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개진론 안재홍
일생을 일하고 일생을 읽으라.
황국단풍(黃菊丹楓)이 어느덧 무르녹아 달 밝고 서리 찬 밤 우러예는 기러기도 오늘 내일에볼 것이다.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다. 하늘 높고 바람 급한 적에 호마(胡馬)가 길이 소리쳐 장부의 팔이 부르르 떨치면서 넌지시 만리의 뜻을 품는 것은 가을의 감정이다. 그러하매, 옛사람이 가을밤 벽상에 장검(長劍)을 걸고 홀로 병서(兵書)를 읽었다고 하니 가을의 숙살한 기운이 무한 정진의 의도를 충동일 제 그 기(機와 경(境)이 알맞게 의도를 펼 수 없는 것이 인세에서는 더욱 천하의 뜻이 굽일어 나아가는 것이니 독서의 의의와 영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가을이 아니니, 언제나 독서는 자아(自我)인 일생을 객관의 경(境)에서 새로 발견하는 것이요, 졸고 있던, 정돈되었던 위대한 나를 고인(古人)의 자취에서 고쳐 인식하는 것이며, 하필 남자만의 일이 아니니, 남성이건 여성이건 누구나 독서에서 새로운 지견(智見)과 생신한 천지를 개척하여 가는 것이다.
독서는 꼭 높은 것을 귀하다고 안 하나니, 모름지기 자가(自家)의 지력(智力)에 맡겨 소화되는 것으로 비롯할 것이요, 반드시 많은 것을 탐낼 일이 못 되나니, 우선 침잠반복(沈潛反覆)하여 알고 깨달아 이른바 융회관통(融會貫通)하는 바 있음을 요하는 바이다.
나는 독서함을 자랑할 바 없는 자이나 독서를 좋아하는 자이니, 혹 10세 전후에도 틈을 타서 혼자 그윽히 서적을 뒤지는 취미를 알았던 바이요, 20세 전후에는 자못 그걸 즐기는 편이었고 24,5세가 되어 학창을 갓 벗어나자 때마침 유럽의 전란이 불어나는 감회(感懷) 많은 재회(際會)이던 것도 한 자극이었겠지만 그 즈음에는 대체로 소위 ‘탐다무득(貪多務得)하는 겉 더듬는 식의 독서 경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서에도 계단이 있는 것이매, 반드시 심각하게 파고들고 냉정하게 사변하고 그리하여 통철하게 깨달음이 있어 안으로는 자기 인생에 굳은 신념이 서고 외곽인 우주에 밝은 관조(觀照)를 이루며, 그 입각한 환경인 사회에 향하여는 또 확호한 견해가 있어 천지간에 처하매, 그 구경(究竟)에 갈 바를 알고 안락과 위난에 살아 그 살아갈 길을 정할 만큼 된 후에야 비로소 독서가 인간 생애의 존귀한 경험이요, 감오(感悟)요, 개척으로 되는 것이다. 이러한 뒤에야 바야흐로 글은 글, 나는 나로 읽되 그 진미를 모르고, 배우되 얻음이 없음과 같은 실패를 저지르지 않게 되는 바이니 묘리진경(妙理眞境), 그것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작가 소개
안재홍(1891~1965)은 정치가요, 독립운동가이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상고사감>,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등이 있다.
이 글은 작자 자신의 독서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여기서 독서란 책을 읽고 사색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수련과 실천까지를 포함하는 의미다. 그가 감옥에서 고난을 치러낸 이후 독서의 진경을 얻었던 것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의 독서 없이는 그의 삶도 없었다는 것이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졸던 자아를 부단히 깨우는 독서의 의미와 함께 독서의 방법과 유형 등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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