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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2021신춘 문예 단편소설 , 수필, 시 등 당선작/현대수필3

74. 영결식 구경

by 자한형 2022.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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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결식 구경 김태길

택지로 조성된 빈터에 천막 한 채가 서 있고, 그 앞에는 어떤 연예인의 영결식장임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영화배우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가 실렸던 엊그제 석간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아직 모이지 않았다. 그 천막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집터 하나를 장만하고 건축해 착수한 지 열흘 정도 되었을까? 집주인이 지켜본다 하여 일에 무슨 보탬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공사 진행과정이 한 걸음 한 걸음 진척되는 것을 바라보면 지루한 줄 모른다. 그래서 매일 적어도 한 번씩은 공사현장을 돌아보는 것이 요즘의 일과처럼 되었고, 오늘도 그리로 가는 길에 슬픈 천막을 발견한 것이다. 하나둘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오늘의 영결식을 준비한 담당자들일까? 곧이어 삼삼오오 조객들이 모여든다. 회삼물((灰三物, 석회, 황토, 모래를 섞어 반죽한 것)에 열중하던 일꾼들이 잠시 일손을 멈추고 내려다본다.

"! 그 자식 허우대 한번 멋지다." 액션 스타로 알려진 어떤 배우의 이름을 부르며 한 친구가 감탄을 한다. 먼 빛으로 보기에도 훤칠하게 잘생긴 모습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여자 손님들도 가끔 보이나 수는 많지 않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 것 같은 느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천막 가까운 곳을 향해 내려갔다. 영결식장 건너편 빈터에는 벌써 10여 명의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다. 나도 잠바 차림의 나 자신을 그들 틈에 끼우고 길 건너 인간 가족의 행사를 참관하기로 하였다. 정말 아주 한가로운 사람처럼. 식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모양이다. 사람들은 악수를 나누면서 반가운 표정을 짓기도 하고,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곤 밝게 웃기도 한다. 개중에는 침통한 표정으로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다. 이제 막 도착한 것으로 보이는 소복 차림의 한 여인이 땅바닥에서 뒹굴며 통곡을 한다. 고인의 미망인인가 보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슬픔을 모두 합쳐도 이 여인 한 사람의 슬픔을 못 당할 것만 같다. 남자 두 사람이 통곡하는 여자를 부축하며 진정하라고 달랜다. 접수를 보는 테이블 주변에서는 부의금을 주고받는 사무 절차가 정중하게 진행되고 있다.

만약 죽은 사람도 슬픔을 느낄 수 있다면 죽음이 가장 슬픈 것은 역시 그 당사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죽은 사람의 슬픔을 중심점으로 삼고 그 사람과의 원근 관계를 따라서 슬픔의 파문이 번져 갈 것이다. 던져진 돌이 고인 물 위에 일으키는 파문이 그렇듯이, 슬픔의 파문도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약해져서 마침내는 아주 없어지리라. 지금부터 50년만 지나면, 저 영결식에 모인 시람들도 대부분 세상을 떠날 것이다. 저렇게 혈기가 왕성하고 밝은 표정으로 지껄이는 사람들도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슬픔의 파문의 중심이 될 운명을 안은 존재가 사람의 머릿수만큼 많다는 계산이 나온다. 아마 그래서 죽음은 슬퍼할 것이 아니라는 철학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죽음의 당사자가 있고, 그의 유가족이 있고, 영결식 에 참석한 조객들이 있으며, 그들을 멀리서 바라보는 구경꾼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결코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누구나 한 번은 당사자가 되고 또 몇 번은 유가족의 자리에 서야 한다. 죽음은 어떤 사람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지만, 지금은 마치 남의 일처럼 바라보고 있다. 하기야 그 숱한 죽음을 모두 내 일처럼 느껴야 한다면 얼굴에 눈물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의 슬픔을 슬퍼하고 남의 기쁨을 기뻐하는 동정심이 좀 더 강했던들, 세계의 역사는 이토록 어두운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남보다 오래 살고 싶은 것이다. 너무 오래 살면 도리어 욕이 된다고 말하지만 속마음은 오래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가족과 친지가 모두 떠난 뒤에 혼자서만 오래오래 살아 남는 것은 상상만해도 아찔하다. 아내를 죽인 끔찍한 죄를 저지른 <판도라>의 주인에게 신이 내린 형벌은, "너는 영원히 죽지 못할 지어다!"였다.

고래로 인간의 오복<五福>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는 것은 장수라고 하였다. 아마 깊은 본능에 근원을 둔 통념일 것이다. 평화롭고 즐거운 세상이라면 오래 살수록 행복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설마 내일은 좀 나아지겠지' 하는 낙관적인 인간성이 장수의 욕망과 깊이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영결식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식장의 분위기는 곧 엄숙하게 바뀌어간다. 그러나 식이 끝나는 순간, 사람들의 마음은 다시 소박한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본래 구경거리가 아닌 것을 구경하는 나 자신의 얄팍한 마음씨를 뉘우치면서 집 짓는 일터로 발길을 옮긴다. 4월 하순, 늦은 봄의 하늘이 끝없이 맑고 화창하다. 관악산의 신록이 갖가지 푸른 색깔을 자랑하며 싱그럽다. 인간사에 비교할 때, 대자연은 더없이 아름답고 유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