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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현대수필3

62. 눈

by 자한형 2022.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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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박이문

 

..

눈 오는 밤 혼자 불을 끄지 않고 앉아 있는 때는 인위적 시간에서 해방된 시간이고 그 공간은 물리적 제약에서 이탈된 장소이다. 그때 그리고 그 장소에서 우리들의 생각은 무한한 것과 접촉할 수 있고 무한한 우주의 맥박을 체험할 수 있다.

밭과 논, 산과 마을은 이미 눈에 덮여 온 세계를 이루고 있다. 계속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이 바람에 휘날려 얼굴을 적시고 눈을 가린다. 무릎까지 눈에 파묻혀가며 어느덧 어두워가는 시골의 산길 들길을 따라 아직도 아득히만 느껴지는 집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모두가 죽은 듯한, 모두가 잠든 듯한 저녁길을 혼자서 가는데 집은 아직도 멀고 걸음걸이는 더욱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세계는 고요하고 삶은 고독하고 엄숙하고 장엄해진다.

프로스트의 시눈 오는 저녁 숲에 멈추면서가 널리 애독되는 근본적 이유의 하나는 이 시가 삶의 엄숙한 상황을 역력히 표상해 주기 때문인 듯 싶다. 무의식중에 이 작품 속에서 삶의 깊은 한 측면에 접촉하는 것이다. 나는 말을 타고 눈이 쌓이는 저녁 뉴잉글랜드의 숲길을 가는 중이다. 이 숲의 주인이 저쪽 마을에 살고 있음을 나는 안다. 여기서 쉬며 눈 쌓이는 숲의 적막한 아름다움에 젖고 싶다. 그러나 나는 혼자서 이 눈길을 계속 가야 한다. 쉬고 싶은 유혹을 이기고, 고독한대로 살아갈 때 삶은 그만큼 더 흐뭇할 수 있다.

숲은 사랑스럽고 어둡고 깊다.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그리고 잠자기 전에 몇십 리 갈 길이 있다.

고독, 삶의 고난 그리고 어쩌면 죽음까지를 상징하는 것이 눈에 싸인 숲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아름답다. 프로스트의 작품의 매력은 삶의 깊은 측면을 표상해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아름다운 미학에 의해 승화되어 있다는 데 있다. 눈 오는 경치에서 미학이 창조된 것이다. 눈은 무엇보다도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프랑스의 중세 시인 비용의 그 유명한 작품

'옛날의 미희들'이 지나간 절세의 미희들을 눈에 비유한 사실, 그리고 그 시가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시인이 지난날의 미희들을 생각하면서 "그런데 옛날 눈들은 어디 있는가"라고 노래할 때 우리는 찬 눈과 같이 사라진, 눈과 같은 아름다운 미희들에게 더욱 절실한 미련을 느끼게 된다.

흰 눈, 흰 눈에 덮인 풍경은 적막하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상징할지도 모른다. 모든 생명의 마지막을...... 그러나 눈 덮인 흰 세계는 꽃이나 녹음이 지닐 수 없는 각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단잠을 깨고 창문을 열었을 때 눈길이 닿는 데까지 희게 덮인 마을, , 들을 마주한다면 그 신선한 아름다움에 누가 황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눈이 부시게 눈 덮인 뜰 밖을, 들길을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었겠는가. 눈을 보면 강아지까지도 즐거워 눈 속을 뛰어 다닌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눈의 아름다움은 청결함에 있다. 세상의 때, 마음의 때가 깨끗이 씻겨진다. 모든 것이 새것이 된다. 세상과 삶이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게 된다. 눈의 세계는 동심에 비유되며 처녀에 비교된다. 그러기에 눈 덮인 들을 대할 때 우리는 다 같이 어린아이 같은 동심으로 돌아감을 체험하고 처녀와 같이 순결한 것을 느낀다. 눈 속에서 우리는 때 묻은 우리들의 세상, 생활, 마음이 일시에 깨끗이 씻김을 느낀다. 눈의 매혹, 눈의 아름다움은, 우리들이 영혼의 밑바닥에서 아직도 순수한 것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청결한 눈의 세계, 그것은 우리들의 영혼의 간절한 부름이다. 눈 덮인 들과 산을 바라보면서 감동을 느끼지 않는 사람의 마음은 비록 그의 얼굴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의심이 간다.

눈 오는 광경을 싫어하는 사람은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

눈의 미학은 순수성에만 그치지 않는다.

눈은 따뜻하다. 오버를 걸치고 눈길을 걸을 때 이마를 적시는 함박눈은 가슴속까지 따뜻하게 한다. 작은 산 너머 거의 눈에 파묻힌 초가집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삶의 짙은 온도를 체험케 한다. 눈이, 함박눈이 쏟아지는 저녁, 잊고 있던 친구들의 얼굴이 각별히 그리워지고 마치 두터운 옷 속에 간직된 체온처럼 그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정이 조용히 피어남을 느낀다. 안부편지를 쓰고 싶어지고 어디선가 정다운 전화를 받고 싶은 것이다. 이웃 동네와 교통이 단절된 자기 집에 식구들과 모여앉아 따뜻한 온돌에 발을 뻗고 옛이야기를 나누는, 삶의 따뜻함을 느낀다.

눈은 조용하다. 사뭇 쏟아지는 함박눈은 한 송이 한 송이가 무한한 이야기를 도란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을 더욱 고요하게 한다. 그것은 고요한 가락들로 이루어진 웅장한 교향곡이라는 인상을 준다. 특히 어두운 밤중에 창밖으로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함박눈을 바라보면 온 세상 아니 온 우주가 무한히 깊은 고요 속에 파묻혀 가는 듯하다.

눈이 쌓이는 밤은 고요하다. 그러기에 고독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고독은 삭막하거나 허전하기 보다는 흐뭇한 내용을 갖게 한다. 고요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새삼 의식하게 되고 오랫동안 잊혀졌던 스스로를 다시금 발견하고 생각하게 된다. 나의 삶, 나의 위치, 우리와 자연의 관계를 그 본연의 모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눈은 명상적이다. 눈이 소리 없이 쌓이는 밤, 혼자 방 안에 앉아 있으면 책상 위의 전깃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어가지지 않는다. 각별한 무슨 사무적인 일이나 공부때문이 아니다. 어느덧 명상에 잠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밤 누가 사색가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가 철학자로 변하지 않겠는가. 무한히 고요하고 거룩할만큼 순수한 시간이다. 사색이 날개를 펴고 자유로운 명상에 잠긴다. 눈에 쌓이는 깊은 밤 혼자 앉아 있는 서재는 사색의 보금자리요, 책상 위에 밝혀 놓은 램프불은 사색의 꽃이다. 눈 내리는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철학가의 모습은 자연스럽다. 눈을 모르는 열대지방의 사상가는 상상만해도 삭막하다. 눈에 황홀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눈을 사랑하지 않는 사색가는 상상하기 어렵다.

눈 오는 밤 명상가가 혼자 불을 끄지 않고 앉아 있는 때는 인위적 시간에서 해방된 시간이고 그 공간은 물리적 제약에서 이탈된 장소이다. 그렇기에 그 시간과 공간은 자유롭다. 그때 그리고 그 장소에서 우리들의 생각은 무한한 것과 접촉할 수 있고 무한한 우주의 맥박을 체험할 수 있다.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모든 장애를 넘어서서 영원한 우주와 잠시나마 화해하고, 조화를 되찾을 수 있다. 이런 테두리에서 나는 다시금 내 본연의 모습을 의식하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하며, 사회와 역사의 뜻을 참신한 조명에 의해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명상은 어느덧 종교적 차원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함박눈이 깊이 쌓이는 밤이 한없이 귀중하며 흐뭇하다. 이런 세계를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진다. 눈이 그치고 밤이 깰까 안타까워지는 것이다.

눈이 쌓이는 밤의 조용한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풍요롭고 따뜻한 꿈이다. 이런 꿈에서 깨어나지 않고 언제까지라도 명상에 젖어보고 싶어진다.

명상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눈은 또한 시이다. 눈 덮인 집, 마을, , , 길을 바라보라. 눈을 맞으며 눈길을 걸어보라. 우리는 모두가 시인이 되며 온세계는 한 편의 장엄한 시가 된다. 세계를 바꿔준 흰 색깔이 우리의 둔탁했던 감각을 깨어나게 하고 피부에 닿는 눈송이가 우리의 피부를 산뜻하게 한다. 눈 속에 잠자듯 도사리고 있는 언덕 너머 마을 굴뚝에서 밥을 짓는 연기가 난다. 모든 것들이 눈에 파묻혀 있는데 오로지 하나 우뚝 하늘로 솟아 있는, 작지만 뾰족한 성당 지붕이 유달리 성스러워 보인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두툼한 옷을 입고 이웃 마을로 가는 사람이 보인다. 작은 도시에선 강아지를 끌고 눈 쌓인 길을 걸어 구멍가게로 들어가는 사람이 보인다. 어느 부인이 마당에 쌓이는 눈을 치운다. 아이들은 밖에 나와 눈사람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시작한다. 갑자기 외지게 보이는 고속도로 위로 자동차가 기어가듯 굴러간다. 뜰 안 나무 위에 새들이 날아와 이 가지 저 가지로 옮겨 앉는다.

눈이 쌓이면 세상이 깨끗하고 새로워진다. 푸른 나뭇가지 하나 보이지 않게 눈에 파묻혀 있지만 어쩐지 주위는 말할 수 없이 포근하고 따뜻하다. 꽃 하나 눈에 띄지 않지만 사방은 아름답기만하다. 말 한마디 들리지 않지만 사람들, 마을 그리고 온 세상이 새로운 언어로 무한히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모두 시인으로 탄생하고, 흰 세상은 시의 구절이 적히기를 기다리는 원고지로 변하고, 우리들의 산뜻한 명상적 느낌은 그 위에 써놓은 시구절이 된다.

, 함박눈, 푸짐하게 내리는 눈은 행복감에 젖게 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고 풍요롭게 해준다. 그것은 우리들의 가슴을 무한히 신선한 것으로 채워준다. 눈이 쏟아지는 것을 바라보면, 눈으로 싸인 주위를 바라보면, 장화를 신고 눈 위를 걸으면 우리의 마음은 어느덧 동심으로 돌아가며 우리들은 어느덧 어린아이같이 발랄해진다. 눈 위에 뒹굴고 싶을 만큼 행복이 충만해진다.

행복은 자유이다. 자유란 별게 아니라 행복한 상황에 불과하다. 행복이 정신적 충만감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또한 아무런 억압도 없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어디를 바라보아도 그저 희기만 한 눈 덮인 세계는 모든 제약의 제거를 상징한다.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로운 것, 새로운 창조를 부르는 눈 덮인 세계, 나의 자유로운 행위에서 새로운 것이 마련되기를 호소하는 것이 눈 덮인 세계, 함박눈이 내리는 세계이다.

함박눈송이들은 자유의 깃발과 같다. 그렇기에 그것은 또한 생명의 독특한 상징이며 희망의 신선한 이미지이기도 하다. 한없이 펼쳐진 눈길을 따라 끝없이 걷고 싶어짐은 눈의 세계가 부름이기 때문이다. 첫눈의 들길을 걸어간 발자국이 삶을 확인해준다. 눈은 새로운 삶으로의 초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쓰러지고 넘어져도 눈길을 걸으면 언제나 가슴이 벅차다. 그 길이 아무리 고달프다 해도 우리는 다시 일어나서 앞으로, 어디론가 끝없이 가고 싶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