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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62. 거미

by 자한형 2022.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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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최민자

그는 마법사다. 빈손으로 암벽을 타고 맨발로 하늘을 걷는다.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날아다니는 것들을 무시로 포박한다. 마음만 먹으면 새 둥지보다 더 높이, 하늘 가장 가까운 첨탑에서 번지점프를 할 수도 있다.

구석진 기둥이나 이파리 사이에 먹줄 하나 야물게 이겨 붙이는 일로 마술과도 같은 그의 작업은 시작된다. 무한 허공 한구석을 사각사각 도려낸 뒤 투명한 은실로 짜깁기해 걸어두는, 그는 타고난 설치미술가다. 나침반도 설계도도 필요치 않다. 자재나 연장을 지참하지도 않는다. 몸 안 진액을 몸 밖으로 방사하여 외가닥 길을 이어 붙이는 그는 길이란 본디 존재의 궤적, 사는 일 또한 허공에 길을 내는 아득한 노정이라는 것쯤, 일찌감치 알고 있는 눈치다.

하루살이 떼가 지나는 길목에서 그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파리와 가지 사이, 기둥과 벽 사이를 눈대중으로 어림해보다가 아침 햇살 한 모숨과 저녁 달빛 한 자밤을 배 안 점액질에 고루 섞어 치대어 놓는다. 형이상의 질료로 형이하의 물상을 창조해낸다는 점에서 그의 집짓기는 예술에 가깝다. 소낙비와 우박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실한 집을 지으려면 비껴 나는 왕잠자리의 하중이나 먹장구름의 난동 같은 것도 계산에 넣어야 한다.

스카프처럼 펄럭이는 집이 이윽고 완성이다. 낭창낭창, 숨 쉬는 집이다. 강철보다 다섯 배는 강하고 나일론보다 백 배는 질긴 이 마법의 그물은 어떤 가위로도 절단되지 않고 어떤 바늘로도 봉합되지 않는다. 함부로 얕잡고 달려들었다가는 얼기설기한 피륙에 감겨 보쌈을 당하거나 송두리째 생포되어 곤욕을 치르기 일쑤다.

끈끈이풀이 묻지 않은 세로줄로만 그는 조심조심 골라 디딘다. 이제부터는 구석지에 옹송그리고 죽은 척 잠복해 있어야 한다. 힘 센 앞발도, 날카로운 뿔도, 사나운 송곳니도 배당받지 못한 목숨붙이들에게 약육강식은 생존의 문법이 아니다. 내 목숨 보존코자 남의 목숨 공략하는 불한당 노릇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살고 죽는 건 하늘의 뜻, 걸리면 먹고 안 걸리면 굶는다. 세상만사 기실 운수소관 아니던가.

새소리와 달빛과 바람은 그냥 지나가라. 사소한 걱정도, 불온한 희망도, 밤새 증식하는 그리움도 연기처럼 빠져나가 버려라. 오로지 선잠 깬 잠자리 하나, 시건방진 말벌 하나, 술 취한 방아깨비 하나, 눈은 장식으로나 달고 다니는 겉멋 든 호랑나비 한 녀석만 싱싱하게 걸려들라.

실수로 발이 빠진 밀잠자리며 사랑에 홀려 앞뒤 분간 못하는 불나방들을 그는 쓸데없이 동정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까지 배려할 가슴이 없다는 것이 그에게는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따로인 여타 족속들과는 달리 그의 신체구조는 머리가슴이 합체된, 두흉부頭胸部라는 통합사령부로 진화되어 있다. 이성과 감정의 갈등 같은 사치스런 소모전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실제, 만물의 영장이라 잘난 체하는 어떤 동물은 불과 삼십 센티 상간의 머리와 가슴이 부질없이 다퉈대는 바람에 일생을 갈등 속에 허우적거린다 하던가.

어둠이 슬어놓은 이슬방울들을 그가 조심스레 털어내고 있다. 찢어진 나방이 날개며 썩은 나뭇잎도 말끔하게 걷어낸다. 남은 일은 기다림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것도 생명체의 중요한 행동양식이다. 집착도 욕망도 다 내려놓고 신의 가호를 축수해 보지만 우연에 기대는 삶이 어쩐지 불안하다.

아래채 녀석이 앞발을 구르며 무당벌레 한 마리를 돌돌 말고 있다. 모처럼의 횡재에 신명이 난 것일까. 그 또한 삶의 아이러니려니. 공들여 그물을 짰다 하여 먹잇감이 몰려오는 게 아니듯, 오래 참고 기다린다 해서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불공평과 불합리를 받아들일 때 사는 일이 더 수월할 것이거늘. 그가 골똘히 바닥에 엎드린다. 분꽃 씨앗 같은 몸통 위로 싸한 바람이 스쳐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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