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층계 유경환
경복궁에 볼일이 생겨 들어설 때마다,한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국립 중앙 박물관의 돌층계부터 바라보게 된다.반듯하게 누워 있는 가지런한 돌층계,보이지 않는 손짓으로 올라와 보라고 하는 것 같아,자꾸 눈길이 끌린다.왜 그렇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지만,돌층계가 날 시험해 보려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내가 어떤 사람인지 돌층계가 시험해 볼 까닭이 없다.그런데도 이런 공상(空想)을 하게 되는 것은,아마 평소의 내 생활 의식 때문이리라.성실(誠實)하지 못했던 생활 의식의 탓이 아니랴.
우리는 많은 층계를 밟고 오르며 산다.층계를 밟고 오를 때마다 그것은 내게 삶의 계단으로 떠올라,헛디딜세라 조심이 된다.어차피 인생은 끝이 있는 층계를 딛고 올라서며 사는 것이다.한 층에 한 걸음이 맞도록 계단은 만들어진 것이다.그런데도 두 단,세 단씩 뛰어오르려는 충동을 느껴 왔었다.이렇게 서두르거나 남보다 앞서려거나,또는 남을 밀치고 먼저 나서려는 데서 헛딛는 실수나 넘어지는 확률은 커지게 마련이다.한 층에 한 걸음,한 발짝씩 밟아 오르게 되어 있는 것이련만,두 층,세 층을 한꺼번에 건너뛰어 밟으려는 욕심 때문에,얼마나 많은 인생 추락이나 도중 탈락(脫落),도중 하차를 해 왔던가?
우리는 인생을 너무 쉽게 살려고만 허둥거리며 살아 왔다.차근히 한 층,한 층 밟아야만 할 과정을 다 밟고 올라가는 성실한 사람을 오히려 어리석게 여기는 눈길로 바라보거나,또는 약삭빠르게 잔재주로 앞지르려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눈길로 바라보았었다.얼마나 높게 오르느냐 하는 것만을 고개 들어 쳐다보았기에,쉽게 오르려 했었다.남보다는 조금 더 많이 오르려는 욕심 때문에,남을 제치거나 딛고 올라서려 했었다.끝이 있는 삶의 계단에 얼마나 높게,얼마나 빨리 오르느냐 하는 것이 별로 큰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이제야,힘이 드는 나이에 생각이 드는 것이다.그래서인지,국립 중앙 박물관의 높은 돌계단이 보이지 않는 손짓으로 내 삶의 성실성을 시험해 보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야,내 삶의 계단을 얼마쯤 올라서서,지금 내가 선 곳이 어디쯤인가를 되돌아보게 된다.수없이 많은 층계를 밟아 오르면서,과정을 무시하지 않고 얼마나 차근히 제대로 발을 옮겼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다리에 힘주고 무릎을 짚어 가면서 이마의 땀을 씻게 되니,한 층,한 층 올라 딛고 서는 그 힘겨움에서 과연 얼마나 보람을 느꼈었는지 이제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얼마나 비틀거렸는지,얼마나 숨차게 헐떡이며 남을 밀쳤는지,몇 번이나 헛디딜 뻔했는지,또 뒤에서 남 보기에 흉하도록 갈지(之)자로 왔다 갔다 했었는지…….그것을 헤아리는 동안 내 그림자가 길어진다.
어렸을 적,고향의 돌층계에서 동무들과 가위바위보를 하며 누가 먼저 오르느냐를 놓고 쌈 싸우듯 한 적이 있었다.그러다가도,기울어져 비끼는 햇살에 그림자가 길어지면,돌층계에 꺾여진 그림자 밟기를 하면서 놀았었다.누가 많이 이겨 돌층계에 먼저 올랐든 간에,그림자가 길게 돌층계에 늘어지게 되면,해지기 전에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 미련 없이 내려와 그곳을 떠났었다.
지금 내 삶의 층계에서는,앞으로 내 인생의 계단이 얼마나 더 많이 남았는지 헤아릴 길이 없다.다만,인생의 해가 지게 되면 미련 없이 비켜서서 내려오게 될 것이다.밟게 되어 있는 층계 한 단씩을 딛고 밟아 올라서면서 다리가 무겁도록 힘이 들어도,되도록 성실하게 내딛는 바로 그 때 그 순간에 느끼는 것이 결국 보람의 전부(全部)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국민 학교 시절이었다.전학을 간ㄱ시의ㅅ학교 교정(校庭)에는 운동장 한쪽 끝 화단 사이에 높지 않은 계단이 있었다.얼마 동안 외톨이였던 나는,혼자서 그 계단을 오르내리며 놀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그 계단에서는 나만이 들을 수 있는 풍금소리가 났었다.한 발짝 옮겨 놓으면'도'소리가,또 한 걸음 바꿔 올려놓으면'레'소리가,왼발에선'미'소리가,오른발에선'파'소리가…….
"솔라 솔라 솔라시,도시라솔 파미레."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입 속으로 불러 보는 음계는,심심한 마음에 재미있는 노래가 되었다.아마 새로 전학 온 아이가 이상하다고 했을 것이다.동무들의 낯을 익혀 친구를 사귀게 될 때까지,즉흥곡(卽興曲)을 작곡하면서 계단을 커다란 풍금으로 여겼던 것이다.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삶의 층계에선 어떤 소리를 듣는가?층계 끝 아득한 높이 너머엔 무지개가 있을 것이라 여겼던 그 시절엔 멋모르고 껑충껑충 뛰어올랐다.지금은 이 층계에 끝이 있음을 알고 힘들어 하고 있다.
새하얀 눈이 덮여 깨끗한 층계,내 눈썹 위로 가지런히 놓여 있는 층계 위에 아침 까치 한 쌍이 어디선지 날아와 시린 발자국을 톡톡 찍고 있다.까치 한 쌍이 그들만 듣는 어떤 음악(音樂)을 옛날의 나처럼 듣고 있으려니 생각해 본다.귀 기울여 층계의 노래를 들으려 해 본다.눈보라가 쳐서 내 삶의 층계 오름이 미끄럽게 되는 일이나 없었으면 하는 것으로 우선 만족(滿足)하고,겨울 까치를 귀엽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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