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죽을 그리며/ 이병남
방안에 동매(冬梅)가 벙그는 오후, 풍죽(風竹)을 그려 놓고 길동이의 퉁소 소리를 듣는다. 길동이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내요, 지금까지도 못 잊어 그리는 사내다. 대숲에 이는 바람이 유난히도 스산하던 겨울날 길동이와 나는 외갓집에서 첫 상면을 했다.
그 무렵 잠시 아버지와 헤어져 살게 된 어머니를 따라 나도 외갓집에서 살고 있었다. 길동이란 이름은 외할아버지께서 지어 부르신 이름이고, 그 청년의 본명은 아무도 모른다. 이름뿐만이 아니다. 그 청년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떠나갔는지도 아무도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길동이를 만났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 애절한 퉁소의 가락을 잊지 못한다. 길동이는 고향도 모르고 부모도 없다고 한다. 부모가 없으니 이름도 성도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길동이는 본시 뱃사람인데 바다에서 풍랑에 쫓겨 잠시 포구에 들렀다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혼자 남게 된 것이 거짓 아닌 사실이노라고 힘주어 말하곤 했지만, 어인 까닭인지 외할아버지는 길동이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으시는 것 같다.
길동이란 이름도, 집도 절도 없는 놈이지만 그래도 부르는 이름 석 자는 있어야할 게 아니냐며 외할아버지께서 최길동이라 부르신 것이다. 물론 외갓집 성이 최씨였다.
시절이 2차 대전의 막바지로 농촌에 장정이 없었던 때라 길동이는 외갓집 머슴으로 눌러 살기로 약조를 했다. 길동이의 거동을 지켜보신 외할아버지께서는 “저놈은 아무리 보아도 농사일을 하던 놈은 아니다” 하셨을 뿐, 서투른 노동 일에는 역정을 내지 않으셨는데 번번이 길동이가 걱정을 듣는 것은 대를 베는 일 때문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낚싯대 하나를 주십사고 조석으로 문안을 드려도 허락지 않고, 손수 돌보며 기르시는 대나무를 길동이가 마음대로 베어내어 외할아버지의 꾸중을 듣곤 하는 것이다.
길동이가 대나무 밭에 가는 날은 먼저 숫돌에 낫을 갈았다. 그리고 살살 대나무 밭으로 가서 이리 제치고 저리 제치다가 마땅한 것을 골라 싹둑 잘라서는 마디마디의 잔가지를 정성들여 다듬는다. 아궁이 앞에 앉아 장작불에 달군 쇠꼬치로 구멍을 뚫은 다음 창칼로 마지막 손질을 하면 하나의 퉁소가 만들어진다. 길동이는 이것을 신들린 사람처럼 불어댔다.
모닥불 사위어가는 여름밤, 댓돌 위에 부서지는 달빛 속으로 파고들던 길동이의 퉁소 소리는 가을밤이면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와 묘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산촌의 정적을 깨고. 겨울밤에 부는 길동이의 퉁소 소리는 눈 내리는 밤 사랑방 창살에 비치는 그림자로 그 운치를 돋우었다.
특히 밝은 밤이면 어머니는 “길동아 퉁소나 불어라” 하셨는데 생이별의 아픔을 어머니는 통소 소리로 달래려 하심을 어린 나이로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길동이가 외갓집을 떠난 것은 보리타작 날을 잡아 놓은 햇볕 뜨거운 유월이었다. 들밭으로 보릿단을 지러 갔던 길동이가 지게만 벗어 놓고 떠나가 버린 것이다. 길동이가 아주 떠나간 것을 안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나서 보리밭 길을 달리며 길동이를 불렀다.
“길동아, 길동아~ 어디갔니?”
엄마에게 매를 맞으면 이제 길동이도 없고 누가 나를 없어주느냐고 목 놓아 울며 찾아 헤매던 날을 지금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길동이는 나를 울리고 떠나버린 첫 번째 사내가 된 것이다. 그날 이후 도리깨 소리 드높은 보리타작 마당에서는 모두들 길동이가 수상한 놈이라고 본 대로 말을 했다. 길동이는 산에 가도 나무는 하지 않고 바다가 보이는 바위에 앉아 퉁소만 불더란다. 누구는 지난 번 주재소 유리창에 왕창 깨진 것은 바람 탓이 아니고, 길동이가 돌을 던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본 순사가 없었기 망정이지 알았으면 길동이는 잡혀갔을 것이란다. 그래서 그러는지 길동이는 길을 가다가도 순사와 마주치게 되면 숨고 주재소 근처에는 얼씬도 안 했다.
아랫채에서 새끼 꼬고 짚신 삼던 일꾼들은 길동이가 삼국지를 읽어 주던 솜씨로 보아 글공부 깨나 한 놈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나무꾼들은 길동이가 산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고도 말했다.
길동이는 품앗이 일을 간다 하고 집을 나가서는 논두렁에 앉아 애꿎은 퉁소만 불어댔다. 그러니 정작 보리타작 하는 날에는 일하러 올 일꾼이 없다. 꾸중이 두려워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을 것이라는 아낙들의 입방아에도 외할아버지는 한 마디 말씀이 없으셨다.
황혼이 처마 끝에 깃들자 “길동이가 무사해야 할텐데” 하시며 외할아버지는 불안한 표정으로 늦도록 마당을 거니셨다. 집안 사람들에게는 혹 누가 길동이를 찾거든 심부름 보낸 것으로 말하라 하셨다.
이 나라의 청년들이 강제징병으로 명목 없이 주어야 했던 일제 말기, 정처 없이 왔다가 잠시 머물고 퉁소 하나만을 들고 말 못하고 떠난 사나이. 그 사나이가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은 퉁소 소리에 맺혔을 시대의 한(恨) 때문이리라.
안으로 결코 굴할 수 없는 지조를 지니고도 고향을 등지고 정처 없이 쫓기는 몸으로, 목숨을 아껴서가 아니라 그대로는 죽을 수가 없어서 때를 기다리며 한을 달래던 일제하의 젊은이. 그들을 생각하는 남이면 나는 언제나 길동이가 그리워진다.
어느 해 봄날 목포를 가던 길에 영산강 유역에 보리밭과 조화를 이룬 유채꽃 언덕을 보았다. 그 순간 길동이가 퉁소를 불며 남으로 가고, 지금은 유복한 할아버지가 되어 이디엔가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잠시 길동이를 잊은 듯했는데, 오늘 다시 내 손으로 풍죽(風竹)을 그려놓고 길동이의 퉁소 소리를 듣는다.
먹을 갈고 붓을 드는 마음이야 한 점의 그림에 재호를 붙이고 낙관이 수원이다. 비록 내 평생에 낙관 한번 해보지 못할지라도 서두르지 않고 풍죽을 그리며 먹을 갈리라.
어느 날, 누가 나에게 한 많은 날들을 어찌 지냈느냐고 물으면,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라는 매화를 그리기 전에, 풍죽을 그려 놓고 길동이의 통소 소리를 듣고, 붓끝으로 댓잎을 날려 바람소리를 들으며 문방사우(文房四友)와 벗하는 하루 해는 짧더라고 대답할 것.
'현대수필4' 카테고리의 다른 글
60. PEN (0) | 2022.02.14 |
---|---|
59. 현이의 연극 (0) | 2022.02.14 |
57. 포클레인과 패랭이꽃 (0) | 2022.02.14 |
56. 폐인 (0) | 2022.02.14 |
55. 커피 루왁 (0) | 2022.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