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덩이처럼 이야기가 쌓여 나가지만, 어느 한 부분도 전체 이야기의 축을 망치는 요소가 없는 영화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차이나타운”은 영화 시나리오 작법에 있어서 교과서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작은 틈새로 시작한다. 작은 틈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잭 니콜슨이 연기하는 제이크 기티스의 시선으로 사건을 국한적으로 바라보게 됨을 의미한다. 영화는 기티스가 수자원 수석 엔지니어인 홀리스 멀웨이의 불륜 사건을 수사하는 것을 기점으로 진행된다. 그의 아내라고 칭하는 이블린 멀웨이는 자신의 남편이 누군가와 불륜을 하고 있으며, 그 불륜 상대가 누군인지 정확히 알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 같은 일에 기티스가 개입되어 들어간다.
이것이 일차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기티스는 어렴풋이 사건의 배후에 어떤 거대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흑막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기티스는 아직은 소도시에 불과한 LA에 그 도시의 물 공급을 완전히 틀어막고, 그 주변 농지의 농민들의 삶을 피폐화시키는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영화는 그 같은 존재를 아직은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기티스는 유능한 탐정이다. 그렇기에 그는 일단 홀리스 멀웨이의 불륜 상대를 찾아내는 것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 같은 사건은 더욱 더 큰 사건의 효시가 된다.
두 번째 장에서 페이 더너웨이가 연기하는 진짜 이블린이 등장한다. 앞선 장에서 보았던 홀리스 멀웨이를 감시해 달라고 요청했던 이블린은 가짜였고, 그녀를 누군가가 고용했음은 자명한 것이었다. 이블린은 기티스에게서 사건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지만, 기티스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될 생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실추된 명예와 진짜 배후의 사건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사건을 끝까지 파보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홀리스 멀웨이가 살해당한다. 영화의 사건은 이제 세 가지 축으로 형성되는데, 일단 첫 번째는 홀리스 멀웨이를 죽인 살인범이 과연 누구인가? 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대체 홀리스 멀웨이와 함께 있던 그 어린 소녀의 정체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는 드디어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존 휴스턴(미국 황금기 영화 시대를 대표한 영화 감독이기도 한)이 연기한 노아 크로스의 존재와 그의 의도이다. 그는 대체 왜 그렇게 자신의 “딸”을 찾기 위해서 열을 내는 것인가?
이 세 가지 사건이 어우러지면서 모든 초점은 이블린으로 향한다. 이 영화는 로저 이버트가 지적한 바 있듯이 위대한 두 배우인 잭 니콜슨과 페이 더너웨이 덕택에 저질 삼류 드라마로 격하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놀라운 것은 이 더럽고 추악스러우며, 잔인한 이야기가 하나의 그리스적 비극으로 격상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니콜슨과 더너웨이는 과장된 연기 없이 본인들이 해야 하는 정확한 양의 연기를 수준 높게 펼쳐 보인다.
그 다음부터의 이야기와 영화의 중요 내용에 대해서는 영화 감상을 하지 않으신 분들도 있기 때문에 굳이 스포일러를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 영화에 대해서 몇 가지만 더 적어보고 싶기는 하다. 일단 나는 이 영화를 영화로 맨 처음 관람한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 작법서인 로버트 맥기의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책에서 글로 먼저 접했고, 여타의 다른 영화 서적 혹은 시나리오 서적에서 이 영화의 이야기부터 접했다. 참 신비스러우면서도 기괴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 기괴한 이야기에 수 많은 비평가들과 영화 연구가들이 찬사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래서 이 영화의 글 한 줄 한 줄을 대사와 상황을 나누어가면서 곱씹어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꽤 지나서 영화를 직접 감상했다. 글을 볼 때와는 다르게 독서의 물리적 시간과 영화 감상의 물리적 시간은 매우 상이하다. 글은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독서의 시간이 정해진다. 하루가 될 수도 있고, 한 달이 될 수도 있으며, 년 단위로 확장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영화의 감상은 두 시간 내외에서 길어야 세 시간 내외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 속 스크린 속 인물들의 모든 속사정에 대해서 정통할 수는 없다. 한 번의 감상을 통해서는. 그렇기에 맨 처음 이 영화를 감상했을 때에는 좀 밍밍했던 것 같다. 실제로 영화는 스타일 적인 측면에서 굉장히 건조하고, 드라이 한 편이다. 니콜슨과 더너웨이는 꽤 신랄한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앞서도 말했듯이 굉장히 절제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 영화를 몇 번은 더 감상하게 되었다. 다시 볼 때마다 이 영화가 가진 묘한 힘이 더욱 느껴졌다. 그리고 뭔가 항상 기억에 남는 장소나 공간처럼 이 영화도 나에게 그렇게 남아 있었다.
펄펄 끓는 LA에서 아직은 작은 소도시에 불과한 곳에서, 노아 크로스는 LA의 미래를 위해서 도시 사람들의 멱줄을 잡고 있다. 그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은 결과적으로 가장 추악한 또 다른 욕망을 채우기 위한 가장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이 상황에서 제이크는 크게 상황을 바꾸지 못한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 사건의 진상을 모두 알고 싶어했고,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블린과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를 의심했지만, 그녀의 과거를 모두 알게 되고서, 그녀를 돕기로 마음 먹는다. 하지만 기티스는 사건 안에서 그 무엇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지 못한다. 그는 모든 비극의 관찰자로 격하된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티스를 책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의 어깨를 그의 영화 속 동료처럼 다독여 주고 싶은 느낌이 드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영화 속 기티스의 동료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도 그에게 말하고 싶어진다. “잊어버리게 기티스, 여긴 차이나타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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