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레인과 패랭이꽃
김수봉
아! 패랭이꽃이 피어있다. 포크레인 밑에서 여러 봉오리의 꽃이 피어오른다. 꽃들은 그 육중한 포크레인을 들어 올리려는 듯 뻗쳐오르는 활개로 한들거린다.
천변 둔치 길에서다. 가끔씩 오후의 걷기운동에 나서곤 하는 나의 산책로. 흘러가는 냇물에선 은빛 갈겨니들이 치뛰는 모습도 볼 수 있고, 키 높이로 자란 온갖 푸나무서리를 걷다보면 상큼한 바람과 만나기도 한다.
그 천변이 지난해 가을부터 뭉개지기 시작했다. 하천 정비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포클레인과 불도저가 들어와서는 높고 낮은 땅을 평평하게 고르고 굽이진 물길은 직선으로 바꾸어가고 있었다. 풀과 나무는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무참히 갈아엎어졌고 깔아뭉개져 갔다.
관청에서 하는 일이라서 소수 시민의 반대 목소리는 불도저의 굉음에 묻혀버렸다. 천변 한쪽에 세운 안내판에는, 우리 도시의 미관과 쾌적한 환경을 위한 사업이니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 출입을 금한다는 말과, ‘불편을 드려서 대단히 죄송하다’는 치렛말을 써 붙였다. 설사 ‘출입금지’ 팻말이 없었다 해도 나는 더 이상 푸나무서리가 없는 그곳에 갈 일이 없어졌다.
가을이 번쩍 지나가버리고 겨울의 끝자락에서 쑥부쟁이 싹이 돋을 때쯤 정비공사는 마무리된 듯했다. 시커멓게 뒤집혀진 맨땅에 시멘트 발린 자전거 길과 산책로가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새봄이 되어도 봄의 전령사는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천변을 걷지 않았다.
그러나 여름장마가 끝나고 모처럼 좋은 햇살이 돋아 오른 아침 나는 옛 친구를 만나러 가듯 발길을 향했다.
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포클레인과 불도저가 남긴 발자국들에서 좀 늦었지만 풀꽃들이 왕성히 자라나고 있었다. 강아지풀, 쇠비름, 토끼풀, 쇠뜨기들이 어깨를 맞대듯 커가고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해질녘 천변을 다시 걸었다. 달개비꽃과 메꽃은 어느새 피기 시작해서 날마다 새 꽃을 피워내고, 코스모스와 달맞이꽃은 화사한 가을의 멋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왕성한 것은 개망초와 패랭이꽃이었다. 나는 그것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무쇠덩어리 그 포클레인 아래서 본 것이다.
공사가 이미 끝났는데 웬 포클레인이 아직도 거기 놓여있는 것일까. 고장으로 아주 못쓰게 돼버린 걸까. 중장비 업자가 부도가 나서 팽개치고 도주해버린 걸까. 아니면, ‘이 거창한 역사(役事)는 내가 다 해놓았노라’라고 알리고 싶어서 기념탑처럼 세워둔 것일까.
나는 저 전설 속의 일각수(一角獸) 같은 괴물을 보면서 궁금한 일들이 좀체 풀리지 않았지만 나와는 상관이 없는 듯해서 그만 생각을 접기로 했다. 다만 그 녹슬어가는 괴물 아래서 뻗쳐오르는 풀과 꽃들의 힘이 마침내 저 무쇠덩이를 이겨내고 말 거라는 확신이 섰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날로 그 강인함이 더해가고 어떤 견고한 것도 생명 없이는 쇠잔해간다는 원리에서다. 무쇠괴물은 어느 세월 후에는 녹슬고 삭아 내려서 흙에 묻히지만 그 흙 속에서 패랭이꽃은 다시 피어오를 것이다.
장맛비가 내리고 때로는 폭우가 휩쓸어갔어도 다시 일어서는 풀들, 그 풀들을 보며 하찮은 잡초로만 여겼던 사람들도 이제는 알아갈 것이다. 그 풀꽃들의 힘과 그것들이 이 자연과 사람을 위하여 해내고 있는 일들의 고마움을.
바위의 쇳덩이와 콘크리트만 강한 거라고 여기던 사람들도, 버섯이 아스팔트길을 뚫고 코스모스가 시멘트벽을 깨고 나와 꽃을 피운 장면을 TV화면에서라도 보고 감탄했던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어떤 반석도 떨어지는 물방울에 구멍 뚫리지 않음이 없고, 소나무 뿌리에 틈을 내주지 않는 바위 없다’라는 옛말의 진의를 알게 될 것이고 생명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도 깨칠 것이다. 또 일찍이 음양오행설의 상극설(相剋說)이 말하는 ‘나무는 아무리 단단한 땅도 뚫고 솟아난다(木剋土)’란 이치에도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힘이 없어 보이는 것들에도 잠재된 능력은 있고, 오늘 힘없이 눌려만 사는 멍추들도 내일은 강인한 힘을 발휘하여 솟아오를 수 있다는 섭리를 우리는 되새겨서 간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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