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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4

61. 강물을 만지다

by 자한형 2022.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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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을 만지다/ 정혜옥

강에 닿았다. 강둑에서 강까지의 거리는 200미터 정도. 나는 빠르게 강을 향해 걸어갔다. 둑 너머에서 불고 있던 바람도 나와 함께 강으로 갔다. 나를 따라 온 바람이 작은 물살을 일으킨다. 이곳은 남강 하류, 강 건너 월아산도 보이고 촌락도 보인다.

강물 곁에 앉았다. 강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끝에 물이 닿고, 마침내 나는 강물과 손을 잡았다. 물을 만져 본다. 부드럽고 서늘하다. 명주 수건 한끝을 손에 쥔 것 같기도 하고 매화 꽃 한 판을 어루만진 것 같기도 하다. 손을 들어 올린다. 물은 없고 빈주먹만 남는다. 다시 강에게 손을 내밀고 물을 만지고, 물은 또 빠져나가고, 이 일을 일곱 번이나 되풀이하였다. 아이가 놀이를 하듯이 하였다. 나는 왜 이 짓을 하고 싶어 했을까.

어린 시절, 강가에서 살았다. 남강 둑 밑에 집이 있었다. 강은 물소리를 내지 않는 대신 언제나 바람을 거느리고 있었다. 강 건너 대숲에서 불고 있던 바람의 소요, 바람이 강을 건너오면 모래사장에는 자주 회오리가 일었다. 강둑을 휘덮고 있던 시퍼런 풀들도 몸을 흔들어대었다. 나의 머리카락도 바람에 풀썩거렸다. 먼 곳에서 물이 흘러오고 또 흘러가고, 강변의 작은 바위와 나풀거리던 풀꽃들, 강가에서 올려다 본 낮달과 강기슭에 매어 있는 빈 배의 흔들림, 나는 그때 이런 것들에 한없이 반해 있었다. "강물 귀신이 붙었나, 눈만 뜨면 강에서 논다." 어른들은 이런 말을 내게 자주 하시었다.

남강을 떠났다. 사십년 동안 강을 잊고 살았다. 삶의 계획, 삶의 성취, 삶의 자신만만함, 바쁘고 분주하였다. 옛 기억에 매달린 시간도, 또 그것들을 만나보고 싶은 욕망도 없었다. 새로 얽힌 인연들이 꽃무리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지난여름, 열흘간 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 많은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남편과 자식들의 얼굴이었다. 혈육들의 환영은 회한의 끈을 풀었다 댕겼다하며 수술실 안에까지 따라 들어왔다.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잠에 나는 빠져 들었다. 다시 잠에서 깨어나고, 그때 돌아오는 의식 속에 어떤 형체들이 언뜻언뜻 스치고 있었다. 차츰 선명해졌다. 그것은 나의 집도, 가족의 얼굴도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얽히고설킨 사건들은 더욱 아니었다.

산과 들과 강이었다. 유년의 들과 강 같았다. 이불 한 자락이 몸에 감기는 것처럼 따뜻한 느낌이 몰려왔다. 죽음에 대한 공포, 수명에 대한 갈망으로 떨고 있는 시간에 어린 날의 기억들이 나의 의식 속으로 왜 들어왔을까. 강가에 서 있는 아이가 나타나고 물소리, 바람소리도 들렸던 것 같다. 빼빼하게 야윈 소녀와 강물과 바람, 문득 깨닫는다. 마르고 볼품없는 아이가 바로 나였던 것을, 그때 내 주위에는 언제나 강물과 바람이 둘러싸고 있었던 것을, 마침내 깨우침 받았다.

병실에 사람들이 다녀갔다. 그들은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삶의 환희와 삶의 고통을 많이 이야기 하였다. 혼자 병실에 남겨졌다. 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불을 밝힌 집들의 창문과 집을 향해 달려가는 자동차의 불빛들, 그러나 그 따뜻한 빛들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 나 혼자만 깊은 병고 속에 남겨질 것 같았다. 갑자기 외로움과 두려움이 밀려왔다. 절대적인 고독감과 절망이었다. 견디기 어려웠다. 이런 기분을 떨쳐 버리기 위해 창문의 커튼을 닫기도 하고 병실의 흰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아 보기도 하였다. 지난날의 즐거웠던 추억들도 생각하였다. 이십대의 열정과 용기, 삼십대의 성취, 사십대의 풍요로움을 떠올렸다. 그리고 오십대의 바람과 같은 자유로움도. 그러나 삶의 마디마디에 끼어있던 아픔의 흔적이 더 많이 솟아올랐다.

어린 시절로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수술 후, 잠에서 깨어나던 순간에 떠오르던 강과 들을 찾아내었다. 갑자기 따뜻하고 충일한 기쁨이 나를 감싼다. 옛집과 강으로 가는 길과 강물의 흐름 등이 차례로 다가온다. 강가에서 맞이하던 봄날, 그 나른한 느낌이 봄의 아지랑이 속에 발목을 파묻던 게으른 날의 기억도 생각난다. 다시 한번 눈물겨운 희열이 나를 둘러싼다.

, 그것들이 나의 완벽한 행복의 원인이었을까. 아무리 세월이 가도 그때의 인식은 절대로 마멸되지 않고 내면 깊숙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내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던 혼미의 시간에, 혼자 떨고 있는 두려움의 시간에, 그것들은 돛단배처럼 달려와 나를 위로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절망과 어둠을 쳐부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결심을 하였다. 삶의 병고와 아픔과 모순을 몰랐던 시절에 누렸던 기쁨을 찾아가 보자. 흐르는 강물을 따라 뜀박질을 하던 순수한 날들의 흔적 속으로 한번 돌아가 보자. 이런 생각을 하였다.

오늘 나는 그 일을 하고 있다. 고향의 산과 들을 걸어 남강까지 왔다. 오후의 햇살을 받은 강이 금빛으로 반짝이며 발밑에 있다. 가을날의 오후는 짧다. 나는 짧음의 의미를 희석시키듯 강물의 끝을 오래 바라본다. 그리고 강물을 만진다. 손끝을 타고 전해 온 물의 감촉이 심장 가까이 닿는다. 손으로 물을 움켜쥔다. 주먹 안에 갇혀있던 물이 순식간에 빠져나간다. 새 물이 흘러오고 다시 물을 붙잡고 또 달아나고. 지금 강물과 나는 달아나고 붙들고 하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희롱을 하고 있다. 장난질을 하며 서로 위로받고 있는 것이었다. 철없던 날의 그때처럼.

나는 지금, 오후의 남강 가에서 다시 낮달도 보고 강의 우수도 보고 강물 귀신이 몸에 붙어 있다고 하시던 할머니의 목소리도 듣는다. 내가 강으로 던진 조약돌과 그 돌들이 강물 속으로 영원히 몸을 감추며 질러대던 소리를 생각한다. 나의 손끝에서 풀려난 명주수건이 강물따라 남실남실 가버린 날의 비애도 떠올린다.

서쪽에서 어둠이 오고 있다. 나는 다시 한 번 위로를 받고 싶어 야윈 손을 남강 물 깊숙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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