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생각나는 詩篇들 김현승
사람들은 여름과 겨울에는 자연의 맹위(猛威)에 저항하며 시련을 겪고, 봄과 가을에는 그 시련에서 얻은 생명력을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늙어가며, 또 한편으로는 성장하여 가는 것이리라. 그리고 봄에는 육체가, 가을에는 영혼이 성장한다고 생각하여도 좋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음악이나 무용은 아무래도 봄에 속하는 예술일 것이고, 시는 왜 그런지 가을에 속할 것 같다. 시는 인생의 꽃이라기보다는 인생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통쾌한 기분이나, 달콤한 감상(感傷)이나, 아름다운 환호에서 꽃피기보다는 깊은 회오(悔悟)와 반성과 이해 속에서, 또는 높은 이념과 갈망과 추구 속에서 열매 맺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꽃보다는 더 많은 인생의 시련을 거쳐 비로소 열매 맺어지는 것이 진정한 시가 아닐까?
모든 계절 중에서 특히 가을은 열매 맺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계절에는 시인들도 많은 영혼의 열매를 맺게 하였을 것이다. 수많은 시인들의 생일이 어느 때인가를, 우리가 일일이 알 수는 없지만, 시의 생일은 가을에 가장 많을 것으로 안다. 그러므로 가을이 오는 이러한 시간에 시를 더듬어 찾아본다는 것은 애오라지 무익(無益)한 일은 아닐 것이다.
가을에 생각나는 시를 고른다면, 무엇보다 먼저 베를레느의 저 유명한 <낙엽>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가을날
비올론의
긴 울음 소리
몸에 스미어
나의 영혼
구슬프게 하네
울리는 종소리에
가슴은 메어
부질없이 눈물짓는
지난날의
추억이여,
나의 몸은 마냥
수심에 싸여
여기저기
정처없이
떠도는
낙엽일레.
베를레느는 19세기 말엽에 나온 저 유명한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군(詩人群)의 한 사람이다. 그가 쓴 이 <낙엽>이라는 시는 우리 나라에도 일찍부터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우리말로 옮겨 놓으면, 낙엽이 땅에 스치는 듯한 음악적인 감촉이 거의 사라지고 말지만, 이 시인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쓰여진 원작에서는 ‘ㅅ’음이 연속되는 언어들을 효과적으로 구사(驅使)하여 가을의 정조가 마음껏 상징되어 있는 노래다.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내가 학창시절에 처음으로 읽은 영국시인 예이츠의 <낙엽>이라는 시다.
가을은 우리가 사랑하는 긴 잎사귀 위에
보리 낟가리 속 쥐 위에도 왔네,
로웬 나무 잎사귀 누렇게 물들고
젖은 딸기 잎도 누런 빛 피었네.
사랑이 다하는 철은 닥쳐 와
우리의 슬픈 영혼은 피곤하여라.
우리는 헤어질 것일세.
정열의 계절이 우리를 잊기 전에
그대 수그린 이마 위에 키스와 눈물을 남기고.
예이츠는 19세기 말엽과 20세기 초엽에 걸쳐서 시의 격심한 변동기에 살고 산 시인인 만큼, 그의 후반기에 속하는 시작(詩作)들은 다분히 난해(難解)한 수법으로 엮어졌지만, 그 전반기에 속하는 시작들에선 이 작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눈물겹고, 달콤한 맛을 얼마든지 느낄 수 가 있다.
특히 마지막 두 줄인 ‘그대의 수그린 이마 위에 키스와 눈물을 남기고 헤어진다.’는 표현은 가을에 알맞은 구절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별은 때때로 <만남>보다 우리의 사랑을 얼마나 더 깊고 깨끗하게 하는 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센티한 시가 요즘의 구미(口味)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센티한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을 현대적인 감각으로서 보다 새롭데 시인 아폴리네르의 <비는 내린다>라는 시를 음미하여 보기로 하자.
추억 가운데 죽어 있던 것처럼
여인들의 음성으로 비는 내린다.
나의 삶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시간에
내려 뿌리는 것도 너다, 오오 작은 방울이여
그리하여 그렇게 설레이던 구름도
이 청각(聽覺)의 모든 세계에 소리를 낸다.
아폴리네르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현대시가 보들레르와 랭보, 로트레아몽을 거쳐 쉬르리얼리즘에 이르는 동안, 입체파(立體派)의 시를 가지고 현대시 운동에 가담하여, 공헌을 남긴 시인이다. 그는 또 현대시에 대한 한 실험으로서, 형태주의(形態主義)를 주창(主唱)하기도 하였는데, 이 <비가 내린다>라는 시는 형태를 가지고 시의 내용을 시각(視覺)에 호소하기 위하여, 시행(試行)을 비스듬히 인쇄하여 발표하였던 것이다.
어딘가 가을 바람에 비스듬히 뿌리는 차가운 비를 연상케 하는 감상적(感傷的)인 시이긴 하나, 이 시인은 현대적인 기교(技巧)로써 그의 감상을 감추려고 기도(企圖)한 흔적이 농후(濃厚)하게 눈에 띈다.
이 시에서 추억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추억이야말로 가을의 소중한 특질의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희망은 봄의 특질이라는 상대적 의미에서도 그렇거니와, 어쨌든 가을의 시편에는 추억에 관계된 소재들이 많다.
그 많은 추억의 시편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생각나는 것은 미국의 시인 트럼볼 스티크니가 쓴 <추억>이라는 눈물겨운 시다.
지금은 가을이 오는 내 추억의 고장
길모퉁이 하냥 따스한 바람결 스치고
태양 향그러이 긴 여름날을
산마루 감돌아 그림자 조을던 곳
지금은 추운 바깥 내 추억의 고장
한낮에 금빛 보리밭결 박차 소리 또는
날씬희 기운 제비 나래여
누런 소 넓은 들에 한가로이 풀 뜯던 곳
지금은 비인 땅 내 추억의 고장
칡빛 머릿단 수심 짙은 눈망울에
내가 보아도 사랑스런 내 누이와
밤이면 손목 잡고 노래부르던 숲 속
지금은 쓸쓸한 추억의 고장
내 귓전에 어린 자식들 도란거리고
난로 뒤에 남은 재 내 눈여겨보면
눈물방울 스며스며 불꽃마다 별인 양 반짝이는.
얼마나 눈물겹고 회한(悔恨)에 젖어들게 하는 추억의 시편인가? 이러한 시의 한 줄 한 줄은 읽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오랜 동안 젖어들어 있게 될 것이다.
특별이 마지막 연의 마지막 두 줄은 얼마나 눈물겹고 아름답게 만드는 감각적인 표현인가?
다음은 좀 다른 성질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짙어가는 가을의 성격을 음미하여 볼까 한다. 지금까지 읽은 서너 편을 서정적(抒情的)이라고 한다면, 다음에 읽을 두 편의 시는 지적(知的)인 경향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프란시스 잠의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를 읽어 본다.
가을이 오면 전선줄 위에
제비들은 길게 줄을 지어 떨고 있다.
그것들의 작고 차가운 가슴들이
불안에 떨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지만, 이 어린 것들은
저 아프리카의 뜨겁고 흐림 없는 하늘을
사모(思慕)하고 있는 것이다.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지만,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이 동요(動搖) 가운데서 멀리 천국을 그리는 것과 같다.
그것들은 점점이 모이고 공중을 응시하고
또 부드럽데 원을 그리고 날아가지만
언젠가는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낯익은 교회(敎會)의 출입구를 떠나기란
그렇게도 쓰라린가 보다.
또 거리는 지난날과 같이 따스한 햇볕이 없는 것도 슬프다.
아아, 그들은 얼마나 탄식할 것인가?
아아, 어찌하여 저 호도(胡桃)나무는 저이들을 속이고
날리어 빨리 잎사귀들을 죄다 바람에
날리어 버렸는가를.
올해 새로이 눈을 뜬 새끼들을
가을의 상복(喪服)이 봄을 감추고 있는 것을
물론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자치하면 교훈적인 냄새를 풍기기 쉬운 내용인데도, 잠의 예술적인 수법은 그런 것을 가리우고 있다. 잠은 상징파 이후의 프랑스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시인이며, 또한 독실한 카톨릭 신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독특한 소재와 난해(難解)한 표현은 일삼지 않는다. 서반아(西班牙)와 프랑스의 국경 지대인 피레네산 가운데 자리잡은 안 작은 도시 올테스에 은거(隱居)하며, 장미꽃과 당나귀와 같은 짐승을 노래하고, 상처를 입은 동물이나 가난한 시골 사람들에게 보내는 사랑을 노래하고, 그리고 그것들 위에 비치는 가없는 신의 은총을 노래하였다.
간결, 순박하면서도 신앙으로 통일된 이 시는, 불안과 철망의식에 사로잡혀 난해와 분열을 특징으로 삼는 현대시의 불행한 일면(一面)과는 얼마나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는가? 우리는 이러한 작품에서 신앙의 세계에 안주(安住)할 수 있는 주옥과 같은 한 시인의 지고지순(至高至順)한 마음에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릴케의 저 조용한 <가을날>이라는 시를 읽어 보자. 이 시는 우리 나라에서도 누구나가 좋아하는 그야말로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명편이다.
주(主)여, 가을입니다. 여름은 위대하였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눕히시고
벌판에 바람을 놓아 주십시오.
최후의 열매들에 남쪽의 이틀을 더 주시어
저들을 무르익으라 이르시고
완성(完成)이 저들을 밀어
또한 최후의 단맛을 무거운 포도알에 넣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집을 짓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호올로 있는 사람은 오랜 동안 호올로 지낼 것입니다.
깨어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나뭇잎들이 떨어질 때, 불안에 서성이며
가로수 사이를 오갈 것입니다.
가을을 표현하는 데 이렇게 쉬운 말로써, 이렇게 감동을 주는 시를 나는 더 알지 못한다. 가을의 풍성함, 가을의 고독, 가을의 고결한 품위를 얼마나 잘 드러낸 노래인가?
릴케는 물질에 의하여 파탄(破綻)을 당한 현대의 폐허 위에다 새로운 정신의 질서를 추구하는, 이상적(理想的) 경향의 제일인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독일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새로운 생명의 추구욕(追求欲)이 수액(樹液)과 같이 내면에서 넘쳐 흐르는 시인이다. 이 시 <가을날>은 그러한 정신의 대표작은 아니지만, 그러한 릴케의 면모와 품격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가을도 이제부터는 더욱 깊어갈 것이다. 내가 릴케의 <가을날>을 좋아하듯이 나 외의 많은 사람들도 제각기 좋아하는 가을의 시편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편들을 읽으며, 긴긴 가을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새우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