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안회남
8월 15일이 일주일 지나 23일경에 처음으로 탄광에 쌀 배급이 되었다. 배급소에서 요사무실로 통지를 하면 여기는 돈을 들여 품삯을 주면서 사람을 쓰는 데가 아니니까 그냥 요에 기숙하는 광부들을 동원시켜 쌀을 운반해온다.
오전 열 시다. 그러니까 일 번 방 일꾼은 모두 갱내에 들어가 일을 하고 각 광부실에는 어제 저녁 다섯 시에 일을 들어가 밤새도록 석탄을 캐고 나온 이 번 방 사람들이 아침밥을 먹은 후 이제 겨우 발을 뻗고 눈을 붙일락 말락할 때다(이때도 우리는 구 주땅 안에서 강제로 노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네미, 이건 숨두 쉴 새 없네 ,,,,」
「죽일 놈들이 사람을 잠이나 자게 해야지. 밤새도록 일하구 온 놈 보구 또 쌀 져오라네 !」
여느때 같으면 으레이 이렇게 퉁명을 부렸겠지만 오늘은 모두 귀가 번쩍하였다.
「뭐, 쌀,,,,,, ?」
「그래두 이놈들이 굶겨 죽이지는 안할라나보이,,,,,,」
「쌀! ,,,,,,」
입입이 지껄였다.
사실 이 쌀에 대한 우리의 근심 걱정은 복잡하고도 컸다. 조선서 북구주로 끌려올 때 바다에서 잠수함을 만날까 기뢰에 배가 부딪칠까 그것도 위험했고, 공습도 무섭고, 틀 천장에서 바위가 떨어지는 갱내 작업도 아슬아슬하며, 또 전쟁이 끝날 임시면 적어도 동경 진재 때의 조선인 학살 사건과 비슷한 일이 생기리라, 그러면 갈 데 없이 죽었지 하는 비관이 끊일 새 없었으나 그래도 쌀에 대한 그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전쟁의 결말이 차차 가까워오는 것 같고, 석탄을 캐야 소용없느니 파내 놓아도 수송 관계로 가져가지를 못하느니 한번만 더 일을 시키고 놀리느니 하는 소문이 났을 때 우리는 새로운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우리는 굻어 죽는다 !>
하는 염려였다. 사실 탄광 특배니 중노동자 식량이니 해서 배급해오던 것이 없어지고 줄어들고 하였다. 놈들이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일을 시키고 부려먹기 위해서다. 인제 석탄이 필요 없게 되면 우리를 편히 놀려두고 없는 쌀에 왜 먹일 게냐, 우리의 어깨에 총과 칼을 메워 전쟁터로 내보내든지, 아니 싸움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니까 놈들은 애쓰지 않고 그냥 우리를 굶겨 죽이리라 하는 이 생각이 우리에게 아주 결정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실제로 배급 쌀이 전과 달라서 모두들 굻쑤리고 있는 판이었다.
그러나 그뿐 아니다. 열이면 열, 백 명이면 백 명, 몇 천 몇 만 사람, 여기 와 있는 조선인 광부들은 누구 한사람 빼놓지 않고,
-아아 ! 쌀, 쌀,,,,,, 조선서는 지금들 어떻게 살고 있나? ,,,,,,굶지들이나 않는지? ,,,굻겠지! 아이들 얼굴이를 어찌 됐을까? 배고프다고 심술을 부리고 울겠지 ? 어머님께서는 그 정경을 보시고 어떻게 견디실까? 아아. 쌀,, >
-우리는 이왕 죽은 목숨이다. 죽어도 그만이다. 좋다 ! ,,,,,,그 대신 고향에 있는 부모,처자,동생들이 다 잘 먹고 편히 있었으면,,,,,,-
모두 이 간절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 근심이 우리에게 무한한 고통을 주었다.
대부분이 무식한 농민 , 노동자의 출신일지언정 조선서 생산되는 쌀은 거의 전부 일본과 전쟁터로 가져가고 조선 안에서는 만주 좁쌀과 수수 , 옥수수로 배를 채우고 있는 것을 잘 안다.
우리가 떠나을 때도 가족들은 배고팠다. 보태 먹기 위하여 향내나고 하얀 아카시아 꽃을 따서 말리는 것을 직접 봤다. 어느 동네에서는 남녀노소 모두가 못 먹어 누렇게 부황이 났느니. 솔잎들을 따먹어 산이 빨갛게 됐느니, 하는 소문이 났었는데 그것을 오늘날 구주 땅에 와 생각하매 더욱더 처참하게만 마음에 스며든다.
금년 보리농사가 말이 아니라는 편지가 왔을 때도 농부들은 일을 못했다. 게다가 또 보리 공출이 못 나오게 되니까 양식 배급이 더 줄어졌다는 소식이 왔을 때도 그랬다.
「다른 게 큰일 아녀 ! 인저는 모두 굶어 죽었다!,,,,,,」
모두 멍하니 먼 곳을 바라다보면서 말했다.
그때 나에게는 아내에게서 직접 다음과 같은 편지가 왔다.
아이들이 그림책을 보면서 소가 나오니까 잡아먹자고 그러더군요. 소고기 맛있다고 병휘 -놈이 그러더군요. 다음 책에서는 말이 나오니까 병은이 놈 하는 말이 배가 고프니까 말도 잡아먹자구요. 병휘는 소는 오늘 잡아먹고 말은 뒀다가 내일 잡아먹자더군요. 그런데 그림책을 보니까 돼지도 있고 닭도 있지요. 그것을 모두 차례 차례로 잡아먹는다고 공론을 하더군요. 맨 나중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남았습니다. 그때 저는 아이들이 순진하고 가엾어 눈물이 나오길래 슬며시 부엌으로 갔더니 저희 형제끼리 고양이도 잡아먹느니 마느니, 못 먹는 것이니 먹는 것이니 하며 나중엔 이 자식 저 자식 싸움을 하더니 급기야 두 놈이 쫓아와서 고양이를 잡아먹어도 괜찮으냐는 것입니다. 뭐라고 대답합니까? 그래서 편지로 써 아버지한테 여쭈어보라고 챘죠. 병휘는 잡아먹고(왜 병휘는 양이 크고 더 먹지 않습니까?) 병은이는 암만 배고파도 고양이는 못 먹는대요. 그예 병휘 놈이 때려서 울렸어요------
이런 내용의 사연 끝에다간 식량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비들이 독에서 쌀을 훔쳐다 먹으나 가엾어서 때리지도 못한다는 이야기, 아이들뿐 아니라 배급소엘 가보면 어른들까지도 뺑 둘러앉아서 멍석에 쏟아놓은 생쌀들을 슬금슬금 집어먹는다는 말을 했다.
이 편지를 보고 나는 견디어낼 수 없는 슬픔만 아니라 전신이 부르르 떨리며 모질고 독한 마음이 생겨났다. 고양이뿐 아니라 캐가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 독사라도 잡아다 먹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림책을 아이들에게 사 보내준 것을 후회하였다. 그림책, 더구나 호화스러운 물건이 나오고 먹을 것을 이것저것 함부로 그려 넣은 얼빠진 그림책은 절대 아이들에게 보낼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키나와 전쟁이 한창일 때 우리는 그것이 하루바삐 함락되기를 빌었다. 아메리카의 연합함대가 어서 조선해협을 지나 전 일본 해를 제해(制海)한 후 조선 땅을 완전히 가로막아주었으면 했다, 그것은 그렇게 되면 조선서 쌀 한 톨이라도 못 가져오리라, 오냐. 여기선 굶어 죽어도 좋다, 이런 생각이었다.
815를 맞이하여 우리가 바라고 바라던 모든 사실, 전쟁이 끝난 것, 일본이 진 것, 조선이 해방되는 것, 우리가 고향에 가게 된 것. 모두 기쁘고 기쁜 일이지만 그보다도 먼저 더 크게 기쁘게 느낀 것은 인젠 조선 있는 우리 가족들이 굶어 죽지 않고 살았구나 하는 것이었다.
「인제는 살았소!」
누구나 다같이 한마디씩 하는 이 말은 누구나 다같이 자기자신이 아니라 가족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때 또 대단히 반갑지 않은 소문이 떠돌았다. 미국 군대가 조선에 진주하기 전에 일본 놈들이 쌀을 가져가느라고 남조선 각 항구에서 밤새도록 배로 실어낸다는 것이다. 여기는 바다가 가까워 그것에 대한 소문이 날로날로 전하여 왔다.
우리 생각에는 조선에 있는 쌀이 한 섬 안 남고 이리로 건너오는 것 같았다. 보리는 못 먹어 쌀은 전부 일본으로 가져와 신곡이 빨 때는 아직 멀어서 이거 조선서는 다 죽나보다 했다.
「아, 고놈의 깍쟁이들이 좀 잘 가지고 오겠어?----」
「고놈들 고 성질에 조선엔 쌀 한 톨 안 냄깁니다-」
「암, 조선사람은 요래 죽어라 하고 ,,,,,,」
「지금 독이 잔뜩 올랐거던요!」
「어디 또 저희들 땅에 여기 쌀 있에요?」
「조선서 가져와야만 할 테니까 기를 산고 가져오겠죠. 그저 그놈들을 ......」
하는 판이었으니까 달이다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니 별안간 모두 긴장이 되었다. 배급을 아주 똑 잘라버리고 인제 석탄은 필요 없다, 너희는 굶어 죽어라 할 줄 알았더니 그래도 목숨은 잇게 되나보다 하는 반가움과 무슨 쌀이 왔느냐 하는 겁이 한꺼번에 우리의 마음을 엄습하였다.
「얼른 가보세. 쌀 왔다네 ,,,,」
「쌀 ,,,,,,」
「쌀이 라네!」
떠들면서 떼를 지어 배급소로 갔다.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서 어깨 위에 메고 나와 밖에다 쌓아놓는 것을 보니 과연 그것은 조선 쌀 가마니였다. 이것이 우연히 암합(暗合)되었던 일이었던가 실로 가슴이 덜렁 내려앉았다.
「자, 보세요!」
-소-라고 별명을 듣는 삼룡이가 가마 머리를 풀고 쌀 한 주먹을 쥐어다가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눈에 늘 희게만 보이는 하얀 닭 같은 백미였다.
「가마도 가마려니와, 자 ! 갈데 없는 조선 쌀입네다,,,,,,」
「그려 바루 은방 이호 쌀여 ,,,,,」
「은방 이호지!」
「은방 이호라니?」
나도 전에 들은 법한 쌀 이름을 뇌며 물어보았다.
「조선은 거지반 다 이 쌀이에요. 여기두 있는지 모르지만 못 봤에요. 이건 아주 진짜 조선 쌀이올시다----,-무어 ,,,,,, 그걸 몰라요?」
다들 이같이 말하며 한 의견이었다.
피들의 말을 종합하면 우선 쌀가마니가 조선 것은 일본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가마니 빛도 다르지만 일본 것은 가마 묶는 새끼가 대개 한 매 한 가닥으로 되었으나 조선 것은 두매 세 매로 묶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도 얼른 수긍할 수 있었다. 즉 조선 쌀가마니를 그렇게 단단하게 두 가닥 세 가닥의 새끼로 묶는 것은 쌀을 조선에 두지 않고 멀리 일본으로 운반해가려는 까닭일 게라고 말했다, 그것도 그럴듯했다. 쌀가마를 세 매로 묶으라고 하기는 분명히 소화 16년(1941년)부터였을 게라고 누가 말했다. 다른 데는 어둡고 둔하나 이런 경우에는 밝고 예민한 농민들이다. 그날 종일 쌀로 해서 이러니저러니 떠들더니 그날 밤 제이협화료 식당에 모인 조선사람 광부들은 일제히 밥을 안 먹었다.
「조선서는 모두 굶어 죽는데 우리만 먹구 살아요?」
「제에기. 부모 처자는 다 굶겨 죽이구 나 혼자 살면 무얼 해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밥 사발을 앞에다 놓고 쩍쩍 입맛만 다셨다.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엎드려서 눈물을 시멘트바닥에다 흘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삼룡이는 할 수 없는 듯이 밥사발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길래 따라가 봤더니 몇몇 한 동네 사람과 함께 방구석에다 밥사발을 오르르 몰아놓고, 모두들 여기저기 퉁숭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밥들 먹으라고 몇 번 권했으나 이내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아 흐려지고 해서 내 방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후 한 열흘쯤 지나서 우리는 회사측과 한바탕 싸움을 한 다음 우리 손으로 밀선(密船)을 얻어 타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삼룡이 및 그 부락 사람들과 여러 가지 연유로 하여 나와 유난히 친하게 지냈었으므로 한번 꼭 오라는 부탁을 받아 집에 온 후 한참 쉬어 가지고 어느 가을날 그의 동네인 월하리 를 찾아갔다. 보리는 버렸으나 작도만은 금년이 근래에 없는 대풍이라고 사람마다 말했다. 사실 바라다보면 들에 가득히 누렇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여 그야말로 어디나 황금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저거 보세요. 안 주사 어른!」
삼룡이는 제 행복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감격적인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저거 다 인저는 우리가 맘놓고 먹게 됐에요,,,,,, 금년은 공출 안허죠? 참 좋군요.」
「참 풍년입니다.」
「풍년입니다.」
그는 연해 풍년 노래만 하더니 스르르 자기 방으로 가서 조그마한 무슨 종이 뭉치를 가지고 나왔다. 펼치고 보니 그것은 누런 편지 봉투에 넣은 쌀이었다.
「자, 안 주사 어른, 보실렵니까?」
할 때 나는 벌써 짐작이 가서 깜짝 놀랐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그것이 구주 탄광에서 조선 쌀이라고 나에게 보이던 바로 그것이라는 설명을 했다.
「집에서 온 편지 피봉에 그냥 넣어 가지고 왔죠. 저는 해마다 은방 이호만 지었에요. 자, 이게 여깃 쌀 아닙니까?」
그 쌀을 다시 갖다가 봉투 속 쌀과 대조해 보니 참 그것은 조금도 틀림없는 동일한 것이었다
「그렇군요!」
나는 항복하고 말았다. 쌀이 그리 희지는 못하나 잘고 둥글며 쌀눈 한 귀퉁이가 베어낸 듯이 떨어져 있는 게 특징이라고 한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속으로 과연.
<농민은 토지의 아들이고 쌀은 농민의 아들이다 !>
하는 엉뚱한 지극히 감상적인 생각에 젖으며 묵묵히 삼룡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안회남(安懷南: 1909- ? )
서울 출생. <금수회의록>의 작가 안국선의 외아들.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발(髮)>이 3등으로 당선되어 등단함. 일본 징용 후 귀국하여 <조선 문학가 동맹>에 가담함. 그는 인생의 현실적 단면을 묘사하면서 역사와 현실 의식을 폭넓게 수용한 작품을 쓴 작가로 알려져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애인>, <탁류를 헤치고>, <소>, <상자>, <농민의 비애>, <철쇄 끊어지다>, <대지(大地)는 부른다>, <전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