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수필4

45. 자라지 않는 아이들

by 자한형 2022. 2. 10.
728x90

자라지 않는 아이들/ 우희정

밤새 들길을 바삐 걸었다. 끊임없이 발길을 재촉했지만 갈 길이 좁혀지지 않아 조급했다. 걸어도 걸어도 길은 멀었다. 등에 업은 아이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걸린 아이의 잡은 손을 놓칠까봐 조바심이 쳐졌다. 온몸에 땀이 배었다. 애를 쓰다 깨어 보면 꿈이었다.

이루지 못한 꿈이 많은 탓일까? 나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꿈을 꾼다. 대부분의 경우 토막꿈을 꾸지만 어떤 날은 선명하게 이야기가 전개되어 꿈을 깨고 나서도 현실감을 찾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예민한 신경 때문일 것이다. 쉽게 잠들지 못하고 그나마 살풋 잠이 들면 금세 파노라마처럼 꿈이 펼쳐지는 것은, 그중 가장 빈번한 장면이 업고 걸린 두 아이의 허둥대는 내 모습이다.

딸과 아들이 다 장성했건만 꿈속에서는 아직도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라는 데 내 고민이 있다. 처음 내가 이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은 정말 이이들이 어렸을 때였다. 그 이후 줄기차게 같은 꿈을 꾸지만 꿈속의 내 아이들은 성장을 멈춘 채 나를 안타깝게 한다.

한동안 나는 꿈에 이이들이 보이면 근심이라는 어른들의 해몽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먹는 꿈을 꾸면 감기에 걸리고, 새옷을 이것저것 갈아입으면 좋지 못한 일이 생기고, 명산고적을 유람하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난다는 등. 그런데 요즘 들어 그 꿈이 근심이 아님을 알았다. 여전히 꿈에 이이들을 업고 다녀도 그때마다 별다른 근심거리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박관념일까? 다 자란 내 자식들이 아무리 꿈이라지만 그렇게 변함없이 어린이일 수 있는가. 그건 아마도 내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마음의 그림자인 것 같았다.

어제는 아이 둘을 한꺼번에 업으려고 밤새 애를 쓰다 날을 밝혔다.

프로이드는 꿈이란 무의식 속에 잠재된 의식의 반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 의식 깊은 곳에 있는 무엇이 나로 하여금 자꾸 꿈속을 헤매게 하는 것일까? 나는 무엇 때문에 자리지 않는 아이들 업고 노심초사하는 것ㄱ인가.

한때 아이를 업고 결리고 전전긍긍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건 벌써 옛날이야기처럼 아득하여 지금은 아픔조차 무디어진 상태다. 늦게 돌아오는 나를 대신해 밥을 짓던 일곱 살짜리 딸아이가 석유곤로 앞에서 성냥불을 켜지 못해 울고 있던, 그래서 한동안 나를 많이 서럽게 했던 기억도 언젠가부터는 엷게 채색된 동화처럼 아련한 영상으로만 떠오를 뿐이다. 그런데 왜 꿈속의 아이는 그 일곱 살에서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일까.

우리 집 거실에서 어느 화가 지망생의 그림이 한 점 있다. 고학을 한다는 젊은이가 안 돼 보여서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그림 속에 담긴 모습 때문에 나는 흔쾌히 그 그림을 넘겨받았다.

이이를 업은 여인이 턱을 괴고 과일자루 옆에 앉아 있고 계집아이가 자루 뒤에서 고개를 비죽이 내밀고 있는, 조금은 청승맞은 광경인데 꼭 예전의 우리 모습 같아 정이 갔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림을 받아든 딸이 계집아이를 가리켰다.

엄마. 얘 꼭 나 같아요.”

딸의 말에 마주보고 웃을 만큼 우린 고통스럽던 과거에서 이만큼 비켜 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그 상황에서 벗어났는데 내 무의식은 아직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그 그림에 끌린 것도 무의식 속에 잠재된 의식의 반영이 아니었나 싶다.

자신의 삶 중에서 가장 지독했던 고통이나 절실했던 상황 따위는 어디만큼 숨어 있다가 긴장이 풀어질 때마다 꿈이란 방식을 빌어 솟구쳐 오르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꿈을 앞으로도 계속, 긴 세월 동안 꾸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내 무의식 속에 새롭게 각인될 고통은 없을 테니까.

 

 

 

'현대수필4' 카테고리의 다른 글

47. 장미 타다  (0) 2022.02.10
46. 작은 상자, 큰 상자  (0) 2022.02.10
43. 자고 가래이  (0) 2022.02.10
42.음음음음 음음음  (0) 2022.02.10
41. 육필원고  (0) 2022.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