 공화주의 개혁을 주장했음.
2) 당통파
산악파 내 우익 세력으로, 별칭 관용파로 불리기도. 조르주 당통을 영수로 하고, 카미유 데물랭, 에로 드 세셸 등도 유력한 멤버. 술과 여자, 갬블 등 인생을 즐기고 있던 향락적인 인물이 많은 것이 특징.
3) 로베스피에르파
공안위원회의 중심적인 위원이었던 로베스피에르가 이끌던 계파로 산악파 내에서 중도 쪽에 위치한 성향을 가졌었지만, 에베르파와 별다른 차이가 없을 정도로 급진적인 성격. 생쥐스트도 이 계파에 속했으며, 공포정치 당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인해 완전히 몰락. 공포정치를 주도한 계파지만 회원들에게 엄격한 금욕주의를 요구하는 등 도덕적인 명분을 중시하던 계파.
4) 에베르파
산악파 내 좌익 세력. 중요한 회원 중 한 사람인 자크 르네 에베르의 이름을 붙였지만, 특정 지도자는 없었음. 거의 대부분의 회원은 빈민, 급진적인 지식인들이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무신론의 영향을 받았기에 가톨릭의 완전한 철폐를 주장하였음.
5) 앙라제
후발 그룹으로 가장 급진적인 평등주의자 파벌.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기 때문에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고,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에는 탄압의 주요 대상이 되기도. 사유 재산의 폐지를 요구하는 등 분배 중심의 초기 마르크스주의적 주장을 펼쳤음. 마르크스주의의 뿌리로 알려진 프랑수아노엘 바뵈프, 국제적인 직업 혁명가 필리포 부오나로티 등이 여기의 멤버로 거론.
6) 마레파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가 중심이 된 파벌이었으며, 마레는 '저습지'를 의미하는데, 이들의 의석은 주로 국민공회에서 아랫 부분에 있었기 때문. 중도적 파벌이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는 산악파에 가담하기도 했고 지롱드파에 가담하기도.
7) 지롱드파
니콜라 드 콩도르세 후작, 자크 피에르 브리소 등으로 대표. 이들은 혁명에서 중도 계파로 알려졌으며, 다른 계파와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자들이 중심이 된 파벌이었음. 신분제와 노예제 폐지 등을 주장하였으며, 거의 대부분의 회원은 절충적인 공화주의자들이었으나 일부는 혁명 초기에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기도. 가담 계층은 주로 개혁교회 회원이었거나 중산 프티 부르주아 계층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기간에 숙청되면서 세력이 급속도로 위축되기 시작.
1791년 도미니코회 도서관에서 열린 자코뱅 회합. Une séance au club des Jacobins. Alexandre de Lameth préside tandis que Mirabeau prononce un discours (janvier-février 1791) - gravure d'époque
장교들의 반발
군대의 모든 장교는 헌법과 의회에 새로이 맹세를 해야 했음. 모든 장교는 헌법을 수호하고 침략을 막아내며 의회의 법령에 의거한 것이 아닌 다른 명령은 따르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에 자필로 서명해야만 했음. 이 맹세는 군의 분열을 초래했음.
당시는 귀족 가문 출신만이 장교가 될 수 있었는데 많은 장교들이 혁명을 반대하며 왕당파를 지지했고 입헌군주제를 반대했음. 결국 상당수의 장교들이 무더기로 전역을 한 후 망명 귀족들과 합류해 국외로 탈출하였음.
가톨릭의 저항
프랑스 혁명의 타깃은 봉건 왕조를 겨냥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교회를 겨냥하고 있었음. 시민들은 곳곳에서 앙시앵 레짐을 상징하는 가톨릭교회를 습격하고 성상을 파괴했음. 이 때문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프랑스 혁명에 극렬 저항했음.
가톨릭교회는 교종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분쇄 시키기 위해 가톨릭 군주들의 군대 파병을 요청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내세워 반혁명 선동을 일삼았음. 프랑스 혁명으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가톨릭교회는 시민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켰음.
왕당파의 방데(Vendéenne) 반란
성직자 기본법에 반대한 로마 가톨릭교회 세력과 왕당파의 반란. 결국은 수많은 희생자를 낳고 진압되었음. 원래 방데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서부는 가톨릭 신앙이 독실한 지역이었음. 1789년 발발한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혁명에 호의적이었으나, 그 후에 자행된 가톨릭교회와 사제들에 대한 탄압, 국왕의 처형, 증세, 불공평한 30만 모병으로 봉기하게 되었음.
반란 세력은 스스로를 가톨릭 왕당군대(The Catholic and Royal Army)라 불렀음. 왕당파는 백색군, 혁명파는 청색군으로 구분되었음. 프랑스 서부에 있는 방데 지역의 농민들에 의해 1793년 시작되어 나폴레옹이 1801년 공식적으로 끝내기까지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30~40만에 이르는 사망자를 냈음.
브르타뉴, 메인, 앙주, 노르망디에서 발생한 슈아누리 반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들의 반란은 때로는 ‘서부 전쟁’(Guerres de l' Ouest)으로 총칭됨. 혁명 중 가장 처참한 살육이 이뤄졌으며, 최근에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 프랑스에서도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음.
방데 반란의 시작이 된 1793년 3월 11일의 멘에루아르주 숄레 전투를 이끄는 라 로슈자클랭. Paul-Émile Boutigny - Musée d'art et d'histoire de Cholet, Cholet (프랑스)
루아르강을 넘어 북상하는 가톨릭 황군. Traversée_de_la_Loire_Vendée. Jules Girardet - Musée Birkenhead, Grande-Bretagne
프랑스 혁명 전쟁 발발, 선전포고
프랑스 혁명 사상의 전파를 염려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지배계급들은 자국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였음. 또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양국은 1792년 2월 대(對)프랑스 동맹을 체결하여 혁명정부를 압박.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필니츠 선언》과 왕당파와 망명 귀족(에미그레: 이민이라는 의미)의 선동 활동은 혁명 정부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받아들였음. 프랑스 혁명 정부는 대외 전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며 각 계파간에 전쟁에 대한 계산은 달랐지만 모두 전쟁을 원했음.
푀양파는 전쟁에 승리할 경우 자코뱅을 제어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음. 지롱드파는 전쟁을 유럽의 인민들을 해방시키는 성전이라 생각했음. 루이 16세와 측근들은 전쟁에서 패배하게 될 경우 군주권이 부활할 수 있는 은밀한 희망에서 전쟁을 원했음.
지롱드파 내각은 혁명을 계속하기 위해 대외 전쟁에 동의했음. 1792년 4월 20일, 루이 16세의 제의에 따라서 의회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선전포고안을 열광적으로 통과시켰음. 프로이센에는 조금 늦은 7월 8일에 선전포고를 했음.
그러나 프랑스군 장교들은 보수적인 귀족 계급이기 때문에 혁명 정부에 대한 협력에는 소극적이었음. 전쟁이 시작되자 9,000명의 장교들 중 약 6,000명이 망명하였고, 병사들은 정치 클럽에 참석하는 등 군기가 나태해졌음. 충원된 의용병들은 훈련과 경험이 부족했음.
결국 프랑스군은 5월에 각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음. 오스트리아와 첫 전투 중 자신들의 지휘관인 딜론 장군을 살해하는 하극상을 벌이는 등 사실상 프랑스 정규군은 와해 수준에 놓였음.
프랑스 혁명 전쟁 (1792년 ~ 1802년). Louis-François, Baron Lejeune 1280px-Lejeune_-_Bataille_de_Marengo
왕궁 습격 사건
다급해진 입법의회는 선서 거부파 성직자의 추방, 국왕의 친위대 해산, 지방 출신을 포함한 연맹군(국민방위대) 창설 등의 법령을 통과시킴. 그러나 6월 12일 루이 16세는 거부권을 행사하고 지롱드파의 대신들을 해임함. 시민들은 루이 16세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반발했으며 아울러 패전의 원인이 국왕 일가에게 있다고 생각했음. 특히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외국 군주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함.
결국 파리 시민들이 6월 20일, 왕궁인 튀틀리 궁을 습격함. 비록 습격은 최종적으로 실패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루이 16세는 심한 모욕을 당했음. 왕실은 또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런 일들은 상퀼로트의 출현과 지방에 있던 혁명을 옹호하는 국민방위대가 파리로 집결하면서 혁명이 급진적으로 흐르게 되었고 공공 질서가 무너지며 발생했음.
무산계급 상퀼로트의 등장
패전과 식량부족, 인플레 때문에 파리의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짐. 공채 아시냐는 가치가 40% 폭락했고 물가는 폭등하여 농민들은 곡식 판매를 거부했음. 소요가 발생했고 도시민들은 당국에게 공정 가격제의 시행을 요구함. 이런 혼란 속에서 도시에서는 상퀼로트가 등장했음.
이들은 귀족 남성들이 입는 퀼로트(무릎까지 내려오는 반바지) 대신에 긴바지를 입고 다녔기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으며 또 다른 특징은 붉은 모자와 긴 창을 들고 다녔음. 이들은 도발적인 활동을 통하여 공포정치를 조장하기 시작했음.
혁명을 급진적으로 이끌고 간 상퀼로트들은 대부분이 소생산자, 소상점주, 노동자 출신으로 혁명 초기에 참정권을 인정받지 못했던 무산계급이 다수였으며 수동적 시민으로 분류되었던 계층이었음. 이들은 자본집중 반대, 직접 민주주의를 통한 민중의 정치참여, 자유보다는 평등, 국왕 경멸, 국왕의 거부권 폐지, 공화제 등을 요구하였음. 이들의 활동은 급진적이고 과격했으며 이로 인해 상퀼로트는 대혁명 시기의 급진적인 민중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음.
상퀼로트 Sans-culotte_avec_sa_redoutable_pique_-_Lesueur. Jean-Baptiste Lesueur (1749-1826) / Pierre-Etienne Lesueur († 1802)
8월 10일 사건
7월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국경을 넘어 프랑스 영토로 침입하자 정부는 조국의 위기를 전국에 호소하였음. 이에 따라 프랑스 각지에서는 국왕 루이 16세가 행사한 거부권을 무시한 채 조직된 의용군들이 파리로 집결. 이때 마르세유의 의용병이 노래한 ‘라 마르세예즈’는 이후에 프랑스 국가(國歌)가 되었음.
7월 25일 프로이센군의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파리 시민들이 또다시 부르봉 왕실을 모욕한다면 파리를 무자비하게 응징하겠다는 협박성 선언을 하였음. 이 선언은 역효과를 불렀는데, 파리 시민들은 왕실이 여전히 외국 군주들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는 판단을 하게 만들었음. 패전으로 인한 절망과 왕실에 대한 분노가 뒤섞였고 흥분한 시민들에 의해 시위가 벌어졌는데, 소요사태가 커지더니 극단적인 수준으로 발전하고 말았음.
국가적 위기 속에 혁명이 급진적으로 변화하면서 입법의회는 이미 정국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상퀼로트, 자코뱅파, 코르들리에파, 지방에서 온 의용군 등이 파리를 장악하여 상황을 주도해 나갔음. 파리 시민과 의용군은 8월 10일에 왕궁인 튀틀리궁으로 몰려가서 공격하였음.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루이 16세는 의회로 피신하였음.
의회도 침입을 받아 군중의 압박 속에 황급히 왕권을 중지시키고, 국왕 일가를 모두 탕플 탑에 유폐했음. 또한 당통이 이끄는 6인 임시내각을 만들고 빠른 시일 내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국민공회 구성을 약속했음. 이 사건은 군주제가 몰락하고 공화제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음.
튀일리궁 습격, 카루젤 광장에서의 전투
9월 학살
파리는 상퀼로트들이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고, 혁명은 급진화하여 민중혁명 단계에 들어갔음. 상퀼로트들에 의한 자치체가 형성되어 이들의 압력으로 왕당파 신문들이 폐간되고, 징발, 징집, 공정가격제가 실시되었음. 감시위원회, 비상 인민재판소가 설치되고 선서거부파 성직자들의 추방, 종교의식 금지, 이혼 허용 등의 법령들이 통과 되었음.
이런 가운데 프로이센군이 8월 19일 국경을 돌파하여 9월 3일 베르됭이 점령 당했음. 프로이센군은 곧 파리로 들이닥칠 기세였음. 패전 소식에 파리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고, 파리 침공에 대한 위기감이 한층 높아지자 자원 입대자가 증가하였음.
한편, 의용군의 출병 후 수감되어 있는 반혁명주의자들이 탈옥하여 파리에 남은 가족을 학살할 것이라는 풍문이 떠돌았음. 전선에 나가기 전에 반역자들에 대한 숙청이 결정되었음. 9월 초부터 모든 감옥을 돌아다니며 반혁명자로 의심되는 수감자들을 형식적인 즉결심판을 거쳐 잔인하게 학살하였음. 또한 프랑스 전역의 반혁명 용의자를 체포하였고, 특별형사재판소의 약식 재판만으로 사형을 집행하는 일이 자행되었음. 이때 살해된 사람은 대략 최대 1만 2천명 정도로 추산됨.
9월 학살 (1792년 9월)
발미 전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베르됭을 점령한 후 파리를 목표로 아르곤느 계곡을 따라 이동하다가 뒤무리에와 켈레르만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군과 1792년 9월 20일 발미(Valmy)에서 조우함. 의용군을 포함한 4만 7천 명의 사기 높은 프랑스 군과 프로이센군 3만 5천 명이 8시간에 걸쳐 전투가 벌어졌음.
프랑스 포병대가 집중 포격을 쏟아부운 후 켈레르만의 보병부대가 프로이센 군을 상대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음. 패배한 프로이센군은 국경을 넘어 퇴각하였음. 발미 승리 후 프랑스 군은 국경을 넘어 사부아, 니스, 륀 등을 침공하였음. 1792년 11월에는 뒤무리에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혁명군이 제마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벨기에를 점령하여 강제 병합 선언하였음.
발미 전투에 의용병으로 참가한 많은 하층민 계급(상퀼로트, 무산자 계급)은 승리로 인해 정치적 발언권이 더욱 커졌음. 상퀼로트는 급진적인 정책을 제시한 자코뱅파를 옹호했고, 혁명은 극좌화되어감. 자코뱅파에는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 등이 소속되어 있었음.
이때의 혁명전쟁의 시작과 함께 발행한 아시냐 지폐(교회의 토지 등을 담보로 한 불환지폐)의 증발(액면가의 57%로 급락)은 나중에 1794년 최고가격령 폐지와 함께 발생한 급격한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었음.
발미전투 (1792년 9월 20일)
왕정 폐지, 제1공화국, 루이 16세 재판 개시
1792년 4월, 혁명군에 위협을 느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와 왕비가 오스트리아와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태는 벼랑 끝으로 달려갔음. 입법의회와 시민들은 궁전을 점거한 다음 국왕 부부를 감금하고 왕정을 정지시켰고, 나중에는 루이 16세를 폐위하고 왕정을 종식시키면서 프랑스에선 9월 21일에 혁명정부의 제1공화국이 출범했음.
그리고 11월에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와 내통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드러나면서 '시민 루이 카페(Citizen Louis Capet)'신분으로 재판을 받게 됨.
재판을 받게 되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
1790~1792년 연대기
1789년
11월 2일: 교회 재산 몰수, 국유화 선포
11월 14일: 아시냐 증권 발행됨
1790년: 혁명 체제의 탄생
4월: 마라와 당통, 코르들리에클럽 창립
6월 21일: 제헌의회, 교황령 아비뇽 몰수 결의
7월 12일: 제헌의회, 성직자 민사기본법 제정. 국가에 충성 서약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 1주년. 샹드마르스축제
8월 11일: 제헌의회, 십일조 폐지
8월 27일: 제헌의회, 아시냐 화폐 제정
9월 6일: 고등법원 폐지됨
10월 21일: 삼색기 국기로 지정됨
1791년: 파리의 계엄령과 헌법 제정, 입헌군주제
4월 3일: 왕실과 의회 중재하던 미라보백작 사망
4월 13일: 교황 비오 6세, 성직자 민사기본법 비난
6월 20일: 왕실, 국외 도피 시도
6월 21일: 바렌 사건. 왕실, 국경 부근서 붙잡힘
6월 25일: 왕실, 파리 송환됨. 자코뱅클럽, 퇴위 요구
7월 16일: 자코뱅클럽의 온건파가 푀이양클럽 창립
7월 17일: 샹드마르스공화정 요구 집회, 국민방위군 발포. 코르들리에클럽 폐쇄됨
8월 27일: 필니츠선언.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프랑스 무력 간섭
9월 3일: 제헌의회, 1791년 헌법 가결. 부르주아 주도 입헌군주제
9월 14일: 루이 16세, 헌법에 서약
9월 30일: 제헌의회 해산
10월 1일: 입법의회 소집
11월 9일: 입법의회, 망명 귀족의 재산 몰수령가결
11월 29일: 입법의회, 선서 거부 성직자 추방령 가결
1792년: 혁명의 위기와 급진화, 제1 공화국
1월 25일: 입법의회, 루이 16세에 필니츠선언 취소 요구 결의안
3월 10일: 지롱드파(브리소파), 푀이양파내각 총사퇴 요구
3월 23일: 지롱드파내각 출범
4월 4일: 입법의회, 유색인종 포함 모든 자유인의 평등 결의
4월 20일: 루이 16세, 의회 요구대로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혁명전쟁)
4월 25일: 라 마르세예즈작곡됨
6월 8일: 입법의회, 국민방위군 중 2만 선발해 파리 방위 맡김
6월 13일: 루이 16세, 지롱드파각료들 해임. 푀이양파내각 복구
6월 20일: 파리 시민, 튈르리궁 앞에서 내각 교체 항의 시위
7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군대가 프랑스 침공
7월 10일: 푀이양파내각 사퇴
7월 11일: 입법의회, 조국의 위기 선언. 의용군 모집
7월 25일: 프로이센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공작, 파리 불바다 선언
8월 3일: 파리 48구 중 47개 구의 루이 16세 폐위 청원서 의회 제출
8월 10일: 파리 시민, 튈르리궁 습격. 왕실 탕플탑유폐되고 왕권 정지됨
8월 11일: 입법의회, 보통선거제 의한 국민공회 소집 가결. 지롱드파 내각 부활
8월 19일: 라파예트, 파리 진군 실패하고 국외 망명
8월 23일: 오스트리아 군, 롱위점령
8월 25일: 입법의회, 봉건제 무상 폐지 법령 공표
9월 2일: 오스트리아 군, 베르됭함락
9월 2-6일: 9월의 학살. 1천 이상 왕당파 처형됨
9월 20일: 발미전투. 혁명군이 프로이센 군 격파. 국민공회 소집
9월 21일: 국민공회, 왕정 폐지 의결
9월 22일: 국민공회, 서력기원 폐지. 공화력(혁명력) 제정
9월 25일: 지롱드파, 산악파 대한 공격 개시
10월 2일: 국민공회, 보안위원회 설치
10월 29일: 로베스피에르, 지롱드파의고발에도 산악파 장악
11월 6일: 제마프전투. 혁명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진격
11월 14일: 혁명군, 브뤼셀 점령. 5일 후 벨기에 합병 선언
11월 20일: 튈르리궁의 금고에서 루이 16세의 내통 문서 발견됨
11월 27일: 프랑스 공화국, 사부아를프랑스에 병합
12월 11일: 루이 16세 대한 재판 개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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