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덕방 있는 거리 김태길
대문을 나서면 큰 길가에 수양버들 한 그루가 비스듬히 서 있다. 수십 년의 연륜을 견디기 어려워 굵고 큰 줄기는 껍질이 벗겨지고 알맹이까지 썩어서 달아나 반쪽만 남았다. 그래도 젊은 가지 가지에는 새로운 잎이 피어서 대견한 그늘을 마련한다.
수양버드 중허리에 때 묻은 천으로 만든 약식 간판 한 장이 걸려 있다. 가로되 ‘복덕방’ 간판 아래 긴 나무때기 의자 하나 가로놓였다. 그것밖에는 아무런 비품도 없는 간이 복덕방이다.
나무때기 의자에는 할아버지 두 분이 걸터앉았다. 두 분이 다 당목 고의 적삼을 입으셨다. 한 분은 거무튀튀한 파나마 모자를 앞이 올라게게 쓰셨고, 다른 한 분은 하얀 맥고모자를 눌러쓰셨다.
파나마 모자는 긴 담뱃대를 들었고 풍덩 폼이 넓은 조끼를 입으셨다. 담뱃대에서 연기는 나지 않고 조끼 단추는 꿰어지지 않았다. 맥고모자는 바른 손에 부채를 쥐시고 왼편에 단장을 기대 놓으셨다. 부채질은 하지 않으신다. 두 분은 모두 흰 고무신을 신으셨고 대님을 매셨다. 두 분은 마치 그림 속의 인물처럼 그저 묵묵히 앉아 계신다.
저녁 햇볕을 받고 버드나무 그늘이 길게길게 뻗기 시작하자, 이곳 한산한 거리에도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난다. 열 사람들이 열 가지의 차림 차림과 열 가지의 걸음걸이로 지나간다. 그들의 갖가지 모습에는 각자의 나이와 직업 그리고 성격을 알리는 도장이 혹은 진하게 혹은 흐리게 찍혀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같은 길을 나란히 걸어가고 희망과 근심이 잠깐 소매를 스치고 남과 북으로 사라진다.
까만 바탕에 은빛 테를 두른 승용차 한 대가 먼지를 피우며 달려온다. 땀 찬 런닝셔츠에 검정바지를 걸친 신문배달의 바쁜 다리가 경적소리에 놀라서 달아난다. 차 뒷칸에 탄 회색 양복의 표정에 자신감이 넘친다.
흰 블라우스와 감색 스커트가 대조를 이룬 교복 두벌이 무엇을 소곤대며 골목길로 접어든다. 어느 연못의 금잉어처럼 투실투실 살이 오른 중년 부인 한 사람이 바다같이 파아란 파라솔을 이고 하느작하느작 비탈길을 올라간다. 발걸음 옮길 때마다 엷은 하늘색 치마 사이로 백설 같은 속옷이 보일락말락 숨박꼭질을 한다.
미색 바탕에 수박색과 밤색 무늬를 굵직하게 놓은 원피스 하나가 뇌먹인 말처럼 미끈하게 자란 젊은 몸집을 뾰족구두 한 켤레에 의지하고 음악에라도 맞추는 듯 맵시 있게 걸어온다. 그의 왼손을 들어서 밉지 않게 생긴 이마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우유같은 손이로되 반지는 보이지 않는다. 여체의 우아한 하반신의 곡선이 더위와 서늘함이 섞인 해걸음의 공기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팔다 남은 돗자리와 발 짐이 오늘의 장사를 마치고 숙소로 발길을 재촉한다. "이 노릇도 이문이 없어 못해 먹겠당게유. 이거나 떨이로 팔곤 낼이면 고향으로 농사지으러 갈랍니다. 이거 참 헐값이래유."하고 일주일 전에 우리 집에서 삼만 원의 매상고를 올린 바로 그 행상이다.
터널터널 빈 아이스케이크 통을 어깨에 맨 10대 소년이 아무 말 없이 비탈길을 내려온다. 있는 듯 만 듯 인색한 바람이 수양버들 가지를 약간 흔들었다. 복덕방 영감님 두 분은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계신다. 전설을 지닌 옛날 벽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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