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역사를 만들다 3 & 밍키
5장. 중세 십자군과 고딕
기괴한 혹은 성스러운
중세가 하나의 단어로 표현될만큼 단순한 시기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500년부터 1,500년까지라는 긴 시간을 중세라는 하나의 시기로 묶어 놓은 것일까. 그것은이 시기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의 정신적 원동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신앙이다.
우리가 중세라고 부르는 시간 대략 5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1천 년 동안 유럽의 지도는 교황과 봉건 군주들이 지배했던 서유럽,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비잔틴 제국, 그리고 이슬람 왕국의 군림한 이베리아 반도로 나누어져 있다. 이 세 가지 상이한 세계 중에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가장 열등한 지역은 서유럽이었다. 중세의 서유럽은 중앙집권 제도와 도시 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상태였다. 화폐보다 물물교환이 성할 때여서 교역의 중심지로서나 왕의 거주지로서 대도시는 존재하지 않았다. 강력한 왕권이었고 물자들이 활발하게 교역되는 도시도 없었으니 경제 수준은 자연히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높은 경제 수준을 이루었을 때 따라오는 문화 발전도 기대할 수 없었다. 117
로마 제국이 일구었던 고도의 조직과 기술은 이교도의 유산이라는 이유로 모두 버려졌으며 여러 영주에게 권력이 분산되었던 탓에 호전적인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의학과 위생 수준이 현저히 낮아 영아 사망률도 높았다. 로마 제국 시절에 6천만 명에 달하던 유럽 인구는 600년에 3천만 명까지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농작물의 생산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로마 제국의 곡창지대는 북아프리카였고 유럽 지역의 농토는 비옥하지 못해서 밭을 2 교대로 경작해 겨우 곡식을 생산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118
황제는 제국을 다스리는 실권이 없었으며 실제적인 통치 권한은 각 지역 영주들에게 있었다. 왕은 자신의 신하들에게 봉토를 떼어주고 그 봉토에서 사실상의 군주로 군림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봉건제로 불리는 이 정치 체제를 뒤집어 보면 중세 국왕에게는 왕권이 거의 없었다는 뜻이 된다. 비잔틴 제국처럼 국가가 정치와 경제를 장악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연히 중세의 경제 중심은 국왕이 머무르던 도시가 아닌 각각 영주에 본거지인 시골로 이동했다. 118
중세에는 도시다운 도시가 없었다.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나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의 필적할 만한 대도시가 서유럽에는 전무했다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에 성을 쌓았다. 중세시대 독일 지역만 해도 8,000개 이상의 성이 건립되었다. 영주들의 자신의 성을 세운 본거지는 부르그라는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 영주와 영주 사이의 봉토 사이에는 황무지와 숲만 무성했고 도적들이 들끌었다. 첫 번째 십자군이 출정한 11세기 말 전까지는 도로망도 존재하지 않았다. 119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기독교 신앙이 중세인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며 예술의 사회적 기능도 함께 바뀌었다. 예술의 미적 가치를 중시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과는 달리 중세 예술은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도구로 변했다. 이처럼 중세 예술가는 고대의 예술관과 그 방향이 완전히 달랐다. 120
중세 화가들이 실력이나 재능이 부족해서 똑같은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성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설명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누가 보아도 마리아나 예수임을 알 수 있도록 그릴 필요가 있었다. 그림이나 모자이크에서 중요한 것은 공간감이나 생동감이 아니라 신앙심의 고취에 있었다. 이 때문에 중세시대의 화가들은 현실 속 장면을 엇비슷하게 그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림이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는 현실이 아닌 정신과 관념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121
수도원은 당시 젊은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고 거의 유일한 건축 활동 역시 교회 건축이었으므로 장인과 예술가들은 자연히 교회로 모여들었다. 당시만 해도 그림은 건축의 한 부분이었다. 그림은 패널이 아닌 프레스코로 그려지는 벽화이거나 모자이크였으며 조각 역시 건축의 일환으로 여겨졌다. 122
800년에 서유럽의 통일을 이루어낸 프랑크 왕조의 카롤루스 대제 시절에 일시적으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의 부흥시기가 있었다. 중세풍의 그림 스타일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기독교적 색체를 강하게 풍기는 중세 예술의 처음으로 생겨난 것이다. 서유럽의 대부분을 통일한 카롤루스 대제의 군사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일종의 영웅시가 탄생한 것도 카롤링거 르네상스가 낳은 공적이다. 122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육체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귀족 계급의 자제들이었다. 이들은 자연히 농업 등의 노동보다는 필사본 제작이나 수공예 등의 종사하게 되었고 그 중에서도 성경 필사본 제작과 삽화 그리기는 각 수도원이 자랑거리로 삼을만큼 중요한 일과였다. 123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 중에서 교회보다 수도원이 더 많은 것은 당시의 신앙생활이 이처럼 수도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큰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서유럽의 기술만으로는 부족해서 비잔틴 제국에서 솜씨 있는 건축가나 장인을 초청하는 일도 있었다. 123
수도관 부속 학교의 수업은 모두 라틴어로 이루어졌다. 귀족과 성직자는 라틴어를 일반인은 각자 지역에 따라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교회가 교육을 독점한다는 것은 사상의 자유를 교회가 움켜쥐고 있었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상황에서 배움이 없던 농노들은 타고난 불평등을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서로 사용하는 언어조차 다른 상황에서 계층간의 벽을 뚫는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124
필사본을 만든 예술가의 개성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중세에는 아직 개인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로마네스크 시대의 수도원에 있던 수사들은 거의 귀족 계급의 자녀들이 자제들이었으나 그들에게도 예술가로서의 자가 나아가 개인으로서의 자각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분리되어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은 중세시대 경제 구조와도 관련이 있다. 중세 초기부터 중기까지를 지배했던 둔중한 교회 건물과 수도원들은 천 년 경부터 큰 변화 없이 200년 이상 동일한 양식인 로마네스크 양식을 고수했다. 중세 사회는 남다른 개성이나 변화를 유도하기에는 너무도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사회였다. 124
필요한 모든 물품은 각 수도원 내에서 또는 본관 영주의 봉토 안에서 자체적으로 해결되었고 이런 상황에서는 타인의 물건과 구별되는 나만의 물건을 만들어 스스로를 내세우려는 욕망이 생길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중세 초기부터 중세까지를 지배했던 둔중한 교회 건물과 수도원들은 천년 경부터 큰 변화 없이 200년 이상 동일한 양식인 로마네스크 양식을 고수했다. 중세 사회는 남다른 개성이나 변화를 유도하기에는 너무도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사회였다. 124
대체 이 중세 중기의 건물들은 왜 이토록 멋스럽지 않고 요새처럼 답답할까. 그것은 당시 사회 자체가 닫힌 구조였기 때문이다. 중세 중기의 서유럽 국가들은 이슬람의 지배했던 이베리아 반도는 물론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도 종교적 갈등으로 인해 교류를 중단하고 있던 상태였다. 동서교역이 두절된 상태에서 낙후했던 로마네스크 시대의 건물들은 더욱 거칠고 둔중한 모습으로 완성될 수밖에 없었다. 125
중세의 닫힌 구조에 큰 변화의 물결을 몰고 온 것은 십자군 운동이었다. 1095년 교황 우루바누스 2세에 의해 시작된 성지수복 운동 즉 십자군 운동으로 인해 유럽은 서서히 역동적인 변화 속으로 끌려 들어갔고 그 변화는 예술에도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 최초의 십자군에 의해 동방의 물품들이 서유럽으로 전해졌고 교역의 개념이 생기며 동서 유럽의 중간에 위치한 도시 국가 베네치아가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127
십자군 운동과 함께 생겨난 11~12세기 변화들은 예술에서 개인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아무 감정 없이 마치 왕처럼 묘사되었던 예수를 한층 인간적인 모습으로 묘사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같은 변화의 결과물이었다. 127
중세를 통틀어 미술에서 가장 즐겨 묘사된 장면들은 수태고지, 예수의 탄생, 예수의 십자가 수난, 그리고 최후의 심판 등이다. 특히 최후의 심판은 흑사병으로 인해 많은 수의 인구가 사망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기독교의 천년왕국설이 더해져 한층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다. 지옥의 공포를 묘사하는데 미술만큼 효과적인 방식은 없었고 최후의 심판을 그린 그림들은 인간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데 더없이 적절한 주제였다. 그러나 현실의 수난 그리고 개인의 감정에 대한 자각과 함께 중세 예술은 본격적으로 감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중세 화가들은 남성의 나체 특히 예수를 나체로 표현하는 것만큼은 마지막까지 승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의 수난 특히 성모의 슬픔을 표현한 중세 후기화가들의 절절한 표현력은 지금 보아도 감동적인 경우가 많다. 128
중세 사람들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만 뚜렷한 목적을 가진 공공의 물건인 예술에 그 같은 감정을 나타내는 것을 꺼려했을 뿐이다. 누가 뭐래도 고딕시대의 음악과 미술 그리고 문학은 매우 인간적이며 역동적이고 낭만적인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128
기사 계급에 출현은 시대가 변하면서 필연적으로 요구된 산물이었다.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도시가 발전하고 도시에서 잉여 논산물이 판매되면서 상인과 수공업자라는 새로운 직종의 종사자들의 생겨났다. 시민 계급의 싹이 이때부터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거듭된 십자군 원정을 감당하기 위해 생겨난 직업 군인이라는 신분은 곧 세습으로 바뀌었는데 이 새로운 전사 계급이 바로 기사다.129
1096년에 시작되어 11~13세기 사이에 8차에 걸쳐 일어난 십자군의 예루살렘 원정은 제1차 이외에는 모두 예루살렘을 정복하는데 실패했다 제 3차 십자군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가 갑옷의 무게 때문에 강물에 빠져 익사하면서 와해 되었고, 제 4차 십자군은 엉뚱하게도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프를 점령하기도 했다. 십자군은 정의 부대라기보다 오합지졸에 가까웠다 더구나 대규모 군대에 필수적인 보급이 없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약탈 생각을 버려서 이 또한 큰 혼란의 원인이 되었다. 129
무분별한 신앙심으로 뭉친 십자군은 많은 희생자를 낳았지만 이를 통해 유럽은 새로운 공동체 의식을 발견했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와 함께 교황의 권위는 약화되었으며 기사 계급이 유럽을 주도하는 계급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계를 접한 기사들은 동방의 수준 높은 예의범절과 문화를 보고 감탄했으며 이를 서방의 전하고자 했다. 기사 정신이 이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130
중세의 음악은 크게 미사에서 불린 전례 음악과 세속 음악으로 나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레고리오 성가는 성직자들이 수도원에서 부르던 단선율 성가를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가 수집하도록 지시해서 생겨난 명칭이다. 그레고리오성가는 로마시대에 쓰였던 리라, 플루트 등이 이교도의 악기라는 이유로 무반주로 불렸으며 플레인 찬트를 여러 가락으로 동시에 부르는 폴리포니 형식도 13세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131
11세기에 쓰인 니벨룽겐의 노래, 쿠드루룬의 노래,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에서 주인공인 영웅이나 기사는 용감무쌍한 활약을 보이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며 결국 스스로 자초한 죽음을 맞는다. 이는 중세시대에 그만큼 죽음이 익숙한 것이었으며 기사들 스스로도 죽음을 굳이 피하지 않고 오히려 천국에 갈 수 있는 기쁜 기회로 맞아들였음을 암시한다. 135
기사의 연애 시에 표현된이 기이한 사랑은 실은 주군에 대한 감성적인 충성 맹세에 가까운 것이었다. 결국 기사는 주군에 대한 충성의 방편으로 죽은 부인에게 사랑과 숭배를 바쳤다는 해석이다. 이런 기사들의 연애시는 나아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숭배로 이어진다. 중세 중반부터 후기까지 쏟아지기 시작한 성모 마리아 숭배와 관련한 회화들은 연애시에 등장하는 영주 부인에 대한 기사의 충성이 종교적인 성격으로 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35
이후로 중세 후반기에 그림들은 수태고지나 예수 탄생은 물론이고 성경에 없는 내용인 마리아의 탄생 등 마리아에 대한 숭배를 자주 주제로 삼았다. 기사들의 연애시는 사랑이라는 개인적인 감정을 문학의 주제로 사용함으로써 근대문학의 시작을 알렸고 회화에서는 종교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마리아 숭배라는 주제의 기복제로 사용되었다. 기사에 등장과 함께 인간의 감정이 점차 예술의 전면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135
중세 중기에서 중세 후기 사이의 가장 큰 변화는 역시 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마치 요새처럼 장대하고 육중한 그러나 갑갑하게도 느껴지는 로마 네스크 교회는 중세 후기에 이르러 날렵하고 역동적인 고딕 교회의 모습으로 완전히 탈바꿈 한다. 고딕이라는 단어는 독일어로 반달족을 의미한다. 즉 고딕이라는 말은 이방인의 문화를 설명하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고딕 양식에 뾰족한 아치는 이슬람 건축의 영향을 받아들여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고딕 양식의 결정적인 특징 중 하나인 뾰족한 아치는 7세기부터 이슬람 건축에 나타났다. 십자군은 11세기 당시 이슬람이 지배하고 있던 시칠리아 등 남이탈리아를 수복하면서이 뾰족한 아치를 발견했을 것이다. 137
둔중한 요새처럼 웅크리고 있는 로마네스크 교회에 비해 고딕 양식의 교회는 위태롭고 가늘며 날렵하다. 그것은 신의 자리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려는 인간의 의욕을 보여주는 동시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한 강렬한 염원처럼 느낀다. 고딕 교회를 통해 중세인은 비로소 고대 그리스 로마의 수준을 넘어서는 서유럽인들만의 새롭고 독창적인 문화 양식에 도달한 것이다. 특정 기술자들의 조합인 길드에 소속된 수많은 장인들은 교회 건축이 이루어지는 도시를 자유롭게 이동했으며 자신의 솜씨에 대해 지속적인 수요가 있는 지역에 정착하기도 했다. 드디어 중세 사회에 문화적으로 자립한 장인들이 등장한 것이다. 138
이런 고딕 교회의 건축은 한두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로마네스크 교회와는 달리 고딕 교회의 건설에는 수많은 전문가들의 협업이 필요했다. 이런 건축 작업은 건축 장인 길드의 결성으로 가능해졌다. 특정 기술자들의 조합인 길드의 소속된 수많은 장인들은 교회 건축이 이루어지는 도시로 자유롭게 이동했으며 자신의 솜씨에 대해 지속적인 수요가 있는지 지역에 정착하기도 했다.138
중세 후반기에 그려진 그림들에서는 순례와 같은 방랑 행저이렬들을 비교적 자주 볼 수 있다. 200년에 걸친 십자군 운동을 겪은 중세 후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어디론가 떠나는 일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도제는 더 나은 기술자를 찾아서, 수도사는 자신이 원하는 수도원을 향해서, 길드 소속의 집공들은 새로운 건축 사업이 벌어지는 도시를 향해 떠났다. 이런 길을 그린 작품에서 더 이상 정면성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 차원이 아닌 3차원의 공간을 묘사했고 그림을 보는 이들을 마치 환각처럼 그림 속의 길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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