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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2

81. 시선, 그 너머

by 자한형 2022.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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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그 너머  박종숙

오래된 고택의 한식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모처럼 만난 지우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느라고 다른 데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 무심코 밥을 먹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벽면에 잘 그린 그림 한 점이 붙어있다. 뒤꽁무니를 둘러대고 서있는 그 말은 분명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기는 한데 무엇을 보고 있는지 통 알 수가 없었다. 오래되어 얼룩진 화선지에 그려있는 말이 건만 꼬리가 금방이라도 바람에 나부낄 듯 상큼해 보였다.

대개 말하면 달리는 말을 생각하게 된다, 전쟁터에 나간 용장의 말이라던가, 황무지를 달려가는 카우보이의 말, 관객을 흥분시키는 경마장의 말, 경주 천마총에 그려져 있는 말들은 모두 용맹스럽고 박력이 있다. 뛰거나 달리는 것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들이 모두 생동감 있어서 활달한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을 상서로운 동물로 생각해 왔다. 박혁거세나 주몽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말만 보아도 하늘의 사신을 받은 영웅 탄생의 징조로 표현하고 있다.

올해는 갑오년으로 청말 띠 해인데 백말은 경오(庚午) , 붉은말은 병오(丙午) , 황색 말은 무오(戊午) , 흙색 말은 임오(壬午) , 띠마다 해석이 다르다. 그날 벽에서 본 말은 올해를 겨냥해서 그린 말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채색을 하지 않아서 백말처럼 보이기는 하나 말의 기상은 그대로 살아있다고 할까? 늠름하고 영리하며 귀티 나 보이는 그 말은 몸매가 날렵하고 윤기 흐르는 데다 위엄스런 갈기가 굳세 보였다. 비록 벽에 그려져 있다 해도 편안하게 안주하고 있는 말이 아니라 곧 무엇인가를 도모할 웅기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시선의 끝은 무엇인가 살아있는 듯 나를 묘하게 사로잡았다.

본다는 것, 그것은 사람뿐 아니라 동물에게도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하고 많은 사물 중에 마음 쏠리는 그 어떤 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그쪽에 마음이 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말은 예민하여 흥분을 잘하고 자기감정에 충실한 동물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그 말이 요즘의 나처럼 새로운 미래, 뭔가 달라진 미래를 생각할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요즘 들어 나는 세상살이가 자꾸 걱정스럽게 생각될 때가 있다. 나라의 국운이 경각에 달려있다는 불안감이 자꾸 밀려들곤 한다. 가식이 판을 치고, 말의 혼돈이 무덤을 파며 집단 이기주의가 팽배한데다 부정부패로 썩어가고 있는 사회를 다시 일으킬 힘은 어디에 있는지 안갯속을 걷고 있는 느낌이다. 북한의 유화정책은 눈속임을 의심케 하고 동북아 정세의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우리의 입장은 강대국과 미묘하게 얽혀있다. 잘못하면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는데 정치인은 정치인대로 사람의 양심은 양심대로 구멍이 난 채 제각각 제멋대로 이니 앞이 캄캄해 보이고 답답해 보이지 않는가.

한때 독서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마이클센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나 개인과 집단이기주의에 대해 철학자나 사상가들을 통해 언설하고 있다. 센델은 국민이 지켜야 할 도덕적 책임의 한계를 매킨타이어의 이론을 들어 설명한다. "우리는 과거를 이미 안고 태어나므로 개인주의자처럼 나를 과거와 분리하려는 시도는 내가 맺은 현재의 관계를 거부하는 짓이나 다름없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그리고 사회계약의 결과로도 돌릴 수 없는 도덕적 의무가 있어서 나 자신이 사회적 역사적 역할과 지위와 별개의 존재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우리는 살아온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외면하고서는 살수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다만 그 도덕적 책임의 한계가 크다 보니 일본의 아베 수상처럼 비도덕적 발언을 일삼는 인물이 생겨날 수도 있는데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의 상황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시선이 필요하지 않는가. 옳고 그른 것도 없이 헐뜯고 비난하며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회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으며 세계경제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인가. 나라 정세를 세계관에 입각하여 볼 줄 아는 지도자의 혜안이 필요한 때다. 그림 속의 말도 그런 정세를 걱정하고 있을지 모른다.

예부터 사람들은 위기가 곧 기회라고 말해왔다. 우리나라도 청마의 기상을온 누리에 펼칠정의로운 사회 구현의 시발점을 책임과 의무에서 찾는다면 희망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제 지방선거를 치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참된 일꾼을 뽑아야 할 주요한 시기에 와 있다. 개인이나 집단이기주의에 빠진 사람이 아니라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올바른 사고를 가진 사람을 뽑아야 행복한 미래가 열릴 것이다. 국민의 선택은 그만큼중요하다.

새해를 맞으면서 나는 앞으로 달려나갈 청마의 기세에 힘입어 다시 웅비할 말을 그려 지인들에게 보내기로 했다. 물론 개인의 건강과 행운을 빌기도 했지만 고인 물처럼 썩어가는 사회가 바로 서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실었다. 태양을 안고 달리는 말의 역동성이야말로 그 진취적인 속도에 매력이 있는 것이아나랴.

고택에 붙어있던 말의 시선은 혼란스럽고 분열된 우리 사회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를 내다본다는 짐작이 들었다. 한 걸음 더 나가 변모한 사회,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기운을 가슴 가득 받아들여 투명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갈 신선한 미래라고나 할까. 그래서 청마는 곧 신화를 몰고 올 신마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벽에 그려진 말의 눈을 바라보았다.

박종숙 畵文集 시선, 그 너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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