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새장을 벗어나 세상의 중심에 선 ‘나’를 깨우다& 권경율
’90년대 신드롬 불러 일으킨 문화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
혁신적인 메시지와 장르로 출현하자마자 ‘대중문화혁명’ 이끌어
4050대가 된 신세대, 레트로 열풍 타고 아날로그의 추억 속으로
1992년 4월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서태지의 속사포 랩과 양현석·이주노의 격렬한 춤사위에 가요 관계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결코 시간이 멈추어줄 순 없다 요! / 무엇을 망설이나 되는 것은 단지 하나뿐인데 / 바로 지금이 그대에게 유일한 순간이며 / 바로 여기가 단지 그대에게 유일한 장소이다 /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 환상 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 지금 사실 내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환상 속의 그대’)
1992년 4월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서태지의 속사포 랩과 양현석·이주노의 격렬한 춤사위에 가요 관계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첨단 테크놀로지로 빚어낸 강렬한 리듬과 경쾌한 선율은 TV 시청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말 그대로 ‘환상적인 그대’였다. 그들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10대의 우상이 되기까지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음악적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발라드와 트로트 중심의 한국 가요계에 힙합, 테크노, 얼터너티브 록 등 새로운 장르를 과감하게 도입해 대중가요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렸다. 데뷔곡 ‘난 알아요’와 이듬해 내놓은 ‘하여가’의 뜨거운 인기는 열정적인 ‘팬덤’ 문화를 낳으며 향후 K팝이 성장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이른바 ‘신세대’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멘토였다. 어느 시대나 신세대는 존재했지만 1990년대의 신세대는 문화적 정체성이 매우 강했다.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솔직히 욕망을 분출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환상 속의 그대’는 망설이지 말고 지금 여기서 진짜 내 모습, 나다움을 찾으라고 한다.
뉴키즈온더블록 내한공연에서 생긴 일
1992년 기준으로 한국 인구 가운데 20대 이하는 44%였다. 그들은 한국에 TV가 보급되기 시작한 196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났다. TV를 보고 자란 세대다. 대중문화의 세례를 듬뿍 받았다. 한국 경제가 성장하며 구매력도 생겼다. 좋아하는 것에 기꺼이 돈을 쓰는 세대다. 개성과 취향의 소비문화를 장착했다. 바로 그 대중문화와 소비문화가 결혼하여 낳은 자식들이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한 신세대였다(지금은 40, 50대가 되었다).
신세대, 그중에서도 10대는 한국 대중문화 발전의 원동력이었다. 대중가요는 10대가 좌우했다. 음반 시장 매출액의 70%가 10대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지상파 방송사의 쇼 프로그램은 10대 방청객의 열광적인 호응에 기댔다. 그들은 소형 카세트 마이마이나 워크맨으로 오빠들의 노래를 재생하고 이어폰을 낀 채로 거리를 활보했다.
여의도 방송가의 연기학원들은 10대 수강생들로 북적거렸다. 유치반, 중고반, 대학입시반, 성인반 등을 모집하는데 수강 희망자의 90% 이상이 중고생이었다. 매년 서너 차례 모집하고도 다 못 받아 테스트를 통해 선발해야 했다. 그 뜨거운 열기의 이면에는 연예인에 대한 10대의 숭배가 자리하고 있었다.
2017년 9월 서태지 데뷔 25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서태지와 방탄소년단이 함께 무대에 올라 공연하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오늘날 세계 무대를 누비는 K팝의 기반을 닦았다. [사진 서태지컴퍼니]
연예인 숭배는 광적인 양상으로 번져나갔다. 유명 스타들은 ‘사생팬(사생활을 침해하는 극성팬)’으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 서태지와 아이들 전성기에 열혈 팬덤과 함께 사생팬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서태지의 집 앞에는 수십에서 수백 명의 팬이 그를 보려고 기다렸다. 택시를 타고 서태지를 뒤쫓는 팬들도 있었다.
사생팬의 집착은 점점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좋아하는 가수의 차를 알아내 몰래 번호판을 떼어가는가 하면, 인기 배우가 사는 빌라의 현관과 벽면을 낙서로 도배했다.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가 태연히 음식을 꺼내먹기도 했다. 엄연한 스토킹이고 주거 침입이었지만, 이런 행위가 범죄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열광이 참사로 이어지기도 했다. 1992년 2월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뉴키즈온더블록(New Kids On The Block) 내한공연에서 대형사고가 터졌다. 당시 뉴키즈온더블록은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아이돌 그룹이었다. 많은 팬이 모였고, 안전 관리는 부실했다. 흥분한 팬들이 무대 쪽으로 몰려들어 앞자리 관객들이 무더기로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고등학생 한 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아수라장이었다.
“세상의 중심은 나!” 외친 신세대
잇단 불상사에 기성세대의 우려가 커졌지만, 반대로 신세대를 옹호하는 주장도 자라났다. 세대 갈등이라는 이슈가 불거지고 학술적인 논쟁이 펼쳐졌다. 1993년에는 신세대가 한국 문화계의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사회 전체의 변화 속에서 1990년대의 ‘1020세대’가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할 것인지 논의했다. 젊은 평론가들이 앞장섰다.
“신세대를 철없는 아이들로 규정하는 관행에 반대한다. 신세대의 사회적인 파워와 감성적인 열정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중략) 90년대의 신세대는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결코 만만히 대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사고와 행동을 추구한다.”(미메시스,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 현실문화연구, 1993)
신세대의 등장이 ‘우당탕탕’ 파열음을 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려면 ‘창조적 파괴’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에게 준 쪽지글과 일맥상통한다. 새는 알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우당탕탕’ 깨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짓는다. 그러니 신세대여, 네 멋대로 해라!
“신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에 대한 당당함과 중심성이다. 그것이 제도와 이데올로기, 일상에 묶인 기성세대에게 숨통을 틔워줄 가능성이 있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90년대 편 1권)
1993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 후보의 선거운동 책자에 실린 주장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안으로 삼키며 살아왔던 기성세대에게, 신세대는 속에 있는 자기 음성을 꺼내도 되느냐고 묻는다.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 음성에 귀 기울이는 세상을 열망한 것이다. 1990년대에 유행했던 광고 카피처럼 “세상의 중심은 나! ”인 것이다.
1993년에 나온 신세대 화장품 ‘트윈X’ 광고. 광고가 화제로 떠오르며 X세대가 신세대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 시작했다. [사진 나무위키 퍼블릭 도메인]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를 닮을 순 없네 / (날 세상에 알릴 거야) / 나 역시 그 누구를 따라하지 않겠어 / (나의 유일함을 위해) / 내세워요 신께서 주신 당신을 / 과감하게 모든 걸 부셔버려요 / 실패해요 쓰러지세요 / 당신은 일어설 수가 있으니 / 다음에야 쓰러져 있던 널 볼 수 있어 ”(‘수시아’)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2집 앨범에 수록된 ‘수시아(誰是我)’다. 한자를 풀이하면 ‘누가 나인가?’라는 뜻이다. 약간 모호한 질문이다. ‘아시수(我是誰),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쓰는 게 이해하기 쉬울 텐데 왜 그랬을까? 사실 이유 같은 것은 없다. 애써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냥 자신의 감각대로, 느낌 좋은 표현을 썼을 뿐이다. ‘이 세상에 유일한 나’를 개성 있게 표현한 것이다. 그것이 1990년대 신세대 문화였다.
신세대의 욕망을 자극하는 법
신세대는 말한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2년에 나온 소설가 양귀자의 베스트셀러 제목이기도 하다. 신세대는 기성세대가 금기시한 욕망과 쾌락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추구했다. 욕망과 쾌락을 악마의 과실 또는 부도덕한 악으로 여기던 낡은 가치관에 도전한 것이다.
앞서 <데미안>의 쪽지글에서 알을 깨고 나온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아브락사스는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를 품고 있는 존재다. 신과 악마,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가 아니라 포용하고 융합하는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것이 신세대 창의력의 원천이었다.
1990년대 신세대는 욕망에 솔직하고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했다. 무궁무진한 창의력을 뽐내며 한국 대중문화의 경쟁력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K팝의 출발점이 되었고,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는 한류 드라마의 개막을 알렸으며, 영화 <쉬리>는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신호탄을 쏘았다. 오늘날 한국인의 긍지가 된 K컬처의 발판을 1990년대에 마련한 것이다.
가수 서태지가 지난 2017년 9월 데뷔 25주년 기념 콘서트에서 화려한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 스포트라이트]
대중문화는 상업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 1990년대 광고는 구매력 있는 1020세대의 욕망을 자극해 소비를 촉진했다. 신세대가 선망하는 라이프스타일을 매력적인 이미지로 보여주고 쾌락이 충족될 것임을 암시했다. 이미지가 곧 실체다. 아름답고 풍요롭고 세련되고 진취적인 삶은 제품과 서비스의 소비를 통해 이루어질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질까 봐 불안하다. 신세대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기업가들의 성공 신화도 신세대의 욕망을 자극했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자서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서점가를 강타하며 1989~1990년 두 해 연속으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재벌에 반대하던 운동권 대학생들이 대우에 입사해 세계 경영의 첨병으로 활약했다. 청년들의 유학과 어학연수, 해외여행도 빠르게 증가했다.
“나부터 바꾸자.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1993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밝힌 ‘신경영 선언’은 ‘나’를 소중히 여기는 신세대를 사로잡았다. 이건희 회장은 자기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뽑히기도 했다. 이면에는 성공의 욕망이 번뜩이는 시대 분위기가 깔려 있었다.
10대의 우상에서 대중문화 혁명가로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속에 /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 그리고 우릴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 / 이 시꺼먼 교실에서만 /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교실 이데아’)
1994년 3집 앨범으로 돌아온 서태지와 아이들은 신세대에게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파했다. 통일의 바람을 담은 ‘발해를 꿈꾸며’와 교육 현실을 비판한 ‘교실 이데아’는 진군의 북소리였다. ‘철없는 애들’이라고 비난받던 신세대 팬들을 사회의식으로 무장한 깨어있는 세대로 만든 것이다. 언론의 상찬이 이어지며 서태지는 대중문화 ‘혁명가’ 반열에 올랐다. 일부 청소년 팬들이 이탈하긴 했지만, 사회적 발언권은 훨씬 커진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어째서 이와 같이 파격적인 행보에 나섰을까? 이미 열광적인 팬덤의 보위를 받으며 10대의 우상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하던 대로 음악 하면 명성을 드높이며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서태지는 상처로 남을지도 모르는 음악적 반란의 길을 택했다. 단순한 도박이 아니었다. 1990년대와 신세대에 대한 통찰력이 엿보인다. 서태지는 음악적 재능뿐만 아니라 시대를 읽는 감각 또한 탁월했다.
영화〈빅토리 〉(2024)에서 주인공 필선과 미나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 맞춰 펌프를 추고 있다. [사진 마인드마크]
1990년대 한국에서는 생태주의, 페미니즘, 다원주의 등 이른바 ‘신좌파’ 의제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러한 의제는 경제적인 풍요가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야 눈을 돌릴 수 있다. 미국의 경우 1960년대 자본주의 황금기에 흑인 민권운동과 함께 신좌파 운동이 거셌다. 1990년대 한국도 마지막 호황기로 좋은 기억을 두루 남겼다.
1991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평균 7% 내외였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던 1980년대 중후반보다는 경제성장률이 떨어졌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정치·사회적 자유가 확대되어 풍요의 체감도는 매우 높았다. 또 1987년에 국민항쟁으로 민주화를 쟁취하고, 이듬해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경험이 1990년대 한국인에게 긍지와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희망이 넘실대고 미래를 낙관하던 호시절이었다.
삶의 질이 높아지니 고도 성장기에 외면했던 사회 문제들이 눈에 밟힌다.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와 관행도 생활 수준에 맞게 뜯어고쳐야 한다. 사회 개혁이 화두로 떠올랐다. 생태환경을 복원하고 성평등을 실현하려는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논의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이런 사회적 의제들을 1990년대 신세대는 공기를 마시듯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개혁하고 바꾸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교실 이데아’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은 말한다.“왜 바꾸지 않고 마음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기를 바라고만 있을까?” 단지 교육 현실만을 바꾸자는 게 아니다. 사회 개혁을 열망하는 신세대를 향해 함께 행동에 나서자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것은 ‘혁명’의 선포인 동시에 시대를 꿰뚫어 본 ‘매니지먼트’였다.
“모두를 뒤집어 새 세상이 오길 바라네”
“검게 물든 입술 /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 숱한 가식 속에 / (오늘은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 / 왜 기다려왔잖아 모든 삶을 포기하는 소리를 /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릴 일이 벌어질 것 같네 / 부러져버린 너의 그런 날개로 / 너는 얼마나 날아갈 수 있다 생각하나 / 모두를 뒤집어 / 새로운 / 세상이 / 오기를 바라네”(‘시대유감’)
1995년에 나온 서태지와 아이들 4집에서는 ‘시대유감’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공연윤리위원회 음반 사전심의에서 노랫말을 문제 삼은 것이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네” 등의 표현이 지나치게 부정적이며 현실 전복적이라는 이유로 심의 불가 판정을 내리고 수정을 요구했다.
서태지는 그러나 가사를 고치는 대신 MR(반주 음악)로 대체해 ‘유감’을 표했다. 팬덤이 들고일어났고 사전심의 폐지 운동이 달아올랐다. 가요 사전심의는 일제강점기인 1933년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한 검열 규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검열 철폐에 대한 공감 여론이 형성되며 1996년 6월 7일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1995년에 나온 서태지와 아이들 4집 ‘시대유감’은 공연윤리위원회 음반 사전심의에서 심의 불가 판정을 받아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공론을 불러일으켰다. [사진 반도음반]
사전심의제 폐지, K팝 세계화의 도화선
가수 정태춘 등이 분투해 온 가요계의 숙원이 서태지 팬덤과 국민 응원에 힘입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사전심의제 폐지로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며 한국 가요에 창의력과 감수성을 마음껏 담아낼 수 있었다. 오늘날 K팝이 해외에서 음악성과 흥행력을 인정받고 세계적인 사랑을 받게 된 요인 중 하나다.
1996년 1월 31일 서태지와 아이들은 전격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시도할 수 있는 건 모두 보여줬다는 것이다. 놀라운 소식에 언론은 뒤집어졌고, 팬들은 깊은 슬픔과 충격에 빠졌다. 서태지는 진취적인 음악으로 K팝이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닦고, 신세대의 아이콘으로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데 앞장섰다. 길이 빛나는 성취를 남기고 한국 대중문화의 전설이 된 것이다.
2010년대 초부터 불기 시작한 1990년대 레트로 열풍은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뜨거워지는 추세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뉴잭스윙 음악과 토끼춤, Y2K 패션 등 전방위적으로 확산되었다. 1990년대에 신세대라고 불려던 이들은 지금 4050대가 되어 한국 사회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다.
대중문화 세대로서 30여 년 전 그 시절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들에게 1990년대는 미래를 낙관하고 희망이 넘쳤던 호시절이었다. 문화적으로 흥미롭고 정신적으로 충만한 호황기였다. 인터넷으로 모든 사람이 연결되기 전이었으니, 아날로그의 추억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오늘날 디지털 경제·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더욱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었다. 하지만 혐오와 적개심, 갈등과 혼란이 심화되어 앞날이 불안하고 두렵기만 하다. 이런 현실에 염증을 느끼고 레트로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 터. 서태지처럼 세상을 바꿀 대중문화 혁명가를 찾아보는 건 어떨까?
'한국인물. 우리 시대의 거장, 스승을 말하다(월간중앙 연재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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