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박이문
여행은 하나의 움직임이다. 파스칼은 불행의 유일한 이유가 우리가 방 안에 혼자 가만히 있지 못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움직이지 않을 때 삶은 끝이 난다. 살아 있지 않고서 행복할 수 없다. 여행은 떠남으로써의 움직임이다. 『플루타크 영웅전』에선 떠남에 대한 피루스와 시네아스의 상반된 태도가 이야기되고 있다. 피루스는 희랍을 정복하고 아랍을 점령하고 그 다음엔 아시아를 정복하겠다고 한다. 그러고 난 다음은 무엇을 하겠느냐고 묻는 시네아스에게 쉬겠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시네아스는 아무래도 쉴 바에야 그냥 지금부터 쉬면 더 좋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삶은 쉬더라도 우선 움직이기를 요구하며, 언제고 반드시 돌아와야 하더라도 떠나기를 요청한다. 그것은 우리가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라도 살고 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행이 떠남이라지만 거기에는 확정된 목적이 없어야 한다. 어떤 확정된 목적을 위해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떠나는 것이 여행이다. 여기서 말하는 여행은 사업가나 유학생, 공무원처럼 어떤 목적을 둔 여행이 아니다. 그것은 바캉스, 즉 비우는 것, 휴가로서의 여행을 뜻한다.
바캉스! 휴가! 말만 들어도 시원하고 그 말의 여운만으로도 어딘가 낭만적이며 자유로운 해방감, 더 나아가서는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바캉스, 휴가로서의 여행은 일상적인 것, 따분하고 무서운 상습성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행은 새로움, 신선한 것,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의 만족을 의미한다.
배낭을 짊어지고 설악산에 오르면, 복잡하고 탁한 공기와 소음에 싸인 서울과는 다른 환경에 접하는 신선함이 있다. 산골짜기에서 도시락을 풀어 요기를 할 때 일상의 틀에 박힌 식탁에서와는 다른 새로운 맛을 경험한다. 또는 비행기를 타고 가서 파리의 노트르담, 로마의 콜로세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신전,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룬 뉴욕의 맨해튼 등을 구경할 때면 교과서나 신문, 잡지를 통해서 막연하게 상상하던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의혹이 풀린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인도의 도시 여기저기서 발견되는 성우聖牛, 남미 잉카문명의 유적, 그리고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을 접하면서 인류의 역사와 인간의 가지가지 생활양식을 눈과 피부로 직접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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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것을 보더라도 새로운 것을 관찰하기란 쉽지 않다. 새로운 정보를 듣는다 해도 정말 새로운 정보로 지각되기란 드문 일이다. 누구나 자신의 눈으로, 자신의 귀로만 보고 들어야 하기 때문이며, 자신의 눈이나 자신의 귀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과 귀를 통한 정보는 상상을 한다 해도 쉽게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리적 방법에 의해 자신의 공간을 떠난다고 정말 새로운 공간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지금의 자신을 떠나 스스로를 새롭게 보거나 자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누구나 타고난 나르시스트인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여행의 유혹은 호기심의 만족에 있지도 않고 교육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지도 않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의 탈출, 자기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나는 나의 집에서, 나의 가족 혹은 친지로부터 떠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의 마을, 나의 도시, 나의 나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러한 공간들이 나의 삶을 보호해주고,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밑거름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나를 구속하는 제약이기도 하다. 생명으로서의 나는 항상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가족의 한 사람이기 전에, 누군가의 친구의 한 사람이기 전에 시민이나 국민이기 전에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현재나 과거의 나로부터 나는 빠져나가고 싶은 것이다. 가족과 친구와 떨어져서 혼자 있고 싶은 것이다. 여행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유혹은 혼자가 되고 싶은, 그럼으로써 모든 사회적 관계의 틀, 일상 적 틀 속에서 해방될 수 있는 데 있다. 단체여행은 고독하지 않아 좋고, 가까운 친구나 애인과의 여행은 다정해서 좋다. 남들과 함께 보는 아름다운 것들은 그만큼 더 아름답다는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야기할 사람도 없이 혼자 다니는 여행은 여행의 절반을 잃어 버린 것임을 많은 사람들은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의 진짜 맛은 역시 혼자, 단 혼자 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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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땅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당혹감을 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역에서 언어가 통하지 않아 답답할 수도 있다. 어느 역에서 돈이 떨어져 막막할 때도 있을 것이다. 땀이 흐르고 발이 부르터서 쉬고 싶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
떠남. 걸어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서, 비행기로 날아서 떠나는 그것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은 떠남이 인간의 근본적인 해방을 향한 욕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고장, 이국으로의 여행이란 낱말이 우리들의 가슴속에 낭만적 향수를 일깨워주는 것은 여행이 생동하는 모험, 자유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벗어던진 적나라한 자기 자신과의 접촉을 마련하고, 그 속에서 남들과는 혼돈될 수 없는 자신만의 깊은 영혼의 비밀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행의 가장 깊은 뜻은 남들과 혼돈되거나 대치될 수 없는 자아의 유일성을 확인하는 데 있다. 낯모르는 곳, 이국의 땅으로 우리는 떠날 수 있다. 이렇듯 떠남이 모든 사람의 어쩔 수 없는 꿈이지만 이 마을에서 다른 도시로,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떠나듯이 언젠가 숙명적으로 맞닥뜨려야 할 이 삶으로부터 다른 삶으로, 곧 죽음으로의 떠남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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