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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6

혼자 먹는 밥맛의 깊이

by 자한형 2024.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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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먹는 밥맛의 깊이/남모

나는 종종 허름한 국밥집에 혼자 들어가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가령 계절과 상관없이 비가 부슬부슬 온다거나, 조곤조곤 무심히 흐르는 음악처럼 얌전한 저녁이거나, 뜬금없이 국밥이나 소주가 생각날 때 사람들이 붐비지 않는 국밥집에서 마주하는 소박한 식탁은 꽤 오래된 습관처럼 취향저격인 풍경이다. 남들은 이 유서 깊은 청승을 만류하는 편이지만 거기 해장국집이나 순댓국집 구석에 앉아 주인이 그냥 틀어 놓은 텔레비전을 별 감흥 없이 보거나 지난 신문들을 뒤적이며 뜨거운 국물에 밥을 말아 한 입 두 입 넘기는 일은 생각보다 쓸쓸하지도 군색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립고 그리운 일이다.

잠시 허락된 온전한 공간과 한 끼를 받아놓고 앉아있는 일은 덜커덩거리던 하루와 생각을 차분히 가다듬어 볼 수도 있어서 간혹 수도자의 식사시간처럼 조금쯤 경건해지기까지 한다. 어느 날은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 같고 마냥 슬플 때가 있었고 아쉬운 순간이나 되돌리고 싶은 시간도 있었을 테다. 또 어떤 날은 누군가를 그냥 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턱없이 궁금해져서 전화기를 매만진다거나, 막대한 부피와 질량으로 못 견디게 그리운 날도 있던 것이다. 그런 생각과 마음들을 투정하듯 국밥 한 그릇에 말고 싶은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한 그릇 분량의 더운 김이 모락모락 코끝을 간지럽히면 간혹 허름한 눈물이 돌 것도 같아서 피부미용을 핑계 삼아 고개를 처박는 일도 그리 창피한 것만은 아니다.

밥맛, 특히 혼자 먹는 밥맛의 깊이에 대해 잠시 골똘해지는 저녁. 곽재구는 포구기행에서 혼자 먹는 밥맛을 아는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면 육체 노동자라며 성찰과 노동의 고단함에 대해 말을 했지만, 이도 저도 아닌 나는 예의 그 더운 김에 얼굴을 파묻고 혼자 먹는 밥맛의 깊이를 가늠해 본다. 그리고 온기와 냄새와 상념이 주는 깊고 걸쭉한 삶의 오묘한 맛을 본다. 이때 혼자라는 건 간혹 호사다. 굳이 외로움이란 명제를 대입하지 않아도 늦은 저녁 마주한 국밥 한 그릇과 몇 가지의 찬들은 자주 내 삶의 형상을 직관하게 하는 개인적인 온정의 신탁인 셈이니까.

요즘은 혼밥족을 위한 가림막 식탁도 있다던데 그런 곳은 개인적으로 낭만도 취향도 맞지 않는다. 혼자 하는 식사 특히 식당에서의 그것은 때로 조금 처량하게 보일까 눈치를 좀 보게 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사람과 음식 냄새가 적당히 섞여있고 오가는 대화도 좀 귀동냥하면서 작은 세상의 끼니들을 맛본다는 건 짐작보다 푸근하고 든든한 일이다. 혼밥이란 말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혼자 먹는 밥맛에 대해 하도 떠들어서인지 정말 혼자 밥을 먹을 때가 많게 되었지만, 이런 호젓한 시간과 풍경과 밥맛은 종종 혼자만의 선물처럼 그리고 말없는 위로처럼 두 팔을 벌려 마중을 나오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혼자 고상하게 국밥을 먹고 있는데 실제로 누가 다짜고짜 팔을 벌려 다가온다면 나는 식겁해서, 혹시 내 밥을 뺏어먹기라도 할까 싶어 서둘러 두 손으로 뚝배기부터 가리겠지만. 내 밥은 곤란해, 아무렴.

점심

점심. 마음에 점을 찍는다는 점심을 생각하면 채 소화를 시키지도 못할 상념들이 아침밥과 저녁죽 사이에서 자못 각별하다. 그건 아침부터 시작한 하루를 잠시 내려놓고 허기를 가리며 쉬어 가는 짧은 호흡이자 사소한 즐거움이요, 저 멀리의 새참 소식 같은 반가한 허기인 것이다. 선종(禪宗)의 선승들이 수도 중에 시장기를 느낄 때 공복에 점을 찍듯 소식하는 것이 유래가 되었다는 점심을 생각하면 과연 낮에 먹는 끼니로만 축약시켜도 되는 것인지, 단지 무얼 먹을까 고민하며 내달리는 시간의 무게에 마음이 허방하다. 엽차를 마시던 마음은 어느새 황급한 숟가락질로 변하고 식탐은 여유마저 함께 먹어치웠으니, 점심이 본래 가지는 선한 본질처럼 간결한 점찍기의 명징하고 내밀한 마음공부에 대해 미안하고 불편해서 자주 명치끝이 싸해지는 것이다.

점심밥에 대하여 아련한 기억 몇 가지가 있다. 그 하나가 바로 밥상이다. 어릴 적 우리집 밥상은 한쪽 귀퉁이가 조금 깨진 개다리소반이었는데 전체적으로 볼품이 없었으며 앙상한 다리는 조금만 움직여도 위태롭게 흔들리던, 작고 불편한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마당으로 밥상을 내던졌을 때부터 밥상은 이가 빠지고 삐걱거리기 시작했으니 그렇게 밥상이 서둘러 고물이 된 것은 아버지의 공이 크다. 나는 그 낡고 허름한 밥상이 싫었다. 밥상을 차려놓고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내가 둘러앉으면 어머니는 앉을자리가 없어서 늘 나중에 식사를 해야 했던 것도 그렇지만, 할머니는 그 밥상 앞에서 자주 고초 당초 매운맛으로 어머니의 눈물을 불렀기 때문이다. 왜 아버지는 한 번도 어머니를 옹호하지 않았는지 어린 마음은 작은 분이 났었고 화풀이가 밥상으로 전이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머니는 항상 식구들 끼니를 챙기느라 분주하셨는데 어쩌면 그것이 어머니 절체절명의 사명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어머니가 차려주는 식탁은 거의 청국장이나 된장찌개, 풋고추 그리고 상추와 된장이 전부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에게 이보다 더 맛깔스러운 한 끼가 어디 있을까 싶어 군침이 고이지만 철이 없던 당시의 나는 먹지 않겠다고 울며 떼를 쓰기 일쑤였다. 청국장은 냄새가 나서 싫었고 고추는 매워서 상추는 맛이 없어서 싫었다. 내가 그 즐거운 놀이를 포기하면서까지 맞은 밥상인데, 세상에 이렇게 보잘것없는 반찬들이라니. 속이 상한 어머니는 나를 다독여보기도 했고 때로는 매타작 엄포를 놓기도 했지만 나는 고집을 한껏 부리다가 어머니의 눈이 글썽거릴 즈음에야 겨우 몇술 밥을 떴던 기억이 있다.

반찬투정을 하지 못했던 적이 있기는 하다. 부뚜막에 걸터앉아 한 가지 찬을 놓고 끼니를 채우던 어머니를 본 날, 그것도 찬물에 말아 드시는 것을 본 날. 입안의 밥을 씹으며 내내 멍한 표정으로 텃밭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이 하도 무심하여 어린 내가 이상하게 목이 메던 날, 나는 반찬투정을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또 있다. 아마도 할머니나 아버지 혹은 돈 때문이었으리라. 밥상을 차려 넣고 어머니가 슬그머니 부엌으로 들어가셨을 때, 그때마다 어김없이 작은 흐느낌 같은 것이 들렸을 때, 나는 잠자코 밥을 먹어야 했다. 투정을 하던 나를 나지막이 토닥이며 먼저 맨밥만 몇 번이고 연신 입에 넣으시던 어머니 앞에서는 어린 마음에도 눈치가 보여 말없이 밥그릇을 다 비웠으니 말이다.

어머니에게 밥은 어떤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일에 대하여 짐작만 할 뿐이지만 아마도 당신에게 있어 밥이란 고단한 생을 조율하는 수단이고 탄식을 참아내는 기술이며 살이를 지탱하는 우물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언제나 그 불안한 밥상에 밥을 차려놓고 점심을 드셨다. 초라하고 군색한 자개무늬가 어머니를 비웃듯 올려다보던 낡은 밥상을 자꾸 닦고 닦아 윤이 나게 했을 정도니 밥상의 숭고함을 이미 알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더운밥 흰밥만 먹으면 찬이 없어도 밥이 달구먼, 하며 웃던 우리 어머니 젊은 여자였을 때의 서글픈 회억들은 그래서 더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나중에 새 밥상을 사 온 아버지가 낡은 밥상을 내다 버리라고 했을 때 내가 골목 어귀까지 나가 그 밥상을 씩씩대며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기특한 일이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밥 한 덩이 앞에 겸손할 줄을 안다. 모든 끼니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허기를 만나는 순간마다 억하심정과 눈물과 밥심을 버무리고 해진 마음을 기우듯 점을 찍으며 생을 건너온 것이다. 어머니들은 아침과 저녁 사이에 그렇게 순정한 의미를 끼워 넣어 삶을 날몸으로 부딪히며 살아냈는데 오늘 우리는 배가 부른 나머지 숭한 욕심만을 찍는 것은 아닌가 싶어 자꾸 부끄러워진다. 소태같이 쓴 입이지만 굶지 않고 밥 먹을 힘부터 내는 일, 묵묵히 밥상 앞에 앉는 생에 대한 겸손한 의식,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부박한 살이를 온전히 지탱하게 하는 선량한 점심이자 밥물처럼 흘러넘치는 뜨겁고도 거룩한 잠언이 아니냐. 우리의 아들과 딸들도 기억할, 허기마다 하나씩 남아있는 어머니의 밥알 같은 힘이자 눈물겨운 비망록이 아니냐.

그리운 돈까스

거리에 천사의 사랑과 은총이 빼곡해질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들던 어느 배고픈 저녁, 아버지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어머니와 중학교 입학을 앞둔 나와 누이동생과 막내녀석까지 총출동시켜 동네에서 제일 그럴싸한 경양식집에 앉아 있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그것도 꿈의 궁전 같던 레스토랑 비슷한 곳에서의 고급진 만찬이라니. 경양식집은 외관부터 스타일 폭발하는 어여쁜 아가씨와 멋진 수염의 신사가 칵테일 잔을 마주치는 크로키한 그림이 폼나게 그려져 있었고, 실내에는 성당에서나 볼 수 있던 품위 찬란한 그래서 조금쯤은 절로 겸손해지는 장식들과 안데르센의 동화 같은 조명들이 우리에게 마치 '어서 와, 세상엔 이런 곳도 있어' 하며 웃으며 반겨주는 것만 같았다.

불안한 눈빛과 어리숙한 낯빛과 들뜬 기대를 동시에 안고 들어선 우리 삼 남매는 입구에서부터 영국신사처럼 정중히 자리를 안내하는 젠틀한 웨이터 아저씨를 보며 아마도 유학 정도는 다녀왔을 것이라 생각했고 아버지가 주문을 마쳤을 때 물까지 따라주면서 요즘의 성시경 같은 목소리로 '라이스 아니면 브레드 어느 것으로 준비해 드릴까요' 라며 잔뜩 멋까지 부렸을 때는 그 말이 뭔지도 모르면서 유학파가 틀림없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그날따라 헛웃음까지 너그럽고 어머니는 괜히 숨겨놓은 교양이 살아나고 우리들은 조금쯤 능숙해 보이려고 티나게 애썼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모든 훌륭한 식탁에서 드디어 난생처음 돈까스를 영접했다.

돈까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신비하고 범접할 수 없는 자태는 묘연한 충격과 더불어 신세계적 후각과 미각의 확장을 가져왔다.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진탕 몰려오는 첫사랑의 맛 같았다. 그 달콤하고도 새콤하며 폭신하고도 고소한 맛을 죽어도 잊지 않으리, 나중에 부자가 되면 돈까스만 먹으며 살아가리란 다짐을 하면서 사랑과 평화의 밤은 더욱 품위 있게 깊어갔다. 알뜰하게 후식으로 커피며 아이스크림까지 맛본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흠뻑 단란한 눈빛을 하고 살짝 무표정으로 존엄을 지킨 가족사진까지 찍었고 액자 속에 담겨 집안에 걸리게 되었으니 그렇게 첫사랑의 각인은 그 후로도 영 잊을 수가 없었다.

물론 나중에 교회 전도사님이 사준 분식집에서의 제육덮밥과 순두부찌개를 먹으면서도 아, 세상에는 이런 맛들도 있구나 싶어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첫사랑을 넘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교회 문학의 밤 행사 사회를 같이 보던 여자애에게 고백 대신 마음을 표현한 것도 경양식집 돈까스였고, 최루탄에 눈물콧물 범벅인 시절에도 간혹 말쑥하게 찾아간 곳이 학교 앞 돈까스집이었으며, 등록금을 벌기 위해 한겨울 공사판을 전전할 때 월급을 받던 날이면 허기진 배에 통 크게 기름칠을 해주던 것도 기사식당 돈까스였다. 지금도 이따금씩 찾아가는, 일본식 돈가스 말고 조선의 경양식으로 기사식당으로 첫사랑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생각만 해도 아득해서 곰살맞은 웃음이 나기도 하는 옛날식 돈까스. 아슴한 추억과 소스가 복음처럼 내려앉았던 나의 그리운 돈까스 이야기다.

뭐니 뭐니 해도 돈가스보다는 돈까스, 자장면보다는 짜장면이 제맛이다. 얼마 전 노트북이 절단나서 몇 달이나 써놓은 시와 산문 수십 편이 사라졌을 때 잠시 황당했지만 그것들보다는 오래전에 썼던 돈까스가 사라진 걸 알고는 무척 허탈했었다. 새로 쓴다. 글은 생판 달라졌지만 그래도 돈까스인 걸. 허클베리핀의 작가 마크 트웨인의 맺음말이 생각난다. 이 이야기에서 어떠한 동기를 찾으려는 자는 기소될 것이다. 어떠한 교훈을 찾으려는 자는 추방될 것이다. 어떠한 플롯을 찾으려는 자는 총살될 것이다. 지은이의 명령에 따라 군사령관 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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