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현
이 세상에 의외의 일이란 얼마든지 있게 마련이지만 내가 강군의 부음(訃音)을 들은 것은 정말 너무도 뜻밖이어서 처음엔 그 죽음의 대상이 그의 부자(父子)가 서로 엇바뀌어 잘못 전해진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날 내가 강군을 만난 것은 전혀 뜻밖의 우연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혼자 있기를 좋아했고, 근자에는 특히 오후의 산책을 즐기는 버릇이 있다.
주로 서재에서 외로이 지내는 것이 나의 일과이기 때문에 오후만 되면 부담없이 집을 나서서 아무데나 거닐기를 좋아한다. 온종일 호젓한 분위기에 젖어 있다가 집을 나서면 주로 명동이나 무교동 일대의 그 잡답(雜沓) 속을 헤쳐보고 싶어진다.
그런 때면 아무리 번거롭고 시끄러우며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눈에 띄더라도 나는 되도록 무감각한 상태에서 주위의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으려 하고, 또 그럴 수가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오직 혼자의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간혹 마주치는 알 만한 얼굴이 있고-뒤에서 쫓아와 알은 체를 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경우거나 나는 쉽게 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기 일쑤여서 상대를 민망스럽게 만드는데 그것은 내가 아둔하거나 어리숙해서 그렇기도 하려니와 자기 일 이외에는 되도록 등한히 하는 데서 오는 본의 아닌 실수이지, 상대를 무시하려는 오만한 성품의 소치는 아니다. 그날도 그런 식으로 강군을 만났다.
「어, 이게 누구신가? P선생 아니시오?」
명동 예술극장 앞을 지나며 무심히 연극 간판을 쳐다보는데 누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 예.」
「아하 P선생 오랜만이시오.」
「아하 네, 네.」
얼굴은 검은 편인데다가 눈매가 날카롭고 콧수염을 길러 가지런히 손질한 그런 사내가 내 손을 끌어당겨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하하, 참 이거 오래간만이오. 내 P선생 소식은 지상에서 늘 대하고 있었지. 나, 모르시겠소? 나 강인규야.」
나는 그제서야 그가 내 중학 동창인 줄을 짐작해낼 수 있었는데 그것도 좀 동안이 뜬 다음이었다.
「아, 그래 강인규, 강인규로구먼. 월남엘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아, 월남전쟁이 끝나 쫓겨온 지도 벌써 일년이 넘지 않았소.」
「참 그렇군. 그래 지금은?」
「P선생 ! 시간 있으시겠지?」
「선생 소리는 집어치우라구. 동창생끼리 선생이 뭔가?」
「그래도 P선생은 사회적으로 선생대접을 받는 분이니까 선생이시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불러팽개치는 선생 호칭은 아니잖소. 시간 있으시지?」
강군은 내 찬동 여부는 아랑곳 않고 팔을 끌며 앞장서더니 어느 조촐한 양주집 문을 밀고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 양주집은 그의 단골도 아니고 내가 들러본 기억도 없는, 그저 마침 간판이 눈에 띄어서 불쑥 들어선 집에 불과했다.
아직 시간이 일렀다. 봄철에 다섯 시도 채 안된 시각이니까 손님들이 있을 턱없어서 꼭 말상을 한 웨이트레스의 융숭한 영접을 받을 수 있었다
「스카치 두 잔.」
「아이 손님두, 우선 물수건이나 쓰세요.」
「스카치 두 잔.」
강군은 내 의사도 묻지 않고 그처럼 성급하게 굴고는.
「아하, 잘못 들어왔군. 양주는 내 성미에 안 맞는데 말야. 맥주집을 찾는 게 잘못 들어왔는걸.」
하는 식이었다.
「그럼 맥줄 드릴까요?」
「있나? 그래, 맥주 둘.」
나는 정신이 얼떨해서 강군의 하는 짓만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의 기억으로는 그가 그처럼 경망스럽고 성급했던 친구는 아닌 줄로 아는데 하여튼 그는 그런 식으로 나의 얼을 빼놓는 것이다.
「P선생!」
「또 선생이야?」
「내 그렇찮아두 P선생 생각을 간절히 했었다구요. P선생! 나 그대한테 아주 기막힌 표정 하나를 보여주고 싶은데 말야.」
「기막힌 표정이라니, 누구의?」
「P선생은 꼭 봐둬야 할 표정이라니까. 누구냐고 묻진 마시오. 누구면 어때. 문제는 작가로서 감동을 받을 만한 어떤 인간의 표정이면 되지, 안 그래? 그 표정엔 인간의 선과 악, 사생관, 집념 , 회한, 고집, 그런게 한데 응결돼 있어요. 추하기도 하고 엄숙하기도 하고 또 소름이 끼치도록 미웁고 불쌍도 하고...... 그런 복합적인 표정, 한번 봐두는 게 어떠시오?」
그는 그런 식으로 혼자 마구 지껄여댔다.
그가 아무리 떠들어대도 나는 나 혼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마치 명동의 잡답 속에서 나 혼자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맥주거품이 왈칵 넘치면서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에프런을 걸친 땅딸한 소녀가 우리의 발밑을 쓰레질하고 있는데 그 손등이 물에 불어 징그러워 보였다,
대머리진 웨이터가 스탠드 저쪽에서 구두를 닦이고 서서 담배를 유유히 피우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개장 무렵인지 파장 무렵인지 얼른 분별이 가지 않는 그런 어설픈 분위기였으나 마주 선 웨이트레스의 화장이 싱싱했다.
강군은 나와 함께 들어올린 글라스를 탱 하고 마주 부딪친 다음 또 할말이 많다.
「나 상계동에 살아요. 바로 백씨댁 근처요.」
「아, 그래요?」
「그러니 내가 P선생 생각을 안 했겠소?」
「언제부터 거기?」
「이번 한식날엔 오시겠지? 상계동에.」
「가야지요.」
「오시오! 그때 그 괴물을 볼 수 있을 거외다. 인간의 표정이 아닌 괴물의 표정이라니깐. 그건 정말 사람이 아니라 원시적인 욕망과 집념으로 일그러진 추한 괴물이오. 한식날에 오시겠지?」
「해마다 가는걸. 어머님 산소두 있구 하니까.」
「만나자구, 한식날. 그때까진 그 괴물이 살아 있을 거 야. 며칠 안 남았으니까, 한식이. P선생은 그걸 꼭 봐야 하고 나는 P형한테 그걸 꼭 보여주고 싶소.」
강군은 시원스럽게 마셔댔고, 나는 병신스럽도록 못 마셨다. 그것은 전부터의 강군 특징인 것 같고 그것은 전부터의 내 특성이었다.
「그래, 요새 하는 일이 뭔가? 무슨 사업이라두?」
나는 말상을 한 웨이트레스의 벌름 뚫어졌으면서도 귀엽게 보이는 두개의 콧구멍에 관심을 갖다가 강군에게 물었다.
「아하, 나 하는 일 말이지? 털 수집하는 사업이야. 여자 남자의 털, 털이면 다 되지.」
「털이라니?」
말상을 한 웨이트레스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는 강군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야, 야, 맥주 좀 따라주지 않구 어디다 정신을 파냐? 이거 내가 털 장사를 한다니까 어디가 군실군실해지는가보구나.」
그는 웨이트레스의 칠칠한 머리털을 일별한 다음 빙그레 웃었다.
「가발공장에 머리털을 대는 사업이야. 그래서 나는 장발족이나 여자만 보면 머리털이 눈에 띄지. 머리털뿐인가, 특히 여자의 털이램 뭣이든지 쌍둥 자르고 싶단 말야. 짧고 보드라운 것으로는 눈썹을 만들어 수출할 수 있으니까, 저런 여자의 그 털은 특히 좋구. 목욕탕꺼정 내 단골이오. 여탕 남탕에서 꽤 많이 나오거든. 나는 털박사요. 보기만 해두 여탕에서 나온 건지 남탕 물 찌꺼기에서 나온 건질 안단 말야, 아하하.」
강군은 마주 선 웨이트레스를 또 지그시 노려보았다
「네건 상품(上品)에 속하겠다. 나하구 잘 사귀자구. 여보 P선생! 내 사업두 지난 한땐 아주 불경기였소. 서양놈들이 전세계에다 장발 붐을 유행시켜놓은 건 좋았으나 그 장발족들의 머리를 자를 수가 있어야잖소. 금년에 들어와선 경기가 좀 회복됐어요. 한껏 길게 기른 머리를 싹뚝싹뚝 자르는 바람에 이발소에서도 꽤 쓸만한 상품이 나오지. 한 세기 전에만 내가 이 사업을 시작했더면 하와이 섬 하나쯤은 살 수 있는 재벌이 됐을걸. 단발령(斷髮令)이 내릴 전후 말이오. 여보 P선생 P선생 같은 분이 여론을 한번 일으켜주시오. 외화획득을 위해서 모든 남녀는 머리를 길게 길러서 주기적으로 그걸 잘라 팔아야 한다는 여론 말이야. 법률로 정해도 좋지. 우리의 무궁무진한 천연자원을 이용하자 그 말이오. 비싼 비용 들여가며 땅속에서 석유나 광석 캘 필요 없어.」
강군은 저 혼자 떠들고 처 혼자 마시고 했다.
나는 지루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고 해서 강군 마음대로 지껄이게 내버려뒀다. 이따금씩 입가에 미소만 지어 보이면 그것으로 나는 친구와 훌륭한 사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P선생, 내 친구 한 녀석은 말야. 쥐 가죽을 수출해서 한몫 단단히 보고 있소. 그 친구는 전국에서 잡히는 쥐를 모아들이기에 눈이 벌겋지. 쥐 가죽 백오십 장이면 서양 년의 코트 안감이 한 벌이야. 아주 고급 안감이지. 여보, P선생. 엊그제 해외토픽을 보니까 구미의 세계적인 거상(巨商)들이 속속 푸놈펜으로 진출하고 있답니다. 나도 가볼 참인데 웬지 아시오?」
나는 미소로 그에게 물었다. 왜냐고.
「그 나라에서 사람을 많이 학살한다는 사실에 주목한 거지. 이왕 죽인 사람, 그 시체를 그대로 땅속에 묻어 썩이는 건 세계의 한정된 자원을 낭비하는 야만행위지 뭐요. 벌써 백만 명을 죽인 모양인데 그들의 털과 가죽을 왜 그대로 버리느냐, 여자들이 인피(人皮) 코트를 가장 좋아하는 줄 모르느냐, 그걸 일깨워주려고 서양 친구들이 속속 푸놈펜으로야. 저들한테 팔아서 강냉이라도 사들이라는 거지.」
「온, 사람두.」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 한마디를 한 게 고작이었으나 함께 그 이야기를 들은 말상의 웨 이트레스는.
「잔인한 말씀 그만 하세요. 속이 다 느글거리네.」
하고 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려세웠다.
「쳇, 인간을 그렇게 잔인하게 만드는 게 누구냐, 여자들이다. 가발두, 쥐 껍질두 여자들의 사치용이구, 남자들이 돈을 벌려고 눈깔을 까뒤집는 것두 궁극으로는 여자들의 밑 빠진 허영과 소비욕을 채워주기 위해서다. 결국 모든 사내새끼들은 계집들의 눈치를 보며 그것들의 밑빠진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니까. 안 그렇소? P선생. 그런데두 남자가 여자를 의식 않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산송장이야. 안 그렇소? P선생. 서양 거상들이 푸놈펜으로 인모(人毛) 인피(人皮)를 수집하러 가는 것두 여자들의 소비성 사치욕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야. 그러니 그놈들 골은 비었어두 똑똑하지 뭐야?」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예요 ? 푸놈펜으로 그런 걸 구하러 간 사람들 있어요?」
말상의 웨이트레스가 정색을 하며 강군에게 물었다.
「갑시다. P선생.」
「갑시다.」
「이봐, 동훈아. 난 돈 벌기에 눈이 뒤집힌 장사꾼이지만 말야. 그런 내 눈두 사람들 모습이 너무 처절하고 잔인해졌어. 전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낭만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한식날 너 와야 된다, 어떤 한 인간의 아주 처절하구 경건한 모습을 보여줄 거니깐. 오지?」
「그럼 가구말구. 그때 만나자구.」
「차아식, 점잖아뵈는구나, 너.」
P선생이 -차아식-으로 급전 격하되는 바람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럼 상계동서 만나자 !」
큰집이 수락산 밑 상계동의 토박이기 때문에 나는 일년이면 열 번 가까이 그곳엘 간다.
팔십 고령의 가친(家親)이 아직 노익장(老益壯)의 건강을 자랑하며 그곳에 살아 계시고, 어머니의 산소가 뒷산에 있고, 어린 시절 나의 꿈이 그곳에서 부풀어 났지만, 지금은 인구 십몇만이라는 서울특별시의 상계동이 되어 그 분위기가 잡다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데도 그러나 내가 세살 때부터 국민학교를 마치는 열다섯 살까지 그곳에서 뛰놀며 가난과 기갈의 뼈저린 생성과정을 거치는 동안 봄이면 밭이랑에서 메 캐먹고 뒷산에 올라 진달래 따먹고, 여름엔 벌판 논돌창에서 피라미나 불거지를 낚아 올리던 추억과 장마비로 홍수가 지면 한내 물이 불어나 하학길에 집으로 돌아오질 못하고 이십 리 밖인 의정부 학교로 기차 타고 되돌아가서 저녁 굶고 교실 책상 위서 하룻밤 지새운 다음 아침 굶고 점심 걸러가며 그날의 수업 마치고 저녁때 다시 기차 타고 돌아와 허리 위나 가슴께까지 차는 물결 센 탁류 속을 마중나온 아버지나 형의 손을 잡고 몸 둥둥 띄우며 소 헤엄치듯 냇물을 건너던 그런 소년시절의 낭만과 고생이 깃든 고장 상계동을 나는 일년에 최소한 칠팔 차례는 찾게 마련이었다. 음력 정초엔 다례를 지내러 가고, 한식 때는 성묘하기 위하여. 삼월 열이렛날엔 어머니의 제사, 칠월에는 형의 생일, 그리고 팔월 추석. 구월 십구일의 가친 생신날, 이렇게 여섯 차례는 정해져 있으며, 그밖에 대소가의 경사나 궂은일이 있어도 가야 하니까 그 숫자가 일정치는 않아도 많을 때는 열 번도 더 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같은 서울특별시의 판도 안이기 때문에 자주 가게 되는 것이지 길편이 멀면 택도 없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 상계동에 강군 그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모르고 있었다,
한식날이 됐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식날 아침에 비를 뿌리다니, 드문 일은 아니지만 그게 가랑비가 아니고 보면 흔한 일도 아니었다. 빗발이 제법 굵었다.
나는 강군과의 약속을 까막 잊은 채 연례행사처럼 가도록 돼 있는 그 상계동엘 갔는데 아내와 함께였다. 예나 이제나 비온 뒤끝엔 발을 옮겨 딛기 힘든 동네이다. 흙이 차져서 신바닥에 찰흙이 떡메에 달라붙는 인절미 그대로였다.
일제시대의 구두창이 생각났다. 그때는 구두의 테두리를 어떻게 꿰맸던지 새로 사 신은 것이라도 이 찰흙 속을 며칠 밟고 다니면 흡사 메기입처럼 앞부리가 쩍 벌어지기 일쑤였다. 가죽창은 고급인 경우고 대개는 헌 타이어로 창을 댔는데, 그게 무거워서 테두리가 더 쉬 망가졌는지도 모른다. 가죽창인 경우에도 쇠징을 많이 박아 신었기 때문에 신창이 잘 갈라지고 테두리가 떨어지면 진탕물이 안으로 스며들어 발이 엉망이 되곤 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내가 상계동에 도착할 무렵에는 다행히도 비가 뜸해져 있었다. 나는 아내와 함께 진흙길을 조심조심 더듬어 큰댁으로 향하다가 앞을 가로막는 강군과 만났다.
「아, 드디어 오시는구만. 으하하.」
그는 그렇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반가와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순간적으로 머쓱해진 기분이 됐다.
「그렇잖아두 아침 일찍 오실 듯해서 진작부터 큰길 쪽만 지켜보고 있었다. 한식이라는데 장마비처럼 내리니 혹 안 오시나 했구만. 땅이 질어서-----이쪽으로.」
강군은 이날을 잊지 않고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집은 그의 말대로 정말 내 형 집의 바로 이웃이었으며, 내 형 집으로 가려면 그의 집 앞마당을 거쳐야 하게 돼 있었다.
「이게 바로 내 집이야.」
「아아. 고랬었군?」
강군은 자랑스런 얼굴이었고, 나는 놀라와하는 말투였다, 강군이 자랑스러운 얼굴을 한 것은 당연했다. 그 일대에서 정식으로 지은 한식 기와집으로는 유일한 존재여서 새로 생긴 고속 순환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속에서도 그의 집 높은 용마루와 기왓골이 마치 그 마을에 군림하듯 솟아 있는 게 빤히 보일 정도니까 그런 집을 새로 장만한 강군으로서는 자랑스러울 게 당연했다.
「이건 내 당숙이 살던 집인데 말야, 내가 사버렸지. 빚을 좀 줬던 게 있구 해서. 아하하.」
「그랬었군?」
「나 아침부터 기다렸네. P선생.」
「고맙소.」
「산소에 다녀오는 대로 곧장 내 집에 들러주시오.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참 아주머니시군요? 나 강이라구, P군과는 중학 동기입니다. 아, 아주머닌 참 미인이시구만. P군이 아마 아주머니 덕으로,,,,,, 아하, 이건 실례가 되겠지?」
나는 -선생- 에서 -군- 으로 또 격하되고 아내는 일약 미인에다 복 있는 여자로 승격이 됐다.
「이 동넨 비만 뿌렸다 하면 이 지경이야. P군이 올 것을 예상하고 길에 자갈을 깔까 했었는데 그게 쉽지 않아서 대신 모래를 몇 리어카 뿌렸어. 정말일세, 저 모래는 좀 전에 내가 뿌렸다니까.」
찰흙 위에 하얀 모래가 뿌려져 있는 것은 사실이어서 나는 강군에게 심한 조롱을 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주머니께서두 이따 함께 오십시오. 우리 집 구경두 해주셔야죠. 그럼 기다립니다. 그 가장자리의 모래를 밟으라구. 내년까진 내가 우리 집 마당만은 아스팔트로 포장해버릴 거니 두고보게나, P선생. 내년 여름엔 여기가 말끔히 포장돼 있을 거니깐.」
상계동 일대에서도 이 원터만은 아직 옛 농촌 그대로 남아 있었다.
논밭 가운데에 형성된 옛 취락, 사람들의 성품이 가증스러워지고 인심이 이악해진 것은 서울특별시의 혜택을 입은 것이지만 봄 해토 무렵이나 여름에 비가 뿌리면 마을이 온통 찰흙밭이 되어 보행하기 어려운 것은 예 그대로였는데. 강군은 저희 집 마당만은 일년 안에 아스팔트로 포장을 해버리겠다고 큰 소리니 평소에 오죽이나 울화통이 터져 그런 소리를 하겠는가 싶다.
「그 사람 굉장한 허풍쟁인가봐요. 저 집이 자기네 집엔 틀림이 없겠죠.」
「그야, 그런 거짓말을 할 리 있겠소. 그 친구 학생시절엔 아주 내성적이고 얌전했는데 저처럼 사람이 변했군 그래. 사회란 인간을 개조시켜버리는 힘이 있는 게요. 본시 인간의 원적은 선천에 있지만 현주소는 후천이거든. 그러니까 문제는 사람들의 현주소야. 어디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해. 저 친구 험한 길을 많이 걸어온 게야. 그래서 저렇게 잡스러워진 거지.」
나는 그를 변명하듯 아내에게 말했다.
「하여튼 당신 친구 중에도 그런 엉터리가 있는 걸 보니 내가 좀 우쭐해지는 것 같아요.」
「우쭐해지다니, 당신이 왜?」
「그 사람 얼레발레에 얼굴이 벌개지는 당신을 보니까 평소에 그 도도하던 당신이 불쌍해요. 그래서 내가 보호해주고 싶어졌어요, 당신을.」
「쳇!」
한낮이 좀 겨웠을 때 우리는 산소에서 내려왔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강군이 불쑥 나타나더니 나의 형의 손을 잡고 또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웃에 살면서도 내가 계씨와 그런 사이인 줄을 모르셨죠? 형님. 내가 말씀을 안 드렸으니까요.」
나의 형이 어리둥절하니까,
「계씨와는 중학 동창이란 말입니다. 지난번에 서울에서도 만났구요. 참 그런 이야기도 아직 말씀 안 드렸군요, 아하하.」
강군은 새삼스럽게 내 형의 손을 마구 흔들어댔다. 아닌게아니라 이상한 녀석이랄밖에 없다. 그처럼 말이 헤프고 허풍이 심한데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나의 형과 진작부터 그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아마도 그는 나의 형을 무시했거나 일부러 경원한 나머지 그런 대화를 피해왔는지도 모른다.
「형님 ! 오늘은 저한테 양보 좀 하십시오. 계씨를 납치해가야 하겠습니다, 아 하하.」
나는 그에게 끌려 그의 집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그 큰 기와집은 특히 대청마루가 넓고 오른편 누마루가 또한 높직했다. 그리고 그러한 큰집의 대문이 활짝 열려져 있는 것은 아직 시골풍경이었다.
「아하하. P선생이 내 집엘 다 와보시다니, 이거 정말 내 가문의 영광이구, 나의 영광이구 정말 지극한 영광이야.」
좀 있으면 또 P군으로, P군에서 너로, 너에서 차아식으로 내게 대한 그의 호칭이 변해갈 것이 뻔하다,
마침 노리끼한 머리를 얌전하게 다듬은 아낙네가 건넌방 누마루 앞에서 커다란 자루의 아구리 매듭을 끄르고 그 속에 든 것을 꾸역꾸역 꺼내는 중이었다. 진달래꽃이었다. 자루에 가득 채웠던 진달래꽃을 꺼내더니 누마루 위에다 펼쳐놓고 있는 것이다.
「여보, P선생이 오셨어, 인사드리지 그래.」
강군은 자기 아내를 나에게 소개하고는 그 진달래꽃을 한 움큼 덥썩 집어 입에다 쑤셔 넣는 것이다.
「P선생도 먹어봐요. 피를 맑게 한다는군, 진달래꽃이. 수락산에서 따온 거요. 자아, 이 아름다운 꽃을 입에 넣고 신나게 씹어봐요.」
그는 진달래꽃 한 주먹을 내게 내밀며 저처럼 씹어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나는 웬지 잔인한 생각이 들어서 사양하려 했으나.
「꽃을 씹어먹는다는 건 통쾌하단 말야. 남들이 애지중지 사랑하는 것, 아름답다는 것, 그런 걸 내가 마구 씹어먹는다 생각하면 원시적인 정복감 같은 걸 느낄 수 있거든. 예쁜 여자를 여지없이 짓밟아버리는 그런 순간의 느낌과 비슷해, 아하하.」
그의 입마구리로 흘러내리는 분홍빛 꽃물이 햇빛을 받아 번지르르하게 번뜩였다.
「P, 네가 오니까 날이 멀쩡하게 개이는군 그래.」
햇살이 제법 두터워져 있었다. 그 햇살을 받으며 누마루에 확 펼쳐진 진달래 꽃이 마치 갓나온 나비가 연약한 나래를 파들거리듯 엷은 색깔의 화판들은 파들 파들 애잔하게 떨고 있었다. 자루 목에 차곡차곡 재어져. 있다가 확 펼쳐지는 순간 햇살이 뿌려지는 바람에 기지개라도 펴듯 떨어대는 것이다,
「누가 이렇게 많은 꽃을 따왔나?」
「술을 담글라구. 진달래술, 그게 옛사람들이 말하는 두견주가 아니냐. 색깔과 향기가 참 근사하지. 약두 된대구 말야.」
「부인께서 따오셨나?」
「이봐! 술상 이리로 내오란 말야. 작년치 두견주가 좀 남아있지? 그걸 가져오구.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깐.」
그는 내 물음엔 대답 않고 자기 아내에게 그런 지시를 내렸다.
그때 나는 누마루 위에 펼쳐진 진달래꽃을 손으로 만져보며 그 색깔과 감촉에 취하고 있던 중이었다.
색깔이 정말 부드러웠다. 진달래의 색깔은 진달래의 빛으로 표현해야지 다른 어떤 색깔에도 비유할 수가 없는, 가녀린 촉감이 연상되는 그런 독특한 색깔이다.
그것은 장미나 튤립 따위의 서양 꽃처럼 강렬한 원색이 아니기 때문에 어딘가 한국적인 색깔이고 어쩌면 우리 여성들의 고 부드럽고 포근한 정감과 같이 따사로우며 애련하기도 하다.
우리가 잡은 아랫방은 남향한 문을 열어 젖히니까 바깥마당으로 면한 사랑이었다.
바깥마당은 넓고 그 저쪽은 벌판으로 이어진 밭인데 얼핏 보기엔 마늘밭인 것 같았다. 파릇거리는 새싹이 마늘인 게 틀림이 없다.
강군은 나를 전망이 쓱 트이는 쪽에다 앉히고는 해묵은 두견주라는 것을 권하면서.
「저 담장 밑에 있는 게 뭔지 아시오? P선생. 저 가마니 속에 있는 것 말야. 인간들의 머리털이라구. 저건 이 근처에서 수집한 거요. 가발공장으로 보낼 건데 길이가 짧아서 상품으로선 시원찮아. 아까 내 마누라를 보셨지 ? 내 마누라도 가발을 썼는데 몰랐을 거요. 처음에 내가 그런 사업을 하겠다니까 펄쩍 뛰며 반대를 하더군. 마누라가 말야. 그래서 먼저 내 마누라의 머리털을 홀랑 깎아버렸어. 그야 물론 강제였지. 그러고는 가발을 씌웠단 말야. 아직도 저 사람 제 밑머리는 짧다구.」
그는 거침없이 그런 실토를 하면서 연신 술잔을 비워댔다.
「그건 그렇구, 인제 좀 있으면 희한한 표정. 분명히 한 인간의 처절하구 엄숙한 표정을 보여줄 수 있을 거야. 무슨 표정인지 아시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너무 가식 없는 인간의 표정이지. 목욕탕에서 수집한 여자들의 거웃털의 이용가치만도 못한 한 인간의 표정을 보여드리리다. 그건 그렇구 말야, 자아 술 들라구,,,,,,」
강군은 미친 사람처럼 화제를 마구 바꿔가며 혼자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의 화제는 주제가 분명치 않으면서도 뭔가 생각하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P선생, 나 월남에서 아주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말야. 지금에 와선 잘한 것인지 아닌지를 모르겠소. 어느 날 적과의 전투를 끝내고 돌아오다가 말야, 풀숲에 버려진 둬살짜리 어린애를 발견했어. 그것도 인간인데 모르는 척할 수가 있어야지. 지프를 세우고 내가 직접 안아 내오다가 베트콩 패잔병의 집중사격을 받았지. 그래도 무사히 그놈을 구출해서 후방 고아원에다 맡겼소. 이것까진 P선생 듣기에 대단한 이야기가 아닐 것이오. 그런데 말씀이야.」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미래의 코뮤니스트를 하나 더 만들어주고 온 게 아니냐면서 그는,
「오늘의 가치 있는 일이 내일에도 그 가치를 그대로 지닌다고는 믿을 수가 없단 말야. 우리는 그곳에 가서 참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해뒀어요. 헌데 지금 저렇게 되고 보니까 그들이 반드시 우리를 기억해줄 것이냐 의문이란 말이오. 오히려 그놈들이 우리에게 총을 겨눌지도 몰라. 녀석들, 지독한 국수주의거든.」
이건 또 그답지 않은 엉뚱한 화제라서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후회하고 있나?」
「후회가 아니지. 그저 마음에 걸린달 뿐이야. 생명이란 어떤 경우거나 무조건 보호해야 하는 건지 그걸 회의하고 있을 뿐이오. 물론 적이 아닌 어떤 선량한 영혼이나 생명을 두고 하는 말이지.」
「순수한 영혼이나 생명을 보호해준 건 열 번 잘한 일일세.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는 그곳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피를 흘려준 일도 떳떳한 것이었구. 문제는 정신이지 변해버린 저쪽 사정이 아니잖은가. 또 모르는 일이구. 그 아이가 커서 그 나라의 현상을 뒤바꿔놓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그거 모르는 일이야. 심령과학자들은 설명할 수 있을걸. 그 아이는 자네와 심령이 서로 통해서 자유주의 투사로 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구. 어쨌든 좋은 일을 했군.」
「그럴까?」
「그렇지. 」
「그럼 말일세,,,,,,」
강군은 잠깐 망설인 끝에,
「살아봤자 아무 쓸모도 가치도 없는 생명두 보호해야 할까. 그저 순전히 동물적인 인간의 생명도 말일세. 오히려 남에게 피해만 입히게 될 존재. 그런 존재의 생명도 보호해줘야 하고 그런 인생두 존귀한 것일까?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다.」
「글쎄. 」
나는 강군의 진의를 알 수 없어서 쑥스럽게 웃음이나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마침 바깥마당에 나타난 어떤 사람이 내가 충분히 주목할 만해서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 쌔끼, 자세히 봐둬라 ! 저걸.」
드디어 강군의 말씨가 그렇게 바뀌어버렸다. 선생 호칭에서 쌔끼라는 욕지거리로 변한 것이다.
마당가에 홀연히 나타난 사람은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우람한 체구를 가진 사내였다. 첫눈에도 그는 중풍환자였고 단장을 짚는데도 육중한 몸이 한켠으로 쏠리며 왼팔과 왼다리가 흉하게 건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마당가에 있는 해묵은 오동나무 밑으로 다가가더니 단장 끝으로 땅바닥을 더듬기 시작했다.
「저기 구멍이 하나 있네.」
강군이 내게 귀뜸해줬다.
정말 땅바닥에 자그마한 구멍이 있는 것 같았다. 그 구멍에다 단장 끝을 꽃고 오동나무 밑동에다 기대 세우니까 단장은 저 혼자 서 있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단장을 세워놓더니 몹시 부자유스런 동작으로 어떤 한 지점을 찾아서 발끝으로 비비고는 고개를 반듯하게 가누더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단거리 경주의 스타트라인 같은 위칠세, 저기가.」
강군은 내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 저 혼자 마시며 취해가고 있었다.
나는 계속 그 중풍환자의 동정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발끝을 움직여, 서 있는 지점에다 불안한 자기 몸을 안정시킨 다음 계속 먼 곳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다가 별안간 뭣인가 중얼거렸는데,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삼천육백오십이라고 그런 것 같네.」
강군이 그런 설명을 했으나, 나는 그 숫자의 뜻을 묻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중풍환자 그는 드디어 스타트라인을 출발했다. 출발하는 순간 그는 씽긋 이지러진 웃음을 보인 것 같았으나 나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는 아주 성큼성큼 발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왼켠이 마비되어 있었다. 왼손이 반쯤 들린 채 너털거리고 왼발이 땅을 질질 끌며 쓰러질 듯 넘어질 듯 위태롭게 전진을 해갔다.
길이가 삼십미터쯤 되는 네모 반듯한 마당이었다. 마당 끝 뒤엄 근처에 이르른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세우며 자세를 굳히는데 계속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저 표정을 똑똑히 봐라!」
강군이 또 나에게 귀띔말을 해줬다.
왼켠 눈을 비롯하여 입도 뺨도 왼쪽 위로 찍어달린 채 굳어진 그런 모습이라서 보기에도 몸이 오싹해지는 무서운 얼굴이었다.
그는 그런 얼굴을 반듯하게 가누고 잠시잠깐 호흡을 조절하더니 갑자기 두 팔을 번쩍 쳐들며, 하나 둘 하고 구령을 붙이는데 그 음성이 구멍을 통과하는 바람소리처럼 들려서 가슴이 섬찍했다.
그는 하나 둘 셋 넷 하면서 팔 올리기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왼편 팔은 가슴 아래에서 머무르고 오른손만이 어깨 위로 뻗치며 하늘을 제법 힘있게 찍었다.
「P군아, 저 번쩍번쩍 빛나는 눈총을 봐둬라. 우리 집 용마루 끝 기왓장을 쏘아보고 있는 거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쏘아보는 곳은 먼 하늘이라고 생각했다. 기왓장을 쏘아보며 자기의 집념을 불태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허허로운 하늘에는 아무 곳에나 초점을 꽃을 수 있으니까 얼핏 허전한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자기 소망이나 집념의 초점을 쉽게 고정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난 저 눈총을 보면 미칠 것만 같다. 살인자의 눈초리도 저처럼 무섭지는 않을 거야.」
그의 팔 올리기 운동은 열 번으로 일단 끝이 났다. 열 번을 마지막으로 손을 내린 그는 또 씽긋 귀기(鬼氣)로운 웃음을 흘리며 먼 하늘에 꽂았던 시선을 서서히 거둬들였다.
다시 걷기 시작한 그는 내 앞을 지나 마당을 한바퀴 돌아서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가 섰다.
그는 또 다시 호흡을 조절하며 먼 하늘에다 초점 흐린 시선을 꽂았다. 그는 이번에도 휘파람소리 같은 말소리로 뭔가 중얼거렸다.
짐작으로 삼천육백오십하나라는 수효를 소리 높여 외친 모양이다.
「참 잘 걸으시네요.」
마침 그의 옆을 지나던 어느 중년 아낙네가 조롱하듯 그를 보고 한마디 흘렸다.
그런데도 그는 아주 흡족한 듯이 씨익 웃음을 보이고는 또 출발점을 훌쩍 떠났다.
그의 머리 위 하늘로는 낮게 뜬 헬리콥터 한대가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북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환자는 그런 괴물 따위에는 관심 없이 또 뒤엄가로 가서 몸을 이쪽으로 홱 돌려세우고는 먼저처럼 용마루 위를 노려봤다.
그는 다시 팔운동을 시작하며 그 헛바람같은 말소리로 구령을 붙이고 끝나자 이번에도 씽긋 묘한 웃음을 흘린 다음 다시 비축비축 걷기 시작해서 두 번째로 내 앞을 자랑스럽게 통과해 가는데 퍽은 신바람이 나는 것 같다,
그의 그러한 행동은 자그마한 차질이나 변화도 없이 열 번인가 정도로 반복되는 동안 나는 숨을 죽인 채 긴장해 있었고, 강군은 연신 술을 마셔댔다.
「자네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저 양반은 도립병원의 꽤 권위 있는 정신과 의사였네. 자신의 지식과 교양과는 너무도 안 어울리는 짓을 하고 있어도 도대체 저렇게까지 해서 쓸모 없는 생명을 연장해보려는 저 동물적인 욕망을 존경해야 하나, 경멸해야 하나, 넌 어떻게 생각하냐? 아무리 저런다 해도 저 이상 좋아질 가망이 없는 줄을 자신도 알고 있는데 말야. 또 저 나이에 저런 육신으로 더 살아봤자 인생으로서의 아무런 가능성도 없는데 말이다. 자네 저 표정과 눈초리, 웃음을 봤지 ? 어때 ? 불쌍하다는 연민과 이해라는 관용과는 본질이 다른 게 아닌가? 난 저분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이젠 미운 생각밖엔 없네.」
「누군가?」
「진달래술이 좋다고 성화를 하는 바람에 내 아내가 삼 년째 봄이면 진달래를 따러 산을 헤맸다네. 이리로 이사오기 전에 안성에서 살았는데 말야. 안성 청룡산엔 진달래가 많았지. 한여름엔 살모사도 많았어. 꽃 따다가 살모사에게 물려서 내 아낸 죽을 고비를 넘긴 일도 있구. 꽃술이 좋대서 말야. 여기 오니까 꽃 따오기도 퍽 어려운 모양이야.」
「자네 부친인가?」
「인제 한두 번쯤 더할 걸세, 열 번을 채우는 건 기본숫자이고 그 이상은 덤인 모양이야. 이번부터는 종합숫자두, 하나 둘 하는 구령두 영어로 바뀔걸.」
강군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중풍환자 강씨는 또다시 출발점에 섰다.
그는 정말 삼천육백육십일이라는 숫자를 영어로 중얼거렸다. 혀끝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무슨 말을 웅얼거러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아듣기는 힘이 들었으나 강군이 미리 나에게 예비지식을 줬기 때문에 그게 그런 말인 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환자 강씨의 부릅뜬 눈과 꽉 다문 그 입에서 열 번을 넘기고 새로 시작한다는 그 환희와 집념을 역력히 볼 수 있었는데, 한마디로 그것은 처절 그것이었다. 눈을 부릅떴다고는 하지만 왼켠은 반쯤 벌려진 채 동공이 굳은 대로였고, 입을 꼭 다물었다곤 하지만 왼켠 입마구리가 위로 바짝 치켜진 채 흥하게 일그러졌으므로 걸다란 침이 그리로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그 끝장 없는 여로(旅路)의 출발점을 떠났다. 긴장을 해서 그런지 ㄴ자로 꺾인 왼팔이 먼젓번보다도 더 아래위로 춤을 추는 딱한 동작이었다.
그는 뒤엄가에 이르자 또 몸을 돌려세우고는 용마루 끝 하늘을 노려보며 똑같은 방식으로 팔 올리기 운동을 시작했다.
「원 투 쓰리 포오,,,,,,」
오른팔이 어깨 위로 쭉쭉 뻗어 오르고 ㄴ자로 꺾인 왼팔의 손끝은 고작 배꼽 위쯤에서 툭툭 튀고 있는 그런 팔운동이 영어 구령의 -헨 !- 하는 -텐- 소리와 함께 아래로 툭 떨어지며 건들건들 흔들렸다.
「긴 병에 효자 없다구 말야. 나는 언제까지 저 몸서리쳐지는 상판을 봐야 하구, 저 양반은 언제꺼정 저 짓을 반복해야 하는지 모르겠네. 도대체 인간의 눈초리가 저처럼 무섭게 보일 때가 있나? 정말 살인을 하려 덤비는 순간의 눈초리도 저렇게 무섭진 않을 거다.」
그때 마침 또 어떤 젊은이 하나가 앞마당으로 지나가며 환자 강씨에게 싱거운 한마디를 툭 던졌다.
「오늘은 아주 잘 걸으시는군요.」
「헹!」
「인젠 마라톤이 라두 하시겠군요.」
「헹, 잘돼. 잘 걷지!」
그 순간 강군의 눈총이 푸른빛을 튀겼다. 그의 그 눈빛이야말로 당장 살인이라도 할 듯싶은 무서운 증오여서 나는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졌다,
「헝 헝 헝, 잘걷지!」
「자알 걸으십니다.」
「뛰어 보. 볼까?」
「뛰어보세요.」
실없는 동네 청년과 환자 강씨의 그런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후두둑 타닥 소리가 났다.
환자 강씨가 뜀박질을 시작한 것이다. 기관이다. 정말 기관이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는 기관이었다.
「처음 저런 꼴을 보았을 때 난 눈이 뒤집혔네, 동네사람 여럿을 두드려팼어.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 으례 그러려니 하는걸. 보게나, 저 병신스런 뜀박질을. 저 표정, 저 눈초리를 보란 말이야. 얼마나 처절하고 필사적인가를. 차라리 엄숙해지네.」
강군은 또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환자 강씨는 그 기괴한 뜀박질을 아들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 같았다. 우리의 앞으로 지나갈 때는 더욱 필사적인 동작이었다.
「나는 저 양반이 저러다가 쓰러져도 일으키지를 않는다. 저래두 남의 도움을 받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
묘한 우연이었다. 그때 환자 강씨가 어이없이 땅바닥에 뒹구르고 말았다.
ㄴ자로 꺾인 왼팔이 땅바닥에 깔리며 그 위에 덮친 육중한 몸이 흉하게 버둥거리고 있었다. 등을 깔고 자빠진 갑충(甲蟲)의 버둥거림과 같다.
「P,저 눈초리를 특히 잘 봐둬.」
그것은 절망의 눈초리였다. 쓰러졌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 그것은 운명 직전 죽음과 겨루는 눈과 꼭 같았다. 허탈과 실의 모든 의욕이 싹 까부러진 순간의 분노 섞인 그런 눈초리였다.
「가서 일으켜드리게나 r_l
「내가 앞으로 십 년을 살지 이십 년을 살지 모르지만 말이다. 나는 내 생명에 대해서 저런 치사스런 집착은 갖지 않을 걸세. 난 팔십까진 건강하게 살 자신이 있지만 말야.」
「빨리 가서 일으켜드려 ! 어떤 경우든 환자의 몸부림은 엄숙한 걸세. 도와드려야지.」
이상할 만큼 환자 강씨는 몸을 추스리지 못하고 팔다리만 계속 버둥거렸다.
답답해서 내가 일어나려 했다,
강군은 나를 제지했다.
「나는 베트콩을 총검으로 찌른 일이 있다, 나는 그놈 눈을 잊을 수가 없다. 살려달라는 애원의 눈총이 아니라 저주하는 눈깔이더군. 베트콩 여자를 해본 일도 있다. 그건 애원의 눈이었어. 고만둘까 하다가 했지, 그러니까 분노와 저주와 체념이 뒤얽힌 복잡한 눈초리로 변하더군. 그래도 지금 저 눈처럼 소름이 끼치진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강군은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눈동자를 디굴디굴 굴리고 있었다. 그것은 폭발 직전의 증오며 울분이었다.
「며칠 전에 의사를 보였네, 지금 저게 최상의 컨디션이라는 거야. 정신상태도 거의 정상이구. 그런데 말이다. 안할 말로 전쟁이라도 나든지 집에 화재라도 나면 나는 저 양반을 업구 안전한 지대로 가야겠지. 왜냐하면 저이는 내 아버지니까. 그리구 살아 있는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건 미덕이구 휴머니즘이니까. 자아, 한잔 들라구. 며칠 후면 저 양반 생신일세. 벌써부터 저 양반 자기 생신날에 대한 관심이 대단해. 자알 차려드릴 작정이네. 자네 그때 한번 다시 올래나? 원체 바쁜 몸이니까 안되겠지?」
어디선가 꽃향기가 진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진달래 꽃향기가 아니겠는가.
화창한 봄날의 하늘은 가을의 그것처럼 맑고 드높았다. 어제까지는 황사현상이었고 아침엔 비가 왔는데 지금은 아주 맑게 개인 봄 하늘이었다.
내가 나의 친구 강군의 부음을 들은 것은 그날로부터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서였다. 장례날 가서 알아보니 그의 사인은 엉뚱한 것이었다. 복상사라나. 그래서 그는 단 한마디의 말도 남기지 않고 남의 인상에 남을 만한 표정이나 눈초리도 보이지 않은 채 결코 제 뜻이 아닐 죽음의 세계로 간 모양이다.
아들 강군의 장례날, 환가 강씨는 며칠 전 내가 강군과 술상을 마주하고 있던 그 사랑에서 동네 청년들의 화투놀음을 구경하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슬쩍 외면을 해버렸다,
나는 그 순간의 그의 눈초리를 볼 수 없었으며 그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도 계속 마당에 나와 걷기 훈련과 팔 올리기 운동을 하며 그 총합 횟수가 삼천대에서 오천대 일만대로 오르고, 덤으로 하는 영어 구령이 점점 더 활기를 띨 것인지 어떨 것인지 전연 예측할 수가 없지만 나는 그의 아들이며 나의 친구인 강군만은 지금쯤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가이 들었다.
「저 영감태기가 아드님을 잡아먹었지 뭐야. 그놈이 진달래꽃술에 취하지만 않았어두,,,,,,」
나는 좀 전에 상가집에서 어떤 아낙네가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을 얼핏 들었지만 그러나 그렇게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강군이 죽은 것은 그 아낙네의 말대로 진달래꽃술 때문도 아니고 그의 아버지 때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 허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누구의 뜻도 아니고 또 스스로 원해서도 아니고 오로지 절대자만이 알 수 있는 절대자 그의 의사라고 생각한다.
이제 강군의 그 정열과 자신은 싸늘하게 식었으며 그의 그 열띠던 다변도 영원히 침묵해버렸다, 그러나 그는 이제사 뭣인가를 알았을지도 모르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침묵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분향을 마치자 슬며시 바깥마당으로 나와서 전에 환자 강영감이 돌던 코스를 한바퀴 점검하듯 차근차근 돌아봤다. 그리고 그가 팔 올리기 운동을 하던 지점에서 나도 용마루 위의 하늘을 강영감이 하던 그 식으로 눈 똑바로 뜬 채 노려 봤다.
거기엔 맷방석만한 구름 한 점이 무서운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이 있었다.
그곳엔 형체와 색깔은 있으면서 무게도. 열도,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를 갖지 못한 한 점 구름이 마치 절대자의 어떤 소명을 받은 것처럼 그 어디론가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싸늘하고 아주 비정적인 어떤 눈초리를 본 것 같아, 분명히 본 것 같아 가슴속에 재채기처럼 솟구치는 경련을 지그시 누르려고 안간힘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