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향/ 정주환
홀로 앉아 송엽차(松葉茶)를 마시며 굽어보는 상국이 청아롭다. 활짝 열어 놓은 서창(書窓)으로 바람결 따라 흘러드는 향기가 벅차서 들었던 찻잔을 자주 내려놓곤 한다.
여유 있는 삶을 충분히 누리기 위하여 세평 남짓한 뜨락에 국화(菊花)를 가득 채운 지 오래요, 그 아름다운 숙기(淑氣)에 끌려 허물없는 가우(佳友)로 사귄 지 수삼 년이다.
지금 하많은 하루의 번뇌 속에서 그래도 세속에 초월하면서 안주(安住) 할 수 있는 시간이요, 때 묻은 마음을 손질하면서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옹글찬 순간이다.
버려진 자갈땅 척박한 황토벌이라도 국화는 햇볕만 있으면 무륵이 자라서 문득 서리 찬 하루아침에 탐스러운 꽃송이를 암팡지게 피어낸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라는 어느 시인(詩人)의 말처럼, 이슬과 바람과 구름과 별빛을 벗 삼아 긴긴 여름을 잘도 참아 준 끈기에 국화의 멋스러움이 엿보인다.
일찍이 예기월령(禮記月令)에 나타났고, 굴원초사(屈原礎辭)에 예찬하지 않았던가. "국화의 가(佳)는 모란 작약처럼 농염(濃艶)의 가(佳)는 아닌 동시에, 하화(荷花)같은 담징(淡澄)의 가(佳)도 아니다. 그의 가(佳)는 풍상(風霜)을 방시(倣視)하는 늠름한 영자(英姿)에 있다."고.
나는 국화꽃이 활짝 피어 있는 여염집 뜰가를 지나칠 때면 느슨한 정에 취해 종종 발걸음을 머뭇거리곤 한다. 어제도 다가공원(茶佳公園)에 오르다가 외인촌 안에 탐스럽게 만발한 국화를 몰래 훔쳐 본 적이 있다.
세속의 부귀와 공명을 초개처럼 떨치고 동쪽 울밑의 국화 몇 포기를 꺾어 들고 유연(悠然)히 남산을 바라보던 도연명(陶然明)의 풍류를 닮고 싶어서일까?
花雖不解語 我愛其心芳 平生不飮酒 爲汝擧一艶
平生不改齒 爲汝笑一場 菊花我所愛 桃李多風光
푸른 달빛 속에 핀 국화의 고절(孤節)을 내려다보며 문득 정을 토해 낸 정포은(鄭圃隱)의 국화탄(菊花嘆)이다. 그 뜻도 좋거니와 충신의 심경을 보는 것 같아서 내 집 뜨락의 국화철이면 되읊어 보게 된다.
어떤 이는 눈서리를 외면하는 국화의 숫기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것은 내가 동조하여 침잠(沈潛)하고픈 사연 중의 하나인지도 모른다.
국화는 교만하지 않다. 또한 화사하지도 않음이 그 천품(天品)이요, 미태(媚態)를 곁들인 유연한 몸짓마저 없으니 일러 단아한 기품이라고만 접어 두자.
새하얀 모시 적삼에 맵시 고운 여인처럼 청순(淸純)한 백국(白菊), 갓 시집 온 새댁이 볼을 붉히며 아미를 숙이고 있는 단심으로 고운 홍국(紅菊), 정갈한 이조(李朝)여인처럼 백자(白瓷)의 숨결이 재워진 우아한 황국(黃菊), 그래서 일찌기 옛 선비들은 매난국죽(梅蘭菊竹)을 사군자(四君子)에 넣어 오지 않았던가.
가을바람에 살며시 고개 젓는 국화를 보면 절로 지락(至樂)의 경지에 잠겨드는 자신을 느낀다. 가난하여 콩 이파리를 뜯어 넣고 하늘 비치는 밀죽을 쑤어 먹는다손 치더라도 국화꽃처럼 고매(高邁)한 한 생을 마치고 싶다. 고뇌하는 인생(人生), 나그네의 차가운 삶의 현실 속에서도 마음이 맑아 우리의 여정이 결코 헛된 시간만은 아니라고 자긍(自矜)하게 된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한해의 풍요를 실감나게 해주는 중양절(重陽節). 달빛이 고향땅 산정의 용마루에 미끄러질 듯 번뜩이던 밤이었다. 마당 한가운데에 멍석을 깔아 놓고 햅쌀로 갓 빚어 낸 송편을 먹으면서 고아(高雅)한 국향(菊香)에 젖던 시절이 좋았다.
나는 가난하지 않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탐스럽게 달린 국화송이를 한눈에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까지도 두둑한 부(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원래 부라는 것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은 것,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불안한 것이지만 내가 누리는 부는 기도처럼 정결하고 출렁거리는 달빛처럼 맑아서 언제나 누려도 속되지 아니하니 나만이 간직하는 정복(淨福)이라고나 할까.
높고 깊은 골짜기, 비옥하고 넓은 들, 맑은 물과 수려(秀麗)한 산, 그 위에 언제나 깨끗한 마음으로 국화꽃을 앞에 두고 산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어디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여가를 선용하여 취미를 살린다. 나 역시 아름다운 자연의 넉넉한 조화 속에 삶의 내적 리듬을 더듬으면서 국화에 물을 주며 자별스런 기쁨을 오래오래 지니고 싶다.
어젯밤 잠을 설치게 했던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국화 향은 곧 거두어 질 것이다, 지내 놓고 보면 침묵에 메마른 차가운 입술을 깨물던 한나절도 잠깐이듯이 청정(淸淨)한 국화의 운치도 덧없으리라. 그러나 만일 한 가을에 마당가에서 토방 끝까지 운승격고(韻勝格高)한 국향으로 도도(滔滔)한 대하(大河)를 이룬다면, 그 향은 담을 넘어 이웃에까지 오붓한 기쁨을 누리지 않겠는가.
명년에는 더 많은 국화를 뜰과 분에 가득가득 담아 아침마다 부러운 시선으로 넘겨다보는 이층집 영감에게도 한 포기 보내 주리라. 그리고 내 집에 자주 놀러 오는 문우 김형(金兄)에게도 맑은 정을 분에 담아 건네주면서 국화처럼 속기(俗氣)없는 우정(友情)을 오래오래 일러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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