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생존기 2 /소망이(교사)
6. 이렇게 출근하느니 차라리 차에 치이면 좋겠다.
조울증이 걸린 사람은 본인이 조울증에 걸린 것을 알까?
내 경험상 답은 “아니다”이다.
나 역시 선배 샘 손에 이끌려 정신건강의학과에(18년 전에는 신경정신과였다.) 가서 지난 3년간의 내 삶의 모습을 말한 후 진단받아서 알게 되었지 내가 느끼기에는 우울증 발병, 치료됨, 조금 더 심한 우울증이 길게 지속됨, 완전히 새사람이 된 것처럼 회복됨, 그리고 끝 모르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우울증을 겪으며 왜 이번엔 다시 예전처럼 회복되지 않지라고 생각하며 다시 회복되기만을 기다리다 병원에 간 거였다. 제 발로 아니고 나를 걱정하는 선배 샘의 강권에 못 이겨서 말이다.
2003년 첫 우울증 발병은 7월이었다. 수업하기가 버겁고 교무실에 앉아있기가 답답하고, 재미있는 것이 없고... 즐거운 게 있다면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초콜릿이 잔뜩 묻은 과자, 빵을 사 와서 게걸스레 먹는 딱 그 시간 정도만 즐거웠다. 먹고 자는 것 외에는 만족감을 하나도 느끼지 못하는 그런 괴로운 시간을 보내다 연말이 되었는데 신기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잠을 별로 안 자도 졸리지 않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고, 몇 달 동안 불어났던 살도 다 빠져 날씬해졌다. 그렇게 다시 잘 웃고 밝은, 에너지 넘치는 사람으로 돌아왔고 2004년 정교사가 되었다. 더불어 적극적으로 변한 성격 덕분에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해서 내가 맘에 두고 있는 사람과 연애도 시작했다. 내 꿈이었던 정교사가 되고, 연애도 시작하고 하루하루가 정말 신났다. 집은 여전히 빚이 늘어나고 있고, 월급의 대부분은 엄마에게 이체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쯤은 하나도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연애는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차이면서 끝이 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직장암에 걸렸고 나의 우울증은 더 심하게, 깊게 시작이 되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2004년부터 학교 근처 원룸에 같은 학교 기간제 샘과 월세를 반반씩 내며 생활하기 시작했는데 주말 이틀 동안 그 샘과 함께 좁은 공간에서 있는 게 너무 싫어서 본가로 시외버스를 타고 갔고, 다시 엄마가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러면 엄마는 항암약이 들어있는 링거병이 달려있는 그 봉을 밀며 나를 데리고 병원 안의 작은 정원에 가셔서는 우리 딸이 힘이 나야 할 텐데 어떡하나 하며 걱정하셨다. 항암으로 속이 울렁거려 힘이 하나도 없는 엄마가 보기에도 우울증 걸려 핏기 하나 없는 내가 더 심각해 보이셨나 보다.
나중에 엄마한테 들었는데 내 걱정하느라 엄마 항암치료는 힘든 줄 모르고 지나갔다고~ 우리 딸이 효녀네 하셨다. T.T
그리고 괴로운 순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중 몇 가지를 꼽자면
- 꿈에 완전히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즐겁게 지내다 꿈에서 깼는데 여전히 극심한 우울증 상태일 때
- 개그 콘서트를 멍 때리며 보고 있는데 내일이면 출근해야 한다는 것이 생각날 때
- 점심시간에 나 때문에 식사분위기가 어색할 때
- 갑자기 늘어난 살로(한 달에 2~3kg씩 쪄서 네 달 만에 10kg 이상이 쪄서 맞는 옷이 없었다.) 옷을 사러 갔는데 내장지방으로 불룩 나온 배를 가리기 위해 맘에 하나도 안 드는 재킷을 사야 할 때
- 수업 종이 쳐서 교실에 들어가야 할 때, 공강 시간에 교무실에 앉아 있어야 할 때
너무 괴로우니 죽고 싶은데 내가 나를 죽일 수는 없으니 차라리 차에 치어 죽고 싶었다. 몸에 콜레스테롤이 많이 쌓여 고지혈증이 와서 생리가 멈췄는데 그냥 심혈관계 질환이 심각하게 걸려 죽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했다. 이렇게 버티고 버티다 또다시 그 어느 날 갑자기 에너지가 마구 솟아났다. 운동이 하고 싶고, 말하는 게 재미있고, 행동이 빨라지고, 살이 다시 쭉쭉 빠지고~ 그때는 ‘아~다행이다. 이제 다시 회복되는구나’ 하고 좋아했다. 그런데 같이 자취하는 샘이 나에게 “선생님들이 걱정하는 거 아세요?”라고 물어봤다. ‘아니, 웬 걱정. 이렇게 신나는데?'
그렇게 에너지 넘치게 새해를 맞았고 2005년 첫 담임을 맡게 됐다. 난 넘쳐나는 에너지로 학생들을 데리고 내 모교에도, 그 옆의 학교에도 가고, 밥도 민들레 영토에서 사주고, 교실을 예쁘게 단장해 환경미화 최우수상도 받고 아주 신나게 첫 담임을 했다. 그러다 교회에서 착하고 잘생긴 남자친구도 사귀게 되어 사귄 지 5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첫 담임한 학생들이 교복 입고 불러주는 축가는 감동이었다. 이제 내 앞길엔 행복한 일만 기다리고 있구나 생각했지만, 결혼한 지 두 달도 안되어 다시 깊고 깊은 우울의 늪에 빠졌다.
출근해야 하지만 일어나지 않는 나를 신랑은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고 차에 태워 학교 앞에 내려주고 출근을 했다. 엄마는 일주일마다 한 번씩 밑반찬을 만들어 신랑 편에 보내주셨다. 신혼 초인데 신랑과 나는 대화도 없이, 몸의 대화도 없이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갔다. 운동이라도 하자고 헬스장에 억지로 끌려가면 운동할 때 소모한 칼로리보다 더 많은 양의 칼로리를 빵으로 채웠다.
신랑은 어느 날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고 벽을 치며 눈에 눈물을 살짝 머금고 탄식하듯 말했다. “너무 괴롭다. 이렇게 너를 보며 버티는 게 힘들다.”그 말을 들으며 난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너무 힘들어. 나도 그냥 사라지고 싶어. 이런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어’
7. 사표를 쓰러 온 날 새로운 빛이 비쳤다.
2006년 4월의 어느 날 아침.
도저히 때려죽여도 일어나지 못하겠을 정도로 무기력했다. 그냥 이렇게 잠들듯이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어떻게든 나를 일으켜 세워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고 출근시키던 신랑이 웬인일지 이날은 그냥 조용히 물어봤다.
“학교 안 갈 거야?”
“응, 나 사표 낼래. 도저히 더 이상 못하겠어.”
신랑은 나의 이마에 입을 살짝 맞추고는 불을 끄고 출근을 했다.
난 그렇게 하루종일 어두운 방에 누워 있었다.
‘그래, 이렇게는 못 살겠다. 그만 다니자’.
학교 교무부장님, 옆 자리 샘 등 여러 샘들의 전화와 문자가 왔지만 다 무시하고 안 받았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온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에 대고 너무 힘들다고,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고 했더니 “그만두는 것은 괜찮은데 내일 제대로 학교 와서 마무리는 해야지요 “라는 대답을 들었다.
아무 말 없이 그냥 안 나오면 다른 선생님들이 보강 들어가고 너무 힘들다고~
‘그래, 내일 사직서 내고 끝내자.’
다음날도 여전히 마음은 납덩어리를 달아 놓은 것처럼 무거웠지만, 출근을 해서 사직서를 내야 이 끔찍한 고통이 끝난다는 마음에 느릿느릿 준비해서 겨우 출근을 했다.
‘아마 나를 보자마자 교감선생님은 다 큰 어른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화내시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학교에 도착하고 떨리고 괴로운 마음으로 교감실에 들어갔다.
“교감선생님, 죄송해요. 저 아무래도 교사 못하겠어요. 사직서 제출하러 왔어요.”
“00 선생님, 많이 힘들었나 봐. 우리 기도합시다.” 교감선생님은 그렇게 말한 후 간절하게 내가 이 어두운 터널을 잘 빠져나가기를, 친정어머니가 잘 회복되시기를 기도해 주셨다.
‘어~ 이게 아닌데?’
이런 분위기면 사표를 어떻게 내지, 언제 내지 뭔가 애매모호한 마음으로 교무실로 들어갔다.
공강시간에 내가 속한 연구부 부장선생님이 나를 데리고 옆에 빈 교실로 들어가셨다. 나의 이야기를 다 들으시고 나서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뭔가를 가지고 오셨다. 부장선생님의 은행통장들이었다.
“선생님, 저도 이러저러한 일로 빚이 많았지만, 계속 차곡차곡 갚아 나가니 이제 이만큼의 빚만 남았어요. 선생님이 지금 그만두면 신랑은 혼자 어떻게 그 빚을 다 갚아요. 맡은 업무는 우리가 나눠서 할 테니 나중에 건강해지면, 또 그때 우리 일을 도와주세요. 그만두지 말고 같이 해요. 도와줄게요. 맡은 업무 못해도 괜찮아요.”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영어과 선배샘이 점심을 사주셨다. 평소 의지하며 지냈던 터라 나의 마음상태, 우리 가정의 재정상태, 수업 등에 대하여 말씀드렸다. 다 들으신 후 선생님은 영어 잘 가르치지 못해도 괜찮다고, 알아서 학생들 다 영어 공부 한다고, 집의 빚 갚는 것 생각하며 힘내서 다니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런 약속을 선생님에게 했다.
“선생님, 혹시 제가 3년 뒤에도 계속 학교를 다니고 있으면 꼭 맛있는 점심 사드릴게요.”
다시 학교로 돌아와 오후 방과 후 수업까지 끝내고 오니 선생님은 나를 차에 태워 정신건강의학과가 있는 병원에 데리고 가셨다. 가서 그동안의 일들을 주욱 말하니 의사 선생님은 나의 상태를 그래프로 표현했고, 위아래로 요동치는데 파동이 점점 크고 깊어지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사실은 우울증이 걸렸다, 나았다 이렇게 반복을 했던 게 아니라 3년간 조울증을 겪었던 것이고, 지금은 가장 심각하게 무기력한 우울증 상태여서 약을 꼭 먹어야 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보통 이곳에는 가족이 환자를 데리고 오는데 선배샘이 이렇게 데리고 온 경우는 처음 본다고 신기해하셨다.
오늘 사표 쓰고, 내 삶은 이렇게 무너지나 싶었는데 상상하지도 못했던 많은 위로와 격려, 그리고 받아들여짐을 경험했다. 그동안 아무리 탄식하며 기도해도 나의 이야기를 하나도 듣지 않는 것 같던 예수님이 꼭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00야, 난 널 이렇게 사랑해. 내가 널 너무 사랑해서 오늘 이 분들을 준비해 뒀어. 난 네가 아무 선한 일을 하지 않아도, 네가 보기에도 꼴 보기 싫은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그런 너를 너무 많이 사랑해.”
눈물이 펑펑 났다. 착한 크리스천 완벽주의자로 살며 하나님 앞에서도 꼭 부모님한테 그러듯이 말 잘 듣고, 착하게 이쁜 모습만 보여 드려야 인정받고 사랑받는다고 생각했던 나의 가치관이 와장창 깨졌다.
‘아~ 나를 그냥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는구나. 그리고 지난 3년간 한 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으셨구나. 다 알고 보고 계셨구나.‘
이후 조울증 약을 먹었는데 한 달 만에 임신이 돼서 약을 끊었다. 다행히도 조울증은 치료되었고 그 후 재발하지 않았다. (원래 조울증은 약을 상당히 오래 먹어야 하는데 기적이라 생각한다.)
8. 상황은 똑같지만 나는 달라졌다.
내가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
내 모습 이대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변화시켰다.
조울증 약을 한 달 정도 먹고 있다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어 걱정돼서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에게 여쭤봤더니 내가 처방받아먹은 약의 이름과 용량, 복용 시기로 판단해 볼 때 일반 산모가 장애아를 낳을 확률과 비슷하니 걱정하지 말라는 답변을 해주셨다.
여전히 아빠가 내 이름으로 00 머니에서 진 빚이 있고, 결혼할 때 이 빚만큼은 갚아야 된다고 넘기신 빚 1억이 있지만,
엄마가 수술 후 다행히 인공항문을 달지 않아도 돼서 감사하고, 나의 의료보험증으로 지원받으며 치료받으실 수 있어 감사하고,
결혼했으니 이 빚은 우리의 빚이라고 말해주며 함께 갚아나가면 된다고 말해주는 듬직한 신랑이 있어서 감사하고,
아빠가 나의 결혼식 후 선물투자를 그만두신 것도 감사하고,
고지혈증으로 생리도 멈췄었는데 다시 건강해져 첫째를 임신한 것도 감사하고,
무엇보다 완벽주의 착한 크리스천이라는 틀 속에 평생을 살았을 나를 꺼내주시고, 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있음을 절절히 깨닫게 해 주신 것이 정말 감사했다.
아직 빚이 내 교사 초년생 월급에 비해 너무 많지만,
그래도 다시 파란 하늘을 보며 파래서 예쁘다고 느낄 수 있고,
학교 급식을 먹으며 동료 샘들과 도란도란 대화 나눌 수 있고,
교실에 들어가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영어를 가르칠 수 있으니 그러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3년간의 조울증을 겪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으로 살아봤기에 경제적 빚만 많은 것은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 난 거의 20년간 친정 빚, 신랑 사업 빚, 주택담보 대출 빚해서 거의 4억 원 이상의 돈을 갚았다. 이 이야기는 다음 연재 브런치에 할 예정이다.)
9. 친정집에는 화장실이 집 안에 없지만
그 후 친정은 이사를 갔다. 현금으로 산 아파트에서 빌라로, 그리고 언덕 위 빌라로~ 이 집은 화장실이 집 안에 없어서 1층에 있는 야외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다. 겨울이면 엄마는 화장실에 밤에 가기 위험하고 춥다고 요강을 하나 사서 볼일을 보셨다.
난 마음이 짠하고 안타까웠는데, 엄마는 빚만 많고 빌라에 살 때보다 지금이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고 하셨다.
(다행히 지금은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방 2개와 거실이 있는 작지만 깨끗한 빌라에 사신다. 월세이긴 하지만~)
엄마는 그곳에서 늘 새벽기도를 가셨고, 출산휴가 마치고 바로 복직한 나를 대신해서 우리 딸을 봐주기도 하셨다.
아빠는 선물투자에서 손을 완전히 떼시고, 도시락 배달, 간판가게 조수, 도시락 포장일 등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으신 일들을 묵묵히 배워가며 성실하게 해 나가셨다. 지금은 70이 훌쩍 넘으셨는데도 건물 관리직에 취직해서 엄청 성실히 월~토요일까지 하고 계신다.
00 은행 지점장, 그리고 사모님으로 살아오셨지만, 단 한 번도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망해버렸냐라고 한탄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아빠는 젊을 때보다 더 엄마를 소중히 대하셨고, 예배와 기도를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장로님으로 변하셨다.
돈만 생각하면 완전히 마이너스 인생이지만,
아빠가 변하셨고,
내가 변했으니 영원의 관점에서는 완전 수지맞은 인생이지 않을까?
10. 늘 미안해하는 아빠, 괜찮아요. 사랑해요!
아빠는 나에게 부채의식이 있으신 것 같다.
딸이 그렇게 원하던 학교에 정교사가 되었는데 선물투자에 투자할 돈이 필요해서 00 머니에 데리고 가고,
맏딸이 시집가는데 선물을 해주는 게 아니라 빚을 1억 이상 갚으라고 주고,
그래서 딸은 조울증으로 3년을 사경을 헤매고,
내가 너무 예뻐 내가 태어나고 바로 카메라를 사신 우리 아빠.
사랑하는 딸의 가슴을 아프게 했으니 아빠도 많이 아프셨겠지.
상담을 받았는데 내 안에 착한 딸 콤플렉스가 있다고 했다. 아빠의 말에 “아니요”라는 대답을 못하는 딸. 그때 “아니요, 싫어요. 아빠가 돼서 너무한 게 아니에요?”라고 왜 말하지 못했나 자책한 적도 있고, 아빠가 원망스러웠던 적도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빠를 진짜 사랑한다.
화이트 칼라로만 살아오셨는데, 그때 당시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은행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들어갔는데 젊은 40대 후반의 나이에 이제 막 애들이 대학에 가려고 하는 그때에 은행을 나와야 하는 그 충격. 어떻게든 생활비를 벌려고 뛰어들었고, 그 선택이 잘못됐지만, 그 후로도 아빠는 한 번도 안 해본 일도 매달 생활비를 벌기 위해 지원하고 일하셨다. 그리고 지금 70세가 훨씬 넘으셨지만 여전히 성실하게 출근하고 계신다.
언제나 가족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신 아빠,
늘 나만 보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랑하는 딸이라고 말해주시는 아빠,
새벽마다 기도해 주시는 아빠,
저도 아빠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아빠 덕분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돈이 아니란 것을 배웠기에 그 후 신랑이 사업으로 빚을 져도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고,
더 예수님을 깊이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아빠의 삶은 제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어른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히 함께 지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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