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역사를 만들다 3 & 밍키
3장 초대 기독교/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
늘 죽음을 의식해야 했고 삶 자체도 결코 풍요롭거나 즐겁지 않은 상황에서 중세인들이 좌절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내세에 얻을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를 믿는 이들이 죽은 후 그리스도처럼 부활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해석되었다. 64
이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선 성경의 내용을 고난을 뚫고 온 한 민족의 영웅 이야기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모세, 요셉, 다니엘, 예수, 베드로, 바울, 마리아 등 뛰어난 영웅에 대한 찬양이라는 전제로 기독교 예수를 이해하면 한층 편안한 기분으로이를 응시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창조된 예술에는 서양 문화의 양대 원료인 그리스도 문화가 가지지 못한 중대한 장점도 있다. 그것은 예술의 창조자인 작가들 역시 기독교에 대한 열렬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열망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헬레니즘 미술이 예술이 주로 이성을 중시한 르네상스나 신고전주의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면 헤브라이즘에 기반한 예술은 감정이 중시되는 바로크와 낭만주의 등의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곤 한다 65
그렇다면 왜 새롭지도 유일하지도 않은 성경과 기독교는 숱한 종교의 명명들 속에서 단 한 번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현재까지도 전 세계의 교세를 떨치고 있을까. 중요한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동시대의 다른 종교들과 달리 기독교는 육신의 소멸, 즉 죽음과 함께 생명이 끝나지 않는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66
죽음이 늘 가까이 있던 고대인과 중세인들에게 믿음만 유지하면 죽은 후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된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현대와 달리 1500년대만 해도 유럽인의 평균 수명은 30세 미만이였다 태어난 아이들 절반 이상이 만 1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렇게 늘 죽음을 의식했고 삶 자체도 경험 결코 풍요롭거나 즐겁지 않은 상황에서 중세인들이 좌절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내세의 얻을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었다.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이 너무 굳세였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은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 이전까지 기독교가 박해를 받았던 기간 동안 스스로 죽음을 택해 로마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67
기독교 초기의 성장 과정은 사도 바울의 서신들, 그리고 로마와 지중해, 동부 기독교 공동체들의 선교 여행 등을 통해 기록되었다. 여기에 복음서 저자들이 주기도문, 산상수훈 등 예수가 남긴 말들과 예수의 생애 각종 일화들을 덧붙였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이었으므로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숨겨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비밀스러운 소책자를 통해 믿음을 강화하고 정보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사도들과 설교자들의 편지가 더해지며 소책자들의 내용은 점차 많아지고 방대해졌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베드로의 후계자로 인정을 받은 교황은이 방대해진 소책자의 내용을 검토해 경전을 만들었다. 이런 기록들이 성경에 두 편 즉 신앙 성경을 이루었다. 신약 성경이 완전히 확립된 것은 예수 사후 700여 년이 지나서다. 68
이에 비해 성경의 1편인 구약 성경은 유대교의 경전이다. 구약 성경은 거의 1천년간 꾸준히 만들어지고 내용이 더해진 유대인들의 역사서이기도 하다. 기원전 8세기경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정착하면서이 기록은 더욱 방대해졌다. 헤브라이어와 아람어로 기록된 경전의 내용은 기원전 3세기에서 1세기 사이에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유럽의 전해졌고 그 후로는 기독교의 전파와 함께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구약의 핵심 내용은 신은 유일하다는 것과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구약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경전이기도 한다. 68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창세기 1장의 9장면과 구약에 등장하는 예언자 340명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을 그릴 당시 미켈란젤로는 스스로를 화가라기보다 조각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각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동작은 지극히 극적이며 과장되게 몸을 비틀거나 구부리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하나님은 자비롭기 보다는 무서운 인상이다. 초기 기독교 이후 중세까지 내려온 신앙의 일면 최후의 심판을 내리러 오는 징벌의 상징인 신의 면모가 돋보인다 70
그런데 구약 성경의 내용은 왜 징벌 위주며 구약의 등장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거칠고 사나운 것일까. 구약 성경에 쓰인 중동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동은 뜨거운 날씨에 개관이 어려운 땅이자 다양한 민족들로 들끓는 땅이었다. 이처럼 중동은 정착이 어려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유목민들이 늘 오가는 땅이었다. 살인과 약탈 형제간의 배신 등이 쉽게 일어나는 구약 성경의 내용은 곧 중동 지역 유목민들의 영위하던 거친 삶의 방식이었다. 이유목민들 중 한 부족인 유대 민족의 족장이 아브라함이었다. 유목이라는 것은 대단히 고달픈 삶의 방식이었기 때문에 유목민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강한 신념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환상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이때부터 유대 민족은 일신교라는 새로운 신념으로 뭉치게 된다. 73
유대 민족은 이집트에 정착한 후 400년 가량 번성했으나 이들 세력이 커지자 이집트인들은 유대 민족을 경계하게 된다. 아마도 람세스 2세였을 파라오는 유대 민족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처럼 살벌한 분위기에서 구약 성경 최초의 영웅 모세가 태어난다. 75
긴 방황 끝에 유대 민족은 다시 중동으로 돌아와 가나안의 정착했고 민족의 규모가 커지자 중앙집권적인 권위도 필요하게 되었다. 이때 나타난 이들이 사울, 다윗, 솔로몬 같은 왕들이다. 다윗은 유대 민족을 처음으로 강성하게 만든 왕이었으며 모세의 이은 유대 민족의 두 번째 영웅, 즉 모세 못지않게 극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낸 인물이기도 하다.77
예언자들의 염려대로 기원전 597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1세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솔로몬이 세운 사원을 무너뜨린 후 많은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유대인들이 반세기 가까이 포로로 잡혀 있었으나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정복한 덕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79
수많은 영웅과 예언자 극적인 일화들이 등장하는 구약 성경에 비해 신약 성경의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은 비교적 간단하다. 신약 성경의 초점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대 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탄생과 설교 그리고 수난에 맞추어져 있다. 대신 신약 성경에는 예술적 관점에서 보면 완벽한 남성과 영원한 여성의 두 원형이 나타난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주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젊고 아름답고 순수한 예술가들이 재현하기를 꿈꾸는 이상향 같은 존재다. 81
예수 탄생 설화는 수태고지 즉 성령의 힘으로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음을 알리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중세 이래로 수태 고지는 숱한 화가들의 창작욕을 자극했다.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와 마리아를 비롯한 동방박사의 경배도 자주 눈에 띄는 소재다. 특히 동방 박사의 경배는 그림을 청탁한 이의 모습을 함께 그려 넣기가 수월해 중세 후기 이후로 많이 그려졌다.83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기독교인들은 구원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사도들이 앞장서서 이를 전파했다. 기독교인의 수는 불과 몇 년 만에 120여 명에서 8천여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런 교세 확장의 중심에는 두 명의 사도 베드로와 바울이 있었다. 베드로가 교회를 세웠다면 바울은 신앙을 세웠다. 베드로는 시리아를 거쳐 로마로 가 첫 번째 교황이 되었고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가 순교한 자리에 세워졌다. 성당 제단의 지하에는 그의 무덤이 있다. 84
로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고 예수의 음성을 들리는 경험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방인 개종자들을 배제하지 않고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가 세계의 종교가 될 수 있는 중요한 기틀을 만들었다.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전도 여행을 계속하였으며 에페소스, 아테네, 로마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전도 여행 중에 바울이 쓴 많은 편지들이 신약 성경에 중요한 부분들이 되었다. 아마도 그는 베드로와 같은 해인 64년의 순교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300년 경에는 중동 인구의 1/4이 기독교도가 되었고 로마의 기독교 인수는 10만 명의 이르렀다. 초대 교회는 부활에 대한 믿음을 안고 박해와 상관없이 번성해 갔다. 결국 중동의 한 지방 나사렛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2.000년이 지난 현재까지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종교 중 하나로 성장했다. 85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겠다는 밀라노 칙령을 선언하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내친 김에 동쪽으로 행군을 계속한 콘스탄티누스는 적을 격퇴하고 비잔틴 제국을 정복한 후 이곳을 자신의 도시 즉 콘스탄티노플이라고 개명하고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서구의 예술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고민한 후 성경에 등장하는 장면들이나 예수와 성모 등 성가족을 그리는 과정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86
기독교가 고대 유럽과 중동 세계의 서서히 자리를 잡으면서 다신교의 성상이 물러나고 그 자리는 기독교 성상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이교도의 오랜 전통이 지금 기독교 미술을 이루는 근거가 된 셈이다. 초기에 기독교 미술은 근본적으로 공포감. 즉 최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었으며. 이러한 태도는 상당히 오랫동안 초기 기독교 미술을 지배했다. 86
초창기 예수의 성상은 제우스나 아폴론의 모습을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성상은 고대 이집트 여신 이시스 성상을 본떠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실 성상의 사용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세 율법 제2계명이 너를 위해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을 숭배하지 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율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면 성상 역시 우상의 범주에 들어가지 말라는 법이 없다. 300년 전까지 기독교 미술이 등장하지 않았던 것은 역시 이 때문이었다. 726년 동로마 제국에서 시작된 성상 파괴 운동도 이 계명을 근거로 해서 벌어진 것이다. 87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그림은 무학자들의 성서라고 말하면서 복음서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기를 장려했다. 그림으로 그려진 성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장인들은 성경필사본의 부분뿐만 아니라 성경 속 장면을 그린 그림들도 단독으로 제작했다. 그리하여 구약과 신약에 주요 장면들을 그림으로 그리는 전통이 탄생했다. 성경이 담고 있는 여러 일화들 그리고 유일신 신앙은 분명히 역사상 최초의 것은 아니다. 신의 죽음과 부활, 근친 사례, 대홍수 등 성경의 모티프들은 예수 탄생 이전에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고대 설화에도 등장했다. 비록 미학 외적인 이유로 예수를 이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기독교가 세계의 종교로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한 강력한 도구였음이 분명하다. 88
4장 비잔틴과 콘스탄티노플/ 잊혀진 제국
비잔틴 문화의 중요한 특징은 이 문화가 이 교도와 기독교적 요소 동방과 서양의 예술 로마와 중세적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잔틴 문화는 고대 그리스 로마와 초기 기독교 예수를 이해하고 중세 예술을 살펴보기 시작하는 길목에서 꼭 건너가야만 하는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한다. 90
예이츠의 시가 말해 주듯 비잔틴제국은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영원 불변한 고전이자 성스러운 땅이었다. 동시에 비잔틴제국은 지리적 문화적으로 결코 서유럽과 동일하지 않았다. 로마 문명의 후예인 유럽인들에게도 비잔틴은 미지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지성이 거의 잠들어 있던 중세 천년의 시간 동안 비잔틴 제국은 화려한 문명을 이루었다. 유럽인들이 비잔틴을 보는 시각에는 먼 나라라는 낯선과 함께 비잔틴 문명에 대한 동경과 시기가 한데 얽혀 있었다.93
비잔틴이 우리에게 생소한 단어라는 사실 은 확실하다. 역사책에서 비잔틴 제국에 대한 이야기가 비중있게 다루어진 경우는 드물다. 비잔틴 또는 그리스 정교와 같은 단어들은 우리 역사 지식에서 기묘한 공백으로 남아 있다. 역사책에 나오는 비잔틴 제국에 대한 확실한 언급은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1453년의 동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한 서술이다. 이 두 로마 제국 멸망 사이에는 정확하게 1천년이라는 시간이 존재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이 천 년간의 시간을 우리는 중세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서유럽을 어둠으로 채운 천 년 동안 멸망하지 않은 동로마 제국은 무엇을 했으며 어떤 문명을 구가하고 어느 지역을 정복했을까. 94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서구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으며 50만 명 이상의 인구가 거주할 정도로 큰 도시였다. 같은 시기에 유럽에는 인구 10만 명을 넘는 도시도 드물었다. 비잔틴 문화의 중요한 특징은 이 문화가 이교도와 기독교적 요소, 동방과 서방의 예술 로마와 중세적 요소를 고루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잔틴 문화는 고대 그리스 로마와 초기 기독교 예수를 이해하고 중세 예술을 살펴보기 시작하는 길목에서 꼭 건너야만 하는 일종의 다리 역할을 한다. 94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정복 전쟁의 와중에 로마의 속적 페르시아를 막을 거점이 필요함을 느끼고 기원전 7세기 그리스인들이 보스포루스 해협의 끝에 세운 식민지티온에 눈독을 들였다. 이 지역은 3면이 바다에 접해 있어서 서쪽 성벽 하나만으로도 방어할 수 있는 천혜의 지형에 자리잡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방과 아시아를 있는 이 해상무역의 거점에 성벽을 쌓아 도시 형태를 만든 후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로 도시의 이름을 바꾸었다. 95
콘스탄티노플에는 기존의 특권 계층이 없었고 지형적으로 상업에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자연이 젊은 인재들이 속속들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콘스탄티노플은 기독교 전파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거점이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아기 예수가 누웠던 구유와 십자가 조각을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 위에 성묘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로 성지순례를 떠나기 위해서라도 콘스탄티노플은 반드시 필요한 중간 지점이었다. 위대한 황제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에 대한 숭배는 점차 동방 기독교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다. 96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에 이탈리아의 지배권은 게르만족 용백 용병 대장인 오도 아케르가 차지했다. 로마 문화를 계속 지키고 싶었던 서로마 제국의 잔존 세력들은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콘스탄티노플로 몰려들었다. 콘스탄티노플은 또 하나의 로마 제국인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 제국의 유일한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들은 저마다 교회와 수도원을 짓고 황궁을 확장하며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97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마 제국 그리고 그 후 유럽 각국의 군주들은 늘 교황과 경쟁 관계이거나 아니면 교황 밑에 있었던 것에 비해 동로마 제국에서는 황제가 교회 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비잔틴 제국은 종교 합일주의, 즉 정치와 종교가 모두 한 명의 군주에게 집중되어 있는 형태였다. 동서양의 가교 역할을 하며 양쪽으로 숱한 침략군을 물리쳐야 하는 독특한 지리적 형태 때문에라도 전제군주가 종교와 정치 양쪽을 모두 지배하는 형태는 필수적이었다. 97
서방 세계는 늘 콘스탄티노플에 세 가지 보물을 부탁했다. 그것은 그리스의 불 황제의 보물, 그리고 황제의 적통을 의미하는 비잔틴 궁전의 자줏빛 방에서 태어난 황녀였다. 이후로도 콘스탄티노플은 불가르족 러시아 등 동유럽 세력의 침략을 받았으나 이 역시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뜻밖에도 1204년 콘스탄티노플은 제4차 십자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이는 십자군의 강력한 전투능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제국 내부에서 황위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균열과 책략 때문이었다. 콘스탄타노플의 십자군 침공 이후 비잔틴 제국은 예전의 영광을 잃고 점차 쇠락하다 마침내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침공의 무너지게 된다. (p. 99)
이처럼 여러모로 우월했던 비잔틴 제국의 문명은 서방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알렉시우스 4세 황가 제4차 십자군의 진 빚을 갚지 못하자 이로 인해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이 벌어졌다. 1204년의 약탈로 인해 유럽과 비잔틴 제국은 더 이상 같은 로마 제국의 후예가 아닌 영원한 적수로 갈라지고 말았다. p.100
국가의 정치, 경제, 종교를 한 손에 거머쥔 강력한 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예술을 이용했다. 황제의 절대적 권위 초인간적인 위대함과 신비 등을 나타내는 것이 비잔틴 예술의 중요한 목표였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비잔틴 예술이 사용한 방법은 고대 이집트 예술가들이 활용했던 정면성의 원리였다. 비잔틴 예술 속에 등장하는 예수와 성모 황제와 황후는 모두 같은 사람처럼 보이며 예수는 왕처럼, 마리아는 여왕처럼 묘사되었다. p.102
1. 서로마 제국 멸망 당시 로마의 상태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족 출신의 오도아케르가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면서 공식적으로 멸망했다. 당시 로마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경제적으로 쇠퇴해 있었으며, 군사력도 약해져서 외적(게르만족 등)에 의해 쉽게 침략당했다.
2.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서방 영토 회복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는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황제다. 그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회복한다’는 목표로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스페인 일부를 정복했고, 이 과정에서 이탈리아의 라벤나도 동로마 제국의 통치 하에 들어왔다.
3. 라벤나의 역할: 서방의 행정 중심지
라벤나는 원래 서로마 제국 말기의 수도였다. 서로마가 멸망한 뒤에도 전략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이곳을 ‘서방 행정의 중심지’로 삼았다. 라벤나는 이후 비잔틴 제국의 '라벤나 총독령(Exarchate of Ravenna)'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총독이 이곳에 파견되어 비잔틴 황제를 대신해 서방의 영토를 다스렸다
4.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 부부의 모자이크가 있는 산 비탈레 성당은 라벤나에 있는 비잔틴 양식의 대표 건축물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황후 테오도라의 모자이크는 그들이 이 지역의 상징적 주권자임을 나타내는 이미지이지, 실제로 그곳에서 직접 통치하거나 머물렀다는 의미는 아니다
라벤나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비잔틴 제국의 서방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총독이 파견되어 통치를 했고, 황제 부부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산 비탈레 성당은 종교적, 정치적 상징성이 크며, 모자이크는 비잔틴 제국의 정당한 지배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장치였다
서로마 제국 멸망과 게르만족의 정착 (5세기 후반)
476년: 서로마 제국이 오도아케르(Odoacer)에게 멸망당함. 오도아케르는 게르만족(스키리족 계열) 출신의 장군이었고, 서로마 황제를 폐위시킨 뒤 자신은 "이탈리아의 왕"이라고 칭함.
이후 유럽은 많은 게르만 부족 왕국들로 분열됨.
예: 동고트족(테오도릭)이 이탈리아를 지배. 서고트족은 에스파냐, 반달족은 북아프리카, 프랑크족은 갈리아(프랑스)에 정착.
이 시기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왕(rex)"이라 불렀고, 황제(imperator 또는 augustus)는 오직 비잔틴 황제만이 자처할 수 있었다.
2.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와 동로마의 서방 재정복 (6세기 중반)
527~56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 재위.
명장 벨리사리우스를 앞세워 북아프리카(반달왕국), 이탈리아(동고트왕국), 남부 스페인을 일시적으로 재정복. 이탈리아에 ‘라벤나 총독령’ 설치. 그러나 이 재정복은 한 세기 못 가 다시 게르만족(랑고바르드족 등)에게 넘어가게 됨.
3. 프랑크 왕국과 샤를마뉴 (8~9세기)
8세기 중반: 프랑크 왕국의 왕조가 메로빙거에서 카롤링거 왕조로 바뀜.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가 등장.
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샤를마뉴에게 서로마 황제의 칭호를 부여함.
이는 "서방에서의 독립적인 기독교 제국 수립"을 의미. 동시에, 비잔틴 제국과는 별개로 새로운 로마 제국(후일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점.
4. 게르만족의 기원과 이동
게르만족은 원래 중부 및 북유럽(스칸디나비아 포함)에서 기원한 민족들. 4~5세기: 훈족의 압박과 인구 증가 등의 이유로 남쪽과 서쪽으로 대이동을 시작함. 이를 "민족 대이동(Germanic Migration)"이라 부름. 이들 중 다수는 로마 영토 안으로 정착하면서 로마 제국의 체제를 점차 흡수하고 변형시킴.
‘게르만족’은 총칭이다
‘게르만족’은 단일 민족이 아니라, 언어적·문화적 유사성을 가진 여러 부족을 아우르는 총칭이다.
대표적인 게르만 부족들:
고트족 (동고트, 서고트)반달족, 프랑크족,
랑고바르드족, 알레만족, 앵글로색슨족 등
이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 정착하고, 서로 다른 왕국을 세웠으며, 정치적·문화적 성격도 제각각이었다.
2. 로마 문화와 종교의 영향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로마의 문화, 행정, 종교(특히 기독교/카톨릭)는 게르만족 사회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게르만 왕국들의 정통성을 승인해주는 중요한 힘이 되었다.
초기 게르만족은 대부분 아리우스파(Arianism)라는 이단으로 분류된 기독교를 믿었지만, 프랑크 왕국의 클로비스 1세(재위: 481~511)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496년경)하면서 본격적으로 전환점이 된다. 그러므로 최초의 로마 가톨릭 개종 왕은 샤를마뉴(카롤루스 대제)가 아니라 클로비스 1세다.
3. 샤를마뉴 대관의 정치적 의미
샤를마뉴(재위: 768~814)는 프랑크 왕국을 서유럽 전역으로 확장하며, 교회와 긴밀히 협력했다. 그는 게르만 왕이면서도 카톨릭 교회의 수호자로서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교황 레오 3세는 800년 성탄절,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그를 "서로마 황제"로 즉위시킴.
이건 두 가지 상징을 내포한다:
서방 세계의 황제 권위를 부활시킨 사건.
교황이 세속 군주의 정통성을 승인하는 권력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행위.
예수의 얼굴이 좌우가 다르게 그려진 것은 장인의 기술이 미숙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왼쪽 얼굴은 용서 오른쪽은 심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잔틴 사람들은 요한계시록에 명시되어 있는 최후의 심판이 오는 날을 두려워했으며 미래를 기다리기보다 예수가 살아있던 과거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비잔틴 미술에 등장하는 예수의 엄격한 얼굴에서는 비잔틴 사람들의 공포와 과거 지향적인 자세가 엿보인다. p.104
하우저는 성 소피아 성당이 초기 교회가 사용하던 로마의 바실리카 구조 위에 일종의 관과 같은 돔을 올려놓음으로써 교회 건축이 민주적인 구조에서 권력과 일반인을 구분하는 비민주적인 구조로 변화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분석한다. 성 소피아 성당을 본 무슬림들은 이후 돔이 있는 모스크를 앞다투어 지었다. 1453년에 콘스탄티노프를 함락한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호메드 2세는 이슬람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성 소피아 성당 아래 블루모스크를 건축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두 사원을 보면 비잔틴 문화가 이슬람의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극명하게 느낄 수 있다. 1천년 이상의 차이를 두고 건축된 두 건물의 외관은 언뜻 보기에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비슷하다. p.105
예언자 무함마드가 632년에 사망한 이후부터 무섭게 교세를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634년에는 다마스쿠스, 637년에 가자와 안티오피아, 638년에는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되었다. 661년에 이슬람 세력은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정하고 매년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세력은 고대 로마 문명의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고 정복을 통해 로마 문명을 흡수하겠다는 염원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로 가기 전 또 하나의 로마인 콘스탄티노프를 점령하려 했으나 이 계획은 800년이나 실행되지 못했다. p.106
이슬람 손에 들어온 곳은 서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였다. 712년 아랍군은 서고토 왕국의 수도 톨레도를 점령하고 스페인의 이슬람 왕국을 세웠다. 그리하여 서기 800년경의 지중해 연안은 라틴계 기독교의 서부, 그리스 기독교의 동부, 이슬람의 지배하는 남부로 나뉜다 비잔틴 제국은 기독교와 이슬람 유럽과 중동 사이의 방벽이자 보루가 되었다. p.106
7세기를 전후해 일체의 성상 숭배를 금지한 이슬람 세력이 단시간에 영토를 확장하는 상황을 목격한 비잔틴인들은 자신들의 신 역시 성상 숭배를 우상숭배로 여기는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황제 레오 3세의 조언자들은 성상 숭배에 대한 신의 노여움으로 해석을 했고 황제는 교회와 공공장소의 상상을 모두 치우거나 지워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반면 서방에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이미 692년에 성상 숭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상황이었다.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는 레오 3세의 조처에 즉각 반발했다. 그러나 성상 파괴에 대한 교황의 반대는 비잔틴 제국의 반감을 자극해 성장 파괴 운동을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성장 파괴 운동은 100년 이상 지속되다가 843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107
성상 파괴 운동에는 정치적인 의도도 숨어 있었다. 황제와 그의 추종자들은 성상 파괴 운동을 통해 부단히 세력을 키워가던 수도원을 견제하고자 했다. 실제 황제는 수도원의 신비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성당 파괴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108
왕이나 귀족의 기도실을 위해 만든 딥티크나 트립틱들이 상아, 황금, 에나멜 등의 고급 소재로 만들어진 것도 성상 파괴가 나은 새로운 유행이었다. 또한 성경 필사본에 그려진 삽화들이 성상 파괴 운동의 바람을 타고 더욱 유행하며 비잔틴 특유의 장식 미술과 회화가 발전하는 계기를 낳기도 했다. 109
성경 필사본 제작은 주로 수도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필사본 제작은 수도사들에게 신앙고백이자 속죄의 수단이었으며 사본 삽화가는 이리저리 초청되어 귀한 대접을 받기도 했다. 양피지에 그려진 성경 필사본은 궁전 부속 예배당에 딥 디테크처럼 세워져 있거나 원정을 나가는 황제들의 짐에 포함되어 있었다. 황제는 원정 중 천막에서 이 필사본을 보며 기도를 계속할 수 있었다. 성경 필사본 사파들은 성당에 모자이크와 같은 공공 미술이 아니었기 때문에 삽화가 내면의 개성이 한층 더 자세하게 드러난 경우가 많다 비잔틴의 성경 삽화는 중세 후반에 미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09
이러한 비잔틴의 보물들은 서구 세계의 부러움과 질서를 불러일으켰고 1204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프를 정복했을 당시 많은 유물들이 서방으로 넘어갔다. 약탈당한 비잔틴 유물들을 소장하게 된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성당은이 유물을 보려는 순례자들로 몸살을 앓기도 했다. 이와 함께 비잔틴의 예술 방식은 서쪽으로는 이탈리아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키예프 지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110
베네치아는 계속 콘스탄티노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동시에 이슬람 세력과도 이익이 되는 장사를 했다. 829년에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슬람이 점령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성 마르코의 유물을 훔쳐 왔는데 이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산 마르코 성당을 축조했다. 비잔틴의 도움과 모자이크 장식 거기에 더해 서방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싼 마르코 성당은 동서양 건축을 혼합한 백미가 되었다. 111
화려한 비잔틴 장식 예술은 서구 수도사들의 필사본의 그 명맥이 이어져 갔다. 비잔틴 제국이 건설한 문화와 예술의 잔재들은 제국의 멸망과 함께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베네치아로 흘러갔고 이 두 도시는 르네상스의 교두보가 되었다. 하나의 문명의 쇠락하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문명인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래저래 비잔틴 제국의 1천년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는 역사 속의 한 줄의 설명으로 끝내기에는 너무나 화려하고 장대한 시간이었다.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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