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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74. 숨어서 피는 꽃

by 자한형 2021.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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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서 피는 꽃 김병권

우리 집 정원에는 지난 1년 동안 시들했다가 생기를 되찾은 수국 한 그루가 있다.

나는 꽃나무의 생리를 잘 몰라 별로 손질해 주지는 못했지만 이 수국은 지난해 삿갓 모양의 넙죽한 향나무 밑에서 호된 홍역을 치뤄 하마터면 죽을 뻔한 것을 아내의 정성스러운 손길로 옮겨 심어 가까스로 기사회생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올해는 꽤 싱싱하게 자랐는데도 다른 집의 풍성한 수국보다는 포기가 적고 나이는 그럭저럭 5년째로 접어든다. 다른 수국 같으면 벌써 꽃송이가 만발했을 때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야 겨우 한송이 피었는데 그 꽃의 빛깔은 바로 내가 좋아하는 연보라빛이었고 그 크기는 제법 밥사발만 하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겨우 한 송이 핀 꽃이 올바른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 무성한 잎새에 가려진 채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어 사람의 손이 잎새를 헤쳐 주지 않고는 눈에 띄기조차 어려웠다. 옆에 있는 옥잠화 · 실비아 · 채송화 · 장미 · 목단 · 국화 등이 저마다 요염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는 데 비해 혼자 외로이 외면하고 있는 모습은 매우 측은해 보였다. 그러나 다른 꽃들과 미색을 다투지 않고 홀로 잎새 속에 숨어서 피어 있는 자태는 사뭇 고고하기까지 했다.

 

꽃나무도 감성이 있는 것일까?

 

아마도 지난해 여름 그 홍역을 치른 후 제 나름으로 온갖 풍상을 다 겪은 탓인지 저렇듯 자신의 모습을 움추리는 겸허 속에는 꼭 까닭이 있는 것만 같았다. 주변에 피어 있는 뭇 꽃들이 화려하면 할수록 나의 마음 쓰임은 저 무성한 잎새 속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수국에게로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인생살이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저마다 난 체하려 들고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얼굴을 내세우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씁쓸한 현대인의 경박한 생리를 생각하다가 문득 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수국 앞에 와서는 겸허하게 자신을 도야하는(몸과 마음을 닦아 기르는) 은자의 교훈을 느끼게 된다.

 

정금미옥(精金美玉, 인품이나 시문이 맑고 아름다움을 이르는 말)은 반드시 열화(熱火) 속을 거쳐 단련되어야 이루어지듯이 죽음의 경지에까지 도달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생의 참다운 의미를 깨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의 쇠붙이나 돌덩어리보다도 약한 자신인 줄 안다면 어찌 함부로 고개를 쳐들고 교만을 피울 수 있으랴!

 

그런 의미에서 온상의 화초처럼 길러져 강한 햇빛만 받아도 시들해지는 저 모든 꽃들이 어찌 신산인고(辛酸忍苦,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괴로운 상황을 참고 견뎌 이겨 냄.)를 다 겪은 수국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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