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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52. 보리

by 자한형 2021.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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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한흑구

1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논과 밭에는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늦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면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차가움에 엉긴 흙덩이들을 호미와 고무래로 낱낱이 부숴가며, 농부는 너를 추위에 얼지 않도록 주의해서 굳고 차가운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었다.

"씨도 제 키의 열 길이 넘도록 심어지면 움이 나오기 힘이 든다"

옛 늙은이의 가르침을 잊지 않으며, 농부는 너를 정성껏 땅 속에 묻어 놓고, 이제 늦은 가을 짧은 해도 서산을 넘은 지 오래고, 날개를 자주 저어 까마귀들이 깃을 찾아간 지도 오랜, 어두운 들길을 걸어서 농부는 희망의 봄을 머릿속에 간직하며, 굳어진 허리도 잊으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2.

온갖 벌레들도, 부지런한 꿀벌들과 개미들도 다 제 구멍 속으로 들어가고, 몇 마리 산새들만이 나지막하게 울고 있던 무덤가에는, 온 여름 동안 키만 자랐던 억새풀 더미가, 갈대꽃 같은 솜꽃만을 싸늘한 하늘에 날리고 있었다.

물도 흐르지 않고 다 말라 버린 갯강변 밭둑 위에는 앙상한 가시덤불 밑에 늦게 핀 들국화들이 찬 서리를 맞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논둑 위에 깔렸던 잔디들도 푸른 빛을 잃어버리고, 그 맑고 높던 하늘도 검푸른 구름을 지니고 찌푸리고 있는데, , 보리만은 차가운 대기 속에서도 솔잎 끝과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머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하늘을 향하여, 솟아오르고만 있었다.

이제 모든 화초는 지심(地心) 속의 따스함을 찾아서 다 잠자고 있을 때, , 보리만은 억센 팔들을 내뻗치고, 새말간 얼굴로 생명의 보금자리를 깊이 뿌리박고 자라왔다.

날이 갈수록 해는 빛을 잃고 따스함을 잃었어도, 너는 꿈쩍도 아니하고 그 푸른 얼굴을 잃지 않고 자라왔다.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다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억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지금 어둡고 차디찬 눈 밑에서도, , 보리는 장미꽃 향내를 풍겨 오는 그윽한 유월의 훈풍과 노고지리 우짖는 새파란 하늘과, 산 밑을 훤히 비추어 주는 태양을 꿈꾸면서, 오로지 기다림과 희망 속에서 아무 말이 없이 참고 견디어 왔으며, 삼월의 맑은 하늘 아래 아직도 쌀쌀한 바람에 자라고 있다.

3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남향 언덕 위에 누른 잔디가 파아란 속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 보리는 논과 밭과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 누리를 뒤덮는다.

낮은 논에도, 높은 밭에도, 산등성이 위에도 보리다. 푸른 보리다. 푸른 봄이다.

아지랑이를 몰고 가는 봄바람과 함께 온 누리는 푸른 봄의 물결을 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푸르는 생명의 춤, 새말간 봄의 춤이 흘러 넘친다.

이윽고 봄은 너의 얼굴에서, 또한 너의 춤 속에서 노래하고 또한 자라난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너의 푸른 얼굴들이 새날과 함께 빛 날 때에는, 노고지리들이 쌍쌍이 짝을 지어, 너의 머리 위에서 봄의 노래를 자지러지게 불러 대고, 너의 깊고 아늑한 품 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 놓는다.

4

어느덧 갯가에 서 있는 수양버들이 그의 그늘을 시내 속에 깊게 드리우고,나비들과 꿀벌들이 들과 산 위를 넘나들고, 뜰 안에 장미들이 그 무르익은 향기를 솜같이 부드러운 바람에 풍겨 보낼 때면, , 보리는 고요히 머리를 숙이기 시작했다.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 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장미의 그윽한 향기를 온몸에 지니면서, ,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비명(悲鳴)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머리를 숙이고 성자(聖者)인 양 기도를 드린다.

5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아름 덤썩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스르릉 너를 거둔다.

농부들은 너를 먹고 살고, 너는 또한 농부들과 함께 자란다.

,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자라나고, 또한 농부들은 너를 심고, 너를 키우고, 너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6

보리, 너는 항상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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