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물 맞추기 / 한남희 - 제1회 이천문학상 우수상
동생네서 얻어온 손바닥만 한 압력밥솥은 혼자 사는 나의 필수품이 되었다. 외할아버지 생전 쓰시던 밥그릇보다도 작은 솥이라니.
러시아에선 -나 혼자 행복하게 잘 살아요- 류의 방송 프로그램이나 광고에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통과했다는 뉴스를 봤다. 출생률이 1.5명인 상황에서 고삐를 틀어쥐겠다는 러시아 정부는 아마도 0.7명도 무너질 지경이라는 한국의 극심한 출생률 저하를 타산지석 삼고 있지 않나 싶다.
동생네는 정부에서 그나마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단란한 네 가족을 이루고 산다. 그 집에 이 작고 앙증맞은 솥이 해당 사항 있을 리 없다. 친정엄마가 찬밥 혐오자인 까닭으로, 끼니마다 따뜻한 밥해 먹으라며 손수 장만해주신 최소형 압력솥이었다. 동생은 두어 번 밥을 해 먹고는 솥을 이내 방치했다. 제부가 따뜻한 밥을 싫어하는 희한한 체질이어서다. 제부는 식은 밥을 좋아한다. 또 지나치게 찰기가 많은 밥을 좋아하지 않는다. 엄마의 정성이 무색하게 작은 압력솥은 싱크대 안에 방치되어 있다가 지난번 동생네서 가족 모임을 했던 날, 내 품에 넘어왔다. 사실 그 솥이 내게도 필요할 리가 없다. 즉석밥 한 박스면 한 달은 넉넉한 처지이다. 집밥이 먹고 싶을 땐 오랜 습관대로 한 줌의 쌀을 씻어 솥 밥을 해 먹으면 되었다. 그러나 엄마의 애면글면 밥 사랑을 외면치 못해 솥을 끌어안고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한동안 현관 신발장 근처에 방치되어 있던 솥은 구운 달걀을 해 먹기 위한 용도로 드디어 주방에 입성하였다. 온라인 몰에 주문하면 하루 만에 배달되는 구운 달걀이지만 가격이 너무 오르고 보니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심지어 두 판을 주문해야 가격이 좀 저렴해지는데 두 판이면 무려 60알, 그 많은 달걀을 어느 세월에 다 먹는단 말인가.
동영상 사이트를 뒤져 보니 압력솥으로 쉽게 구운 달걀을 만들 수 있었다. 방치되어 있던 압력솥에 들어갈 손바닥보다 작은 채반을 놓고 달걀을 담으니 간신히 열 알이 들어갔다. 물을 붓고 소금을 조금 넣어 불에 올렸다, 강 불에서 압력추가 울릴 때까지 돌리다가 불을 최대한 낮추고 한 시간 이상 돌려 압력이 다 빠질 때까지 두었더니 산 것에 버금가는 맛있는 구운 달걀이 완성되었다. 달걀을 까먹으며 동영상 사이트를 어슬렁거리니 저당 밥 짓는 법이라는 영상이 올라왔다. 건강에 좋은 밥이란다. 귀에 솔깃했다. 혼자 사는 처지에 병이 나는 게 가장 무섭단 말이지. 렌틸콩과 귀리와 현미와 백미를 섞어 밥을 해 먹으면 혈당이 오르지 않고 좋단다. 동생이 솥과 함께 밥해 먹으라고 준 정체불명의 곡식들이 다시 보니 저당 밥 재료들이었다. 든든한 남편이 있는 동생도 이미 건강 관리에 뛰어들었나 보다.
곡식들을 1/4씩 섞어 압력솥에 밥을 지었다. 조그만 녀석이 주어진 임무를 야무지게 해냈다. 가스레인지 위 솥의 모습은 모조품인 양 어울리지 않지만 말이다. 타고나길 소식 인간인 내겐 2인용 압력솥도 커서 솥의 절반만큼 지은 밥도 냉동해야 했다. 밥을 한 번 하면 일주일은 너끈하게 먹었다. 날이 더운 통에 한나절 만에 밥이 상해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작은 솥에 나를 위한 건강 밥을 지어 먹는 게 생각보다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밥 짓는 일이 어렵다고 여겨본 적은 없다. 엄마는 내가 핏덩이일 때부터 늘 일을 했고, 나는 예닐곱 살부터 동생과 라면을 끓여 먹고 찬밥을 찾아 먹다가 어느 순간부턴 직접 밥을 짓기 시작했다. 밥 짓는 법을 누가 물으면 정확하게 답하기는 힘들다. 물 맞추기는 이론이 아니라 실전의 영역이다. 솥마다 쌀마다 계절이나 아침저녁에도 같지 않다. 말하자면 그때그때 다르다. 그래서 이론으로 손가락 한 마디라던가 손등 어디만큼까지 물을 채우는 등의 기술 영역은 잘 설명하지 못한다. 눈대중으로 밥을 지은 지 수십 년인 탓이다. 가끔 된 밥이 되는 경우가 있지만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지아비 닮아서 고두밥 좋아하는 까탈스러운 입맛을 가진 애다. 밥알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걸 꼭꼭 씹을 때 밥알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단맛을 좋아한다. 먹다 남은 된 밥은 볶음밥을 해도 좋고 카레를 부어 먹기도 좋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식성도 여간해서 변하지 않는가 보다. 심지어 대물림 되는 영역이니 더 말해 무엇할까.
다른 집은 대부분 공부를 더 못 시켜 안달이었고, 피아노에 미술에 갖가지 예체능 가르치느라 바빴던 걸로 아는데 우리 집은 딸들을 식모 수준으로 부려 먹으며 키웠다. 살림 조기교육 덕에 네 식구 오붓하게 사는 동생은 살림의 여왕 수준이고 혼자 사는 나도 내 앞가림에는 부족함이 없다.
냉동실 밥이 다 떨어지고 다시 밥을 했던 어제 아침, 다른 곡식은 먼저 떨어지고 백미와 렌틸만 남아 그 두 가지로 밥을 지었다. 씻어서 불려 솥뚜껑을 닫기 전 눈길이 물 높이에 잠시 갔다. 순간 물이 조금 많다 싶었다. 살면서 헷갈리는 문제가 있을 땐 첫 번째 드는 생각이 정답일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어제 밥물도 그랬다. 물을 좀 따라냈어야 했다. 물을 쏟아 내려다가 대충 맞을 것 같기도 해서 마음을 바꾸어 그냥 불을 켰다. 압력추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불 끄는 타이밍을 정확히 모른다. 언제부터인지 감각에 의지해왔다. 감에 따라 불을 끄고 뜸을 들이고 밥솥을 열었다. 주걱을 가져다 댔을 때 알았다. 밥이 질었다. 남은 곡식을 다 털어 넣었기에 심지어 밥의 양도 많았다. 나는 진밥을 정말 싫어한다. 죽도 밥도 아닌 느낌을 견디지 못한다. 그깟 밥이 되고 진 것에 이토록이나 무게를 두다니. 한심하지만 내게는 중요한 문제다. 일단은 한 그릇을 퍼서 밥을 먹었다. 숟가락에 붙은 밥은 찰떡처럼 들러붙었다. 간신히 떼 내어 씹는 입안이 괴롭기 그지없었다. 한 그릇은 꾸역꾸역 먹는다 치고, 남은 밥을 어찌할까 생각하니 한숨이 났다. 진밥은 누룽지를 만들기도 어렵다. 같은 밥일진대 볶음밥도 김밥도 돌솥비빔밥도 못 해 먹을 한솥의 밥에 마음이 우중충해졌다.
솥뚜껑을 덮어놓고 밥을 피해 집을 나왔다. 추석이 지났는데도 날씨는 여전히 한여름이다. 짜증이 울컥 솟구친다. 누군가에게 집에 있는 진밥이 고민이라는 말을 한다면 나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어쩌면 각각의 삶에 주어진 수많은 고민이나 걱정거리 중에는 솥에 든 진밥처럼 너무 사소해 어이없는 일도 많지 않을까 싶다.
뜨거운 햇볕을 피해 동네 카페로 피난을 갔다. 차가운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댔을 때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제부의 흉을 보고 싶어 전화를 건 것이다. 어디 하소연할 곳이 없는 동생의 대나무밭이 나다. 집에 와서 발을 안 씻고 거실을 돌아다닌다, 옷을 제때 안 갈아입는다, 나이를 먹으니 버릇이 더 나빠진다, 같은 익히 아는 레퍼토리다. 제부는 자기 마누라가 너무 깔끔해서 피곤하다는 말을 내게 여러 번 한 적 있다.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잘 안다. 하소연을 한참 들어주다 보니, 남편이 이번에 명예퇴직하는 바람에 그 집 아내인 동생 이웃이 걱정이 많다는 말이 이어졌다. 제부는 회사 잘릴 걱정이 없으니 그거 봐서 참아주기로 결론이 났다. 밥을 했는데 질어서 짜증 난다는 내 말에 죽 끓여 먹거나 국에 말아 먹으라고 그런 것도 걱정이냐며 동생이 피식 웃었다.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었다. 마음을 고쳐먹는다. 냉장고 신선칸의 자투리 채소들을 썰어 넣어 죽을 끓여 먹던지, 미역국을 한솥 끓여 진밥을 말아먹고 치우자고 결론 내려버린다.
커피잔을 비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인생도 어쩌면 밥물 맞추기와 비슷한 일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 늘 하는 일, 별생각 없이 진행되는 일들의 연속에서 잠시 삐끗하면 문제가 되어 삶이 복잡해지고 어수선해진다. 그러나 시간은 또 대부분의 어그러진 일을 되돌려 놓게 마련이다. 탄 밥이든 고두밥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솥은 비게 되고 다시 밥을 하듯 삶도 다시 내일로 나아가기 마련이니까. 가족과 사는 동생이 더 행복하거나 혼자 사는 내가 더 불행하지도 않다고 느낀다. 비슷한 총량의 행복과 불행 앞에서 울고 웃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을 결국 삶 속에서 깨닫는다. 광고 때문에, 예능에 힘입어 비혼과 결혼을 선택하지 않지만, 훔쳐보는 삶이 더 좋아 보이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이미 폐경을 겪어 버려 인구수를 늘리는 일로 국가에 이바지하기 어렵게 된 인간은, 그저 조금 더 긍정적인 마음과 건강한 몸으로 세상을 살아 국가 의료보험 재정에 이바지하는 걸로 대신하기로 한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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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에세이 (꽃으로)
지네철 / 김동식 - 2024년 제8회 포항스틸에세이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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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숙 ・ 2024. 12. 22. 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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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를 온 딸 가족과 경주에 갔다. 손자가 궁금해하는 첨성대를 먼저 보고 계림 숲에 들른 다음 곧바로 불국사로 향했다. 사찰 입구 소나무 숲이 우리를 시원하게 맞이했다. 청운교, 백운교 다리를 넘어 부처님 나라에 들어섰다. 석등 불구멍 창을 통해 본 대웅전 큰 어른은 나에게 손자들과 같이 왔냐며 염화시중의 미소로 반겼다. 아이들은 다보탑 앞으로 달려갔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이 신기한지 다보탑과 석가탑을 번갈아 오가며 한참 감상했다. 나도 느긋하게 절을 둘러보았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지네철이었다. 불국사 극락전 맞배집 지붕널 사이를 지네철이 연결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 문화해설 봉사활동을 하면서 전통문화재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는데 지네철을 가까이 보기는 처음이었다. 지네철은 건축물의 지붕널 벌어짐을 잡아주는 쇠 장식이다. 지네 모양이지만 언뜻 물고기의 뼈와 꼬리를 닮기도 했다. 꺽쇠 기능에 예술성이 가미된 독특한 장식이다. 철강 도시 포항에 살지만 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은 철조각이 박공널을 연결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철물은 삼국시대부터 요긴하게 쓰였다. 실제로 동궁월지에서 자물쇠, 가위, 문고리 등 철재류가 출토되었다. 관정 꺽쇠 쇠못은 흔한 편이고, 불국사 극락전 지네철이 말해주듯 목조건물에도 사용하였다. 건물에 어긋남이 생기거나 보수할 때 필요했을 텐데 다른 것들과 달리 지네철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궁전과 사찰에 지네철이 부착되어 있는 자료를 본 적이 있다. 그 모양이 지네에서 맵시 있게 변형하여 다양했다. 경복궁 사정전과 수덕사 대웅전은 꽃잎 모양, 운현궁 이로당은 둥근 지네 발 모양으로 형상화하였다. 또한 봉정사 대웅전은 날개를 편 새 모양에 복과 장수를 바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렇듯 다양한 문양으로 장인의 미적 욕구를 표현한 것이 놀라웠다.
포항 보경사 여러 목조건물 널에도 지네철이 붙어있다. 꽁치 뼈 모양은 물론이고 뼈가 많은 청어 닮은 형상도 있다. 일찍이 관목어를 과메기로 만들어 먹은 해변 도시에 철강회사가 자리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현대는 목조건물뿐 아니라 시멘트벽에도 강철 볼트 너트로 꿰맨다. 국가기간산업인 철강생산뿐만 아니라 하찮아 보이는 지네철같이 나무와 나무를 아우르는데 사용하는 철을 생산하는 포항시민 자부심을 가진다.
내 몸에도 지네철 모양의 자국이 있다. 오른쪽 다리에 남아있는 상처의 흔적이다. 어릴 때 고향 뒷산에서 같이 놀던 친구가 낫으로 나무를 베다 내 다리를 쳤다. 피가 펑펑 쏟아지는 상처를 수건으로 동여맨 채 자전거에 실려 20리 밖 경주병원으로 갔다. 울며불며 꿰맨 상처가 60년이 지난 지금도 다리에 지네처럼 선명하게 붙어있다. 그 후 난 흉터 때문에 반바지 입기를 꺼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또한 내 살과 살을 연결하여 아물게 해 준 지네철이었다.
그런가 하면 보이지 않는 지네철이 있다. 곳곳에 필요하고 또 존재한다. 가정, 직장, 사회에서 어긋나거나 벌어져 덧대야 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형제간 우애에 보강대가 필요하고 집안 행사에서 의견 충돌로 널이 서로 뻗대면 바로 잡아야 한다. 세대 간 관점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지네철의 역할이 필요하다.
건축물의 그것처럼 사람 사이의 지네철도 드러나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으스대며 힘자랑하거나 뽐내고 튀는 자세는 지네철 역할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강철이면서도 서로 뻗대는 양쪽을 끈끈하게 하나로 아우르는 쇠 장식처럼 야무지면서도 인정 있게 양쪽을 보듬는 지혜와 공감력이 필요하다.
우리 집에는 두 딸이 지네철 역할을 한다. 나는 아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지만 아내는 양육을 힘들어하며 딸 둘만으로 만족하였다. 난 그것이 야속하였고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 부부는 한동안 말 없는 평행선 속에서 살았다. 나는 직장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고 집안일과 아이들 교육은 온통 아내 몫이었다. 아내도 직장이 있어 힘들었을 텐데 모른 척했다.
감정이 격해져 충돌이 있을 때는 꼬마 아가씨들이 나섰다. 안마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며 애교로 분위기를 풀어주었다. 돌이켜보면 두 딸이 우리 부부를 다정하게 이어주었다. 경복궁 꽃망울 쇠 장식보다 몇 배나 더 곱고 사랑스러운 지네철이었다. 자라서도 그 역할은 계속되었다. 집안일에 솔선수범하고 일가붙이 사이에서도 아들 못지않게 의견 조율과 교통 정리를 잘하여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곤 하였다. 특히 큰딸은 때맞춰 결혼하여 늠름한 사위와 두 손자를 안겨주었으며, 이제 3대를 돈독하게 엮는 일에 애쓰고 있다. 딸들의 지네철 역할은 현재 진행형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다독이며 봉사하는 사람이 많다. 장애인을 돕거나 요양보호사로 활동하는 친구들도 가교역할을 잘하고 있다. 불협화음과 문제성이 있는 단체는 그곳에 몸담았거나 그 분야를 아는 사람이 지네철 역할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퇴직 교사인 친구가 대안학교에서 학교생활 적응력을 높여주고 사회 진출을 위한 기본 소양 교육을 기꺼이 담당하였다. 나는 학창 시절 야학에서 학생들과 검정고시 준비를 해 준 경험이 있다. 직장 퇴근 후 오는 학생들과 공부한 시간이 보람찬 지네철 같은 역할이었으리라.
지네철은 쇠의 숨겨진 미덕이다. 쇠란 완강하고 무거운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작지만 섬세한 모양으로 물체와 물체를 다잡아 하나로 묶는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강하면서 부드러운 드러나지 않는 일꾼이다. 그것이 있어 건물과 건물이 제대로 서고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살아간다. 지네철이 삶을 지탱한다. 모양은 별로 없지만 나도 보이지 않는 한구석에서 한 조각 지네철이 되고 싶다.
지네철 / 김동식 - 2024년 제8회 포항스틸에세이 대상
여름휴가를 온 딸 가족과 경주에 갔다. 손자가 궁금해하는 첨성대를 먼저 보고 계림 숲에 들른 다음 곧바로 불국사로 향했다. 사찰 입구 소나무 숲이 우리를 시원하게 맞이했다. 청운교, 백운교 다리를 넘어 부처님 나라에 들어섰다. 석등 불구멍 창을 통해 본 대웅전 큰 어른은 나에게 손자들과 같이 왔냐며 염화시중의 미소로 반겼다. 아이들은 다보탑 앞으로 달려갔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이 신기한지 다보탑과 석가탑을 번갈아 오가며 한참 감상했다. 나도 느긋하게 절을 둘러보았다.
무엇보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지네철이었다. 불국사 극락전 맞배집 지붕널 사이를 지네철이 연결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 문화해설 봉사활동을 하면서 전통문화재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는데 지네철을 가까이 보기는 처음이었다. 지네철은 건축물의 지붕널 벌어짐을 잡아주는 쇠 장식이다. 지네 모양이지만 언뜻 물고기의 뼈와 꼬리를 닮기도 했다. 꺽쇠 기능에 예술성이 가미된 독특한 장식이다. 철강 도시 포항에 살지만 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은 철조각이 박공널을 연결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철물은 삼국시대부터 요긴하게 쓰였다. 실제로 동궁월지에서 자물쇠, 가위, 문고리 등 철재류가 출토되었다. 관정 꺽쇠 쇠못은 흔한 편이고, 불국사 극락전 지네철이 말해주듯 목조건물에도 사용하였다. 건물에 어긋남이 생기거나 보수할 때 필요했을 텐데 다른 것들과 달리 지네철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궁전과 사찰에 지네철이 부착되어 있는 자료를 본 적이 있다. 그 모양이 지네에서 맵시 있게 변형하여 다양했다. 경복궁 사정전과 수덕사 대웅전은 꽃잎 모양, 운현궁 이로당은 둥근 지네 발 모양으로 형상화하였다. 또한 봉정사 대웅전은 날개를 편 새 모양에 복과 장수를 바라는 글자를 새겼다. 이렇듯 다양한 문양으로 장인의 미적 욕구를 표현한 것이 놀라웠다.
포항 보경사 여러 목조건물 널에도 지네철이 붙어있다. 꽁치 뼈 모양은 물론이고 뼈가 많은 청어 닮은 형상도 있다. 일찍이 관목어를 과메기로 만들어 먹은 해변 도시에 철강회사가 자리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현대는 목조건물뿐 아니라 시멘트벽에도 강철 볼트 너트로 꿰맨다. 국가기간산업인 철강생산뿐만 아니라 하찮아 보이는 지네철같이 나무와 나무를 아우르는데 사용하는 철을 생산하는 포항시민 자부심을 가진다.
내 몸에도 지네철 모양의 자국이 있다. 오른쪽 다리에 남아있는 상처의 흔적이다. 어릴 때 고향 뒷산에서 같이 놀던 친구가 낫으로 나무를 베다 내 다리를 쳤다. 피가 펑펑 쏟아지는 상처를 수건으로 동여맨 채 자전거에 실려 20리 밖 경주병원으로 갔다. 울며불며 꿰맨 상처가 60년이 지난 지금도 다리에 지네처럼 선명하게 붙어있다. 그 후 난 흉터 때문에 반바지 입기를 꺼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또한 내 살과 살을 연결하여 아물게 해 준 지네철이었다.
그런가 하면 보이지 않는 지네철이 있다. 곳곳에 필요하고 또 존재한다. 가정, 직장, 사회에서 어긋나거나 벌어져 덧대야 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형제간 우애에 보강대가 필요하고 집안 행사에서 의견 충돌로 널이 서로 뻗대면 바로 잡아야 한다. 세대 간 관점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지네철의 역할이 필요하다.
건축물의 그것처럼 사람 사이의 지네철도 드러나지 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으스대며 힘자랑하거나 뽐내고 튀는 자세는 지네철 역할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강철이면서도 서로 뻗대는 양쪽을 끈끈하게 하나로 아우르는 쇠 장식처럼 야무지면서도 인정 있게 양쪽을 보듬는 지혜와 공감력이 필요하다.
우리 집에는 두 딸이 지네철 역할을 한다. 나는 아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지만 아내는 양육을 힘들어하며 딸 둘만으로 만족하였다. 난 그것이 야속하였고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 부부는 한동안 말 없는 평행선 속에서 살았다. 나는 직장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고 집안일과 아이들 교육은 온통 아내 몫이었다. 아내도 직장이 있어 힘들었을 텐데 모른 척했다.
감정이 격해져 충돌이 있을 때는 꼬마 아가씨들이 나섰다. 안마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며 애교로 분위기를 풀어주었다. 돌이켜보면 두 딸이 우리 부부를 다정하게 이어주었다. 경복궁 꽃망울 쇠 장식보다 몇 배나 더 곱고 사랑스러운 지네철이었다. 자라서도 그 역할은 계속되었다. 집안일에 솔선수범하고 일가붙이 사이에서도 아들 못지않게 의견 조율과 교통 정리를 잘하여 어른들로부터 칭찬을 받곤 하였다. 특히 큰딸은 때맞춰 결혼하여 늠름한 사위와 두 손자를 안겨주었으며, 이제 3대를 돈독하게 엮는 일에 애쓰고 있다. 딸들의 지네철 역할은 현재 진행형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다독이며 봉사하는 사람이 많다. 장애인을 돕거나 요양보호사로 활동하는 친구들도 가교역할을 잘하고 있다. 불협화음과 문제성이 있는 단체는 그곳에 몸담았거나 그 분야를 아는 사람이 지네철 역할을 잘할 수 있을 것이다. 퇴직 교사인 친구가 대안학교에서 학교생활 적응력을 높여주고 사회 진출을 위한 기본 소양 교육을 기꺼이 담당하였다. 나는 학창 시절 야학에서 학생들과 검정고시 준비를 해 준 경험이 있다. 직장 퇴근 후 오는 학생들과 공부한 시간이 보람찬 지네철 같은 역할이었으리라.
지네철은 쇠의 숨겨진 미덕이다. 쇠란 완강하고 무거운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작지만 섬세한 모양으로 물체와 물체를 다잡아 하나로 묶는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강하면서 부드러운 드러나지 않는 일꾼이다. 그것이 있어 건물과 건물이 제대로 서고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살아간다. 지네철이 삶을 지탱한다. 모양은 별로 없지만 나도 보이지 않는 한구석에서 한 조각 지네철이 되고 싶다.
판문(板門)을 바라보다 / 임경희 - 제6회 순수필 문학상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은 대문 앞에 선다. 빛바랜 문짝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저 낡은 표지를 넘기면 옛날이 어슴푸레 펼쳐질까? 판문을 밀자 책갈피 같은 어둠이 주춤거리며 뒤로 비켜난다.
아버지와 함께 찾은 재실(齋室)은 유난히 판문이 두껍다. 널빤지를 길게 켜서 옆으로 한 장씩 이어 붙인 문은 거칠면서 단단했다. 두께와 길이를 보면 여간 큰 나무가 아니었을 성싶다. 베어내 자르고 켜서 말린 다음 짜맞추기까지 얼마나 고단한 손길이 스며들었을까.
꺼칠한 턱수염에 너털웃음을 잘 짓는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일했다. 여섯 식구를 건사하기엔 늘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여간해선 힘든 내색을 짓지 않았다. 남의 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힘닿는 대로 도와주어 동네에서는 호인으로 소문났다.
볕에 찌든 얼굴이며 굳은살 박인 손은 도회지에 살던 다른 아이들 부모와는 구별이 되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이 없을 땐 어린 우리와 자주 놀아주었다. 함께 걷다가 오르막길이 나오면 업어준 적도 많았다. 넓고 딱딱한 등판에 얼굴을 묻으면 땀냄새며 거름 냄새가 났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선 원래 오랫동안 판문을 사용했다. 산이 많은 나라에 판재로 쓸 나무가 널려 있었기에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잡목 가지를 엮은 문보다 훨씬 튼튼하여 집안사람들에게 안정감도 줬을 것이다. 그러다 크고 작은 전쟁이 잇달아 일어나 산이 불타고 목재는 구하기 힘들 정도로 사라졌다. 판문이 흔치 않은 까닭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무작정 고향을 떠나와 찬바람 드는 사글셋방에 살면서 어떻게 하면 힘든 고비를 넘길지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고향에 돌아가 농사짓겠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되뇌었지만, 역시 만만찮았다. 직업이 없는 나날이 계속되던 중 어렵사리 부탁했던 데서 일자리가 비었다는 연락이 왔다.
기다림 끝에 얻은 직업은 도로와 인도를 청소하는 것이었다. 꼭두새벽, 물 한 잔만 마신 채 집을 나섰고 매연을 참으며 일했다. 늦은 오후에 피곤한 기색으로 퇴근하면 이내 목침을 베고 새우잠에 들었다. 우리가 떠드는 소리에 깰까 봐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동네 공터로 나갔다.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 등에 고생이 옹이처럼 박혔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재실 문에는 꽃무늬 쇠가 옆으로 줄을 이었고 문고리 하나가 달렸다. 크기에 비해 별다른 장식은 없다. 안쪽은 띠장을 네 군데나 가로질러 놓았고 빗장도 든든하게 걸려 있었다. 아무나 들이지는 않겠다는 완강함이 전해졌다. 지킴이 역할에 걸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난 이곳은 마을에서 재실로 쓴 강당의 아래채였다. 젊은 부부와 옹알이하는 아이가 함께 누웠을 방은 비좁아서 도리어 아늑했다. 여기서 살 적에 마냥 좋았다는 아버지 입매에 웃음이 떠올랐다. 땀 흘리며 메고 온 땔감으로 군불을 피우고, 배냇저고리 입은 첫애를 예뻐하며 바라봤을 젊은 아버지 모습이 그려진다. 부엌과 단칸방에 세상 추위가 들어오지 않도록 막아주는 판문이 있었기에 당신은 실낱같은 행복을 꿈꿀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집집이 내놓은 쓰레기를 거둬 정리하는 작업으로 바꾸었다. 손수레에 수북이 실어다 공터에 부려놓고 돈 될 만한 것들을 골랐다. 빈병, 폐지, 양은그릇, 전선에서 떼어낸 구리는 고물상에 팔았다. 쓸 만한 살림 도구는 집에 가져와 어느 정도 사용하다 버렸다. 날마다 새벽을 밀고 일터로 나가는 동안 어깨와 등은 조금씩 구부러지고 말라갔다.
판문은 철문처럼 듬직하지는 않다. 비라도 들이치면 훅 젖을 것이다. 그러나 단단함이 느껴진다. 투박하지만 따뜻하고 허름한 듯해도 강인하다. 문밖에서 세파가 몰아쳐도 방안에 있는 것들은 온몸으로 지켜내겠다는 의지도 엿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 가정을 보존하겠냐며 넌지시 귀엣말을 건네는 것 같다.
당신은 힘에 부치는 일을 하면서도 가난한 살림을 일구고 우리를 공부시켰다. 그런 중에도 어린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여름이면 됫박 얼음을 사와 대바늘로 쪼갰다. 그 덕에 수박이나 미숫가루를 먹을 때는 입이 얼얼하고 땀이 식었다. 생일에는 평소에 꿈도 못 꿨던 자장면과 용돈을 선물했으며 겨울에는 가끔 귀한 귤도 손수 사 들고 귀가했다.
아버지 인생이 가족을 든든하게 지키는 내내 우리는 저마다 다른 결을 새기며 자랐다. 공부 잘했던 나, 찌개 하나라도 맛깔스럽게 끓여내고 운동을 잘했던 첫째 여동생, 남달리 예쁜 막내가 그랬다. 남동생도 건강하게 성장해서 사회의 일원으로 한몫했다. 밋밋했던 아버지의 문은 우리가 품었던 나이테가 조금씩 도드라지자 차츰 멋있어졌다.
튀니지엔 나무문을 가진 집들이 마을을 이룬 도시가 있다. 지중해를 바라보는 파란색 문에는 쇠 장식이 박혔다. 우리나라 판문에 있는 작은 쇠붙이와도 닮았다. 구레나룻을 기른 한 남자가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카메라 앵글에 잡힌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아버지처럼 따뜻하고 인정스러운 눈빛이 표정에 담겨 있어서다.
재실을 휘돌아 나오며 밖을 봤다. 길은 건넛마을로도 뒷산으로도 연달아 이어진다. 인적 드문 추운 날이다. 소나무 사이로 새들이 날아가고 나무문의 삐걱거리던 소리도 잦아든다. 날마다 세상 쪽으로 난 문을 밀며 아버지는 그렇게 일터로 나갔을 것이다. 곤하게 자는 어린것들을 그윽이 바라보며.
아버지가 저만치 앞에서 걷는다. 굽은 판문의 어깨에 남은 저녁볕이 따습게 얹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