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선열 추념문(殉國先烈追念文) 정 인 보 (鄭寅普)
대한민국 27년 12월 23일 임시정부주석 金九는 순국선열 영령의 앞에 고하나이다.
우리 국조(國祖) 형극(荊棘)을 개제(開除)하시고 정교(政敎)를 베푸신 뒤로 면연(綿延)함이 거의 오천 년에 미치는 그 동안, 흥폐(興廢)의 고(故)가 어찌 한두번이리요마는, 실상은 한 족류(族類)로서의 대승(代承)이요, 혹 외구(外寇)의 침탈(侵奪)함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지역(地域)이 일구(一區)에 그쳐, 환해 고윤(桓解古胤)의 내려오는 통서(統緖)는 언제나 엄연(儼然)하였었나니, 우리 몸소 당한 바 변난(變難)이야말로 사상(史上)에서 보지 못하던 초유(初有)의 참(慘)이라. 광무(光武) 을사(乙巳)로 비롯하여 정미(丁未)를 지나 윤희(隆熙) 경술(庚戌)에 와서 드디어 언어(言語) 끊이니, 그 참(慘)됨은 오히려 둘째라, 기치(奇恥)와 대욕(大辱)이 이에 국(極)함을 무엇으로 견준다 하리요.
이러한 가운데 일도(一道) 찬란(燦爛)한 국광(國光)을 일으켜, 이 민중(民衆)으로 하여금 치욕(恥辱)의 일(日)에 긍부(矜負)와, 비참(悲慘)의 기(期)에 분발(奮發)을 끊임없이 가지게 함이 과연 누구의 주심이뇨. 우리는 이에서 을사 이후 순국(殉國)하신 선열(先烈) 제위(諸位)를 오매간(寤寐間)에 잊지 못하나이다.그동안 일구(日寇), 치토(此土)에서 육량(陸梁)함이 오래라, 감(監)이라 독(督)이라 하여 패퇴(敗退)하던 날까지, 강산(江山) 민인(民人)을 피(彼)는 피(彼)의 점제하(占制下)에 두었던 듯이 알았을 줄 아나, 우리 선열(先烈)의 피로써 적(敵)과 싸워 온 거룩한 진세(陣勢) 사십 일 년의 일월(日月)을 관철(貫徹)하여, 몸은 쓰러져도 혼(魂)은 나라를 놓지 않고, 숨은 끊어져도 뜻은 겨레와 얽매이어, 그 장(壯)하고 매움을 말한진대, 어느 분의 최후(最後), 천읍 지애(天泣地哀)할 거적(巨迹)이 아니시리요. 인(刃)에 절(絶)하였거나, 약(藥)에 운(殞)하였거나 다 같은 국가 독립(國家獨立)의 발발(勃發)한 탱주(撑柱)요, 척수(雙手)의 격(擊)이나 일려(一旅)의 전(戰)이나 모두가 광복 달성(光復達成)의 열렬(熱烈)한 매진(邁進)이요, 역중(域中)에서 기구(崎嶇)하다가 맹지(猛志)를 뇌옥(牢獄)에 묻었거나, 해외(海外)에 표전(漂轉)하면서 고심(苦心)을 노봉(虜鋒)에 끝마치었거나 다 항적 칠사(抗敵必死)의 강과(剛果)한 결정(決定)이니, 개인(個人)과 단체(團體), 자살(自殺)과 피해(被害)가 불일(不一)한 대로, 내어뿜는 민족적(民族的) 망릉(芒稜)은 일찌기 간헐(間歇)됨을 보지 못한즉, 이 ‘피’가 마르지 아니하매 적(敵)과 싸움이 쉰 적 없고, 이 싸움이 쉬지 아니하매 차토(此土) 마침내 적(敵)의 전거(全據)로 돌아갔다고 이르지 못할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 과거 사십 일 년을 통틀어 일구(日寇)의 역(役)이라 할지언정, 하루라도 피(彼)의 시대(時代)라 일컬을 수 없음은, 오직 순국 선열(殉國先㤠)들의 끼치신 피 향내가 항상 이곳의 주기(主氣)되어 온 연고(緣故)이니, 이 여러 분 선열(先烈)이 아니런들 우리가 무엇으로써 원구상(圓球上)에 서리오. 삼천리 토양(土壤) 알알 그대로가 이 여러 분 열혈(熱血)의 응체(凝體)임을 생각하매, 구한 신감(舊恨新感)이 가슴에 막혀 어찌할 줄을 모르겠나이다.
교구(狡寇), 대로 전승(對露戰勝)의 여위(餘威)를 가지고, 오조(五條)의 협약(脅約)을 떠들던 것이 어젠 듯하오이다. 국보(國步)는 기울고 대세(大勢)는 가, 앞길의 암흑(暗黑)이 그 즈음을 알 수 없던 그 때, 저 주근(周勤), 유유(紐由)의 구원(久遠)한 정기(正氣), 몇몇 분의 선혈(鮮血)로 좇아 다시 솟아나, 안으로 폐부(肺腑)의 중망(重望)과 원로(元老)와 수의 고고(守義枯槁)하던 구신(舊臣)과 격앙(激昂)한 위사(衛士)와 강개(慷慨)한 미관(微官)과 임하 유문(林下儒門)의 기덕(耆德)들의 순열(殉烈)이 서로 이었고, 밖으로 주차 사신(駐箚使臣)의 사절(死節)이 국문(國聞)을 용동(聳動)하였으며, 각 지방(各地方)으로 의기(義旗) 곳곳에 날려 과혁(裹革)의 시(尸)와 냉산(冷山)의 혼(魂)과 피집 불굴(被執不屈)의 장사(將士), 다 적담(敵膽)을 서늘ㅎ게 하였으며, 해아(海牙)의 의성(義聲)이 내외(內外)를 흔듦에 미쳐, 국민(國民)마다 강혈(腔血)이 끓는 중, 양위(讓位)의 핍(逼)을 뒤이어 군대(軍隊)의 해산(解散)을 보게 되던 날, 굉렬(轟烈)한 대장(隊長)의 자포(自砲)가 그 즉시 조국 광복(祖國光復)의 활훈(活訓)이 되며, 죽어도 겨누라는 명령(命令)이 되어, 마침내 시가 일전(市街一戰)의 혈성(血腥)이 영구(永久)한 민지(民志)의 보람으로 빛나매, 무릇 군장(軍裝)을 신상(身上)에 건 이, 거의 의려(義旅)로서 결합(結合)되지 아니함이 없고, 학사(學士), 명관(名官)이 함께 기고(旗鼓)를 잡아, 비록 형세(形勢) 단약(單弱)하나마 자못 운흥(雲興)함을 보았나니, 이에 창(槍)이 부러질수록 의(義) 더우기 굳고, 몸이 적(敵)에게 잡힐수록 정신(精神)은 갑절이나 활발(活潑)하였나니, 옥중(獄中)에, 황야(荒野)에, 어느 뉘 어귀찬 전망(戰亡)이 아니오리까. 난적(亂賊)을 치려다가 오중(誤中)하여 의구(義軀)만이 상(喪)함을 애달파함도 그 어름이어니와, 하얼삔[哈爾賓]에서 구적(仇敵)의 원악(元惡)을 사살(射殺)하던 장거(壯擧)는 지금껏 남은 늠연(凜然)이 있나이다. 국변(國變) 당시(當時) 조야(朝野)를 통(通)하여 열절(烈節)이 계기(繼起)한지라, 수토(守土)의 장리(長吏)를 비롯하여 구원(丘園)에서 간정(艱貞)을 지키던 이, 국교(國敎)로 민지(民志)를 뭉치려던 이, 석학(碩學), 문호(文豪), 고사(高士), 단인(端人), 기근(畿近)으론 산반(散班), 중경(重卿)에 미쳐, 선후(先後)하여 구명(軀命)을 버리어 사적(私敵)의 열(烈)을 밝히셨나이다.
을사년(乙巳年)부터 경술(庚戌)에 미쳐 국보(國步) 이미 기우는 것을, 대세(大勢) 이미 가는 것을, 저렇듯 죽음으로 붙드시려 하였으나, 기우는 것은 기울고 가는 것은 가, 최후(最後)에 이르게 된 일면(一面), 붙드신 그 힘은 그 속에 점점(漸漸) 강고(强固)하여 한번 상란(喪亂)의 최후(最後)를 넘자, 하경(下傾)하던 파도(波濤)를 휘어돌려 다시 흉용(洶湧)하기 시작하매, 광복(光復)의 일로(一路), 바로 전 민중(全民衆)의 분추(奔趨)하는 바 되었나이다. 이에 앞서부터 만주(滿洲), 남화(南華), 원(遠)으로 미(美), 근(近)으로 노령(露領)에 지사(志士)의 종적(蹤迹)이 분포(分布)하더니, 다시 그 규모(規模)를 굉활(宏闊)히 하매, 혹 단결(團結)하여 군려(軍旅)를 배진(倍振)하고, 혹 규합(糾合)하여 당륜(黨倫)을 증장(增張)하고, 혹 단신(單身)으로 고행(孤行)하여 좌원우응(左援右應)하는 그 행사(行事) 또한 백난(百難)을 충모(衝冒)한 바라. 내외 호류(內外互流)하는 기다(幾多)의 열혈(熱血) 속에 전 민중(全民衆)의 지의(志意), 불타듯이 뜨거워가다가, 기미 삼월(己未三月)에 와서 총일(總一)의 표로(表露)가 독립 만세(獨立萬歲)로 터지자, 여기서들 대한 민국(大韓民國)을 내세우고 임시 정부(臨時政府)를 만들어 오늘에 이름이, 하나로부터 만억(萬億)에 이르기, 다 선열(先烈)의 물려주신 바임은 천추하(千秋下)에도 오히려 유메(濡袂)의 누(淚)를 자아낼 줄 아나이다. 기미(己未) 이후는 우리의 운동이 가장 강(强)하여지니만큼 만세 소리에 응집(應集)하던 그 때부터 농촌(農村), 시장(市場), 교회(敎會), 부인(婦人), 노년(老年)을 나눌 것 없이, 앞에서 넘어진 채 뒤에서 밀고 나와, 혈풍 혈우(血風血雨)가 전토(全土)를 휩쓸었으니, 고 선민(古先民) 임전 무퇴(臨戰無退)의 계(誡), 이에 재흥(再興)함을 이를지라, 피 헛되이 쌓이지 않고, 하늘이 민충(民衷)을 돌아보아 금일(今日) 광복(光復)의 서색(曙色)를 국토(國土)에서 맞이하게 되었나이다.
언제나 순열(殉烈)의 선민(先民)은 유국(有國)의 정간(楨幹)이시라. 그 가운데서도 우리의 과거를 생각하건대 선열(先烈)은 곧 국명(國命)이시니, 왕왕(往往)히 일인(一人)의 피로 인(因)하여 민족의 소소(昭蘇)함을 보게 됨이 어찌 도언(徒言)이리까. 저 강호(江戶)의 추격(椎擊)의 계속적(繼續的) 장도(壯圖), 고국(故國)의 사람 있음을 나타냄도 그러려니와, 왕자(往者) 상해(上海)의 난(亂)에 왜구(倭寇)의 방장(方張)하는 공세(攻勢), 우방(友邦)으로 하여금 지한(至恨)을 머금게 하던 때, 우리 의사(義士)의 일발(一發)이 군추(群酋)를 진섬(殄殲)하여 거국(擧國)의 원사(援師)보다 오히려 지남이 있어, 우리 독립의 대계(大計), 격랑(激浪)같이 노사(怒瀉)함을 얻게 되었나이다.
예로부터 지사(志士)는 일사(一死)를 가볍게 여기나니, 구태여 생(生)을 사(捨)하고 의(義)를 취(取)하신 데 향하여 비애(悲哀)의 세정(細情)을 붙이고자 아니 하며, 더우기 모두 광복(光復)의 원공(元功)이신 바에 무슨 유한(遺恨)이 있으리까마는, 같은 선열(先烈)이면서도 혹 현저(顯著)하여 천양(天壤)에 혁혁(赫赫)하기도 하고, 혹 인멸(湮滅)여 명자(名字)조차 물을 길이 없기도 하니, 전(前)을 행(幸)이라 하면 후(後) 어찌 불행(不幸)이 아니리까. 하물며 무인 궁도(無人窮途)에서 고훼(枯卉) 위에 촉루(髑髏)를 굴리어, 귀화(鬼火) 번득이고 오작(烏鵲)이 난비(亂飛)할 뿐으로, 생전(生前)은 차치(且置)하고 사후(死後)까지 소조(蕭條)한 이가 많음을 어찌하리오. 설사 이렇기까지는 아니 할지라도 군행 여진(軍行旅進)하다가 함몰(咸歿)한 이들은 누구며, 유칩 역구(幽蟄歷久)하다가 유사(瘐死)한 이들은 누구뇨. 다수(多數)로 인(因)하여 특저(特著)가 없는 거기에, 일성(日星)과 병수(竝垂)할 열적(烈蹟)이 많으시려니, 서자(逝者) 아무리 호연(浩然)ㅎ다 한들 살아 있는 우리야 어찌 돌아보아 슬프지 아니하리요.
다시 생각하면, 순국 선열(殉國先烈)은 순국(殉國)으로 일체(一體)시니 명자(名字)를 가리켜 인아(人我)를 나누려 함은 오히려 사견(私見)인 양하여 자위(自慰)ㅎ고자 하나, 또 설워하는 바 있으니, 을사(乙巳) 이후 선열(先烈)의 보고자 하심이 광복(光復)이라. 차신(此身)의 전전(轉轉)하는 동안 동지(同志)로서 간고(艱苦)에 제휴(提携)하던 이 가운데도 이미 선열을 따라 가신 이 많거늘, 이 날을 어찌 우리만이 보며, 더욱이 만드시던 이는 멀리 아득하고, 그 적(跡)을 습(襲)한 우리. 이 서광(曙光)을 바라니, 이 느낌을 또 어이하리요.
우리 국외(國外)에서 성상(星霜)을 지낸 지 오래라. 그 때는 생자(生者)들 또한 사로(死路)를 밟아 의의(依倚)하는 바 오직 선열의 혼백(魂魄)이매 거의 인귀(人鬼)의 격(隔)을 잊었더니, 이제 고토(故土)에 들어와 동포 민중(同抱民衆)의 품에 안기니, 와락, 차신(此身)의 존류(存留)함이 어째 그리 확연(廓然)함을 느끼나이다. 들어오면서 곧 미침(微忱)을 드리려 한 것이 오늘에야 겨우 추념(追念)하는 대회(大會)를 거행(擧行)하게 되니, 늦으나 오히려 우리의 정을 기탁(寄託)함직하되, 우리 선열께 바칠 형향(馨香)이 광복의 완성(完成), 즉 독립(獨立)의 고공(告功)에 있을 뿐이어늘, 이제 여기까지 달(達)함에는 아직 거리(距離) 없지 아니할새. 영전(靈前)에 향하는 육니(忸怩) 자못 무거우나, 몇십 년 전 암흑(暗黑)뿐이요, 누망(縷望)이 없던 그 때에도 선열은 꺾이지 아니하셨으니, 우리 이제 수성(垂成)의 업(業)에 헌신(獻身)함을 맹세(盟誓)할 것은 물론이요, 시(時) 금석(今昔)이 있다 할지라도 민시(民是)는 선열(先烈)의 유서(遺緖)로부터 내려와 의연(依然)할 바니, 우선 현하(現下)를 들어 선열께 고(告)하려 하며, 여러 분 재천(在天)하신 영령(英靈)은 우리를 위하여 경경(耿耿)하실지니, 그 백절 불굴(百折不屈)하신 의기(義氣), 지순 지결(至純至潔)하신 고조(高操), 민아무간(民我無間)하신 성심(誠心), 용맹 탁특(勇猛卓特)하신 용개(勇槪)를 전 국민(全國民)으로 하여금 호칙(效則)하게 하사, 이로써 태운(泰運)을 맞이하여, 위로 국조 홍익(國祖弘益)의 성모(聖模)를 중신(重新)하게 하시며, 아래로 삼천만의 기원(祈願)을 맞추어 이루게 하소서.
-선열기도추념문
1945년 12월 23일 오후 2시 서울운동장에서 순국선열 추념대회가 열렸다. 국기 게양, 애국가 제창, 묵념에 이어 은은 장중한 아악이 연주되는 경건한 분위기에서 정인보가 백범의 추념문을 대독하고 난 뒤, 백범이 추념문을 제단에 바치고 배례하니 광복군, 소년군, 각 학교 등의 단체와 수천 군중도 이에 따라 경건하게 배례를 올렸다. 다음 신익희 위원장의 추념사, 이화여전 합창단의 추념가 제창, 각 단체 대표의 추념문 낭독과 내빈들의 예사가 있었으며, 충정공 민영환의 셋째 아들 민광식이 유족을 대표해 답사했다. 이날의 추념문은 “비분강개하고 폐부를 찌르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진 장문의 글이다.
대한민국 27년(1945) 12월 23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순국선열 영령 앞에 아뢰나이다.
시조 단군께서 다스림과 가르침으로 문명을 여신 뒤로 유구한 역사가 근 5천 년에 이르는 동안, 흥망의 역사가 어찌 한두 번이리오. 그러나 대개는 같은 민족이 이어받았고, 혹 외세의 침탈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지역에 그쳐, 단군의 후손이 한 갈래로 이어 온 계통은 언제나 뚜렷하였으니, 일제에게 당한 강제 병합은 그야말로 역사상 보지 못하던 초유의 비극이라.
을사늑약(1905)에서 비롯하여 정미7조약을 지나 경술국치(1910)에 이르러 드디어 언어가 끊기니, 그 참담함은 오히려 둘째요, 부끄러움과 욕됨이 극에 달함을 무엇으로 견디어 내리오. 이러한 가운데 한 가닥 찬란한 빛을 일으켜 이 민중으로 하여금 치욕의 날에도 빛을 보게 하고, 비참한 시기에도 끊임없이 분발케 함은 과연 누가주신 것이리오. 우리는 을사년 이후 순국하신 선열 여러분을 꿈에도 잊지 못하나이다.
그동안 왜놈들이 이 땅에서 날뛴 지 오래라, 통감이니 총독이니 하면서 패퇴하던 날까지 조국 강산과 인민들을 그들의 점령 하에 통제하는 줄 알았으나, 우리 선열의 피로써 싸워 온 거룩한 진세陣勢가 41년의 세월을 관철하여, 몸은 쓰러져도 혼은 나라를 놓지 않고, 숨은 끊어져도 뜻은 겨레와 얽매어, 그 장하고 매서움을 말할진대 어느 분의 최후인들 하늘이 울고 땅이 슬퍼할 거대한 족적이 아니시리오.
칼에 베여 돌아가셨거나 약에 의해 독살당하셨거나 다 같은 독립운동을 발발시킨 기둥이요, 단신으로 의거하거나 무리 지어 싸우거나 모두 광복 달성의 열렬한 매진이요, 시중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다 굳센 뜻을 감옥에 묻었거나 해외를 전전하면서 괴로운 마음을 적의 칼날에 끝마쳤거나 이 모두 적과 싸워 죽겠다는 굳센 의지니, 개인으로 단체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죽임을 당하였거나, 그 피해 서로 다르지만 내어 뿜은 민족적 예기銳氣는 그치지 않았으니, 이 피가 마르지 아니하매 적과 싸움에 쉬신 적 없고, 싸움이 그치지 아니하매 왜적이 한시도 이 땅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과거 41년을 통틀어 왜구가 통치했다 할지언정 하루라도 그들의 시대라 일컬을 수 없음은 오직 순국선열들의 피 향내가 항상 나라의 정기를 주관해 온 까닭이니, 선열 여러분이 아니런들 우리가 무엇으로써 이 땅에 서리오. 삼천리 흙더미 알알 그대로가 여러 선열의 뜨거운 피의 응결임을 생각하매, 이 땅에 들어올 때 옛 한과 새 감격에 가슴이 막혀 어찌할 줄을 몰랐나이다.
교활한 왜구가 러일전쟁 승리의 위압으로 을사늑약을 강압하며 떠들던 것이 어제인 듯하오이다. 나라 기울고 대세 어긋나 앞길의 암흑이 그 즈음을 알 수 없던 그때, 애국 영령들의 영구한 정기가 몇몇 분의 선연한 피로 다시 솟아나니, 안으로는 대한제국의 두터운 신망을 받은 원로들, 의를 지키며 고난을 달게 받던 신하들, 나라를 지키던 격앙된 군인들, 미관말직의 강개한 관리들, 재야 유림 원로들의 순열殉烈이 서로 이었고, 밖으로는 외국 주둔 외교관의 순국이 여론을 요동치게 했으며, 각 지방으로는 의로운 깃발이 곳곳에 휘날려, 전선에서 죽어 차가운 산에 혼이 될지언정, 잡혀도 굴하지 않는 장사將士라,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나이다.
헤이그에서 밀사의 의로운 소식이 국내외를 흔들어 국민마다 피가 끓던 중,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는 핍박에 뒤이어 군대의 해산을 보게 되던 날, 대대장의 굉렬한 자결이 조국 광복의 산 교훈이 되어, “죽어도 겨누라”는 명령이 되어,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일전이 민중의 지향으로 빛났으니, 무릇 군복을 몸에 걸친 이는 거의 의병으로 결합되지 아니함이 없고, 문관들도 함께 깃발과 북을 잡아, 비록 형세가 보잘것없었으나 자못 구름같이 일어나, 창이 부러질수록 의기는 더욱 굳고, 몸이 적에게 잡힐수록 정신은 갑절이나 활발하였나니, 옥중에서 또는 황야에서 어느 누군들 어기찬 죽음이 아니오리까.
난적亂賊을 치려다가 잘못하여 자신의 의로운 몸만 다친 것을 애달파함도 그 어름이거니와,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원수를 사살하던 장거는 지금껏 의연한 모습으로 남아 있나이다. 일제의 합병 당시에도 조야朝野를 통하여 순국이 이어졌으니, 관리를 비롯하여 벽촌에서 절개를 지키신 이, 교육으로 민중을 뭉치려 하던 이, 석학, 문호, 지조 높은 선비에서 아녀자에 이르기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목숨을 버리고 적을 죽이고자 하는 매서움을 밝히셨나이다.
을사년부터 경술국치에 이르기까지, 나라 이미 기우는 것을 대세 이미 가는 것을 저렇듯 죽음으로 붙드시려 하였으나, 기우는 것은 기울고 가는 것은 가 최후에 이르게 되었나이다. 그러나 붙드신 그 힘은 그 속에서 점점 강고하여, 한번 대재앙의 최후를 넘자 아래로 기울던 파도를 휘어 돌려 다시 용솟음치기 시작하여, 조국 광복의 한길로 전 민중이 달리는 바 되었나이다.
이에 앞서 만주에서, 남중국에서, 멀리는 미국, 가까이는 연해주에서 애국지사의 종적이 있더니, 다시 그 규모를 확대하여 혹 단결하여 군대를 배양하고, 혹 규합하여 무리를 증강하고, 혹 단신으로 다니며, 이쪽에서 후원하고 저쪽에서 호응한 그 일 또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달려든 것입니다.
국내외에서 호응하는 뜨거운 피 속에서 전 민중의 의지 불타듯이 뜨거워 가다가, 기미년(1919) 3월에 와서 하나로 모아져 독립만세로 터지자, 여기서 대한민국을 내세우고 임시정부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나이다. 하나로부터 억만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선열의 물려주신 바임을 생각하니, 오랜 세월에도 오히려 소매 적시는 눈물을 자아내게 되나이다. 을사년 이후 우리의 민족운동이 강해지더니, 기미년 만세소리에 모여들던 그때부터 농촌, 시장, 교회, 학교, 부인, 노인 나눌 것 없이 앞에서 넘어진 채 뒤에서 밀고 나와 피바람이 온 국토를 휩쓸었으니, 이는 임전무퇴라는 선조의 가르침이 다시 살아난 것이리라. 흘린 피 헛되지 않고 하늘이 민중의 충심을 돌아보시어, 오늘 광복의 서광을 내 나라 땅에서 맞이하게 되었나이다.
피 흘려 돌아가신 선열은 언제나 나라를 있게 하는 근간이시라. 한 사람의 피로 민족이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되니, 선열은 곧 나라의 명운命運이라는 말이 어찌 헛된 말이겠나이까. 저 도쿄에서 이봉창의 장한 의거가 조국에 사람이 있음을 나타낸 것도 그러려니와, 왜구들이 상하이에서 우방을 공격하여 큰 한을 품게 되었을 때 윤봉길의 의거로 왜적의 우두머리를 없애, 우리 독립운동도 성난 파도와 같이 일어나게 되었나이다.
예부터 지사志士는 죽음을 가볍게 여기나니, 구태여 삶을 버리고 義를 취하신 것에 대해 애도의 사소한 정을 표하고자 아니하며, 더욱이 선열 모두 광복의 으뜸 공로자이신데 무슨 한이 더 남아 있으리까. 그러나 같은 선열이면서도 누구는 두드러져 하늘과 땅에 혁혁히 빛나고, 누구는 이름조차 알 길 없으니, 전자가 다행이라면 후자 어찌 불행이 아니리까. 하물며 아무도 없는 궁벽한 길 마른 풀 위에 해골이 되어 뒹굴어 귀신불만 번득이고 까마귀만 어지러이 날 뿐, 살아서는 차치하고 죽어서도 소식조차 적막한 이가 많음을 어찌하리오.
설사 이렇게까지는 아닐지라도, 독립전쟁 도중에 사라진 이들은 누구며, 오래 갇히어 아무도 모르게 돌아가신 이들은 누구인지요. 이러한 분이 많아, 특별히 드러나지 않는 그곳에 해.별과 나란히 빛날 공적이 많으시리니, 가신 님들이여! 임들이 아무리 호연浩然타 한들 살아 있는 우리들이야 어찌 돌아보아 슬프지 아니하리오.
다시 생각하면 순국선열은 모두 순국으로 하나이시니, 이를 서로 구분하고 나누려 함은 오히려 사견인 양하여 스스로 위안코자 하나, 그럼에도 슬퍼하는 바가 남아 있습니다. 을사년 이후 선열이 보고자 하심이 광복이라, 이 몸이 전전하는 동안 동지로서 어려움을 같이하던 이 가운데도 이미 선열을 따라가신 이 많거늘, 광복의 이날을 어찌 살아남은 우리만 보며, 더욱이 광복을 만드시던 이는 멀어 아득하고, 그 발자취를 이어받은 우리가 이 광복의 서광을 바라보니, 이 느낌을 또 어이하리오. 우리가 나라 밖에서 지낸 세월이 오래라, 그때는 산 자들도 죽음의 길에 있어 의존하는 것은 오직 선열들의 혼백이매 인간과 귀신의 차이도 잊었는데, 이제 고국에 들어와 동포 민중의 품에 안기니, 와락 이 몸의 살아 있음이 어찌 그리 확연하게 느껴지는지요.
입국한 그날 바로 작은 정성이라도 드리려 한 것이, 오늘에야 내무부에서 주관하고 국내 여러 사람들이 향응하여 추념하는 대회를 거행하게 되니, 늦으나 오히려 무한한 정을 표할 수 있되, 우리 선열께 바칠 꽃다운 향기는 광복의 완성 즉 독립의 성공에 있을 뿐이거늘, 이제 여기까지 도달함에는 아직 거리 없지 아니하니, 영전에 향하는 부끄러운 마음 자못 무겁나이다. 그러나 몇십 년 전 암흑뿐이요 실날같은 희망도 없던 그때에도 선열들은 꺾이지 아니하셨으니, 우리 이어받은 과업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는 것은 물론이요, 때의 다름이 있다할지라도 민족의 바른 지침은 선열이 남기신 유업에 의거할 것을 우선 선열께 고하려 합니다.
여러분 하늘에 계신 영령은 우리를 위하여 빛을 밝힐 것이니, 백번 꺾여도 굽히지 않으신 義氣, 지극히 순결하신 높은 지조, 민족을 자신과 같이 여기신 참된 마음, 웅대하고 용맹하며 우뚝 뛰어나신 용기와 기개를 전 국민이 본받아, 이로써 태평한 운세를 맞이하여 위로는 나라 시조님의 널리 이롭게 하는 성스러운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시며, 아래로는 삼천만의 기원을 이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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