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친구는 경주가 고향이었고 밀양이 본관이었다. 3남 3녀 중 남자로서 막내였고 여동생이 22살 터울로 한 명이 있었다. 작은 누나는 B은행에 다니기도 했는데 무척이나 연약해 보였다. 우리집보다 아랫동네에 살았으니 유복했었던 것 같다. 큰형과 나이차이가 많이 났고 작은형 그리고 작은누나 여동생이 비슷한 또래집단에 속했다. 친구를 만난건 초등학교 4학년때 였다. 공교롭게도 같은 반이 되었다. 그리고 친하게 되었고 같이 과외를 하게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전문대학생 정도에게 6개월가량을 배웠었던 것 같았다. 정말 가난한 살림에 과외까지 한다는 건 복 받은 일이었다. 그냥 학교 공부를 하기 바빴고 정신이 없었는데 과외를 하다 보니 학교 공부를 하는 것이 아주 쉽게 이해될 수 있었다. 성적이 급상승했다. 중상정도의 평범한 실력에서 최우등 그룹으로 급부상한 것이었다. 그런데 가르쳐주던 양반이 군에 입대를 해버렸다. 그런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성적도 급락하고 말았다. 더 이상 그렇게 효과적인 공부가 되지 않았다. 중학교를 갈 때 녀석은 따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소원해졌다. 학교가 다르다 보니 별로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안부정도를 아는 정도로 그쳤다. 친구녀석은 무척이나 약골이었다. 키는 그런대로 보통 정도는 되었으나 몸은 왜소했다. 피부가 좋지 않아 여러 가지 연고를 바르기도 했었다. 형들과 누나들 사이에서 사랑을 독차지하고 살았다. 위로부터 베우고 들은 것이 많았던 탓에 무척이나 성숙하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친구녀석의 아버지는 베트남에 계셨는데 한 번씩 귀국하면 귀한 물건을 많이 가져오셨다. 그러다 보니 경제적으로 풍족한 살림을 살 수 있었던 같아 보였다. 아버지는 베트남 전쟁이 끝나자 곧 중동으로 건너가 생활을 하였다. 고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겨울방학 때였다. 또다시 녀석과 더불어 과외를 대학생으로부터 받았다. 각자 다른 고등학교로 배정을 받아 다녔다. 녀석은 여자에 대해 인생에 대해 무엇이든 해박한 듯하였고 얘기도 잘했다. 드디어 대학을 진학하게 되었다. 친구녀석은 같은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인문학부쪽이었고 나중에는 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1학년 때에는 불교학생회에 나갔었는데 같이 붙어 다니게 되었다. 변설이나 언변은 언제나 유창했다. 언젠가 한번은 포항 보경사로 야유회를 간 적이 있었는데 밤새도록 토론을 벌인 일도 있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다음날 버스 속에서 정신없이 곯아떨어져버렸던 적이 있었다. 몸이 약해 술은 잘 못했지만 어울리는 것은 좋아 하였다. 캠퍼스 커플이라 할만한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영어교육학과 소속이었다. 그것은 최고 수준의 엘리트임을 의미하였다. 군생활까지는 친하게 지내다 결국은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여 결별하고 말았다. 여자친구 쪽에서 모든 뒷바라지를 다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종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불교학생회에 가입을 권유해서 같이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에 송광사에서 수련회(템플스테이)를 같이 다녀오기도 했다. 참으로 특이한 세계였었고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마음을 닦고 수양하는 것에는 참으로 더할 나위 없는 듯했다.. 친구 녀석은 대학 2학년을2 마치고서 군에 갔다. 거의 국민 약골 수준이었음에도 군생활은 잘해 나갔다. 논산훈련소에서 조교생활을 하였다. 여자친구가 매주마다 면회를 다녔다. 반찬을 싸서 갖다 주었다.. 지극정성이었다. 우스갯소리로 조강지처 같은 여자 친구를 홀대하면 하늘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건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 후 세월이 흘러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 여자친구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친구녀석은 독신인 채 학업을 계속했다. 결국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 조교수로 임용이 되었다. 정년까지 남은 기간까지 하면 연금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무척이나 좋아하였다.. 얼마 전에는 11년 동안은 독일에 가서 지내다 오기도 했다. 교환교수로 간 셈이었다. 친구녀석의 큰집이 있던 경주를 함께 가서 하루를 자고 온 적이 있었는데 제법 큰 조카 녀석이 있었다. 그런데 이녀석이 본인을 멘토로 생각을 했는지 롤모델로 여겼는지 그렇게 진로를 정했다고 했다. 그 후 대학도 법학을 전공하게 되었다고 했었다. 친구녀석은 아직도 독신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철학탓인지 여자를 못 만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작은 형과 여동생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한 것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뭔지를 모를 일이다. 작은 형은 이혼을 한 후 혼자 살고 있고 여동생도 순조로운 결혼생활을 못하고 아이와 함께 지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큰형이 운영하던 공장 일이 어렵게 되어 조카와 같이 한동안 지내기도 한 모양이었다. 한때는 큰 형의 공장일을 봐주기도 했었다고 했었다. 아주 귀하게 자란 탓에 식성이 까다로웠고 입이 짧았다. 바깥에서의 식사가 여의칠 못하였다. 위장이 좋질 못했다. 군생활을 할 때 곤욕을 치루었다. 친구 녀석은 군대밥을 잘 먹질 못하였다. 계속적으로 여자 친구가 김치, 김 등 밑반찬을 3년 동안 해 대었다. 워낙 몸이 가벼워 여러 겹으로 옷을 껴입음으로써 여윈 몸을 감추기도 했다. 제대로 자리를 잡아 생활하고 있기는 하지만 걱정이 많이 되기도 한다. 조교시절에 교수님들의 수발을 들며 배운 취민인 낚시에 한참 심취하기도 했다고도 한다. 독일 철학자 하이덱거 쪽의 철학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불교쪽에 관해서도 관심이 시들해지고 학교 쪽 일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예전의 친구들과의 관계는 여전히 잘 맺고 있는 모양이다. 형들이나 누나들이 많아 여러 가지로 조숙한 측면이 있었고 삶에 있어서도 정신연령이 한참 높았던 듯했다.. 문학에 있어서는 시 쪽에 관심이 많았고 산문 쪽은 별로 인정을 해주지 않았었다. 이제는 아버지도 오래전에 여의였고 몇 년전에는 모친마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의 지극정성의 사랑을 받았던 친구였다. 아버지의 사랑이 좀더 제대로 주어졌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몇 년 만에 한번씩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세상사는 얘기를 듣노라면 금세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잊게 해 준다.. 이 친구는 고독한 남자라 할만하다.. 배우자도 없고 외롭게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철학하는 고독한 남자가 항상 건강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훌륭한 교수로 인정받는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