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인 권대근
‘미치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어찌 나뿐이겠는가. 어떤 이는 수필에 골똘히 몰두하니 잠 속에서도 수필의 꺼리가 떠오르더라고 하였다. 일 주일에 몇 편의 글은 무난히 쓸 수 있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 나의 트래이드 마크는 ‘수생 수사’다. 누구보다 ‘수필’에 미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마음에 남은 붉은 그림자, 그것이 수필임을 알기에 수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내 행복이 되기도 하고 던져버릴 수 없는 시지프스의 큰 바위가 되기도 한다. 내가 ‘수생수사’ 수필폐인으로 불려지길 원한다면 남들은 욕심이 과하다고 말할까.
시간의 속도를 계산하는 현대인의 언어생활은 무척 생산적이다. 몇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이해도 못할 우리말이 생긴다면 얼마나 곤혹스러울까. ‘폐인’이란 낱말이 있다. 자신이 폐인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젊은이를 이해할 수 있는 기성세대는 얼마나 될까. 새로운 의미로 폐인은 ‘열성이용자’를 말한다.‘디지털 폐인’이란 말이 선두주자다.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온라인 세상에 빠진 네티즌들은 스스로를 시간의 블랙홀에 빠졌다고 표현한다. 모니터 보면서 양치질하기, 컴퓨터 책상에서 라면 먹기, 재부팅 하는 동안 화장실 다녀오기, 바이러스 검사하는 동안 식사하기, 시스템 조각모음 하는 동안 취침하기 등 의식주의 대부분을 컴퓨터 앞에서 해결한다. 드라마 제목을 따거나 주인공 이름을 딴 폐인은 말할 것도 없고, 온 국민의 폐인화가 우려되었던 지난 봄의 월드컵 열기는 또 얼마나 뜨거웠던가.
일간지에 ‘디지털 폐인, 의학상의 진짜 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글이 실렸다. 별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할 일이 많은 젊은이들이 전력을 다해 매진하는 것은 걱정스럽다. 그러나 어찌 보면 한 곳에 집중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열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다분히 폐인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돌아오는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몰두할 수 있다는 것은 미덕이 아니겠는가. 현대는 전문성이 요구되고, 취미와 일이 혼재되기 일쑤인 사회이다. 폐인 성향이 유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싶다.
폐인이란 말이 젊은이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민족문화추진위원회 홍기은 위원은 꿈에서도 업무를 볼 때가 많다고 한다. 낮에 몰라서 헤매던 부분을 꿈 속에 작자가 직접 나타나서 가르쳐주기도 한다고 하니 그의 몰입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지 않은가. 박봉에다 사람들이 잘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며, 좋은 직장을 버리고 한자와 옛사람의 글이 좋아 모인 사람들, 그들에겐 신념의 향기가 누구보다 진하다. 미치지 않으면 이렇게 하기 어렵다고 자평하는 그들을 한문폐인이라 불러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점잖지 못하다고 호통을 치실까.
유동호 씨는 화랑대기 폐인이다. 매년 시즌이 되면 종일 구덕야구장에 묻혀 산다. 십 년 전부터 그는 매년 일 주일간 휴가를 내어 화랑대기바캉스를 즐긴다. 어릴 때는 야구장 직원의 눈을 피해 담을 넘기도 하고, 헤밍웨이 전집을 부모님 몰래 팔아 입장권을 사기도 했다고 하니 가히 폐인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다고 하겠다. 아마야구의 꽃이라는 고교야구를 사랑하며 무려 40년간이나 폐인으로서의 열정을 불태우는 그의 투혼이 부럽기만 하다.
‘야구는 질 때가 있으면 이길 때도 있는 인생과도 같은 것’, 롯데 폐인 정구상 씨의 주장이다. 롯데가 우리를 폐인으로 만들었다고 목청을 높이는 그들 부부는 롯데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전국 어디라도 날아가서 롯데사랑의 기치를 높이 든다. ‘팬들은 경기의 승패 여부가 아니라 경상도의 악바리 근성, 짠내 나는 끈질김을 매번 보고 싶은 것일 뿐이다’라는 그들의 말에서 보다 고양된 폐인의 자세가 느껴진다. 그들에게 있어 야구는 단지 스트레스를 푸는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은 삶을 이끄는 웰빙의 방법이지 않을까. 나아가 수양의 도구, 삶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안일함을 다그치는 자기 반성의 한 방편인 것 같기도 하다.
붉은 악마는 단지 골대 뒤의 광적인 응원 부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진실로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되고자 합니다.
축구 좋아하십니까?
한국 축구 대표팀을 사랑하십니까?
바로 여러분들이 붉은 악마입니다!
붉은 악마는 월드컵 축구 경기 응원을 통해 자신들의 광기를 마음껏 펼쳤다. 그들을 볼 때마다 기획과 실천, 투지, 헌신 등의 낱말이 떠오른다. 금전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기에 그들은 더욱 아름답다. 한국의 거리 응원, 그 붉은 물결을 통해 전 세계에 우리의 열정과 삶의 활기찬 파동이 퍼져 나갔다. ‘Go together for our dreams!’라고 그들은 외쳤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붉은 악마’라는 이름이 도마에 올랐다. 한민족응원문화운동본부가 악마의 부정적 의미를 걱정하여 붉은 호랑이, 붉은 천사, 붉은 부사리를 제안했다고 한다. 도깨비나 산신령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하는데 ‘악마’가 뭐 어떤가. 상대방을 압도하는 힘을 내보이기에 적절한 낱말이 아닐까. 언어는 살아있는 유기체다. 사회가 변함에 따라 생성되거나 소멸되기도 하고 의미가 변하거나 쓰임이 달라지기도 한다. 긍정적으로 자주 쓰게 되면 그 낱말의 이미지도 변해가는 것이다. 폐인의 자격으로 따진다면 첫손에 꼽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그들에게는 ‘붉은 악마’라는 이름이 절묘하게 어울리지 싶다.
나도 붉은 악마가 되었다. 응원석에서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러대기도 하였다. 경기는 끝났다. 성패는 관계없다. 사랑에 조건이 없듯이 이기고 지는 것은 내 열정과는 관계가 없다. 롯데가 이겨준다면 더 좋아 더 열정적으로 응원할 뿐이다. 사십 대는 뜨겁게 살고 싶다. 밤을 새는 격랑을 잠재우고 일상으로 돌아와 나를 돌아보았다. 대학 다닐 때는 유독 붉은 티셔츠를 자주 입고 다녔다. 열정이 많아서이지 싶다. ‘사람은 어느 하나에 미쳐야 한다’는 보들레르의 시구를 외우고 다녔을 정도니까. 월드컵도 끝났다. 반백에 가까워지는 나이 때문인가. 이제 붉은 티셔츠는 벗었다. 그래도 가슴 속에 남은 붉은 그림자 하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도 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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