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지어 피는 꽃/ 박장원
메밀밭.
강원도 이름 모를 한 산등성이를 넘으며 솜사탕을 깔아 놓은 것 같은 그 들판을 보고서 넋을 잃고 말았다. 황혼녘 그 꽃벌판은 신기루처럼 느닷없이 나타났다. 메밀꽃은 무심히 지나치는 젊은 군인의 땀에 전 푸른 제복을 어루만지며, 초가을의 기우는 햇살을 받아 도도히 흐르는 듯하여 그 감흥이 지금까지도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다.
달빛 아래의 그 꽃을 효석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은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기경이다.”
그는 「메밀꽃 필 무렵」에서 그 감동을 흩뿌렸지만, 나는 무리지어 피었던 아름다운 그 꽃처럼 살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무리지어 피는 꽃들.
어린 기억에도 잊지 못할 생생한 꽃들.
4월부터 백색 또는 담홍색으로 피는 복숭아꽃이 그 중 하나이다.
내게 선연하였던 복숭아밭은 공동묘지 가는 어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꽃이 한창 피기 시작하면 나어린 가슴에도 꽃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산자락을 뒤덮으며 담홍색의 소곤거림과 흰 울음 같은 것을 하루 종일 토해 냈던 복사꽃이 지기 시작할 즈음, 이웃집의 분이 누나는 열매에 봉지를 씌우려고 복숭아밭에 나가곤 하였다. 우리는 하루 종일 누나가 어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목 빼고 기다렸다. 누나가 돌아오면 풋 복숭아 몇 알씩 얻어먹을 수 있었다. 복숭아를 조심스럽게 갉아먹고 나서는, 장난삼아 하얀 복숭아씨를 손가락으로 톡톡 터뜨리곤 하였다.
회오리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불던 어느 날, 동네 꼬마 아이가 농약복숭아를 따 먹고서 짧은 목숨을 거두었다. 그 작은 시신이 광목에 싸여 복숭아밭 너머로 옮겨지는 것을 보았다. 며칠 동안 그 아이 할머니의 울음이 복사꽃밭에 나지막이 깔렸다.
비록 서둘러 저 세상으로 간 어린아이의 슬픈 추억에 가슴 저렸지만, 복숭아밭에는 왠지 모르게 새록새록 피어나는 연분홍 꿈들이 소곤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 무렵이면, 배꽃마저 자잔하게 터진다. 마치 소복 입은 월궁항아(月宮姮娥) 같다. 샛바람 불어 배밭이 출렁이면 눈보라가 휘날리는 듯한 착각에 고개가 움츠러들곤 하였다.
무리지어 피는 꽃.
어우러지면 어우러질수록 멋들어진 꽃.
그러한 꽃들이 복사꽃, 배꽃, 그리고 혹독했던 병영시절에 본 메밀꽃이 아니었던가.
그 꽃들을 떠올리며 하릴없이 생각에 잠기게 된다. 하나하나의 꽃을 보면 보잘 것도 품위도 없지만, 태없이 모여서 어우러지매 감동을 주는 꽃들.
그렇게 무리지어 피는 꽃들을 나는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