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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2

3. 한국의 사상

by 자한형 2022.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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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상 박 종 홍

 

한국 사람이 겪어 온 고난 극복의 역사가 파란과 곡절로써 아로새겨질 적마다, 한국의 사상은 폭이 넓어지고 깊이를 더하여 왔다. 따라서, 섣부른 일면적 고찰로써 한국 사상 전체의 본령을 파악하기는 매우 곤란한 일인 줄 안다.

 

흔히 말하기를, 한국 사람은 대체로 현세적, 실제적인 것에 애착을 가지고, 그를 즐기려 하며 중시하려는 경향이 많다고 한다. 옛날 사람이 본디 그러했을 것이며, 근세에 와서는 거기에다 유교의 영향도 컸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가령 같은 불교에 있어서도 삼국 시대의 유물로서 오히려 미륵 불상의 절묘한 작품을 많이 볼 수 있다거나 저 궁예가 미륵불의 현신이라고 자칭하였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미래불인 미륵을 숭상함은 현세적, 실제적인 것을 단순하게 그것만으로써 생각하려는 사상적 태도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사상 속에는 미래와의 관련에 있어서 현재를 파악하려는 태도도 있었던 것처럼 짐작된다.

 

현재의 진의는 한갓 현재에만 얽매임으로써 살려지는 것이 아니다. 현재나 과거의 파악에 있어서, 미래에 대한 태도 여하가 다시없이 중요한 몫을 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희망에 찬 미래에 대한 계획 아래 현재가 긴장된 건설로 전전할 때, 비로소 그의 과거는 새로운 뜻을 가지고 빛날 수도 있다. 그리하여, 다시금 그의 과거가 살려져 현재의 건설에 이바지하는 둘도 없는 힘이 되기도 한다. 삼국 시대의 역사에서, 또는 고려 시대의 역사에서 무엇을 보며, 또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는 현재의 우리의 태도에 달렸고, 이 현재의 우리의 태도는 미래에 대한 건설적 의욕에 의하여 제약된다.

 

한국은 이상하게도, 주로 소극적인 은사의 나라, 더 나아가 애상의 아름다움을 가진 나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자기의 형태나 또는 그 위에 그려진 그림이 빛깔과 무늬가 그렇다고도 하며, 애조를 띤 미요의 멜로디가 또한 그렇다고도 한다. 대륙의 우렁참도 없고, 섬나라의 현란함도 없이, 고요하고 적막한 가운데 하늘에 호소라도 하는 듯한 애닯은 선의 멜로디가 그 특색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는 사람 자신이 너무나 애상적인 견지에서, 미래에 대한 적극적 건설 의욕이 세차지 못한 때에 보이는 일면인 줄 안다. 고구려 고분 안의 벽화들을 보라. 석굴암의 석가상을 보라. 거기 어디서 그런 소극적인 것, 더구나 애상의 흔적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청룡이나 현무의 그림에서, 약동하는 선 속에는 오히려 웅혼한 기상과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석가상의 원만, 구족한 상호에는 누구나 믿음직한 안도감을 느낄 것이다. 탄압에 시달린 일제 치하에 유행되어 온 민요의 멜로디가, 그대로 한국적인 정조를 대표한다 하여도 좋은 것인지는 의문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민요란 대개가 애조를 띠지만, 신라나 고구려의 서울 거리에서 그러한 애조를 띤 노래가 흘러 나오곤 하였을지 자못 의심스럽다. 을지 문덕의 싯귀에는 적을 삼키고도 남을 기개가 넘쳐 있거니와, 대자연 속에 노닌 화랑도들의 입에서, 그처럼 연약한 애상의 노래가 흘러 나왔을 리 없다.

 

한국은 반도이기 때문에, 대륙과 섬나라의 틈바구니에서 고난의 역사를 마치 운명으로 받아온 것처럼 생각하며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틀림없는 판단이라면, 장래도 그러한 운명을 걸머진 채로, 같은 고난의 역사만을 되풀이하여야 된다는 말인가? 도대체, 반도니까 그렇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이끌어 낸 말인가? 저 그리이스 반도를 생각해 보라. , 이탈리아 반도는 어떠하였던가? 고대 그리이스의 문화, 문예 부흥기의 문화는 반도 아닌 어디서 생겨났었던 것인가? 반도니까 그저 소극적인 운명을 걸머져야 된다는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너무나 얕잡아 헐뜯는 좋지 못한 버릇이 있는지 모른다. 반도니까 오히려 종합적인 새로운 분화의 꽃이 필 수도 있고, 반도니까 대륙도 섬나라도 포섭할 운명을 가질 수도 있다. 미래에 대한 건설적인 기백과 계획에서 과거의 역사를 보는 눈을 기르자. 지금 바로, 우리의 것을 살려서 적극적으로 다룰 줄을 알아야 할 때가 왔다. 이것은 공연한 허장성세가 아니다. 왜곡되었던 사실을 널리 바로 보자 함이요, 부질없는 편견을 제거하자는 것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한국 사상이라야 불교 사상 아니면 유교 사상일 것이요, 불교나 유교가 모두 남의 것이 아니냐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이와 유사한 외국인의 질문에 한국 유학생들이 가끔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논법으로 일관한다면, 서양의 여러 문명국에는 하나의 문화밖에 없고, 아마도 이렇다 할 각자의 독자성들은 없어야 할 것이다. 아니, 서양 문화라는 것의 독자성마저 엄밀하게는 없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분명히 동양에서 시작된 종교이겠기 때문이다. 그리이스 사상까지도 동양 사상의 영향 없이 생겨난 것이라고 단언하기 힘들 것인 줄 안다. 서양 문화의 특색이 없다고 한다면, 그에 대해 그 사람들 자신이 누구보다도 먼저 반대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한국에 있어서만 불교나 유교가 외방으로부터 전래되었다고 하여 사상적인 독자성이 없으란 법이 이디 있을 것인가!

 

한국의 불교는 선을 위주로 하였으나, 교종을 겸한 조계종이 전체적인 주류를 형성하여 왔고, 그와 관련하여, 지눌과 같은 창의적이며 총혜한 고승을 낳았다. 우리는 이 지눌의 사상을 탐구 천명함으로써, 한국 불교 사상이, 어떤 점에서 그의 특색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 흔히 말하기를, 조선 시대는 유학도들의 공리 공론으로 망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한 예로서 사단 칠정론 같은 것은 오히려 세계 철학사를 빛낼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지언정, 무의미하다거나 해를 끼쳤다고 함은 지나친 혹평이 아닐 수 없다. 사단 칠정론에 있어서와 같이, 하나의 철학적 문제를 중심으로 몇 세기 동안이나 끊임없이 줄기차게 논의되어 왔음은, 아마도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보지 못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오히려 한국 사람의 강인한 사색벽의 발로였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의 철학적 두뇌와 역량을 여실히 보여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이 공리 공론같이 보이는 사단 칠정론을 우리는 다시 계승하여, 현대 철학적 견지에서 좀더 철저히 연구 전개시킬 필요조차 있다고 나는 느끼곤 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널리 알려지는 날, 세계 사람들은 한국에 그처럼 정치한 철학적 이론이 있었음에 새삼스러이 놀랄 것이다. 총명한 머리를 가진 한국 사람으로서 독자적인 사상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는 사상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백 걸음 천 걸음을 양보하여, 우리의 불교 사상에는 독자성이 없다고 가정하자. 그러나, 한국에는 한국에서 생긴 천도교라는 종교가 있지 않은가. 인내천의 종지는 현대의 그 어느 민주주의보다도 철저하고 깊은 것이 아닐 수 없다. 한갓 정치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보다 철저한 윤리적, 종교적인 민주주의를 제시하는 종교다. 현대 사상이 휴머니티를 자주 문제삼는다. 인간의 존엄성을 외친다. 그러나, 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서보다 더 뛰어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사상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면, 전통적인 기독교인은 깜짝 놀랄 일이다. 그보다 더 큰 죄악이 없겠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내천 사상에는 특색이 있다. 그래서, 서학 아닌 동학이었다. 논자는 말할는지 모른다. 천도교는 유선 삼교의 영향 밑에 이를 종합한 것뿐이라고. 좋다. 그러나, 어느 사상치고 그 유래를 따지면, 다른 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을 것인가! 가끔, 독창적이라 하여, 마치 하늘에서라도 떨어진 것같이 말하는 일도 없지 않으나, 알고 보면, 이미 유서를 가지지 않은 것이라곤 없는 것이요, 캐서 따져 보면, 이미 있었던 어떤 사상과 반드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불교나 유교 또는 기독교들 자체도, 모두 그의 전신이라 할까, 또는 간단하다 할 수 없는 유서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천도교 또한 그러한 영향 밑에 서면서 인내천이라는 면을 강조하여 한국 사람의 것으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이를 우리의 독자적인 사상이라 하여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논자는 또, 아직도 사상적으로 충분히 이론화하는 데까지 전개되지 못하였음을 탓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바울 외에도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그 밖의 사람의 출현이 필요하였고, 불교에는 아난의 총명은 물론, 용수, 그 밖의 이론이 필요하였으며, 유교에는 자사, 맹자, 그리고 내려와서 한유, 송유에 의한 전승 내지 철학화가 필요하지 않았던가. 천도교도 이 뒤 몇 세기를 내려가는 동안에, 그와 같은 역사를 가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는가? 덮어놓고 한국에 독자적인 사상이 없다 함은, 스스로 저지르는 어리석은 행위밖에 안 될 것이다.

 

한국에는, 실학 사상과 더불어, 서양의 과학이 처음으로 수입되었었다. 과학은 오늘도 서양 것을 배우기에 바쁘다. 무엇보다도 시급히 배워야 할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 사람에게 과학적 창의성이 본다 없었던 것이 아님은, 국민 학교 학생들도 잘 안다. 거북선이나 활자의 발명을 모를 어린이가 없겠기 때문이다. 정책이나 그 밖의 이유로 해서 이러한 면이 계승, 발전되지 못하였다고 하여, 우리 한국 사람에게 과학적 소질이 본디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소질이 없는 바 아니요, 사상이 고정, 완결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하니, 우리 본래의 건설을 꾀하는 견지에서, 그 새싹을 찾아 내어 다시금 북돋우어 줌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그 소질에 있어서, 그 능력에 있어서, 무엇이 외국 사람에 비하여 손색이 있단 말인가? 널리 배우는 동시에, 우리를 알고 우리를 찾자. 한국의 앞날이 그대들과 더불어 희망에 차 있듯이, 한국의 사상이 멀지 않아 뚜렷한 의의와 보람을 나타내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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