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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현대수필3

64. 더위의 우화

by 자한형 2022.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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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의 우화 이청준(소설가)

여름 한낮, 낮잠 속에 들려오는 벽시계 방울 치는 소리는 그대로 그냥 포탄의 폭음이다.

단 세 발의 포탄 소리에 나는 그만 낮잠을 깨고 만다.

머리를 향해 누운 뒤꼍 쪽 언덕으로 한줄기 시원스러운

바람기가 스치고 지나간다. 그 바람결에 풋나뭇잎들이 갑자기 소스라치며 서걱거리는 소리---.

그 소리가 어딘지 많이 귀에 익다.

머리를 들어 열린 문 사이로 뒤꼍을 내다본다. 언덕을 기어오르다 더위에 지쳐 축축 늘어진 호박잎들. 그 위쪽의 콩밭. 그리고 콩밭가로 늘어선

옥수숫대의 행렬-----.

바람이 옥수숫대를 스쳐가는 소리였구나.

소리의 정체는 금세 밝혀진다. 하지만 그 소리가 귀에 익은 사연은 아직도 확연치가 않다. 실제로 귀에 들리는 소리와 기억 속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리고 끝내는 그것이 저 권태와 기다림의 천자

'이상'의 소리임을 알아낸다.

''옥수수밭은 일대 관병식입니다. 바람이 불면 갑주

부딪치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한시대의 불꽃 '이상'(불꽃은 원래 파괴 위에 피어오르는 꽃이 아니던가). 기다림의 천재,

우화의 천재, 그 천재의 여름도 그처럼 무덥고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일까. 사람들은 때로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기 위하여 그의 현실을 파괴하여 우화를 만든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지렸기에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큼털털한 반 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해 보임이리오.''

어느 해던가. 이상은 그의 더운 여름의 모든 것을 그렇게 한 편의 우화로 베껴놓는다. 그리고 그의 삶과 시대 전체를 우화로 바라보고 우화로 살다 간다.

더위가 너무 심한 탓인가. 내게도 이젠 그 바람소리가 심상한 바람 소리가 아니다. 그것들은 이제 이상의 추억 속에서 들려오는 우화의 소리요 모습들이다.

나는 이제 그것들을 이상의 눈으로 보고 그의 귀를 통하여 듣는다. 애초에 낮잠을 깨운 그 시계 방울의 포탄 소리도 이상의 소리가 아니었던가 싶어진다.

나는 비로소 더위에 조금씩 안심이 되어 간다.

그리고 40년 전에 이미 더위를 이기는 비법을 살고 간 우화의 도사를 축복하고 싶어진다. 날씨가 아무리 더 더워진다 한들, 이상은 이미 한 편의 적절한 우화를 쓰고 갔으므로, 그리고 그가 한번 쓰고 간 우화를 되풀이 쓸 일은 없을 터이므로.

오늘 오가가 책을 한 권 부쳐왔다. 그의 출판사에서 출간한 이상의 수필집. 심심풀이로 넘겨보라는 뜻이리라. 혹은 우편물에 주소를 적는 일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책갈피 속에라도 짐짓 안부 말 한마디 적어 넣지 않고 있는 데서 오히려 그런 오가의 마음을 읽는다.

어쨌든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소재를 어떻게 알았을까. 서울에선 그럼 녀석들이 모두 내 일을 뻔히들 알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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