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등석 / 김태길
법정 출입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받은 첫인상은 기차 정거장 삼등 대기실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그것과 비슷했다. 법정 마룻바닥은 깨끗이 청소한 상태였고 비품도 그리 남루한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등석'의 인상을 받은 것은 아마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되었으나 아직 법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생기도 없고 풀기도 없는 사람들이 단하壇下를 가득 채우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누르께한 혈색에 표정 없는 얼굴들을 보는 순간 내 뇌리에 '삼등 인생'이라는 단어가 스쳐갔다.
변호사를 대기에는 너무나 간고하기에 자신의 권익을 스스로 변호하고자 시간에 늦을세라 부랴부랴 달려온 사람들이다. 장롱 깊숙이 아껴 두었던 외출복을 손질하여 차리고 나섰으나, 반평생에 걸쳐 속속들이 스며든 궁기가 하루아침에 가시지는 않았다. 젖먹이를 데리고 온 아낙네도 있다. '여성'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풍상에 시달린 젖통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사이참을 먹인다.
그 삼등 손님들 대열 가운데 나도 끼여 앉았다. 외국에 나가 있는 사이에 내 가옥을 팔아먹은 고명한 변호사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곳에 나올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넉넉한 착수금을 주고 변호사에게 맡길 만한 주머니 사정도 아니었고, 사기를 친 사람이 워낙 고명한 변호사인지라 아무도 그 사건을 맡으려 하지 않기에, 내가 직접 나서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기왕 온 바에야 볼일을 보고 가야 하겠기에 허리띠를 늦추고 앉아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무표정한 얼굴로 얼마 동안 기다리고 있노라니, 이상한 복장으로 의젓하게 차린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복장이란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법관의 그것이었다. 검정 모자에 검정 가운. 가슴에는 커다란 무궁화 무늬가 빛나고 있었다. 같은 복장을 한 사람들이 7∼8명 들락날락하며 법정 안이 차차 활기에 찬다. 우리 삼등석 평민들과 저 검정 옷차림의 양반들 사이에 어마어마한 거리가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며 나도 모르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일동 기립!" 구령 소리에 눈을 떴다. 이번에는 법정 정면 높은 단상에 다른 네 사람이 나타났다. 앞서 말한 '이상한 복장'과 비슷한 차림이다. 다만 가슴에 수놓은 무궁화의 빛깔은 다르다. 아까부터 들락날락하던 분들의 무궁화는 붉은빛인데, 지금 새로 등장한 분들의 무궁화는 세 사람은 금빛이고 한 사람은 푸른빛이다. 그제야 아까 단하의 마룻바닥을 왔다 갔다 한 검정 옷은 변호사들이고 단상에 나타난 검정 옷은 판사들과 서기라는 짐작이 갔다. 법정 안에는 갑자기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재판관을 따라서 일동이 착석하자 곧 사무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세운 사건에는 대리인이 나가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당사자 본인이 나가서 묻는 말에 대답을 해야 한다. 그런데 본인 또는 증인을 호출할 때는 이름 석 자만 발음하고 어떤 종류의 존칭도 붙이지 않았다. '형사 피고도 아닌데 어째서 남의 이름을 마구 부를까?' 하는 의문이 잠깐 스쳐갔다.
재판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사실을 발견하였다.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운 사건부터 처리하고 본인이 직접 출석한 사건은 뒤로 미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지점장 대리나 대리 대사가 그렇듯이, '대리'라는 것은 본인보다 한 단계 아래에 위치하는 직책을 일컫는 말인데, 법정에서는 대리가 더 높은 대우를 받는 것이 석연치 않았다.
변호사들이 모두 퇴장하고 삼등석의 손님들도 많이 줄었다. 그러나 내 이름은 부르지 않는다. 지시대로 열시에 나왔는데 지금은 열두시 반. 언제 내 이름이 호명될지 몰라서 화장실에도 못 가고 기다리고 있는 내 모습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 동안 더 기다렸다. 마침내 "김태길!" 하는 소리가 재판장의 입을 통하여 들려 왔다. "네" 하고 앞으로 나서는 나의 모습이 참으로 초라하게 느껴졌다. 재판장 앞에 이르러 가볍게 경례하고 손을 앞으로 모을 뻔했을 때,
"당신이 바로 김태길이오?"
"예, 그렇습니다."
"당신 사건은 상대편에서 연기 신청을 했습니다. 5월 28일에 다시 나오시오."
"열시에 나와서 지금까지 기다렸는데요."
"어쨌든 오늘은 그대로 돌아가시고 다음에 다시 나오시오."
나는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례는 하지 않았다. 오직 '기일 연기'의 통고만을 받기 위하여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세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삼등객의 무력한 처지에 쓴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왔을 때, '빵빵' 하고 관용 지프 한 대가 길을 비키라고 호통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