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사포/ 김우종
90넘은 누님이 80여 년 전의 부끄러운 내 얘기를 했다.
“너는 온종일 내 등에 업혀서 오줌만 쌌단다. 그래서 내 저고리 등판이 오줌에 절고 다 썩었었어.”
그게 사실이었다면 참 죄송하게 된 일인데 나는 어렸을 때 누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까불었다.
“그 순간의 내 기분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네요. 포근하고 따뜻한 누나 등, 사타구니를 타고 내리는 따뜻한 온천물, 방광 문이 시원스럽게 열리는 짜릿한 배설감….”
나는 어린 누님이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렇게 나를 업고 나가 놀았다는 성진(城津) 바닷가가 그립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다.
그곳에 꼭 한번 누님을 모시고 가서 이번에는 내가 누님을 없고 조개도 주우며 그때 업힌 빚을 갚아 드리고 싶다. 그렇지만 서독처럼 이 나라 장벽이 무너질 날을 더 기다려 보기에는 누님이나 내 인생이 너무 흘러가 버렸다.
내가 그렇게 업어주고 싶은 사람이 또 있다.
전쟁 때의 일이다.
피투성이가 된 다른 부상병들과 함께 차갑고 축축한 땅바닥에 눕혀져 있던 나는 몇 차례 간호병 등에 업혀서 풀밭에 다녀와야 했다. 그녀는 베레모에 붉은 줄이 처진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풀밭까지 겨우 20미터쯤 가는데도 가파른 데서는 몇 차례 걸음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은빛 억새와 보랏빛 쑥부쟁이가 나부끼는 풀밭에다 조심스럽게 등짐을 내려놓고 고개를 딴 곳으로 돌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좀 비켜 줘요.”
“어서 일 보세요. 포탄 떨어져요.”
어렸을 적에는 누님 저고리 등판에 온종일 오줌을 싸고도 기분만 좋았을 것 같은데 나이 스물에 처녀 옆에서 아래를 내놓고 응가하자니 부끄러웠다.
바지를 내리자 그녀 말대로 포탄이 떨어지고 파편들이 날아왔다. 서둘러야 했다.
“종이 없어요?”
“없어요.”
인민군 병사들에게 종이가 없다. 나는 풀을 뜯어 썼다. 살을 벨 것 같은 억새와 예쁜 쑥부쟁이 사이의 가을 풀을 뜯어서 썼다. 그리고 다시 기운 없는 여자 등에 업혀 벙커로 돌아왔다.
그 다음 야전병원으로 옮겼을 때는 여자가 바뀌었다.
총각이 처녀 등에 업혔으면 어릴 적 누나 등에서 오줌 싸던 것보다 느낌이 좋았을 터인데 그렇지 않았다. 다리의 통증과 절망감, 그리고 나를 업는 그녀들이 불쌍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루 두 끼니 정도 옥수수 가루로 버티고 있던 그들은 모두 영양실조로 핏기 없는 얼굴에 그냥 걷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러다가 그들 역시 얼마 뒤에는 나처럼 피를 흘리고 어쩌면 죽을 운명이 아니던가?
이틀 뒤에는 더 멀리 후방의 109병원으로 이송되어 중상자실(민가의 사랑채)에 누워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한 간호병에게 매일 업혀 다니면서 차차로 서로 정이 들었다. 그녀는 분명하게 내게 속내를 드러내고 나와 둘이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
“혼자 심심하죠? 업히세요.”
다른 부상자들이 야간비행기의 조명탄 낙하산을 주우러 나간 어느 날 그녀는 혼자 남아 있는 나를 업고 마당 끝에 쌓여 있는 볏가리 뒤로 가서 등짐을 풀며 어깨를 기대었다. 서로 말하기가 어색했는데 이삭 하나가 떨어져 있어서 그녀 앞머리 베fp모 사이에 꽃아 주며 말을 시작했다.
“면사포가 이것밖에 없어요.”
그녀가 웃었다.
“다리가 많이 나아져 가고 있어요. 그땐 그만 업히고 이별이겠네요.”
아군기가 방금 굉음을 내며 저공비행으로 지나간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꼭 그렇지는 않아요. 퇴원해도 곧 다시 돌아오는 동무들이 많아요. 그렇지만 그들은 전보다 더 심하게 다쳐서 왔다가 꽃밭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꽃밭?”
“꽃 이름이 적힌 막대들이 많이 꽂혀 있는 곳 못 보셨어요? 국방군들도 그런 노래 한다는데…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라…’ 그래서 그게 모두 꽃 이름이래요.”
우리는 갑자기 우울해졌다. 그리고 조금 후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여기 다시 오시면 안 돼요. 꼭 살아 남으세요.”
그 후 나는 폭우가 쏟아지던 날 밤에 중동부 전선의 고지에서 절벽을 타고 소양강 상류의 급류를 따라가며 탈출해서 남으로 돌아왔다. 꼭 휴전 1년 전인 1952년 7월 27일이다.
휴전이 되고 아직 전선에 남아 있던 나는 휴가를 얻어서 그녀가 가르쳐 준 서울 삼선동 집을 찾아갔지만 물론 그녀는 돌아와 있을 리 없었다.
총성이 멎고 이제 60년 가까운 긴 세월. 혹시 남북이 서로 왕래라도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그리고 그녀가 살아 있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허기지고 지친 몸이 되어 홀로 남은 그녀를 북에 가서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업어 주고 싶다. 내 다리도 이제는 힘이 빠져 가지만 그녀가 살아 있다면 아마도 90은 넘은 내 누님보다 더 여위어서 가벼울 것이다.
“저는 사상 따위는 몰라요.”
사상으로 두 동간 난 이 나라에서 그녀가 내게 했던 이 말은 너무도 소중했다.
이 땅을 그 지경으로 만들며 설친 주범은 바로 그 ‘미련한 사상가’들 아닌가? 건전한 사상은 지켜야 하지만 생명의 존엄성을 모르고 남들의 슬픔을 배려할 줄 모르는 어떤 사상,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파괴와 살인의 잔혹한 도구일 뿐, 그들이 말하는 사상은 모두 개나발이다.
그런 전쟁 속에서 그녀는 드물게 순수하고 현명했다. 그녀가 부상당한 국군 포로를 그렇게 아껴 주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따위의 사상 없이 그냥 슬픈 한국인끼리 만난 여자일 뿐이기 때문이 아닌가?
그녀를 다시 또 만날 수만 있다면 이번에는 내가 그녀에게 진 업힌 빚, 부채(負債)를 갚아 주고 싶다. 할미가 다 되었을 그녀의 흰 머리에 그때보다 더 예쁜 면사포를 씌워 주고서 업힌 빚을 몇 배로 갚아 주며 한껏 사랑하다 함께 꽃잎처럼 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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