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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

그림자

by 자한형 2021.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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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재용

시외버스 터미널에 이르러 매표구 앞에 설 때까지 장 순구는 행선지를 정하지 않은 왜였다. 알 만한 지명과 그것들보다 훨씬 많은 생소한 지명들이 매표구 위에 각기 운임표를 매단 채 겨루듯 늘어서 있었다.

정해진 금액을 구멍 속에 집어넣어라. 그러면 일정한 행로를 거쳐 예정된 시간이 흐른 뒤 당신이 원하는 어느 고랑 어느 산천 속에 몸과 마음을 담그게 해 주겠노라

사람들은 그런 유혹에 넘어가듯 반월형의 매표구 속에 돈을 집어넣고는 차표를 받아 쥐곤했는데, 마치 환상여행을 즐길 수 있는 전자오락기의 동전투입구에 집어넣을 동전을 구입해 손에 넣는 행위와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그런 연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전자오락실에 들어가 본 것은 퍽 오래전 일이었다. 조 근식을 따라서였다. 조 근식은 밤 어둠 속에서 정신이 술기운에 휘말리게 되면 즐겨 전자오락실을 찾아가곤 했다.

"네 나이 낼 모래면 사십이야 장난감 가지구 놀게 생겼니 ?"

순구는 그런 조 근식에게 야유를 하곤 했었다.

"술 먹구 개 되는 것보다 아이 되는 게 낫잖아? 너두 장난감 가지구 놀아봐."

조 근식은 대꾸하며 동전을 전자오락기의 동전투입구에 집어넣었다. 동전을 삼킨 기계는 혈액 순환이 시작돼 생명현상을 일으킨 듯 현란한 움직임으로 작동을 시작했다. 조 근식은 살아 움직이는 기계를 조작하며 기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기계 속 전장의 구릉 너머에서 적 탱크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 근식은 잡고 있던 포신을 재빨리 회전시켜 탱크를 겨냥하며 발사한다. 명중된 탱크가 파열하여 굉음을 울리며 뿜어내는 섬광이 조 근식의 얼굴에 번들번들 끼얹어진다. 적 탱크는 예측할 수 없는 지점으로부터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연이어 침입해 온다. 조 근식이 움켜 쥔 포신이 먹이를 찾아 미친 듯 호()를 그린다. 포탄은 명중되기도 했고 빗나가기도 했다. 조 근식의 생각 속에 상상의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이윽고 환상의 세계가 아득하게 펼쳐진 듯 눈이 비현실적인 빛을 두르고 몽환의 아지랑이 속으로 잠겨 들어갔다. 거기가 끝나면 조 근식은 다른 기계로 옮겨가곤 했다.

순구는 매표구 속에 돈을 집어넣으며 지명 하나를 말했다. 와수리. 자신이 발음한 어느 마을 이름이 생경한 진동으로 귓바퀴를 울렸다. 그가 태어난 이래 처음 입에 올려 보는 마을 이름이었다.

그는 차표를 끊고 있는 매표원 아가씨의 손을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며 망설여지는 자신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지명을 고쳐 말하자고 생각하며 눈을 들어 늘어선 지명을 훑어보았다.

하지만 다른 지명을 골라 내기 전자 매표구 속에서 표가 끊겨져 나왔다. 거스름돈에 휩쓸려 나온 보잘 것 없는 종이 조각 같은 차표를 집어들며 좋다, 가보는 거다 하고 체념하듯 마음을 정했다.

버려진 휴지조각처럼 값어치 없어 보이는 차표 속으로 초라한 시골마을 풍경이 비쳐 보였다. 전방의 첩첩한 산 갈피 속에 오스스 소름 돋은 모습으로 몸을 붙이고 앉은 작은 마을이었다. 거기 길손이 묵어 갈 숙박시설이 갖추어져 있기는 할 것인가.

순구는 시계를 보았다. 네 시.

"와수리 가는 차 몇 시에 떠나지요?”

"네 시 반이요.”

"와수리까지 몇 시간 걸리지요?"

"두 시간 반이요."

와수리에는 일곱 시에나 가 닿게 될 것이었다. 날이 저무는 시간이었다.

"와수리에서 서울 오는 막차 몇 시에 있지요?"

매표원 아가씨는 귀찮게 구는 사람의 얼굴을 화인하고 싶다는 듯 치떠 보고는 눈길을 가라앉혔다.

"일곱 시 반이요.”

순구는 대합실 의자에 가서 앉았다.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대합실이 그렇게 붐비지는 않았지만 웅성거리는 소음과 복작대는 움직임이 대합실 공간 속에 가득 들어 차 있는 느낌이었다. 분위기나 여운을 넘어 선 어떤 실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합실에 잠깐씩 머물렀다가 어디론지 떠나간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이, 몸에 앞서 길을 떠난 마음의 뒤쳐진 조각들이 모여, 떠도는 혼처럼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마음 한 조각도 호응하며 그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도 그의 몸에 앞서 길을 떠나고 있었다.

"어디 뚝 떨어진 고장에 가서 며칠 시원한 바람이나 쏘이고 오세요."

아내가 말했다. 순구의 역정과 호통을 뒤집어쓰고 순애가 경황없이 떠나버린 뒤였다.

밤 열시. 가게에서 돌아온 아내가 마당 수도가에서 손발을 씻고는 마악 방으로 들어 왔을 때 차임벨이 뻐꾹왈츠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건넌방 집 식구가 돌아왔거나 그 집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집 한 채를 두 가구가 나눠 세 들어 살고 있는 그 집에는 초인종이 두 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건넌방 사람이 나가 대문을 열어주는 소리가 났는데 조금 뒤 방문이 열려서 보니 순애였다. 왼종일 바깥에서 지내다가 늦어서야 귀가하는 집안식구처럼 스스럼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하루생활이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는 듯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서 아무렇게나 아랫목에 퍼져 있는 것이 심술을 부려 스스로를 잡아 흩뜨린 몰골이었다.

순구는 가슴속에 역정이 일어 엉기는 것을 느꼈다.

"이 밤중에 웬 일이니?"

그는 자신을 억제하며 물었다,

"내가 여기밖에 올 데가 더 있우?"

순애는 짐짓 화전 척하며 되물었다. 짙은 응석이 섞여 있었다. 서글픔과 측은함을 안겨주곤 하던 그 걸맞지 않는 어린티가 별안간 엉성하고 천격스러운 얼굴화장처럼 구역질나는 역겨움으로 화락 다가섰다.

"어린이가 아니에요. 누이 하는 짓 어디가 그렇게 순진해 보이지요? 당신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그렇게 보여 주구 싶어 꾸민 것뿐이에요."

기회 있을 때마다 아내는 말했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거기는 색안경을 끼구 순애를 보구 있는 거야. 순애는 나이만 먹었지 마음은 어린 채로 있어. 마음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지녀보지 못한 채 몸이 픈 애라구. 가엾은 애야. 가없게 여기라구.”

그는 굳건한 방패처럼 버티고 서서 아내의 화살을 막아내곤 했다.

순구는 그 밤 돌연 아내의 눈으로 순애를 바라보게 된 것일까.

"여기서 잘 생각은 말아라."

그는 선언하듯 말했다. 순애가 얼굴을 후딱 쳐들며 의아스럽다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잘못 들었거나 잘못 말해진 말이라는 생각을 그 눈이 품고 있었다.

순구는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을 흩뜨리지 않고 완강한 성벽처럼 순애 눈길 앞에 버터 보였다.

"그 사람이 날 때렸어요, 오빠."

순애가 호소하듯 말했다.

"어쨌든 잠은 네 남편이 사는 집 지붕 밑에서 자야 해."

"그 사람이 뉘우치구 데리러 오기 전에는 그 사람한테루 돌아가지 못해요."

한밤중 번개 불 속에 들짐승의 모습이 후딱 들어나 보이듯 순애의 숨은 뜻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편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주고 또 옮겨 주어도 끝없이 불편한 처음자리를 되찾아와 앉는 외곬의 고집 같은 것이었고, 정성을 다해 길들이려 애써도 끝내 의심을 버리지 못하는 야수의 교활성 같은 것이라고 느껴졌다.

"툭하면 집을 뛰쳐나오는 네 버릇부터 고쳐 놔야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를 재워 줄 수 없으니 느이 집으루 돌아가."

"오빠!"

순애의 눈에 당혹의 빛이 짙게 서려 있었다.

"밤 늦었다. 빨리 일어나라,"

"오빠가 오늘은 아주 딴 사람 같애. 내가 여기서 잠 좀 자면 안 뒬 사람이우?"

의심과 저항을 담은 순애의 눈길이 그를 스쳐 지나 아내에게로 가 머물었다

"언니 안 그렀수?"

"난 남매분들 일에 끼어 들구 싶지 않아요."

아내는 순애의 매달리는 눈길을 옆으로 젖혀놓으며 피하듯 방을 나갔다.

"두 사람이 미리 의논이라두 한 것 같애."

순애가 방어태세를 갖추듯 몸을 추스려 고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그는 순애의 말에 자극 받으며 소리질렀다.

"날 쫓아내는 거유? 이 밤중에 날 쫓아내자구 한 사람이 오빠유? 올케유? 쫓아내려거든 오라가 날 질질 끌어내가요. 오라가 끌어내기 전엔 난 못 가."

"나가! 당장 나가! 없어져 버려 !"

그는 발작하듯 벽에 걸린 거울을 떼어내 방바닥에 메어꽂았다. 거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났다.

순애의 눈빛이 놀라움으로 헝크러지며 두려움과 낭패감이 그 속에 깊은 구렁을 이루는가 하는데 왈칵 눈물로 고여 넘치며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갔다.

대문이 여닫치는 소리가 들렸다. 부서질 듯 난폭한 소리가 아니라 사뿐히 몸을 빼내가는 듯 조용한 소리였다. 그의 몸에서 무엇이 빠져나가는 소리 같았다. 그의 가슴속에 커다란 공동(空洞)이 입을 벌리고, 그 텅 빈 구멍이 주위의 소리들을 온통 빨아들여 간 돈 그는 별안간 적막 속에 몸을 담그고 서 있었다. 박살난 거울조각들이 그의 깨어진 마음을 비쳐 보이듯 첨예한 날 안에 들쭉날쭉 찢긴 형체들을 어수선하게 담고 있었다.

아내가 그의 쪘어진 마음을 추스리듯 거울조각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이 기회에 근을 송두리째 뽑아 내야 해요. 당신은 누이 때문에, 누이는 당신 때문에 곪아 쌕어가구 있었어요. 당신두 누이두 썩은 살을 도려내구 새 살루 살아나야 해요"

아내가 외과의사의 손에 쥐어진 수술 칼처럼 냉정한 표정과 음성으로 말했다. 아내는 자신의 집도로 이루어진 수술의 결과에 만족하면서도 후유증을 경계하고 있다는 투였다.

순구는 대꾸 없이 창가로 가서 아내에게 등을 돌리고 섰다. 그는 진작부터 아내의 그런 말에 조금씩 조금씩 침식되듯 무너져 온 터였다. 하지만 그는 창 밖에 충충하게 고여 있는 어둠 속으로 은밀하게 귀 기울여 보았다.

순애가 떠나지 않고 가까이에 머물러 있는 기척이 어둠 속에서 들려 을 것 같았다.

"당신 여행이나 하구 오세요. 남쪽이나 동쪽 바닷가에 -가서 시원한 바다 바람이라두 쏘이며 한 일주일 지내다 오세요."

아내의 목소리가 순구의 등이라도 쓰다듬듯 들렸다.

와수리 행 직행버스는 승객을 기다리느라 10분을 지체한 뒤 떠났다. 좌석이 반나마 비어 있는 버스의 서쪽 창으로 기울기 시작한 햇볕이 한가롭고 쓸쓸한 느낌을 일으켜 주며 비쳐 들어왔다. 그 적요한 풍경은 버스가 허위적허위적 헤치고 있는 도시의 혼잡 속에서 이상한 괴리감을 안겨 주었다.

그는 객석에 높이 앉아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신이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던 듯한 생각이 들었다. 별안간 그의 몸 속에 피로가 가득 배어들어 있는 사실이 깨달아지는 느낌이었다.

여행을 하고 오라는 아내의 말에 저항이 일면서도 못이기는 체 승락해 버린 것은 그의 내부에 위험수위로 차 오르고 있는 피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가래서 가는 게 아니야. 내가 가구 싶어 가는 거야."

그는 아내 마음을 긁어 놓기라도 하듯 말했다.

"그러믄요. 해묵은 먼지, 해묵은 기름때나 말끔히 떨어 버리구 오세요."

아내가 밝은 목소리로 사근사근 대답했다.

버스는 도시를 헤치고 나가면서 무수하게 걸음을 멈췄다. 도시의 복잡성이 자력을 품고 도시를 탈출하려는 버스를 잡아 세우는 것 같았다. 도시의 자력이 버스 바닥과 벽을 뚫고 들어와 그에게도 끈적끈적 작용하고 있었다.

나는 도시를 탈출하려는 것도 아니고 도시에서 쫓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막연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쓰라림과 아픔에 휘감기는 자신을 느끼며 반발하듯 버스가 어서 속히 도시 밖으로 그를 실어내 가 주기를 바랐다.

이윽고 버스가 도시의 북쪽 경계를 넘어 얽히고 설킨 그물을 벗어 내던지듯 시야 트인 전원으로 빠져나갔을 때 그는 옹색하게 똬리 틀었던 마음을 시원스럽게 펼쳐진 창 밖 풍경 위로 풀어냈다. 그것은 체념 같은 뒷맛을 자아내 주었다.

버려지지 않는 못된 버릇처럼, 끈질기게 뒤쫓아 다니는 어수선한 꿈처럼 도시의 복작거리는 거리 모습이 한가로운 전원 위로 겹쳐 보였다. 아내가 그 거리 속을 능숙한 몸놀림으로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시면 가게부터 들르세요"

아침에 가게로 나가며 아내가 말했다. 아내는 여행을 떠나는 그와 터미널까지 동행하고 싶어했다. 그가 탄 고속버스가 남해안이나 동해안을 향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했다.

그는 아내의 친절을 뿌리쳤다. 왜 그런지 여행을 떠나는 자신의 뒷모습을 아내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그는 아내를 먼저 내보내고 누워서 딩굴다가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고는 때늦게 굴 속을 빠져나가는 게으른 짐승처릴 어슬렁거리며 집을 나섰다,

오십 분 뒤 그는 미아동에 가 있었다, 순애가 사는 동네였다. 그는 순애네 집으로 통하는 넓은 골목길을 주저하며 걸어 들어갔다. 순애와 마주치지 않고 순애를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큰 골목이 순애네 집 쪽으로 가지를 친 샛골목 어귀에 생맥주 집이 있었다. 그는 생맥주 잔을 앞에 놓고 창가에 앉아 샛골목 어귀를 지켜보았다.

그렇게 한 시간을 지켜 앉았다가 생맥주 집을 나왔다. 술기운을 빌어 순애네 집으로 가볼까 하다가 억제하고 골목을 걸어 나와 시내버스를 탔다. 한참 뒤 닿은 곳은 아내가 기대했던 영동 고속버스 터미널이 아니라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이었다.

버스는 의정부에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북쪽으로 달려갔다. 아내의 기대에 어긋나는 방향이었다.

그는 자신이 아내와 공모해 순애를 떼어내 버리려 하고 있다는 생각 속에 빠져 들어가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풀 그릇 속에서 풀로 범벅이 되어 헝클어진 실타래를 손에 쥐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그를 무력하게도 과민하게도 만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시면 가게부터 들르세요. "

아내의 그 말을 그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척했고,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그 말의 의미가 너무도 명화하고 첨예하게 날마저 세우고 그의 의식 속으로 파고들었다

일주일의 여행에서 돌아와 그가 살던 집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울렸을 때 대문을 열어 주며 그를 맞는 생판 낯선 얼굴이 얼핏 떠올라 보였다.

아내는 진작부터 그런 주장을 해왔다. 순애에게 알리지 않고 순애 모르게 이사를 함으로써 순애를 정리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순애 자신에게 알려주자는 것이었다,

순애가 찾아와 초인종을 울린다. 낯선 얼굴이 문을 열어 주며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다.

"안방에 사는 장 순구씨가 내 오빠예요. "

"그 집 식구는 이사갔어요."

놀라 크게 열린 순애 눈에 버림받은 자의 아픔과 당혹과 노여움이 서려 엉기는 모습이 보였다.

"안 돼."

그는 그런 모습을 지우려고 머리를 흔들곤 했다. 아내는 그러한 그를 딱하게 여기며 안타까워했다. 아내는 그의 눈앞에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무너앉듯 한숨을 쉬어 보기도 했다, 자신의 노력이 헛수고이고 더 이상 시도해 볼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은 하얗게 사윈 속 모습을 까뒤집어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당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나봐요. 피로와 서글픔을 불 사윈 재처럼 담은 아내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집착해서 헤어나지 못하는 개흙 진창 같은 과거 속에 당신을 팽개쳐 두고 우리끼리 마음 개운하게 마른땅을 딛고 미래로 걸어갈 수밖에 없나봐요.

하지만 아내는 인연의 줄이 질기디 질겨 끊어내기 힘들다는 듯 다시 기력을 가다듬고는 그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개흙진창에서 이 악물구 뛰어 나와 마른땅에 서 보세요. 개흙진창 속에 버티구 서 있는 고집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깨닫게 뒬 거예요.) (, 당신이 잘못 보구 잘못 생각하구 있어. 개흙진창두 아니구 고집두 아니야.)

"당신 고향친구 있지요? 실상 난 당신 고향이란 말을 입에 올리기두 싫어요. 조 근식이라는 사람 말구 박 성출씨한테 당신이 배울 게 많다고 생각해요. 조 근식이라는 사람은 멀리 하라구 권하구 싶어요. 고향친구를 만나지 않구 못 견디겠으면 박 성출씨와 만나세요."

아내가 말했다.

"박 성출이 놈. 그 놈은 고향 사람두 친구두 아니야. 인간이 돼먹지 않은 놈이야."

"당신 박 성출씨를 다른 눈으로 보구 박 성출씨 값어치를 새로 매겨야 해요. 그렇게 되면 조 근식이라는 사람두 달리 보이게 될 거예요. 고향사람들의 시시한 얘기나 이리 저리 전하구 댕기면서 술이나 얻어 마시는 일루 세월 보내는 폐인 같은 사람, 그런 조 근식씨 어디에 값 매길 구석이 있어요? 당신 나이 낼 모래면 오십이지만 늦지 않았어요. 아니 오십이 낼 모래니까 정신을 차려 세상을, 세상 어디에 당신이 서 있는가를 바르게 봐야 해요."

순구가 순애 코앞에서 거울을 박살내던 일, 그것은 그와 아내의 팽팽하던 오랜 맞섬에서 이윽고 그가 패하고 패배를 받나들인 사실을 아내에게 증명해 보인 의식행사였던 셈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리라도 피하듯 여행길에 올랐다.

아내는 방 청소를 할 때는 식구들을 방밖으로 몰아내곤 했다. 손수 해야 성에 차 했다. 어른도 아이도 청소를 할 때면 몰아내기 전에 미리 몸을 피해 주도록 길들여져 있었다. 수건을 머리에 쓰고.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리고, 터리개로 먼지를 털어 내는 아내 모습이 떠올라 보였다. 어느덧 아내는 순구의 몸 속으로 들어와 그의 내부 구석구석에 터리개질을 해대고 있었다, 아내가 터리개질을 하는 곳은 새로 얻은 방이기도 했다.

그녀는 가게를 점원아이한테 맡기고 방을 얻으러 나선다. 가게를 다른 자리로 옮긴 것은 지난 1월이었다. 그가 가게경영의 일선에서 물러나고 대신 그녀가 나서서 경영을 맡게 되자 곧 그녀는 가게 내부수리를 했다. 천정과 턱의 색깔도 바랬고. 상품 진열의 모양도 바뀌었다. 터리개질이었다. 그가 가게를 지키지 않게 되자 조 근식도 순애도 가게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조 근식과 순애가 찾아와 수작을 걸기를 기다렸다. 조 근식이 돈을 꿔 달라면 전에 꿔 간 돈을 갚고 나서 담보를 세우라고 요구하리라. 순애가 가져가려는 옷은 사정없이 제값을 받아 내리라. 박성출이 사용해 온 방법이었다. 그녀는 필요하다면 악마의 지혜라도 빌려다 사용할 태세였다. 조 근식은 세 번인가 찾아와 지나다 들렀느니, 근처에 볼일이 있어 나온 김에 들렀느니 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돌아간 뒤에 발을 끊었다. 순애는 한 번 찾아와서 그가 집에 들어앉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다시 가게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나타나지 않아도 그녀의 코는 가게 안에서 때묵은 먼지냄새를 맡았다. 터리개질하고. 비질하고, 걸래질해도 먼지냄새는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장소를 물색해 가게를 얾겼다, 5년 가까이나 지키고 앉아 어지간히 자리잡힌 장소를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모험이지만 그녀는 툭툭 털어버리듯 해치웠다. 그것이 지난 1월이었다.

이제 그녀는 다시 살림집을 옮기려고 방을 구하러 나선다. 미리 생각해 두었던 듯 망설이지 않고 남쪽으로 강을 건너간다. 강남 쪽은 지난날의 사연이 엉켜 있지 않은 미래지향적인 땅이다. 강물이 지난날에의 기억을 차단하고 흐른다. 그녀는 미래지향적인 방을 찾아 강남 옥의 주택가를 헤매다닌다.

"평화적 정권교첸가, 쿠테탄가?"

아내를 가게에 내세우고 집에 들어앉은 그에게 어느 고향 친구가 농담삼아 물었다.

"아동복점이니 여자가 가게를 지키구 있는 게 날 것 같아서."

순구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얼굴이 뜨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숨겨 놓은 의중을 엿보이기라도 한 듯 가슴속에 물결이 일고. 얼굴이 얼숭덜숭 고르지 않게 물이 드는 것 같아 잠시 동안이지만 그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당신한테만 가게를 맡길 수는 없어요.”

아내가 말했다. 아내는 전에 없이 결의에 차 있었다. 조 근식이 꾸어간 돈이 돌아오지 앉자 아내가 자제력을 잃은 듯 들고일어난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고 그는 진작부터 의욕이 위축되고. 자신이 지치고 피로하다는 사실을 자각증상처럼 느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거꾸로 그 동안 축복되어 온 힘이 이제야 분출하듯. 솟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애쓰는 것 같았다.

아내는 그보다 다섯 살이 아래였다. 그렇지만 그러한 현상이 그쯤의 나이 차이로 설명되어 질 수는 없었다. 쉰 살이 되는 그에게는 힘의 생산이 힘의 소모를 따르지 못하는 데 비해 마흔다섯 살이 되는 아내는 힘의 생산이 힘의 소모를 앞질러 넘쳐 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를 노릇이었다. 남자란 여자보다 빨리 소모되는 것일까.

어쨌든 그는 아내의 넘쳐나는 힘을 빌려쓰기 시작했다. 그의 영역을 호시탐탐 엿보던 아내가 허술해진 틈을 재빨리 알아차리고는 날쌔게 파고 들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해 봄부터였다. 그 전까지 그는 아내가 가게에 나와 필요 이상 얼쩡거리지 못하게 했다.

순구가 망우동 시장부근에 차려놓은 가게는 고급 아동복점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고, 문화수준이 향상되면서부터 아이들의 옷도 실생활을 위한 필요 조건을 넘어서서 예술적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한 조건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디자인과 색상, 두 단어로 요약해 말할 수 있겠지만 그 간단한 두 단어 속에 무궁한 변수가 복병처럼 숨어 있었다. 상인은 변화에 대한 예민한 감각과 감수성을 지니고 제품업자와 소비자 사이를 민첩하게 헤엄칠 줄 알아야 할 뿔 아니라 신선한 변화를 지닌 상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새벽 네 시에 남대문과 청계천의 도매 시장을 뒤지고 다녀야 한다. 하루도 쉬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가차없이 뒤처져 버렸다. 쉽사리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낮잠을 자야 했다. 아내가 가게에 나오는 것이 허용되기는 그가 점심을 먹고 낮잠 자는 시간뿐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그가 독감으로 누워 지내느라 부득이 사홀 동안 아내에게 가게를 맡겨야 했던 때가 있었다.

병에서 회복된 뒤 가게 꼴이 엉망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나가 보니 그게 아니었다. 가게에는 흩어지거나 허술해진 구석이 조금도 눈에 띄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 더 잘 정돈되고 더 충실해진 것 같아 보였다. 받아다 놓은 물건의 디자인과 색상도 그의 마음에 차는 것들이었다.

오랜 타성의 틀에 갇혀 있던 가게의 분위기에 활력과 의욕이 스며들어 꿈틀거리는 느낌 이었다.

그가 몇 년 걸려 터득한 경지를 아내는 어머니 뱃속에서 타고난 듯 지니고 있었다. 그가 낮잠 자는 시간에 아내는 재빨리 익힌 것일까,

하지만 단순한 눈썰미 이상의 것을 부인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만족감과 함께 시샘 같은 보랏빛 감정의 안개가 가슴속에 피어 서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칭찬 한 마디 없이 아내를 제 자리인 집안으로 돌려보내고 잃었던 영토를 되찾기라도 하는 기분으로 가게를 다시 그의 지배하에 넣었다. 그가 없이도 가게를 운영해 나가는 아내의 솜씨에 빈틈이 없었던 것은 사흘이라는 짧은 동안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마음을 가다듬듯 생각했다. 몇 년은 고만 두고 몇 달만 가게에 매달려 보라고 해라. 지쳐 물러앉아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을 테니까.

순구가 아내에게서 가게를 되찾은 이튿날이었다

새벽 350. 그는 도매시장으로 물건을 하러 가려고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옷을 입다가 현기증이 일어 주저앉았다. 잠시 뒤 현기증이 갈아 앉아 그는 아내 쪽을 살펴보았다, 아내는 그냥 잠든 채 누어 있었으면 하는 그의 기대를 배반하고 어느 틈에 상반신을 일으켜 앉아 살피는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현기증은 다시 일지 않았지만, 잠시 그의 머리 속을 휘젓고 간 단 한번의 어지러움이 찬 서리인 듯, 태풍인 듯 사지의 힘을 휩쓸어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서서 그는 안간힘을 써 보았다. 이마와 등에서 진땀이 솟았다.

"무리하지 마세요. 며칠 더 몸조리 하셔야겠어요."

아내가 말했다. 며칠 더라는 말이, 치부를 드러내 보인 듯한 수치감과 건인 자존심을 다독거려 주었다.

"그럴까?"

그는 승복했다기보다는 너그러움을 드러내 보이며 몸을 주저앉혔다.

아내는 스스로 다음 순서를 알고 있다는 듯 옷을 꺼내 입고, 물건 담아 올 대형 가방을 챙겨 들고는 동트기 전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아늑하고 달착지근한 새벽 잠자리를 헌옷 벗어 던지듯 하고 하품 한 번 하는 일없이 찬바람 휘도는 어둠 속 한데로 몸을 래내 가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그는 틀 잡힌 민첩함과 의지가 배어든 꿋꿋함을 읽은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의 일이고. 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듯한 아내의 태도 속에 그에 대한 불신감이 배어들어 있다고 느낀 것은 자격지심 때문일까.

다섯 시 반이 되니까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부시시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옷을 입더니 부엌으로 나갔다. 잠꾸러기라는 별명까지 붙어 어미한테 늘 핀잔을 듣던 아이였다. 딸아이는 다섯 시 반에 일어나 조반 짓는 일이 자기 일이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는 듯 군소리 한마디 없이 해냈다.

여섯 시가 되니까 딸아이가 부엌에서 들어와 다른 아이들을 깨웠고, 여섯 시 반이 되니까 밥상이 차려져 들어왔다. 아이들은 밥상 둘레에 오손도손 모여 앉아 밥을 먹었고, 일곱 시가 지나니까 책가방을 챙겨들고 제각기 갈 길을 찾아 떠나갔다.

"아버지두 우리하구 같이 아침 잡수시겠어요?"

"느 엄마 오믄 같이 먹을란다."

그 동안 그와 아이들이 나눈 대화는 그것뿐이었다.

"아버지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아이돌이 떠나가 조용한 방에 아이들이 남겨놓고 간 인사말이 윙윙거리며 떠돌다가 잦아들었다.

아이들은 헛갈리거나 삐걱거리는 일 업이 잘 돌아가는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은 식구들이 성능 좋은 자동 기계처럼 스스로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앓아 누웠던 지난 사흘 동안 그러한 집안 모습에 접해 왔지만 그것은 집안을 이끌어 오던 가장의 기능 마비로 갑작스럽게 끊긴 일상의 흐름을 이어 놓으려고 집안 식구들이 임시방편으로 동원돼 허둥대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열 가신 눈으로 다시 살펴 본 집안식구들의 그러한 움직임은 뜻밖에 깨어진 생활의 흐름을 땜질하려고 급작스럽게 주워 모은 것이기에는 너무도 매끄럽고 평온하고 질서정연했다. 사흘 동안의 동원된 실습으로 아이들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이 그만큼 틀잡히기는 힘들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아내는 벌써부터,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를 어떤 상황에 대비해 아이들과 자기자신을 훈련해 온 것일까.

그가 없이도 어느 구석 하나 흩뜨러짐 없이, 구겨지는 일없이, 떨어져 내리는 일없이 궤도 위를 순탄하게 달려 갈 가족들의 생활모습이 떠올라 보였다.

순구가 새벽 도매시장에 타가 물건 해오는 얼을 아내에게 떼어 맡긴 것은 그때부터였다.

마음속에서 남편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줄여가고 있는 아내를 구슬리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다, 몸조리하는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졌고, 그러는 동안 그 일은 어느새 아내의 몫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머지 않아 아내는 그 일을 싫증낼 것이고, 그 일은 저절로 그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런 그의 예측은 어긋났고, 아내가 그의 헛점을 교묘하게 이용해 그의 영역을 침범하고 눌러앉아 버린 듯한 느낌, 또는 아내의 팽창하는 힘에 밀려난 꼴이라는 떱떠름한 생각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려 꺼림칙한 응어리가 빚어지는 듯했지만, 그것도 그렁그렁 사그러 들었다. 아내의 도움이 가져다 주는 편안함이 차츰 그의 몸 속으로 배어들어 약 기운처럼 자리잡아 갔다.

"새벽에 시장에 가서 물건 해오는 일은 요즘 마누라가 하구 있어."

그는 조근식에게 말했다.

"새벽에 시장 가는 일은 올케가 하구 있다."

순애한테도 말했다. 그들이 묻지 않은 일을 새 소식이나 전하듯 그는 말해준 것이다.

 

조근식은 (삼신대서소)라고 푸른 페인트 글씨로 씌어진 유리문을 열었다.

책상 위로 상반신을 구부정 굽히고 앉아 글씨를 쓰던 김정수가 고개를 쳐들어 검은 테 안경 너머로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는 조근식을 바라보다가 외면하듯 책상 위로 눈길을 걷어 내려갔다.

손님이 두 사람 벽에 기대놓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조근식은 빈 의자를 골라 엉덩이를 얹고 나서 방안 분위기에 익숙해지려는 듯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문간에 손바닥만한 공간을 남겨놓고는 낡은 책상 하나와 의자 다섯으로 대서소 바닥이 그럭저럭 다 메워져 있었다.

조근식은 휘두르던 시선을 거둬들여 김정수의 뒤통수에 가져다 댔다. 유행을 따라 길게 자라도록 내버려둔 머리가 반백이 되어 있었다. 그 머리에 반쯤 덮인 검붉은 목덜미도 세월에 절어 짐승의 가죽처럼 주름지고 질겨 오였다. 조근식의 머리 속에 담아 왔던 얘깃거리가 한옆으로 밀려나고, 김정수의 어린시절 모습이 떠올랐다. 키는 껑충하면서도 자기보다 작은 아이한테도 얻어맞고 눈물 찔끔거리던 칠칠치 못한 아이,

조근식은 그 아이가 지금 눈앞에서 책상에 엎드려 글씨를 쓰고 있는 반백머리의 가나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려고 애쓰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서글프게 미소지었다.

손님 두 사람은 동행인 듯 김정수가 써 놓은 서류를 돈과 바꿔 가지고 대서소를 떠났다.

조근식은 김정수의 어린 시절 모습을 지워 버리고 준비해 온 얘깃거리를 머리 속 계 자리에 다시 옮겨다 놓았다.

김정수는 조근식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 한동안이나 책상 위를 정돈하고 서랍을 여닫고 난 뒤 이윽고 의자를 돌려놓았다. 손목을 들어 시계바늘을 들여다보고 나서 천천히 조근식에게로 옮겨다 놓는 눈길이 할 얘기가 없다는 투였다.

"복덕방에 나간다면서? 어때? 잘 되나?"

그래도 김정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야 놀러 나가는 거지 뭐. 요새 복덕발 영 안 돼. 셋방 찾는 사람두 없는걸?"

조근식은 준비해 온 얘기를 꺼내 놓을 기회를 노리며 대답했다.

"그럼 요즘 뭘 하나?"

"그냥 놀지 뭐."

"자네 부인이 하는 사업은 잘 되구?"

"사업이랄 게 있나? 이름 난 화장품회사 외판원들은 수입이 괜찮은가부든데 이름 없는 회사 물건이 돼 놔서 힘든가봐."

조근식은 자신의 얘기를 할 기회를 엿보았다.

"이름 있는 회사 외판원으루 들어가지 그래 ? 이름 있는 회사에서두 외판원을 수시루 모집하나부던데."

김정수는 좀체로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전부터 댕기던 데라면 괜찮아두 새루 들어가는 데는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는군. 마흔 살까지라야 되는데 우리 마누라는 마흔 두 살이거든."

조근식은 구질구질한 마누라 얘기 집어치우고 자신이 얻어 온 소식을 전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자네 부인이 박성출이를 찾아갔더라는 소식이 들리던데 박성출이한테 무슨 부탁을 하러 갔던 게지?"

김정수의 눈이 반짝 빛을 내며 조근식을 재빨리 살폈다

"언제? "

조근식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자네 부인이 자네한테 말 안 하던가?"

김정수의 눈에 호기심이 서렸다.

"우리 마누라 얼마 전부터 화장품회사 외판원 노룻 집어치우구 보험회사 외판원 노릇 시작했어."

조근식은 김정수의 물음을 회피하며 자신도 모르게 변명조의 말이 되어 나왔다.

"자네 부인이 보험을 얻으러 박성출이한테 갔었던 게로구만. 근데 박성출이가 보험을 들어줄까?"

조근식에게서 대답을 얻어내고 싶어하는 말투였다.

"잘 알아보지두 않구 간 걸 테지. 박성출이까 왼 눈하나 깜짝할 사람인가 말야. 어림두 없지."

"밑져야 본전이니까. 얌전하구 부끄럼 잘 타던 부인네두 외무사원만 되면 유들유들해지구 끈질겨지더군 그래. 자네 부인이 한 번이 아니라 몇 번 박성출이를 찾아간 모양이야. "

몇 번씩이나? 조근식은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는

"장순구한테 가서 보험을 얻어 오더니 박성출이두 남편의 고향 친구루 알구 찾아 간 모양이군 "

이렇게 추측해 보았다.

"자네가 앞서서 돌아댕기며 운을 떼 놓구는 부인을 보내는 거 아냐? 난 자네 부인이 온대두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네."

김정수는 미리미리 예방을 해 놓자는 듯 말했다.

"예끼 이 사람아. 난 마누라 일에는 통 참견을 안해. 그래서 마누라한테 미움을 받지만 말야. "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구."

김정수는 유난히 입을 크게 벌려 가지고 보란 듯 하품을 했다. 이제 그 얘기는 흥미가 없다는 뜻일 터이었다.

조근식은 준비해 온 얘기를 시작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 열구 얘기 들었나?"

조 근식은 은근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김 정수가 잊고 있던 생각이라도 별안간 떠올라 온 듯 손목을 들어을려 시계를 보았다.

"안 구청에 가 봐야겠는 걸. 호적 관계 일을 부탁 받은 게 있어. 모처럼 찾아왔는데 점심두 같이 못하게 돼서 어떡하지? 앞으룬 나올 때 미리 전화를 하라구. 그럼 나중에 시간 만들어 술이라두 한 잔 하자구."

김정수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조 근식은 길 건널목에 혼자 서 있었다. 오전 열한 시 사십 분. 해가 한 공중에 솟아올라 있었다. 점심 때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어떻게 할까. 조 근식은 길 건너편의 빨간빛 신호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집에 들어가서 골목 어귀 구멍가게에서 라면이라도 외상으로 얻어다가 끓여 먹고 다시 나을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다른 친구를 찾아가 볼 것인가

조근식이 집을 비우기 일쑤여서 아내는 점심밥을 남겨놓지 않았다. 집에서 넘심을 먹게 되면 새로 밥을 지어먹던지 라면을 외상으로 얻어다가 끓여먹으라고 말하곤 했다. 집주인 여자에게 궁상맞아 보일까 염려해서가 아니라 기어 들어가 손을 꿈지럭거려 가지고 음식을 만드는 일이 귀찮기만 해 점심은 거르는 날이 더 많았다,

한데 오늘은 유난히 시장기가 느껴졌다.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어 조 근식은 사람들 틈에 섞여 길을 건넜다.

시장기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고비만 참아 넘기면 안정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경첩으로 알고 있었다.

조 근식은 친구를 찾아가자고 마음 먹었다. 길가의 공중전화 박스가 비어 있었지만 그는 지나쳐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놓았다.

"미리 전화를 걸구 오지 그랬어 ?"

그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 말을 듣고 그들을 찾아가려고 나서면서 전화를 했었다.

", 근식이, 잘 있었나? 그런데 오늘은 무척 바쁜데 어떡하지? 며칠 후에 다시 전화 걸어."

"오늘은 말야. 거래처 사람하구 만나기루 했는데. 다음 번에---"

그들의 말대로 전화를 미리 해 가지고는 그들을 만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금새 깨닫지는 못 했었다. 장 순구라는 예외가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장 순구한테 전화를 하면 주저 않고

"놀러 와."

하고 말했다. 장 순구는 선약이 있을 때도 조 근식을 맞아들여 그 자리에 합석시켜 주곤 했다,

"내 불알친구예요."

장 순구는 조 근식을 그렇게 소개했다, 그러면서 정말로 불알을 내놓고 뛰놀던 시절의 조 근식을 찾아보려는 듯 조 근식의 얼굴을 들여다보곤 했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조 근식을 위해 시간을 마련하는 것을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 근식은 고향친구들이 그를 위해 따로 시간을 떼어내 주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들의 시간 속에서 그들에게 거치장스러운 존재가 됨이 없이, 그들의 시간에 편승해 잠시 잠시 그들과 함께 헤엄치고 싶을 불이라고 스스로에겐 다짐하곤 했다, 그들 곁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되어 그들의 얼굴을 대하고 그들과 시시한 얘기를 주고받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했다.

"고향에서 모여 놀던 사랑방 있었잖아? 여기두 그 비슷하게 우리 고향 사람 모이는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어."

언젠가 조 근식이 그런 얘기를 했다가 퉁바리 먹은 적이 있었다.

"자네 사는 동네에서 찾아보게. 경로회라구 있을 테니까."

고향친구 만나 보고 싶으면 전화 따위 하지 않고 곧바로 찾아 문을 열어 젖혀야 했다.

조 근식은 버스를 탈까 하다가 걷기로 했다. 느릿느릿 급할 것 없이 걸음을 옮겨 놓으며 아내가 박 성출이를 찾아갔었다는 얘기를 머리 속애 되살려냈다.

아내가 집안 일이나 밖에서 있었던 일을 조 근식에게 일일이 보고하는 의무에서 벗어난 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아내가 박 성출을 찾아간 일을 조 근식이 모른다고 해서 대수로운 일은 못 되었다. 아내가 장 순구를 찾아가 보험을 얻어 온 일도 아내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장 순구를 통해서 알았으니까 말이다.

아내가 박 성출을 찾아간 회수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몇 차례 되풀이되었다는 사실에 고개가 기웃거려졌다. 신기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열 번 스무 번을 찾아간대도 이상한 일일 수는 없었다. 외무사원이란 그렇게 찾아다녀야 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이니까 말이다.

아내는 연줄을 찾아내 그 연줄에 얽힌 사람을 만나서 쪼아 대는 일이 일개미나 일벌의 일상처럼 본능적인 행동이다시피 되어 있었다. 어느 때는 아내가 성()마저 퇴화한 중성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신기한 것은 박 성출이 조 근식의 아내를 몇 번씩이나 찾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조 근식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은 못 되었다.

아내는 자기가 박 성출의 고향친구인 조 근식의 아내라고 소개하며 접근했을 것이었다.

장 순구가 그렇게 말했다. 뜻밖에 너무 오래간만에 찾아온 조 근식의 아내를 장 순구는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누구십니까?"

"저 조 근식써 아시지요?"

", 잘 압니다."

"지가 조 근식씨 처되는 사람이에요."

아내가 그렇게 자기 소개를 해서 기억을 되살렸노라고 했다.

박 성출이도 조 근식의 결혼 초에는 아내를 몇 번 만나보았다. 그 무렵만 해도 박 성출이 고향 친구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곤 했었으니까.

박 성출이 고향친구들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은 박 성출이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부터였다. 박 성출은 처음에는 변두리시장에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 전기 밥솥, 보온 밥통, 전기 후라이팬 등 주방용 전기 기구를 몇 점씩 갖추어 놓고 소매를 했는데 상술이 뛰어나선지. 운이 돌아와선지 몇 해 뒤에는 총판을 맡아 도심지 번화가에 큼직한 가게로 옮겨 앉았다. 상품도 종래 취급해 오던 것에다 믹서, 코피 포트, 전기 곤로, 전기 장판, 선풍기, 에어컨 등 다양해졌다.

고향사람들의 입에서 박 성출을 욕하는 말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고향사람들이 박 성출의 물건을 팔아 줄 겸 다른 데보다 조금이라도 싸게 물건을 구할까 해서 일부러 찾아가서 사다 놓고 나중에 알아보면 소매값을 그대로 다 받았더라고 했다. 곱게 사용한 중고품을 손질해 놓은 것으로 보이는 물건을 신품이라고 속여 팔아먹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게 고향사람한테 할 수 있는 짓거리야?"

목에 힘줄을 돋구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 사람은 박 성출을 찾아가 물건을 외상으로 달랬다가 똑 떨어지게 거절당하고 돌아왔다며 분해했다.

"아니 월부판매하구 외상하구 뭐가 다르다는 거야? 월부 물건 들여놀 데가 없어서 즈이 가게 찾아간 줄 아나? 아니꼽구 더러워서."

박 성출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월부판매를 하면서도 고향사람들과는 월부거래를 한사코 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건을 팔아주어도 코피 한잔 시켜오는 적이 업더라고 했다. 코피는 커녕 물건 팔아주어서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업이 물건을 거저 주기라도 한 듯 뚝뚝하게 군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같은 또래의 고향 친구 세 사람이 뒤늦게나마 점포확장이전을 축하하는 화분을 사 가지고 박 성출의 가게를 찾아갔다. 저녁 때가 되었는데도 음식을 시켜오거나 식사하러 가자는 말이 없어 기다리다 못해 손님으로 간 친구 중의 한 사람이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제의했댄다. 박 성출은 선선히 뒤따라 나왔다. 음식점을 찾아가 소주 한잔 곁들여 수수하게 저녁식사를 했는데, 식사를 끝내고 앞장서서 음식점을 나가던 박 성출이 계산대 앞을 모른 척 지나 문 밖으로 나갔다. 할 수 없이 입맛을 절절 다시며 음식값을 염출해 치르고 뒤쫓아 음식점을 나온 친구들이 어쩌나 보려고

"다방애 가서 차나 한 잔씩 하구 헤어지지."

하고 말했다. 이를 쑤시며 서 있던 박 성출은 고개를 내저으며

"난 바빠서 들어가 봐야겠으니 자네들끼리 하게. "

그렇게 말하고는 한번 더 뒤돌아보는 일도 없이 휭하니 걸어가 버리더라고 했다.

또 언젠가는 고향 사람 하나가 박성출을 찾아가 돈을 꾸어 달라고 졸랐다.

"사흘 뒤엔 꼭 갚겠네."

박 성출이 눈을 깜박거리며 잠시 생각해보더니

"사흘 뒤에 꼭 갚으실 수 있읍니까?"

하고 물었다.

"염려 말게. 틀림없이 사흘 뒤엔 갚겠네."

"어떻게 해서 갚으실 수가 있지요?"

"사흘 뒤에 돈 나을 데가 있어."

"틀림없습니까? 사흘 뒤에는 틀림없이 돈이 나옵니까?"

"아 틀림없대두. 하늘을 두구 맹세하겠네. "

"좋습니다. 아저씨 말씀을 믿구 꾸어드리겠습니다. "

박성출이 말했다.

"고맙네, 고마워. "

돈 꾸러온 사람은 일이 뜻밖으로 수월하게 풀리는 것 같아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박 성출은 꺼르릉 소리 내며 금고를 열었다. 하지만 금고 곡을 들여다보던 박 성출은

"아니 돈이 없잖아? 아차, 내 정신 좀 보게. 아까 물건값 치르느라 있던 돈 다 꺼낸 일을 깜박 잊었잖나?"

박성출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내일 한번 더 들러 주시겠습니까?"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고향 사람은 그러마고 선선히 대답하고는 집에 돌아왔다가 이튿날 다시 박성출을 찾아갔다.

"아저씨 참 죄송하게 됐습니다. 내일 한 번만 더 오십시오."

박 성출이 미안해 쩔쩔 매듯 하며 말했다.

고향사람은 이튿날 다시 찾아갔다.

"오 양, 내가 아까 말한 돈 이 분 갖다드려.”

박 성출이 경리사원에게 영을 내렸다.

"사장님, , 급한 일이 생겨서 부득이 그 돈을 쌨는데요."

경리사원은 큰 죄를 지었다는 듯 얼굴을 가슴께로 끌어 박았다.

"뭐야? 그럼 그 돈을 언제 거야?"

박 성출이 소리질렀다.

"내일이면 됩니다."

경리사원이 대답했다, 박 성출은 못마땅하다는 듯 경리사원을 노려보다가 고향 사람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아저씨, 정말 죄송합니다. 내일, 끝으루 꼭 한 번만 더 오셔야겠습니다.”

박성출이 말했다.

고향 사람은 이튿날 다시 찾아갔다.

"지금 문득 생각나서 말씀드리는데. 전 번에 아저씨가 사흘 뒤면 어디서 돈 생길 데가 있어서 저한테서 꿔 간 돈 갚을 수 있다구 하셨지요? 생각해보니 오늘이 바루 아저씨가 말씀하시던 사흘 뒤가 되는 날입니다. 아저씨두 오늘 돈 나을 데가 있다는 사실을 잊으셨나요? 번거롭게 저한테서 돈 라 가실 생각 마시구 아저씨 돈을 쓰시도록 하십시오."

박 성출이 빤질빤질한 얼굴로 말했다.

이놈이 그 동안 나를 가지고 놀았구나. 고향사람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꼼짝없이 무안만 당하고 박 성출이 앞을 물러나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박 성출은 고향사람에게서 멀어져 갔다. 이제 박 성출과 만나고 있는 고향사람은 돈깨나 모았다고 알려진 한 두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내가 박 성출을 찾아가기 전에 한마디만 물었어도 조 근식은 이런 저런 얘기를 소상하게 들려주어 시간 낭비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끗이었다.

"조 근식씨 아시지요? 지가 조 근식씨 처 되는 사람이에요."

이런 따위 자기 소개가 박 성출이한테 먹혀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조 근식은 고향친구들을 다 찾아다녀도 박성출이한테만은 발걸음을 안 하고 있었다, 박 성출이한테서는 조금도 고향을 느낄 수가 없었다.

박 성출이 조 근식의 아내가 찾아가는 것을 한 번으로 막아버리지 알고 내 버려 둔 것이 사실이라면 언젠가 돈 꾸러 간 고향사람에게 했듯 아내를 조롱하고 골탕먹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조 근식은 한성종합병원 정문을 들어서면서 송 광덕이 병원 안에 있는지를 수위에게 물어보려다가 그냥 지나쳐 들어갔다.

운전기사 대기실은 영안실 옆에 위치하고 있어서 찾아올 적마다 으스스한 느낌을 안겨 주곤 했다.

"기사장님 구내 식당에 점심하러 가셨는데요. "

운전 기사 대기실을 지키고 있던 삼십대의 운전 기사가 말해 주었다. 열두 시 사십 분이었다.

"여기서 기다려두 되겠지요? "

조 근식은 상대방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방바닥에 걸터앉았다. 운전기사 대기실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었다. 야간에 대기하는 운전기사를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리라.

송 광덕은 삼십 분을 기다려서야 돌아왔다.

"좀 일찍 오지 그랬어. 점심에다 코피까지 다 하구 왔으니 이를 어쩌지?"

송 광덕은 또 다시 다방에라도 나갈 생각은 없다는 듯 말했다.

"얼굴이나 보구 갈라구 온 거야."

조 근식이 대꾸했다.

"다 껴들은 얼굴은 봐서 뭐 할라구?"

그러면서 송 광덕은 조 근식을 새삼스럽게 눈 여겨 보았다.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눈여겨 보다가 비시시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 송광덕의 어릴 적모습이 떠을라 오는가 하는데 왁자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옆에 있는 영안실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였다.

"자네나 나나 금새 저렇게 돼."

송 광덕이 말하고는 끙 소리내며 방바닥에 벌렁 누웠다.

송 광덕은 병든 사람 얘기, 병들어 죽어가고 죽은 사람의 얘기를 즐겨 입에 담았다. 늘 환자만 실어 나르는 데다가 다음 일을 기다리는 시간을 영안실 옆에서 보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송 광덕의 아버지는 왜정 때 고향에서 소학교 교원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네. "

조 근식이 대답했다.

"이 사람아 나이 오십이면 언제 차례가 올지 모르는 거야. 자넨 아직두 멀었다구 생각하나? 이 병원에서 죽어 나가는 사람을 보면 자네나 내 나이는 살 만큼 살아본 측에 들어간다구."

송광덕의 얘기는 영안실에서 들려 오는 울음소리를 배음으로 깔아 어쩔 수 없이 우울하고 서글픈 그늘을 방안에 드리우게 했다. 가슴이 답답해 왔다

"광덕이. 자네 이 열구 얘기 들었나?"

조근식은 화제를 바꿀 겸 가지고 온 얘기를 꺼내 놓았다.

"구청에 당기는 이 열구 말인가?"

"그 이 열구 말구 또 이열구가 있나?"

"이 열구가 어쨌는데 ? "

"올 가을에 정년퇴직 한대는군, "

조 근식은 결정적인 대목을 말해 놓고 송 광덕의 표정을 살폈다.

"정년퇴직이라니, 이 열구가 몇 살인데?"

송 광덕은 벌떡 일어나 앉지는 않았지만 스위치를 넣은 듯 눈에 번쩍하고 불이 켜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쉰 살이지"

"쉰 살에 무슨 정년 퇴직을 해 ?"

조 근식은 만족했다. 송 광덕이 그 얘기를 모르고 있는 것과 그 얘기에 깊은 흥미를 보여 주는 것 모두가 만족스러웠다.

"이 열구가 난리 때 피난 내려와서 취직을 할라구 하는대 나이가 모자라서 안 된다구 하더래잖아? 그래 가 호적을 하면서 나이를 다섯 살이나 늘여 놨대 구만. "

"저런! 나이를 다시 졸일 수는 없나?"

"안 된대. 그 사람 또 유난스럽게 머리칼이 일찍 새서 백발이잖아?"

"와 논 재산은 있나?"

"몰라. 하지만 왠 게 있을라구?"

"하기야 호적을 제대루 고칠 수 있대두 기껏 오 년 더 명줄이 붙는 것를 시간문제야. 오 철환이두 나이 오십에 쓰러졌잖아?"

"오철환이가 쓰러졌다니?"

조 근식온 귀가 의심스러워 틈을 주지 알고 물었다.

"모르고 있었나? 쓰러져서 정신 못 차린 지 벌써 일주일이나 됐는데. 뇌출혈이야"

"회생할 가망이 있나?"

"절망적이지. 기적적으루 달아난대두 폐인이 되는 거구. 그것 때문애 오 철환이 어머니와 마누라 사이에 말다툼이 생겼대. 어머니는 집을 팔아서라두 끌까지 치료를 하자구 하구. 부인은 힘닿는 데까지는 치료를 하되 집은 팔지 못하겠다구 뻗댄대는 거야, 한데 대학과 고등학교에 댕기는 아들 딸이 즈이 할머니 편을 들지 않구 즈이 어머니 편만 든대는군."

"쓸모 없어진 사람 위해서 재산 없앨 필요가 없다는 소리겠지. 오 철환이 마누라 우리 고향 사람 아니지 아마? "

"오 철환이 마누라뿐인가? 남쪽에 넘어온 뒤 결혼한 사람은 너 나할 것 없이 고향 사람 아닌 여자와 짝을 지었지. 그렇지만 고향 여자라구 해서 아이들하구 살아갈 길이 까마득한데 집 팔아 희망 없는 병자한테 쓸어 넣을라구 할 것 같은가?"

옳은 얘기였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조 근식은 일 년에 한 번씩 고향사람들의 모임을 눈앞에 떠올려 보았다. 해가 갈수록 고향의 분위기가 없어지고 있었다. 짙은 향수를 뿜어내 분위기를 끈적끈적하게 만들던 노인들이 한 둘 세상을 떠나 모습을 감추고 남편의 고향을 가보지도 못한 남쪽 태생의 여자들과 그 여자들이 낳아놓은 자식들. 아버지의 고향에는 관심도 없는 아이들의 단순한 호기심이 모임의 분위기를 생경하고 어설프게 만들어 놓고 있었다.

전화가 걸려와 젊은 운전기사는 호출되어 나가고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오 철환이 얘기도 끝난 것이다.

잠시 머리 속을 비워 놓고 앉아 있으려니까 영안실에서 다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송 광덕에게로 눈길을 돌리니 송 광덕은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조 근식은 잠든 송 광덕을 남겨놓고 병원을 나왔다.

걸음을 옳기면서 조 근식은 기분이 흡족했다. 비교적 보람있는 시간을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가지고 간 고향친구의 소식을 고향친구인 송 광덕에게 전해주었고, 송 광덕에게서 고향친구의 소식을 새로 들었다. 재산이 한가지 늘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 시간 뒤 조 근식은 보생 한의원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들어서는 사람에게로 향해진 얼굴들에 서리던 기대가 급하게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인사말을 되삼키고 있는 표정들이었다.

"어쪘 일인가?"

진열장 위에 종이를 늘어놓고 첩약을 짓고 있던 권 기남이 미지근하지도 않은 얼굴 표정으로 말을 던졌다.

"시내 나온 김에 자네 얼굴 좀 보구 가려구 들렀네."

조 근식은 비어 있는 소파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으며 잠시 권 기남의 어릴 적 모습을 회상해 보았다. 한약방 집 아들이어서 보약을 많이 먹어 그런지 발육상태가 좋아 별명이 양돼지였다. 아버지 대를 이어 한의사가 된다고 하더니 한의사는 못 되었지만 한의원에 취직해 일하고 있었다.

조 근식은 권 기남이 첩약을 짓고 있는 진열장 속의 인삼, 녹각 따위를 욕심 없는 눈길로 바라보며 권 기남이 무슨 말을 걸어 주기를 기다렸다.

"뭐 좋은 소식 없나?"

이런 식으로 말이었다,

조 근식은 입을 다문 채 참을성 있게 기다려 보았지만 권 기남은 첩약을 다 짓도록 아무 말도 물어주지 않았다.

"기남이 자네 오 철환이 쓰러진 소식 들었나?"

이윽고 조 근식이 먼저 말을 걸었다.

"이 사람아, 그게 언제 적 얘긴데 그래? 모두 문병을 다녀왔어."

권 기남이 퉁바리 주듯 말했다.

"이 열구 올 가을에 정년 퇴직한다는 소식 들었나? "

"며칠 전에 몇몇 친구들이 이 열구를 불러내 위로 술을 샀지."

조 근식은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좀 전에 한성병원을 나와 걸음을 옮기며 재산이라도 얻은 듯 든든하던 기분에서 별안간 거꾸로 박혀 빈털털이가 된 기분으로 까부라져 있었다.

조 근식은 소파 등받이 깊숙히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잠이 들어버렸다. 침까지 흘리고 세상 모르게 잔 모양이었다.

누가 어깨를 흔들어 잠에서 깨어났을 때 턱으로 끈끈하게 침이 흘러내린 것을 깨달았고, 한의원 천정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일곱시.

"권 기남 아저씨는 볼일이 있어서 일찍 퇴근하셨는데요."

조 근식의 어깨를 흔들어 잠을 깨워 준 젊은 사람이 눈에 경멸을 담은 채 말을 전해 주었다.

조 근식은 한의원을 나와 걸음을 옮겼다. 가슴이 쓰렸다. 배가 고파서만 쓴 아닌 것 같았다.

이대로 터덜거리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장 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 근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 근식은 공중전화박스로 다가갔다. 수화기 속에서 조그맣게 축소된 장 순구의 음성이 들려왔다.

", 근식이야 자네 나한테 술 한잔만 사주게."

순구는 조 근식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가려던 참이야, 기다릴 테니 오게."

장 순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기며 대답했다

 

처음에 장 순구는 순애를 조 근식과 짝지어 주려고 마음먹었었다. 벌써 이십 년 전 이야기였다. 조 근식이야말로 순애에게 남편과 오빠와, 더 나아가 아버지의 역할을 함께 해줄 수 있는 인물로서 적격자라고 생각했다.

열 살의 나이 차. 그것은 남편인 동시에 오빠와 아버지 역할을 하는 데는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었다,

순구는 순애를 만나러 갈 때는 되도록 조 근식을 불러내 합석시키곤 했다. 같은 고향을 가진 오라의 친구. 친구의 누이동생이어서 친근감을 조성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을 생략시켜 주었다. 순애는 조 근식을 근식이 오빠라고 부르며 스스럼없이 대했다. 순구가 자리를 슬쩍 비켜주며 몰래 지켜보아도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한 공백 없이 오손도손 대화가 이어져 갔다

"너 내 동생 어떻게 생각하니?"

어느 날 순구는 술기운을 빌어 불쑥 물었다.

"사랑스러우면서두 불쌍한 생각이 든다."

조 근식의 대답이었다.

"됐어. 너 내 동생하구 결혼해라."

순구는 마치 명령이라도 내리듯 말했다,

"뭐라구? 너 지금 뭐랬니?"

조 근식은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표정이 되어 물었다.

"잔소리 말아. 넌 내 동생 순애하구 결혼하는 거야. 알았지?"

조 근식은 순구를 멀뚱한 눈으로 건너다보고 있더니

"너 취했구나."

들어볼 가치도 없다는 듯 외면했다.

"농담이 아냐. 농담할 게 없어서 그런 걸 농담거리루 삼겠니?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일이야. 어 순애가 지긋지긋하두룩 보기 싫지 않으면 결혼해라."

순구는 정색하며 진지하게 말했다

", 생각해봐라. 내가 어떻게 순애 속옷을 벗길 수가 있니?"

조 근식이 딱하다는 듯 불쑥 내뱉은 대답이었다. 순구는 실소가 터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내가 언제 너더러 순애 속옷 벗기랬니? 순애하고 결혼하랬지."

조 근식이 픽하고 실소를 홀렸다.

"속옷 벗기지 않구 어떻게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니? 여자 속옷 벗겨낼 자신이 생겨야 결혼을 할 수 있는 거야."

조 근식이 오히려 타이르듯 말했다.

"그래서? 넌 순애 속옷을 벗길 자신이 없다는 거니? 까닭이 뭐야?"

참 어처구니없구나 싶었다.

"순애한테는 자신이 있구 없구가 상관없어."

조 근식에게 전에 없던 고집스러움이 나타나 있었다.

"결국 순애가 싫다는 거로구나?"

"넌 순애가 싫어서 순애하구 결혼 못하니?"

"뭐야? "

순애와 결혼하는 것은 자기 누이동생과 결혼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행위라고 조 근식은 우겼다. 아니, 조 근식은 한 고향 여자와도 결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어떻게 고향 여자의 속옷을 벗길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고향을 잃어버리고 객지에 와서 함께 고생하는 이상 고향여자들은 친누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었다.

미친 놈. 하지만 조 근식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업었다.

순구는 그 결혼이 성사되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기회 있을 때마다 우러나곤 했다, 그랬으면 조 근식도 순애도 지금처럼 엉망으로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제와서야 조 근식은 고향 여자들의 속옷을 지나치게 신성시했던 자신의 결벽을 뉘우치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조 근식과 순애가 결혼했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그들의 됨됨이 속에 지니고 있는 씨앗이 어차피 그들을 부패하게 하고 무너앉도록 만들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스스로 일어서려고 하지 않는 사람 둘을 한 울타리 속에 집어넣는다고 해서 그들이 일어서겠는가. 순애가 살아온 과정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도 남지 않는가.

순애가 살아가는 모습을 아내가 지켜보기는 순애의 첫 번째 결혼생활부터일 것이다.

결혼하고 삼개 월쯤 된 어느 날 밤 순애가 느닷없이 들이닥쳤다. 들이닥쳤다는 표현이 알맞을 만큼 그것은 뜻밖이었고 또 늦은 시간이었다.

"웬 일이니?"

순구가 물어도 순애는 대답이 없었다,

"싸운 게로구나"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순애의 얼굴이 굳어 있지도 않았고 몸매가 흩뜨러져 있지도 않았다. 순구는 아내와 힘을 합해 순애를 놀려주며 부부싸움에 대해서. 부부싸움이 칼로 물 베기라는 데 관해서 얘기해 주었다.

"첫 번째 부부싸움인가? 축하해요."

아내의 말에 순애는 마음이 풀어진 듯 웃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여기서 주무세요. 낼 새벽같이 새신랑께서 모시러 오실 거예요.

한 방에서 세 사람이 섞여 잤다.

아내가 말한 대로 이튿날 아침 식전에 신랑이 떫은 얼굴을 하고 순애를 데리러 왔다. 아내는 고기를 사다가 불고기를 만들고 맥주를 곁들여 순애 내외를 잘 대접해 돌려보냈다.

한데 그때부터였다. 순애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신혼의 보금자리를 뛰쳐나와 오빠와 올케가 살림을 차란 단칸방에 와서 자고 가려 들었다.

"이상해요."

그런 일이 몇 차례 되풀이 된 뒤 아내가 말했다. 예사롭지 않은 모퉁이가 있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부부싸움을 한 달만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어떻게 돼서 그때마다 방 하나뿐인 오라 내외한테 와서 끼어 자려 드는가 말이다. 그나마 신랑이 데리러 오지 않으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마냥 눌러 있으려 들지 않는가.

"누이 어렸을 때 어땠어요?"

아내가 고개를 갸웃해 보며 물었다.

"오랫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지=

순구는 순애가 아버지와도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아내는 순구가 다니던 직장에서 함께 근무하던 동료였다. 두 사람이 가까워져서 결혼을 약속하게 되기까지 아내는 순구에게 아버지와 누이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누이동생이 함께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사코 순애를 당신의 딸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아버지가 순애를 딸로 인정하지 않아 순애가 아버지나 오빠와 함께 살지 못한다는 음산한 이야기를 어떻게 결혼을 약속한 숫된 처녀에게 부담 없이 털어놓을 수가 있는가.

순구는 그가 결혼하기에 앞서 순애를 결혼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해오고 있었다. 어차피 아버지와 한 지붕 밑에서 피낼 수 없는 형편이고 보면 혼기를 맞는 대로 적당한 남자를 물색해 짝 지워 주는 것이 순애를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믿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내와의 사이에 은밀하게 결혼약속이 이루어지면서 순구는 순애의 결혼 문제에 좀 더 급한 마음이 되었지만 진작부터 추진해 오던 일이어서 마음속에 이는 갈등을 어지간히 늦출 수가 있었다. 순애를 먼저 결혼시키자는 생각이 어수선한 집안 꼴을 아내에게 숨기자는 꿍꿍잇속에서 출발한 것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순애의 결혼으로 당장 드러내놓기 심히 거북살스러운 집안 꼴이 가려지더라도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아내는 머지 않아 심상치 않은 집안 분위기를 알아차리게 되지 않겠는가.

점찍었던 조 근식은 그렇듯 막무가내로 도리질하며 뒷걸음질쳤고, 순애의 신랑감으로 마땅한 사람이 나서지 않아 애를 먹고 있던 차에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변소에 다녀 나오던 아버지가 현기증을 일으킨 듯 쓰러졌는데 그것으로 아버지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사흘 뒤 세상을 떠났다. 그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앞에 문구는 당황과 슬픔보다 먼저 안도감이 가슴 밑바닥에 깔리는 것을 느꼈다. 죄스러움이 안도감을 헤살부리며 뾰족한 감각으로 파고 들었지만 그 위에 비로소 고이는 슬픔은 진하고 격한 것이었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순애가 빈 자리를 메우듯 들어왔다. 평생을 이를 수 없을 줄 알았던 가족과의 합류였다. 꿈 같으면서도 다시는 놓칠 수 없는 복된 가정으로 여겨졌는지 모른다. 적당한 사람 나서면 일찌감치 시집이나 가버리겠다던 얼마 전까지의 태도에서 시집 같은 거 가지 않겠다는 태도도 급선회한 것이다.

"오빠 뒷시중이나 들며 살아갈래."

순애가 말했다. 이만하면 순애를 맡겨도 되겠다 싶은 사람을 물색해 선보는 자리를 마련해도 순애는 도리질만 쳤다.

"시집 같은 거 뭐하러 가? 오빠하구만 살 거야."

순애가 말했다.

반 년을 데리고 있으면서 타이르고 구슬리다가 일단 단념하고는 순구는 먼저 결혼해 버렸다,

새 올케가 들어와 오빠를 차지해 버리고, 살림살이를 맡아 버리고, 그러자 순애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 지을 알게 된 것일까.

다시 마련된 선보는 자리에 순애는 선선히 나가 앉았고, 단 한번에 천생배필이라도 만난 듯 그 사람과 결혼했다.

"어머니와 떨어져 자랐다구 해서 모두 누이처럼 제멋대루 처신하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 거예요. 누이 하는 걸 보구 있으면 예절을 익히지 못 하구. 자기 마음 다스릴 힘을 갖추지 못한 사람의 충동적인 행동 같기두 하구, 또 어떤 때는 미리 계산하구 나서 취하는 행동이 아닐까 의심이 들기두 해요."

아내는 머리를 추켜드는 어두운 예감을 지워 버리기 힘들다는 듯 말했다

"단지 철이 덜 든 것 뿐이야, 차차루 좋아지겠지."

순구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대꾸하며, 순애가 죄 없이 배척 당하며 살아온 지난날들을 머리 속에 떠올려 보았다.

"오빠. 난 정말 아버지 딸 아니우?"

순애가 이렇게 물은 것은 순애 나이 열 다섯 살 때였다.

"넌 틀림없는 아버지 딸이야."

"근데 왜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 딸 아니라구 하지?"

"아버지는 병이 드셨어. 그 병 때문이야."

"그 병은 안 낫는 병인가?"

"그렇지는 않을 테지"

"그럼 아버지 병은 언제나 낫지?"

"좀 더 기다려보자,"

순애는 헤일 수 없는 날들을 기다려왔다. 아버지가 순애를 당신의 딸로 인정하고 귀여워해 주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기약 없는 기나긴 날들 속에서도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준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기다림은 끝내 공허한 것이 되어 버렸지만 아버지가 기거하던 방에서 오빠와 지내게 된 것은 그 기나긴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한데 그 기나긴 기다림에 비해 오빠와 함께 지낸 반년은 너무 짧은 기간이었을까. 반 년이란 기간은 오랜 세월 쌓인 순애의 목마름과 허기를 몰아내 주기에는 너무 짧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누이의 행동이 계산된 것이라면 거기 또 아리숭한 데가 있어요. 오빠를 겨냥한 것인지 자기 신랑을 겨냥한 것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아내가 말했다. 순애는 신랑과 대단치 않은 말다툼만 벌여도 뛰어 나와 오빠한테로 오는 것 같다고 했다. 신랑한테 오라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선가, 부부싸움을 핑계삼아 오라에게로 달아나 오기 위해선가. 어느 때는 순애가 모라 내외의 부부생활을 시샘해 훼방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랑의 애정을 시험해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고 했다, 신랑이 와서 사과하지 않는다면 이혼이라도 하겠다고 큰소리 치면서도 신랑이 데리러 오지 않을까 초조해 하는 모습이라든가, 그러다가 신랑이 데리러 왔을 때 승리감에 빛나는 얼굴 표정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인가. 신랑 앞에서는 오빠의 존재를, 올케 앞에서는 신랑의 존재를 과시해 털이고 싶은 충동이 순애의 마음속에 끝없이 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순애가 그런 충동에 시달릴 까닭이 뭐지?"

순구는 조금 짜증스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까닭이 뭐냐구요? 그건 내가 묻구 싶은 말이에요."

아내는 순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투명한 눈 속에 짜증이 잔 거품처럼 일고 있었다. 열어야 할 문의 열쇠를 찾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이었다.

아내에게 순애 얘기를 해줘야 한다고 순구는 생각했다. 그것은 순애 얘기일 뿐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순구 자신을 포함한 가족 모두의 얘기가 될 것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발병한 아버지가 어머니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너 서방질하러 나돌아 댕기는 거지?"

아버지의 의심은 상상의 날개를 펴고 온갖 모습을 허공에 그리다가 이윽고 상상의 그림은 현실이 되어 아버지 머리 속에 가슴속에 견고한 물상을 빚어 놓았다.

"간부와 내통하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냐? 그 일을 감추지 않구 털어놓기만 하면 니 목숨만을 살려 주겠다. 순애 저 지지배두 간부 놈의 새끼지? 숨기지 말구 털어놔 봐."

아버지는 순구는 당신의 자식이라고 인정했지만 순애는 당신의 자식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니가 입 다문다구 내가 모를 줄 아니? 순애 지지배 나이가 다섯 살이니니까 간부 놈과 내통한 지는 못 해두 육 년이 됐다는 얘기야. 어떤 놈이지? 순애 애비가 어떤 놈이야? 털어 놓으면 너를 죽이지 않고 순순히 헤어져 주마."

아버지는 끝내 어머니의 자백을 듣지 못했지만 어머니를 죽이지 않고 헤어져 당신이 자식이라고 인정한 순구만을 데리고 삼팔선을 넘어왔다. 그러니 순애는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셈이었다.

아내에게 그 얘기를 자세히 들려준다면 순애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이 따뜻해질지도 모른다. 적어도 순애의 행동을 덮어놓고 심술부리고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보지 않고 해묵은 목마름과 허기로 아직도 비어 있는 마음속을 채우려는 외로운 몸부림으로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아내와 결혼하기 전 집안 얘기를 털어놓지 못한 것은 자신의 어둡고 추한 구석을 들추어 보이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기 방어본능에 이끌린 행위였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여자를 속이는 비겁한 행위라고는 생각지 않았었다. 순구는 자신의 정신 속에 유전인자가 숨어 있어 어느 날 갑자기 발병해 아내와 자식을 버리게 되면 어쩌나 하는 의심 같은 것은 품어 보지도 않았다. 이 여자를 죽도록 믿으리라. 자신은 또 하나의 불행하고 억울한 어머니를 만드는 어리석고 잔인한 짓은 곁코 하지 않으리라.

집안 얘기는 그가 하려는 결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결혼하려는 여자가 오르지 못할 높은 나무에 매달린 분수에 넘치는 과일도 아니지 않은가.

집안 얘기를 하지 않은 것은 몸 깊은 곳에 나 있는 옛 상처를 애써 드러내 보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을 뿐이다. 순구는 이렇게 생각해 왔었다.

이제는 그 얘기를 털어놓자고 순구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얘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곳에 들어가 박혀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의 살로 굳어버린 듯 끌어올리자니 아픔마저 느껴졌다. 화석으로 변한 옛 흔적이 아니라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 같았다. 주저하는 자신을 느꼈다. 좀 더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리자. 얘기를 들으면 아내는 순애의 그러한 행동이 이루어지게 된 맥락을 자기 나름으로 가늠하계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내가 순애의 행동을 용납하고 받아 들이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이 지나가노라면 어느 기회에 아내는 저절로 그 얘기를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순애나 다른 어떤 사람이 아내에게 얘기를 들려 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때 가서 아내와 그 얘기를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순애는 나를 단지 오빠로만 여기지 않구 아버지 어머니를 포함한 친정 식구들. 친정 그 자체루 생각하구 찾아오는 걸 거야."

순구는 그 정도로 대답을 했다. 억지로 꾸며낸 말이 아니었다.

"당신, 누이를 저대루 내버려두실 거예요? 우리한테 오른 건 그렇다 치구 신랑이 누이의 그런 행실을 언제까지나 참아낼 수 있을 거라구 생각하세요?"

아내가 다그쳤다.

"조금 더 두구 봅시다."

순구가 말했다.

순구는 방 둘 짜리 셋집을 얻어 이사를 했다. 아내와의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

순구는 순애가 아이 낳기를 기다렸다, 어린애가 끈이 되어 순애의 발을 현실에, 그리고 순애의 마음을 가정에 굳게 매어놓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순애는 두 번 유산을 하고 나서 아이가 들어서지를 않았다. 순애의 발은 여전히 공중에 뜨고 마음 뜬 자리를 잡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다. 순애는 아이들의 숨바꼭질 놀이처럼 오빠 내외가 순애를 위해 예비해 둔 방에 와 죽치고 들어앉아 남편의 애정을 시험해 보곤 했다.

순애 남편은 술래잡기 놀이에 지쳐가고 있었다. 왜 거듭거듭 술래가 되어 편한 곳에 숨어 있는 순애를 끊임없이 찾아내러 가야 하는가,

순애가 남편을 기다리느라 초조해하면 순구는 슬그머니 순애 남편을 찾아가 술집으로 데리고 가곤 했다.

"여보게 매부, 순애두 곧 숨바꼭질놀이에 싫증을 내게 될 거야. 나두 순애를 타이를 테니 조금만 더 술래 노릇을 해주게나. 순애는 사랑 놀음을 하구 싶어하는 것 뿐이야."

순구의 간곡한 말에 순애 남편은 몇 번 더 술래노릇을 성의껏 해냈다. 하지만 이윽고 술래잡기 놀이는 깨어져 버렸다. 순애 남편이 술래가 되기를 거부한 것이다.

남편이 집안 얘기를 들려 준 것은 시누이 뜨려 버린 직후였다. 순애가 첫 번째 결혼을 깨뜨렸을 때는 남편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남편은 두 번씩이나 결혼 생활을 깨뜨려 버린 시누이의 행동을 변명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모른다.

시누이의 결혼 생활이 깨뜨려지는 것은 전적으로 시누이에게 책임이 있었다. 남숙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남자가 수시로 집을 뛰쳐나가 진을 치듯 하고는 남편에게 그때마다 항복하키를 요구하는 아내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무한정 용납하려 하겠는가.

남편이 뒤늦게 집안 얘기를 털어놓은 것은 누이동생의 그런 절조가 결여된 행위를 변명할 겸 남숙의 마음속에 빚어진 거부반응을 무마시키기 위한 조치였는지도 모른다.

남편은 잠자리 속에서 남숙의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사랑이라도 속삭일 때처럼 은근한 목소리로 집안 얘기를 들려주었는데,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남숙은 남편이 들려주는 얘기가 흥미진진하기까지 했었다.

"당신두 혹시 의처증에 소질이 있는 거 아니예요?"

남숙은 남편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응석부리듯 말했고

"옛 속담에 남편감으루 의처증 환자의 아들을 골라잡으라는 말이 있어."

남편도 아내의 부드러운 반응에 마음이 놓인다는 듯 농담 섞어 대꾸했다.

"그건 어느 나라 속담이지요?"

"죄 없이 아버지한테 의심받고 시달리는 어머니의 불쌍하고 가련한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자기 자신도 함께 고통을 겪은 아들은 자기 아내에게는 이를 데 없이 극진하게 대하게 된다는 얘기지."

", 그런 속담이 어디 있어요?"

"속담이 아니까 현실적인 얘기야. 술로 가산을 탕진한 사람의 자식은 술을 멀리하게 되구, 여자루 패가망신한 사람의 자식은 여자를 멀리하게 되는 거야, "

남편의 그런 말이 남숙의 귀에 그럴듯하게 들렸다.

하지만 남편의 집안 얘기는 남숙의 의식 속에 스며들어 동화되지 않고 동떨어져 거치적거리며 어두운 예감의 그늘 같은 것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것은 갈수록 짙어지는 자각중상처럼 남숙의 신경을 건드려 놓았다.

간단명료하지를 않고 어딘가 애매하고 복잡했다. 그 복잡성이라는 것도 표면에 드러난 채 뒤헝클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어둡고 깊숙한 지하에 묻혀 보이지 않고 느낌으로만 만져지는 것 같았다. 차츰 예민해져 가는 수많은 신경의 갈래 끝 여기저기에 눅눅하게 와 걸치는 음산한 예감 같은 것이었다.

남편은 어째서 뒤늦게 그 얘기를 털어놓은 것일까. 의심이 솟았다. 결혼 전에 얘기하지 않은 것은 남숙을 놓치기 두려워서였을까.

남편의 가족이 비교적 단출하다는 점이 그들의 결혼에 건설적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남숙이 순구라는 남자에게 만만치 않은 호감을 품게 왼 이후에 안 사실이었다. 남숙이 순구를 남편으로 택한 것은 순구의 외모와 인품이 만들어 내는 매력 때문이었다.

"이남 사람이면 더 좋았을 텐데."

남숙이 순구와 결혼할 뜻을 알렸을 때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이북 사람은 어때서요?"

살던 고장을 떠나와 근거 잃은 삶을 살아서 그런지 어딘가 안존치 못 하구 어수선해 보여. 제자리에 놓이지를 않아 흐트러지구 떠 있는 것 같아 믿음성이 없어 보여."

"사람 나름이에요, 엄마. "

"니 맘에 어지간히 드는 모양이다만 잘 살펴 보구 해라. 이남 사람 한 번 살펴볼 거면 이북 사람은 두 번 살펴봐야 해."

"이북에 본처라두 있는 사람일까봐서요? 그 사람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남쪽으루 내려 왔어요."

그런 문제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나. 착하고 성실하고 외모도 그만하면 괜찮았고, 억세고 단단하지는 않았지만 몸이 약한 편도 아니었다. 약점이 있다면 어딘가 맺고 끊는 데가 모자라 보인다는 것이라고 할까.

어머니는 순구가 제 집을 지니지 못했다는 점을 꼬집었지만 그가 특별히 이북 사람이어서 제 집을 지니지 못한 것도 아니고 또 집이란 살아가면서 장만하는 것이 아닌가.

또 하나 순구에게 약점이 있다면 때없이 그를 사로잡는 우울이었다. 얼굴에 짙게 드리우는 그림자. 하지만 우울의 정체는 쉽사리 알아낼 수가 있었다.

"나두 모르게 고향 생각, 어머니 생각에 잠기게 되는군요."

순구가 말했다. 순구를 때없이 찾아와 사로잡는 우울은 다름 아닌 향수였다. 순구의 향수는 오히려 남숙의 가슴에 애틋한 정을 일으켜 순구에게로 한 발짝 더 다가서게 했다. 순구의 마음속에 들어가 향수를 다독거려 잠재워 주리라,

결혼 전에 시아버지 될 분이 세상을 떠났다.

"할말은 아니다만 셋방살이하면서 시집어른 섬기기 힘들겠다구 생각했더니 그 어른이 돌아가시는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남숙은 순구의 향수가 깊어질 것을 걱정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순구의 향수가 더해진 것 같지는 않았다.

결혼을 했다. 식에 참석한 신랑 쪽 사람 중에는 친척은 없었고 고향사람들뿐이었다. 몇 대째 독자(獨子)로 이어져 온 가계여서 고향에서도 이렇다할 친척들의 왕래가 없었다고 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가족사진을 찍을 때는 신랑 쪽에는 시누이인 순애와 지방 도시에 살고 있는 순애 유모였다는 여자가 함께 서서 찍었을 뿐이었다.

"홀가분해서 좋다. 일가붙이들 많아 봐야 무슨 날 모여들면 여자 고생하기 알맞을 뿐이다."

어머니가 말했다.

결혼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시누이마저 시집을 보냈다. 시누이 시집 보내느라 직장 생활하며 저축했던 돈 다 꺼내 썼고, 빚까지 조금 얻어 썼지만, 예상보다 빨리 부부 두 사람의 보금자리를 꾸밀 수가 있었다.

"아들 둘, 딸 하나만 튼튼하게 낳아 놓구 알뜰하게 살림 꾸려서 내 집 장만하거라,"

어머니는 마음이 흡족하다는 듯 말했다.

. 이제 남아서 흥청망청 써버릴 수 있는 삶은 못되더라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보자. 날이 밝고. 밝게 개인 하늘에 아침해가 떠오르고, 신선한 대기 속에서 심호흡하는 기분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때없이 남편을 덮어버리는 그림자, 향수쯤은 별문제가 못 된다 싶었다.

한데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못했다.

그 그림자는 처음에는 막연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당신 고향얘기 저한테 털어 놓으세요. 그럼 당신 기분이 개운해질 거예요. 당신 얼굴을 덮구 있는 그림자가 제 마음까지 어둡게 덮을려구 하잖아요."

남숙의 말에 남편은 그림자를 지닌 채 빙긋이 웃었다.

"뭐 흥미 있는 얘깃거리가 있어야 말이지."

"당신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

"왜정 때 여학교 교육을 받은 분이었지. 아버지와 결혼하시기 전에 소학교 교원 생활을 몇 해 하셨구. 어머니 고향은 환해도, 어머니 키는 보통이구 얼굴은 동그란 편이구, 성격은 다정다감하다기보다는 이지적인 편이었어."

남편은 되도록 얘기를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향수를 발산하지 못한 채 움츠러들고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당신 고향얘기 더 들려주세요. 당신 고향은 어떤 곳이지요?"

"특색이 없는 조그마한 읍 거리야. 읍을 감돌아 흐르는 작은 강에 놓인 양회 다리가 채마다 장마 때면 끊어져 새루 놓군 했지. 그리구 뭐 별루 재미있는 얘기가 없어, "

남편은 얘깃거리에 궁한 것 같았다. 그런 남편에게서 남숙은 막연히나마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막연한 소외감은 남편의 고향친구가 놀러 온 어느 날부터 뚜렷한 현실감으로 남숙의 가슴에 얹혔다. 남숙에게 얘기할 때는 얘깃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쩔쩔매며 어색해하던 남편이 고향친구와 어울리자 마르지 않는 샘처럼 무궁무진하게 얘기를 쏟아놓는 것이었다.

고향 뒷골목 뉘집 담 안에서 골목으로 가지를 런은 개복숭아 나무, 학교에 오르는 돌계단에 뚫린 작은 구멍 속으로 굴러 들어가고는 나오지 않는 쇠 구슬 한 개, 가재 잡으러 가는 뒷산 골짜기의 오솔길 한가운데 불쑥 내민 돌뿌리 하나, 횐 수탉과 붉은 수탉의 대헐투가 벌어진 읍 공회당의 마당, 산토끼를 쫓아가 찾아낸 와우산 숲 속의 바위굴, 무지개 꽂힌 옹달샘을 찾아가던 길가의 뱀딸기 밭,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그렇듯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있는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눈에는 그의 고향 봄 들판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엷은 막이 쳐지고, 버들피리 소리가 들리는가 표정이 꿈을 꾸듯 아련해졌다. 남편의 눈에 쳐진 엷은 막과 얼굴에 어린 아련한 표정이 남편과 남숙의 사이를 차단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엷은 막과 아련한 표정에 가려진 남편의 마음속에는 고향마을의 뒷골목 길과 산야의 오솔길이 얼기설기 뻗어 있었다.

남숙은 남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 보잘것없는 길들을 남편과 나란히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보잘 것 없는 시골 마을의 길과 거친 산과 들의 오솔길을 남편처럼 정답게 느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남숙은 그 길에 들어가 설 수가 없었다. 어머니 말이 생각났다,

이북 사람이란 마음 속 깊은 곳에 뒷골목 길과 오솔길을 따로 은밀하게 숨겨두고 때때로 홀로 숨어 들어가 거닐곤 하는 사람일까. 그리고 시골 어느 곳에나 있을 뒷골목과 오솔길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일까.

남숙은 남편의 마음속에 아내가 들어가 설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남편의 마음속에 들어가 남편과 나란히 그 뒷골목 길과 오솔길을 걷고야 말리라.

남숙은 때때로 남편의 고향친구를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며 남편의 고향 얘기를 귀담아 들었고, 고향사람들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남편을 따라가 남편와 고향사람들과 어울려 그 분위기에 젖어보려 애쓰곤 했다.

남숙이 순애의 분방을 오래 참고 견뎌낸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순애, 끝내는 유희처럼 지칠 줄 모르고 남편을 시험하다가 이혼하고 오빠한테 와서 지내고 있는 순애는 이번에는 오빠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오빠는 내가 어디 가서 죽어 없어졌으면 하지?"

순애는 밥상머리에서 느닷없이 말하곤 했다.

"무슨 소리냐?"

", 내가 오빠 속마음을 모를 줄 알구? 나가버릴 테니 걱정 말아."

"꿈에두 그런 생각해본 일 없다. 다시 좋은 사람 나설 때까지 맘 푹 놓구 쉬어라."

"거봐. 나를 쫓아낼 궁리를 하구 있으면서 뭘 그래 ?"

"쫓아내는 게 아냐. 내가 너를 쫓아내서 시원한 게 뭐 있니? 니가 좋은 사람 만나 잘 사는 모습을 보구 싶은 생각뿐이야. 어머니가 여기 계셔두 나하구 똑같이 생각하실 거다."

"엄마 핑계 대지 말아요."

남편이 출근하고 없는 사이 시누이는 문밖에 바람이라도 쏘이러 나가듯 슬그머니 빠져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얘 어디 갔지?"

저녁밥상을 대하고 비어 있는 순애 자리를 가리키며 남편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화장실에라도 가듯 방을 나가구는 들어오지 않았으니까요."

통행금지 시간이 되도록 순애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 나 좀 늦을지두 몰라. 순애를 찾아봐야겠어."

이튿날 아침 출근하면서 남편이 말했다.

"어디 짐작 가는 데 있어요?"

"몇 군데 찾아가 보는 거지."

밤 늦어 남편은 누이동생을 찾아 데리고 돌아왔다. 수원에 있는 순애 유모네 집에 가서 데려왔다는 것이다. 순애의 얼굴에는 승리감 같은 것이 환하게 번져 있었다.

유모네 집이라면 며칠 묵어 오두룩 내버려두시지 그랬어요? 기분 전환두 될 체구요."

남숙이 남편에게 말해보았다,

순애 유모두 전실자식한테 얹혀 지내는 형편인걸."

남편의 허전한 대답이었다.

순애는 한 달이 멀다하고 집을 뛰쳐나가 전실자식의 집에서 식모살이 하듯 얹혀 지내고 있는 유모를 찾아가 진을 치곤 했다.

-오빠는 내가 어디루 없어졌으면 하지? 오빠 속마음 난 다 알아요."

밑도 끝도 없이 트집잡아 오빠 마음 긁어 놓고는 오빠없는 사이에 집을 나가는 순애는 오라가 찾아갈 수 업는 데로 가 숨어 버리지를 않고 오빠가 찾아갈 수 있는 수원 유모한테로 가 있곤 하는 것이었다.

남숙은 그 일을 무수하게 겪으면서도 그때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애가 유모를 찾아가는 건 어머니 생각이 나기 때문일 거야. 그리구 개게 트집을 잡구 뛰어나가는 건 내가 자기를 싫어하게 될까봐 겁이 나서 그러는 걸 거야."

남편이 말했다. 그렇더라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순애는 왜 구태여 그런 방법을 사용해 오빠의 관심을 시험하고 확인해 보려는 것일까. 다른 시위의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시누이의 그런 짓거리는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져 일상의 평화로운 흐름을 휘저어 헝클어 놓곤 했다.

남숙은 때때로 억제하기 힘든 역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럴 때면 시누이의 그 버르장머리 없는 짓에 왜 질질 끌려만 다니냐고 남편을 몰아세우기도 했지만 부부싸움에 이르기 전에 자제할 수 있었던 것은 잘못 섣부른 행

위가 되어 남편의 마음 속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남숙의 노력에 해를 끼칠까 염려되어서였다.

남편은 적당하다 싶은 남자를 물색해 시누이를 두 번째로 시집보내며

"고생 되더라두 꾸욱 참구 살아라, 세상사는 게 다 그런 거야."

그렇게 타일렀다.

하지만 누이는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집을 뛰쳐나오는 버릇이 도졌고, 두 번째 남편을 되풀이 되풀이 시험하다가 이윽고 또 하나의 파경을 맞았다.

"순애가 어린애가 생기지 않아 불안한 모양이야."

남편은 변명하며 시누이가 뛰어 나을 때마다 두 번째 매부를 찾아가 술 대접을 하며 구슬리곤 했지만, 한정 없는 관용이 베풀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시누이는 구제 불능의 인생 말종이에요.-

남숙이 남편에게 그런 말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에 남편이 가슴 깊숙이 넣어 두었던 그의 집안 얘기를 털어 놓은 것이다.

실상 남숙은 남편의 품에 안겨 그 얘기를 들으면서 감동으로 몸을 떨기까지 했다. 나의 인내와 노력은 드디어 남편이 마음의 문을 열도록 만드는 위업을 이루고야 말았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벅찬 승리감이었고 성취감이었다. 남편의 마음 속에 펼쳐져 있는 고향의 산하. 마을의 뒷골목 길과 산과 들의 오솔길에 남편과 나란히 서서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보이기까지 했다. 남편의 고향을 내 고향으로 삼으리라.

시누이의 그 이해할 수 없는 처신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모습이 바뀌어 보였다. 그랬었구나. 그런 깊은 사연이 있었구나.

남숙은 조촐하게 음식을 차리고 남편이 늘 잊지 못해 하는 조 근식씨를 초대했다,

순애까지 합쳐 네 사람이 식탁에 둘러앉아 남숙이 어느 때보다 정성껏 장만한 요리를 들기 시작했다. 남숙이 예상했던 대로 고향얘기가 풀려 나오기 시작했다, 남숙은 기꺼이 대화 속으로 끼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남숙을 남겨둔 채 그들끼리 남숙이 알 수 없는 뒷골목 길을, 숲길을, 그들만이 알 수 있는 언어를 지껄이며 어우러져 걸어서 멀어져 갔다. 남숙은 그들을 좇아가려고 허우적거려 보았지만 그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들은 영사막 속의 풍경처럼 단절된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남숙은 그들을 남겨둔 채 조용히 방을 나와 부엌에 쪼그려 앉았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남숙의 가슴에 절망감과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이남 사람이면 더 좋은데."

이남 사람이라고 해서 그 마음속에 뒷골목 길과 오솔길을 은밀하게 지니고 있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남 사람이라면 비록 그의 마음속은 아니더라도 그의 고향으로 달려가 뒷골목과 오솔길을 싫도록 쏘다녀 볼 수 있지 않는가. 남숙은 자신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남편은 나를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 것일까. 남편은 내게 어느 정도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일까. 남숙은 남편의 마음속에서 자꾸만 왜소해져 가는 자신을 느꼈다.

남숙은 문득 친정으로 가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입가로 실소가 비어져 나왔다. 시누이처럼 남편을 시험해 보겠다는 것인가. 뛰쳐나가 친정으로 가는 일을 되풀이한다면 남편도 남숙을 단념해 버릴 것인가. 남편이 단념할 때 남숙은 버림받는 것일까. 아니면 꿈에서 깨어나는 것일까. 한 번쯤 남편을 시험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꼬물거리며 머리를 쳐들고 있었

.

방에서 어린애 우는소리가 들렸다.

"여보, 어디 갔어 ?"

남편이 남숙을 불렀다. 남숙은 눈물자국을 지우며 어린애가 있었지 하고 새삼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어린애가 남편과 남숙의 사이를 이어놓고 있었다. 그것은 체념이었고, 활력이기도 했다.

남숙이 남편의 마음 속 오솔길에서 남편과 나란히 서서 걷고 싶다는 꿈을 버리고 남편을 그 오솔길에서 끌어내자고 생각을 돌린 것은 아이들이 뚜렷뚜렷한 모습으로 자라면서부터 였다.

"이 세상 누구나 마음 속 한자리에 지난날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어요. 하지만 당신은 현재나 앞날을 위해 사용해야 할 장소를 지나간 날들이 차지하도록 방치해 뒀단 말이에요. 지난날이란 사진첩에 꽃아둔 사진처럽 깊이 넣어두었다가 어쩌다 꺼내봐야지 늘 펼쳐놓구 들여다보아서는 안 된다구 생각해요. 당신이 앞날이 없는 노인이나 병자예요? 왜 지난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남숙이 공세를 취했다.

"북쪽에 고향을 두구 온 사람들에게는 고향을 떠나 온 사실이 지난 일이 아니라 지금 벌어지구 있는 일이야. 그 사실이 과거가 되려면 고향 가는 길이 뚫리거나 내가 죽어 의식이 없어져야 해. 고향 가는 길이 뚫리지 않구 내가 살아 있는 한 고향을 잃어버린 일은 과거 속에 파묻힐 수 없는 영원한 현재야."

남편의 대답이었다

"당신이 남쪽에 내려와 새로 만든 현실은 어떻게 하구요?"

"어떻게 하다니? 내가 처자식을 헐벗구 굶두룩 만들었단 말인가?"

". 기막혀. 어쨌든 난 당신이 고향생각을 하건 말건 참견하지 않겠어요. 결혼생활 십여 년에 셋방살이 면치 못한 것두 탓하지 않겠어요. 단지 벌써부터 아이들 뒤대기가 벅차다는 사실은 얘기해야겠어요. 이대루 가다가 는 내년부터는 적자 생활 면치 못해요."

"절약해야지,"

남편은 조금은 기가 꺾인 것 같았다. 남숙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의 등을 밀어냈다.

"말씀 잘 하셨어요. 당신은 시누이와 조 근식씨한테 필요 이상으로 돈을 쓰구 있어요."

남편은 처자식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시누이에게는 철마다 옷을 사 주었다. 틈틈히 용돈도 집어 줄 것이었다. 조 근식씨와는 주말마다 어울려 술을 마시곤 했다. 조 근식씨는 부인한테 얹혀 사는 처지이니 술값은 남편 주머니에서 나을 것이었다,

"순애나 조 근식이를 멀리하라는 얘기야?"

남편은 다분히 힐난조로 물었다.

"할 수만 있다면요."

남숙은 남편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꾸했다, 물러설 수 없는 심정이었다.

남편의 목 울대가 감정을 삼키듯 오르내렸다.

"당신한테 얘기하겠는데 말야. 난 조 근식이를 만나면서 고향을 만나구, 순애를 보면서 어머니를 보는 거야. 알겠어?"

뭔가 섬뜩한 느낌이 남숙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머리 속에서 번개가 친 것 같기도 했다. 순간적인 충격과 섬광 속에 시누이와 조 근식의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 보이다가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그래, 허깨비다! 남숙은 깨달음처럼 마음속으로 외쳤다. 시누이와 조 근식씨는 실체가 아니라 지난날의 허깨비였다. 남편의 마음에 비친 옛 그림잔일 뿐이었다. 남편은 허깨비에 손목을 잡혀 지나간 날들 속을 헤매다니며 자신을 소모하고 있었다. 허깨비들을 남편의 마음속에서 떼어 내야 한다, 남숙은 마음을 추스르며 생각했다.

"시누이 말이에요. 의지는 어린애의 상태에 머물러 있구. 잔꾀를 생각해 내는 지능은 어른들의 보통 수준을 훨씬 앞지른 기형적인 모습이에요. 당신의 과잉보호가 빚어놓은 모습이에요."

"제발 불쌍한 내 동생 헐뜯지 말아. 모른 척 내버려 두라구."

남편이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더 늦기 전에 누이가 제 자리를 찾아 설 줄 알게 비뚤어진 정신상태를 바로 잡아줘야 해요. 누이가 일어설 수 없도록 망가져 버리는 꼴을 당신두 보구 싶지 않겠지요?"

"거기가 언제부터 순애 생각을 그렇게 절절하게 가슴속에 담아 가지구 있었지?"

"누이가 멀리 떠나가 준다면 난 누이라는 사람 어떻게 되든 관심 없어요. 그렇지만 누이는 망가지구 썩어가면서 그 독을 우리한테 끼얹을 만큼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단 말예요. 말이 났으니 말이지 당신 정신상태두 정상이 못 돼요. 아니 병들어 있어요. 당신과 당신 누이동생은 서루 독을 옮겨 주구 병을 키워 나가구 있어요."

"입 닫아! "

"조근식 이라는 사람두 그래요."

"져 닫지 못해?"

"난 나와 아이들을 위해서두 당신을 그 사람들한테서 보호할 의무가 있어요."

"!"

꽃 몇 송이를 꽂고 책상 위에 얹혀 있는 붉은 자기꽃병이 남편의 손아귀에 잡혀 높이 솟았다가 방바닥에 미어꼰져졌다. 박살난 꽃병의 붉은 색 파편과 방바닥에 흥건하게 엎질러진 물 속에서 잘린 줄기를 드러내고 헝크러져 누워 있는 꽃들이 남편의 날선 의식과 찢긴 가슴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남숙은 입을 다물었지만, 도사리고 앉아 물러서서는 안 된다, 밀고 나가야 한다 하고 마음 속으로 외쳤다.

남숙은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그 퇴직금으로 아동복점을 차리면서부터 시누이와 조근식을 떼어놓기 위해서는 남편의 손에서 가게 경영권을 뺏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 어느 기간 동안만이라도 남편을 경제적인 무능력자로 만들어 버려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당신 나이 오십이 가까웠어요.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구 생각하셔야 해요."

남숙은 그렇게 말했지만 남편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난 불안해요. 당신은 자기자신을 방어하구 보호할 줄을 모르는 사람 같아요. 당신 고향사람 박 성출씨의 반만큼만 자기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돼 보세요."

"박 성출이 같은 놈 이름 입에두 올리지 말아."

남편은 욱해서 거칠게 내뱉았다

"내가 가게를 볼까요? "

남숙은 슬며시 한 발을 디밀어 보았다

"집에서 살림이나 해."

남편은 한마디로 내몰았다.

"당신 혼자 힘들지 않겠어요?"

"점원을 두면 되잖아? "

"당신 좋으실 대루 하세요. 하지만 정신 차리세요. 그리구 시누이두 이번이 마지막 기회예요. 나이 사십이 다 돼 만난 사람과 다시 헤어지는 날이면 그때는 정말이지 구제 불능이예요. 시누이를 위해서두 전 같이 받아주면 안돼요. "

"알았어, 그만 해."

남편의 말은 여전히 미덥지가 못했다.

가게를 차린 뒤에도 남편은 예상한 대로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 근식이 찾아오면 남편은 주저 없이 가게를 점원아이에게 맡기고는 술을 마시러 나가 아낌없이 시간과 돈을 써버렸고, 누이동생이 찾아오면 용돈을 듬뿍 쥐어 주거나 누이동생의 전실아이들 몫으로 비싼 옷을 선물하곤 했다. 점원 아이가 그때마다 은밀히 알려주곤 했다.

시누이는 용돈을 얻어가거나 전실자식들을 끌고 와 옷을 한 벌씩 얻어가면서

"오빠, 올케한테 말하지 말아요."

이렇게 꼭 다짐을 한다는 것이었다. 남숙은 꾹 참고 시기를 기다렸다.

남숙이 새벽시장 보러 가는 일을 남편의 손에서 넘겨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느 날 남편이 점심을 하러 들어온 동안 가게에 나간 남숙에게 점원아이가 귀띔했다,

"쥔아저씨 친구분 조 근식씨라구 있잖아요? 쥔아저씨 한테서 백만 원 꾸어 갔어요."

백만 원이라면 예금통장에 들어 있는 돈의 삼분의 일 액수였다.

남편과 교대해 집에 들어간 남숙은 장롱 속에서 예금통장을 꺼내 확인해 보았다. 그 날짜로 백만 원이 인출되어 있었다. 대뜸 찾을 수 없는 돈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통장에서 백만 원이 빠져나갔으니 어떻게 된 노릇이지요?"

그날 밤 남숙이 캐물었다.

"통장은 왜 뒤지구 야단이야?"

남편의 대답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통장 꺼내 보는 게 내 취미예요. 돈 가져간 사람이 시누이에요? 조 근식씨예요?"

"한 달이면 갚는댔어."

남편이 얘기를 털어놓았다.

조 근식씨 부인이 유명한 화장품회사의 지정 소매점 경영권을 얻는데 백만 원이 필요하다면서 조 근식씨에게 돈을 변통해다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경영권만 따내면 자본주나 동업자는 쉽사리 찾을 수 있어서 넉넉잡고 한 달만에 돈을 갚을 수 있으니 한 달 동안만 쓸 돈 백만 원을 수단껏 변통해 오랬다는 것이다.

"남편 체면 애비 체면이 최종적으루 걸려 있는 일이야. 편의 좀 봐 주게."

조근식씨가 남편에게 했다는 말이었다.

"그 돈 잃어버린 돈이에요."

남숙이 말했다.

"사람을 너무 못 믿어두 못써."

남편이 책망하듯 대꾸했다.

"두구보세요. 우리한테 백만 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몰라서 그렇게 가볍게 다루세요? 그 돈은 돌아오지 않아요."

남숙은 단언했다. 남숙의 말대로 돈은 돌아오지 않았다.

(박 성출씨는 보험을 들어 달라고 추근추근 찾아오는 조 근식씨 부인을 유력하다는 어떤 사람에게 소개해 주었다. 조 근식씨 부인은 박 성출씨가 소개해 준 그 유력한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이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당신 마음대루 하두룩 가게를 맡길 수가 없어요. 이제부터 돈은 내가 관리하겠어요. 그리구 당신 몹시 피로하신 거 같아요. 당분간 쉬도록 하세요. "

남숙이 남편에게 보낸 최후통첩이었다.

 

"남쪽이나 동쪽 바다가에 가서 한 일주일 시원한 바람이나 쏘이다가 오세요. "

아내가 한 말이었다, 남편을 시험하는 장난을 벌이려고 밤중에 집을 뛰쳐나온 순애를 호통쳐 돌려보낸 순구의 용기 있는 행동의 대가로 아내가 보내 주는 여행이 아니라 순구 스스로 결정해 떠나온 여행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 증거로 그는 동쪽이나 남쪽의 바닷가가 아니라 북쪽 내륙지방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아내는 그가 북쪽으로 여행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북쪽은 그의 고향이 있는 방향이었고. 그가 북쪽으로 향하는 것은 고향을 의식한 것이고, 그것은 다름 아닌 순애와 조 근식을 여전히 마음속에 담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순구가 여행을 사고 있는 동안 아내는 그들의 거처를 옮겨 놓을 것이다. 순애와 조 근식이 찾아오기 어렵도록 하기 위한 뜻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그들에게 알리지 않고 어디론가 떠나감으로서 순구의 마음속에서 그들이 정리되고 처리된 사람들로 취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주자는 의도가 배어 들어 있었다.

"시누이와 아주 절연하자는 건 아니에요. 당신이 시누이의 분방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누이가 깨달아 알 때까지, 시누이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체념으로 안정을 얻을 때까지, 그렇게 해서 오빠와 누이동생 사이에 정상적인 예절의 관계가 회복될 때까지 얼마동안 관계를 보류하자는 것뿐이에요. 더 늦어지기 전에 시누이를 제 분수를 알고 혼자 힘으로 서서 걸어갈 수 있는 사람으루 훈련시키자는 거예요."

아내가 말했다.

순구의 호통을 받고 노여워 허둥지둥 뛰어 달아난 순애가 그 길로 자기 남편에게로 돌아가기는 했을까. 실의에 잠겨 도시의 거리를, 또는 낯선 시골의 들판을 헤매다니는 순애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떠올라 보였다.

버스는 포천을 지나 북으로 북으로 달리고 있었다. 순애의 모습을 지워내며 창 밖을 내다보는 눈에 (삼팔선)의 표석이 걸려 들어왔다. 버스가 삼팔선을 넘어서고 있었다. -삼팔선-순구는 별다른 감회에 젖어드는 자신을 느꼈다.

걸어서 넘나들던 삼팔선이었다, 해방 이듬해 어머니와 순애를 고향에 남겨두고 아버지를 따라 남쪽에 넘어온 순구는 방학을 이용해 일 년에 두 세 번 삼팔선을 넘어 어머니와 순애를 보러가곤 했었다

1946년만 해도 삼팔선 넘기가 수월했었다, 미아리 고개에는 북으로 가는 사람들을 삼팔선까지 실어다 주는 일을 업으로 삼는 화물자동차가 늘 손님을 기다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차삯이 얼마였던가. 돈을 받고 사람을 태운 화물자동차는 의정부를 지나 포천읍에 이르러 사람들을 내려놓고는 북에서 삼팔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을 태우고 되돌아가곤 했다,

포천읍에 내린 사람들은 삼팔선까지 걸어야 했다. 남쪽에서 삼팔선 넘나드는 사람을 검색하지 않았지만, 북쪽 경계선에서는 소련병정들이 따발총을 메고 서서 북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몸을 뒤지곤 했다. 양담배 한두 갑이면 소련 병정들은 선선히 길을 틔어주곤 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사람은 엄하게 다스려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넘어가는 사람들은 대강대강 넘겨주곤 했었다.

어머니는 고향에서 면 여성동맹위원장 일을 보며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북에서도 출신성분이니 하는 것들을 요란하게 따지지 않았었다. 물론 어머니는 먹고 살기 위해서 그 짓을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한 그 짓이 아버지의 병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말이다.

아버지는 왜정 때 고향에서 정미소를 경영하면서 땅도 수수하게 장만해 놓았는데, 해방이 되고 공산천하가 되면서 정미소와 땅을 몰수당해 살고 있는 집 한 채 이외에는 빈털털이가 되었다

한데 이상한 노릇은 공산주의자들이 소규모이긴 했지만 -자본가와 지주-로 주목해 재산을 몰수한 사람의 부인을 여성동맹위원장 자리에 앉힌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죄질이 가벼워 정미소와 땅을 몰수당한 것으로 죄 갚음이 끝나 살던 집 한 채를 그냥 남겨 주었을 정도이니 그 부인이 여성동맹위원장이 되었기로 이상할 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공산당들이 일부러 어머니를 끌어 내 아버지를 더욱 모욕 주려고 꾸민 노릇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아직 공산체계가 틀이 잡히지 않은 과도기여서 어머니의 지식을 공산주의자들이 잠시 이용해먹은 데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쨌든 아버지의 의처증이 발병한 것은 어머니가 여성동맹위원장이 되어 밖으로 나돌아 다니면서부터였다. 어머니가 여성동맹 일을 봐주고 벌어오는 곡식으로 밥을 지어먹으며, 아버지는 어머니가 정을 통하고 있는 어떤 자와 짜고 아버지를 죽이려고 밥에 독약을 뿌렸을 거라며 어머니에게 아버지 밥을 먼저 먹어보게 하곤 했다. 어느 날은 폭약이 밥그릇 맨 아래쪽에 들었을 거라며 밥그릇 맨 아래쪽의 밥을 어머니에게 먹어 보도록 하기도 했다.

이윽고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혼을 강요했고, 어머니는 부득이 응하고 말았다.

순구가 삼팔선을 넘어 고향에 가 어머니를 만나면

"느이 아부지가 가보라구 하던?"

어머니는 묻곤 했다. 어머니는 그동안 아버지 병이 나아 어머니를 다시 불러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을까.

1947년부터는 삼팔선의 경계태세가 엄해져 숨어서 산길로 넘어 다녀야 했고, 1948년에는 경비가 더욱 심해져 순구는 이윽고 삼팔선 넘나드는 일을 단념해야 했다.

순구가 다시 어머니를 만난 것은 6.25전쟁이 나던 해였다. 공산군이 남침했다가 패퇴하고 국군이 삼팔선을 돌파해 북쪽 땅을 수복하던 그 가을 순구는 지체 않고 고향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순구를 안았다.

"느이 아부지가 가보라구 하던?

어머니는 몇 해 전에 했던 똑같은 말을 맨 먼저 꺼냈다. 어머니는 몸이 병들어 있는 것 같았다. 얼굴에 병색이 짙었다. 이제는 아버지를 버리더라도 어머니와 함께 고향에서 살리라.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 먹으며 어머니 곁에서 몇 해만의 귀향을 만끽했다.

하지만 고향에 머물러 있던 기간은 기껏 한달 남짓이었다. 중공군의 침입으로 유엔군이 후퇴하면서 순구도 다시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 함께 남쪽으로 가시지요. "

순구의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거듭 간청해도 어머니는 번번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정 그렇거든 순애나 데려가려므나. 난 몸이 아파서 순애를 돌봐 주기가 힘들 것 같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내년 봄에는 다시 고향에 오게 될 거예요."

순구는 순애를 업고 고향을 떠났다. 혼자 사는 갓났을 적 순애 유모가 순구와 순애의 뒤를 따라 나섰다. 아버지에게 순애가 아버지 딸임을 설득하고야 말리라. 그래야 어머니고 다시 함께 살 수 있을 것 아닌가. 순애의 나이 아홉 살 순구의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아버지가 순애를 한사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모가 순애를 데리고 눈에 띄지 않게 주위를 빙빙 돌았다. 피난도 그렇게 떠났다가 돌아왔다.

유모가 개가를 하자 순애는 고아원에 맡겨졌다. 순애를 고아원에서 래차온 것은 순구가 군에서 제대하고 나와 취직을 하고서였다. 순구는 방 한 칸을 얻어 순애를 자취하도록 했다. 순애는 사무실 사환, 상점 점원, 공장 직공 노릇을 하며 다른 도시로 가 살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길고 긴 순애의 외롭고 아픈 방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는가. 아직도 순애는 방황하고 있으니 말이었다.

버스가 와수리에 닿은 것은 일곱 시였다. 예상보다 번화한 거리가 눈앞에 황혼을 맞으며 펼쳐져 있었다. 휴전선을 지척에 둔 곳에 이만한 거리가 세워져 있다니. 불이 켜지고 있는 거리를 놀라운 눈으로 둘러보던 순구는 거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얼마 안 가 거리는 끝나고 눈앞에 산이 막아 서 있었다. 걸음을 멈췄다. 고향 땅에 가까이 와 있었지만 객수(客愁)가 진하게 몸을 휘감아 뫘다. 너무 오래 고향에서 떨어져 살아온 때문일까. 아니면 바람 속에 풍겨오는 고향 냄새가 그 동안 억눌려 있던 객수를 풀어놓은 것일까.

날이 저물고 북녘 하늘이 '어둠에 묻혀가고 있었다. 순구는 뒤돌아 서서 여관을 찾아 걸음을 옮겨 놓았다. 불켜진 아크릴 여관 간판이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뿌옇게 떠올라 있었다.

우선 좀 쉬자. 그리고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순구는 여관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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